LOGIN당신 아버지입니다.
서윤은 화면 위의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아버지. 너무 익숙한 단어라서, 오히려 낯설었다. 어릴 때 자신을 업어 주던 사람.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서 있던 사람. 서윤이 플라워 스튜디오를 처음 열었을 때,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와 어색하게 웃던 사람. 그 사람이. 자신의 결혼 계약서를. 기자에게 넘겼다고. 서윤의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 휴대폰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강유라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윤을 보았다. “무슨 연락이라도 받으셨어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안은 평범하게 시끄러웠다. 컵이 부딪히는 소리,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동하는 소리, 창가 자리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서윤의 안쪽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기자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서윤은 천천히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태오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당신 아버지입니다. 그 아래로 새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정확히는 한서윤 대표님의 부친이 처음 자료를 넘겼고, 이후 익명 계정을 통해 확산된 정황이 있습니다. 지금 확인 중입니다. 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확인 중.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은 가끔, 증거보다 먼저 진실을 알아차린다. 피하고 싶었던 조각들이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아버지가 갑자기 연락이 뜸해졌던 것. 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래도 너무 섣불리 결정하지 마라”라고 말하던 목소리. 태오와 정리하겠다고 했을 때, 대뜸 돈 이야기를 묻던 태도. 그 모든 것이 이제 다른 의미로 되돌아왔다. 서윤은 휴대폰 연락처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다. 한기석.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잠시 멈췄다. 누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누르지 않으면, 또 남들이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할 것이다. 서윤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네 번째가 되기 전, 아버지가 받았다. “서윤아.” 그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조금 피곤하고, 조금 다정한 척하고, 늘 무언가를 숨기는 목소리. 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아빠.” “그래. 무슨 일이냐? 바쁘다며.” “계약서.”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단 한 단어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빠가 넘겼어?” “무슨 소리냐.” 너무 빠른 부정이었다. 그래서 더 확실했다. “기자한테요. 내 결혼 계약서. 내가 몰랐던 채무 조건까지.” “서윤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서윤은 웃었다. 소리 없이. 어째서 모두 같은 말을 할까. 그런 게 아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너를 위해서였다. 아무도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았다. “그럼 어떤 건데.” “아빠가 너 해치려고 그랬겠냐?” “그럼 왜 그랬는데.” “너 지금 차 서방이랑 이혼한다며.” 차 서방. 서윤은 그 호칭에 속이 울렁거렸다. 아버지는 아직도 태오를 그렇게 불렀다. 딸을 3년 동안 외롭게 만든 남자. 계약서 뒤에 감춰진 조건을 알고도 숨긴 남자. 그런데 아버지에게 그는 여전히 차 서방이었다. 돈을 갚아 준 집안의 사위. 아니, 채권자에 더 가까운 남자. “그게 계약서 유출이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그 집에서 나오면, 그쪽이 우리를 그냥 둘 것 같아?” 서윤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우리?” “그래. 우리 말이다. 네 아버지 회사, 아직 완전히 정리된 거 아니야. 태경에서 잡아 준 채권도 있고, 만기 연장된 것도 있어. 네가 이혼하면 그쪽에서 손 떼는 순간 끝장이야.” 서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는 아버지 회사가 정리된 줄 알았다. 힘들었지만, 3년 전 태경의 지원으로 대부분 마무리됐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결혼에 서명한 것으로 최소한 가족의 오래된 빚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것마저 아니었다. “아직도 남았어?”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웃지도 못했다. “아빠.”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한테는 끝났다고 했잖아.” “네가 알아서 뭐하겠냐.” 그 말이 서윤의 가슴을 정통으로 찔렀다. 네가 알아서 뭐하겠냐. 아버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딸은 알 필요 없는 사람. 이름은 빌릴 수 있지만, 진실을 들을 자격은 없는 사람. “그래서 계약서를 기자한테 넘겼어?” “기자한테 직접 넘긴 건 아니다.” “그럼 누구한테 넘겼는데.” “아는 사람이 있다. 그쪽 일 잘 아는 사람이. 네가 이혼한다고 해서 상담 좀 했어. 이럴 때는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라. 차 서방 쪽도 쉽게 못 버리게.” 서윤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를 지키려고 한 게 아니네.” 수화기 너머에서 아버지가 숨을 삼켰다. “뭐?” “아빠 회사를 지키려고 한 거잖아.” “서윤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회사가 누구 때문에 버틴 건데? 너도 그 집 덕 봤잖아. 아빠가 감옥 가고 집안 박살 나는 꼴 안 봤잖아. 그럼 너도 가족으로서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 그 말에 서윤은 더 이상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책임. 그 단어는 늘 그녀를 묶었다.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자주 말했다. 네가 엄마를 닮아서 든든하다. 우리 서윤이는 참 속이 깊다. 네가 조금만 참아 주면 아빠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 말들은 다정한 칭찬처럼 들렸지만, 결국 오래된 족쇄였다. 서윤은 언제나 속 깊은 딸이어야 했다. 이해하는 딸. 기다리는 딸. 참아 주는 딸. 그리고 3년 전에는, 결혼해 주는 딸. “아빠.” 서윤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는 아빠 빚 갚으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야.”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그렇게 말할 거냐?” “응.” “아버지가 힘들다는데?” “아버지가 힘든 걸 왜 내 인생으로 갚아야 해?” “한서윤!” 카페 안의 몇몇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지 않았다. 이 말은 끝까지 해야 했다. 평생 삼키고 살았던 말을. “나, 차태오랑 이혼할 거야.” “안 된다.” 아버지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구나.” “그 집이 얼마나 큰 집안인데 네가 감정 상했다고 나와? 네가 참고 있으면 다 정리될 일이야. 계약도 어차피 끝났다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서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3년을 참았어.” “그건 네가 선택한 거잖아.” 서윤은 눈을 감았다. 그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절반만 알고 선택했어.” 수화기 너머에서 아버지가 멈췄다. “아빠랑 차태오 씨가 나머지 절반을 숨겼잖아.” “너를 위해서…” “그 말 하지 마.” 서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롭게 갈라졌다. “나를 위해서라는 말, 이제 더는 듣기 싫어.” 아버지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 너머에서 담배를 찾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그 소리마저 지겨웠다. “아빠한테 자료 전부 보내.” “무슨 자료.” “태경이랑 주고받은 채무 관련 자료. 내가 모르는 계약서. 아빠가 가지고 있는 거 전부.” “그걸 네가 봐서 뭐하려고.” “내 인생이었으니까.” 서윤은 낮게 말했다. “내가 알아야겠어.” “서윤아, 너 정말 이러면 아빠도 가만히 못 있어.” “뭘 할 건데?”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 대답 없는 침묵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읽었다. 더 넘길 자료가 있을지도 몰랐다. 더 숨긴 이야기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 전체가 그런 식으로 짜여 있었을지도 몰랐다. 서윤은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울면 다시 딸이 될 것 같았다. 불쌍한 딸. 상처받은 딸. 그래서 또 누군가가 대신 판단해 줘야 할 사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강유라가 여전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 그리고 조금은 불쾌하다는 듯. “가족 문제까지 복잡하시네요.” 강유라가 말했다. “그래서 사생활 리스크라고 한 거예요.” 서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유라 씨는 이 상황이 재미있어요?” “재미라기보다는…” “아니요. 재미있어 보여요.” 서윤은 테이블 위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누가 다치는지보다, 그걸 어떻게 이용할지가 먼저 보이는 얼굴이에요.” 강유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말조심하세요.” “강유라 씨도요.” 서윤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내 가족이 나를 팔았다고 해서, 당신이 나를 싸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기자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살폈다. 서윤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대표님, 기사 관련해서 한 말씀만 더…” “쓰고 싶으면 쓰세요.” 서윤은 차분히 말했다. “다만 제가 녹음한 내용과 다르게 쓰면, 정정 요청하겠습니다.” 기자의 표정이 굳었다. 서윤은 가방을 들었다. 카페를 나서기 전, 그녀는 다시 한 번 강유라를 보았다. “그리고 강유라 씨.” 강유라가 턱을 살짝 들었다. “이 일에 당신이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저도 확인할 겁니다.” “증거 있어요?” 서윤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찾으면 되죠.” 그 말은 원래 태오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서윤은 카페를 나왔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하늘은 흐렸고,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비는 금세 머리카락과 코트 어깨를 적셨다. 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경호텔 앞 횡단보도에 섰을 때, 맞은편에 검은 세단 하나가 정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 차태오의 차였다. 서윤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운전석도, 조수석도 비어 있었다. 뒷좌석 창문 너머로 태오의 옆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내리지 않았다. 서윤이 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의 태오라면 이미 카페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기자를 압박하고, 강유라를 막고, 서윤의 손목을 잡아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차 안에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선 밖에서. 서윤은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왜 이제야. 왜 지금 와서. 왜 내가 다 망가진 뒤에야. 신호가 바뀌었다. 서윤은 길을 건넜다. 차 옆을 지나칠 때, 뒷좌석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태오가 내리려는 듯했다. 서윤은 멈춰 서지 않았다. 문은 다시 닫혔다. 그는 결국 내리지 않았다. 서윤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 작은 존중 하나가, 이렇게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서윤의 코트는 반쯤 젖어 있었다. 문을 열자 꽃 냄새가 그녀를 맞았다. 딸랑. 평소와 같은 종소리였다. 그 소리에 겨우 숨이 놓였다. 서윤은 가방을 내려놓고, 젖은 코트를 벗었다. 손이 차갑게 굳어 단추가 잘 풀리지 않았다. 몇 번을 헛손질한 끝에야 겨우 코트를 의자에 걸었다. 휴대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태오에게서 온 메일 알림이었다. 제목은 짧았다. 3년 전 계약 관련 자료 일체. 서윤은 노트북을 열었다. 메일에는 여러 개의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계약서 원본. 부속 합의서. 채무 조정 내역. 태경 측 내부 검토 보고서. 서윤은 손을 멈췄다. 부속 합의서. 그 파일을 열었다. 화면 위로 낯선 문서가 펼쳐졌다. 그녀가 본 적 없는 문서였다.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혼인 계약 관련 별도 합의 사항. 서윤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한기석 대표의 채무 일부를 태경 측이 인수한다. 혼인 기간 동안 관련 채권 회수를 보류한다. 혼인 관계 종료 시, 태경 측은 잔여 채권에 대한 재협상권을 가진다. 서윤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이 결혼은 끝나면 끝나는 계약이 아니었다. 그녀가 떠나면, 다시 아버지의 빚이 살아나는 구조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서윤은 스크롤을 더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본 합의 사항은 한서윤에게 고지하지 않는다. 서윤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굳었다. 세상이 한 번 더 조용해졌다. 그 문장 아래에는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다. 한기석. 그리고 차명환. 태경그룹 회장. 차태오의 아버지. 태오의 서명은 없었다. 하지만 서윤은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태경도 알고 있었다. 오직 서윤만 몰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차태오였다. 서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 “봤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다. 서윤은 화면을 본 채 대답했다. “네.” “숨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말,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요.” 태오가 숨을 삼켰다. “미안합니다.” 서윤은 웃었다. “차태오 씨 서명은 없네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었죠.” “알고 있었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그 솔직함이 더 아팠다. 서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럼 당신도 공범이에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태오는 변명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서윤은 눈을 떴다. 예상한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공범입니다.” 태오가 낮게 말했다. “내가 만든 조항은 아니지만, 알고도 숨겼습니다.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는데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책임이 있습니다.” 서윤의 목이 메었다. 예전의 태오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책임을 구조 속에 숨겼을 것이다. 아버지의 결정이었다고, 회사의 문제였다고, 당신을 보호하려 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웠다. 조금만 일찍 그랬더라면. 단 한 번만, 3년 전의 자신에게 이렇게 솔직했더라면. “왜 말 안 했어요.” 서윤이 물었다. 대답을 이미 들었는데도 다시 물었다. 태오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이 떠날까 봐.” 서윤의 숨이 멎었다. “처음에는 당신이 상처받을까 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태오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당신이 이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그래서 내 옆에 오지 않을까 봐 말하지 않았습니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결혼이 필요했고, 당신이 조용히 받아들이길 바랐습니다. 당신에게 선택권을 준 척했지만, 사실은 선택지를 줄였습니다.” 태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 늦었다. 그런데도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닿았다. 그래서 더 싫었다. “저는 이제 뭘 믿어야 해요?” 서윤이 물었다. “아버지도, 당신도, 내가 선택했다고 믿었던 3년도 전부 거짓이었는데.”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 속에서 서윤은 아주 오랜 피로를 느꼈다. “저, 공개 프레젠테이션 할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공식 입장도 낼 거예요.” 태오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도움이 필요하면…” “필요하면 말할게요.” 서윤은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제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정말요?” “네.” 태오가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의 선택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믿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태오가 조용히 말했다. “서윤 씨.” “네.” “비 맞지 마십시오.” 그 말에 서윤은 잠시 멈췄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가 봤구나. 차 안에서. 그러나 내리지 않았구나.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늦었어요.”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말은 비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태오도 알 것이다. 서윤은 노트북을 덮었다. 그러자 스튜디오 안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작업대 위의 꽃들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다듬어 둔 작약이 물통 안에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서윤은 가위를 들었다. 상한 잎을 잘라 냈다. 줄기 끝을 다시 사선으로 잘랐다. 꽃을 살리려면 썩은 부분을 잘라 내야 했다. 아프더라도. 늦었더라도. 그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서윤은 받지 않았다.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서윤 대표님. 방금 한기석 대표님 인터뷰 전문을 받았습니다. 따님도 계약 조건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셨는데, 사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서윤의 손에서 꽃가위가 떨어졌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메시지 아래에는 녹취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였다. “서윤이도 다 알고 한 겁니다. 그 애가 원래 속이 깊어요. 집안 살리겠다고 자기가 먼저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서윤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녹취 속 아버지는 계속 말했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하면 안 되죠. 부모 자식 사이에 그런 것도 감당 못 하면 되겠습니까.” 파일은 거기서 끊겼다. 서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팔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태오였다. 서윤은 받지 않았다. 화면 위로 그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윤 씨, 지금 당장 기사 막아야 합니다. 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당신 아버지가 방송 인터뷰까지 잡았습니다. 서윤의 시야가 흐려졌다. 하지만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바닥에 떨어진 꽃가위를 주웠다.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팠다. 그런데 그 아픔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 서윤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새 문서를 띄웠다. 제목을 적었다. 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 공식 입장문. 그리고 첫 문장을 썼다. 저는 제 인생을 더 이상 타인의 입으로 설명하게 두지 않겠습니다. 문장을 쓰는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 순간, 스튜디오 유리문 밖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쳤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비에 젖은 유리 너머.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차태오가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한기석은 문밖에서 초인종도 누르지 않은 채, 서윤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쪽 골목 끝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이 서 있었다. 서윤의 손이 천천히 멈췄다. 아버지는 유리문 너머로 입모양만 움직였다. 문 열어라. 이번에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네 엄마가 죽기 전에 남긴 통장이 있다.”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스튜디오 안은 조용했다. 유리문 밖 기자들의 웅성거림도, 빗소리도 멀게 느껴졌다.엄마의 통장.그 단어 하나가 서윤을 오래전으로 끌고 갔다.침대에 기대 앉아 있던 엄마. 창백한 얼굴로도 서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 병실 창가에 놓여 있던 작은 꽃병.엄마는 늘 웃었다.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서윤이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삼촌.”서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수화기 너머 외삼촌은 한숨을 삼켰다.“네 아버지는 네 엄마 병원비가 태경 돈으로 버텼다고 했지?”“네.”“거짓말이다.”서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외삼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처음 병원비는 네 엄마가 준비해 둔 돈으로 냈어. 보험금도 있었고, 외가에서 보탠 돈도 있었다. 네 엄마는 네 아버지한테 그 돈 함부로 쓰지 말라고 통장까지 따로 만들어 놨다.”서윤은 숨을 멈췄다.그녀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달랐다.아버지는 늘 말했다.엄마 병원비 때문에 빚이 커졌다고.그 빚 때문에 회사가 기울었다고.그래서 서윤이 조금은 가족을 이해해야 한다고.“그럼 태경 돈은요?”서윤이 물었다.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그 침묵이 이상하게 불길했다.“태경 돈은 병원비가 아니라.”외삼촌은 말을 멈췄다.“삼촌.”“네 아버지 회사로 들어갔다.”서윤은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뭐라고요?”“네 엄마 병원비 명목으로 받은 돈이었지만, 실제로는 한기석 회사 운영자금으로 들어간 흔적이 있다.”서윤은 작업대 끝을 붙잡았다.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머니의 병원비.그 이름으로 받은 돈.그 돈이 아버지 회사로 들어갔다.그렇다면 아버지는 엄마의 병까지 이용한 것이었다.그리고 그 거짓말 위에 서윤의 결혼을 올려놓았다.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맞은편에 서 있던 태오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그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 통장.”서윤이 힘겹게
게시되었습니다. 화면에 뜬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서윤은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언가가 끝난 것 같기도 했고, 이제야 시작된 것 같기도 했다. 손끝은 차가웠다. 마우스를 쥔 손가락이 굳어 있었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유리문 밖에서는 여전히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대표님! 입장문 올리신 겁니까?” “자료 공개하신 거 맞습니까?” “태경 측 반박에 대한 재반박입니까?”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더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방금 올린 글이 그녀의 첫 공식 대답이었다. 거기에 없는 말을 즉흥적으로 덧붙이면, 또 누군가 마음대로 잘라 쓸 것이다. 서윤은 노트북을 닫았다. 그때 유리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딸랑. 차태오가 들어왔다. 비에 젖은 코트 자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기자들 사이를 지나온 사람답게 얼굴이 굳어 있었다. “봤습니다.” 서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뭘요.” “입장문.” “내리라고 하려고요?” 태오의 입술이 굳었다. “아닙니다.” 서윤은 그제야 그를 보았다. 태오는 젖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 채 서 있었다. 예전의 차태오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정리된 사람. 흐트러지는 법이 없던 사람. 그런데 지금 그는 엉망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더 불편했다. “그럼 왜 들어왔어요?”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제가 괜찮은지요?” 태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네.” 서윤은 작게 웃었다. 웃음 끝이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따가웠다. “괜찮지 않아요.” 태오의 눈이 흔들렸다. 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괜찮지 않아도 제가 한 선택이에요.” 그 말에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오려다 멈췄다. 서윤은 그 작은 멈춤을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다가왔을 것이다. 잡았을 것이다. 괜찮지 않으면 자신
“태경 측은 한서윤 대표가 모든 조건을 알고 서명했다고 주장했습니다!”기자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순간 모든 카메라가 다시 서윤을 향했다.서윤은 숨을 멈췄다.방금 전까지 그녀는 겨우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몰랐던 것을 구분해서 밝히겠다고, 더 이상 남의 입으로 설명되지 않겠다고.그런데 태경은 단 한 줄로 그녀를 다시 밀어냈다.한서윤은 모든 조건을 알고 있었다.그 문장은 너무 간단했다.그래서 더 잔인했다.“한 대표님! 정말 몰랐습니까?”“태경은 서명 당시 충분히 고지했다고 합니다!”“거짓 해명을 하신 겁니까?”질문들이 쏟아졌다.서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옆에 있던 태오의 얼굴이 굳었다.“그 입장문, 누가 승인했습니까.”그의 목소리는 낮았다.그러나 기자들의 소음에 묻혔다.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오를 보았다.태오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제가 낸 게 아닙니다.”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말을 믿어야 할까.믿고 싶지 않았다.믿는 순간, 또다시 상처받을 자리를 내주는 것 같았다.하지만 태오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당황, 분노, 그리고 두려움.그는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그때 한 기자가 휴대폰 화면을 높이 들어 보였다.“공식 입장문 전문입니다. 태경그룹은 ‘한서윤 씨가 혼인 계약 및 부속 합의 내용을 충분히 확인한 뒤 자의로 서명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서윤은 그 문장을 들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자의.충분히 확인.그 단어들이 그녀를 다시 가두려 했다.마치 모든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는 듯.마치 그녀가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는 사람이라는 듯.서윤은 입술을 열었다.그러나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부친 채무를 갚기 위해 결혼한 게 맞습니까?”“어머니 병원비 지원도 알고 있었습니까?”“차태오 본부장과 짜고 피해자인 척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습니다!”피해자인 척.그 말에
플래시가 다시 터졌다.서윤은 유리문 앞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작은 스튜디오 앞 골목은 어느새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우산들, 젖은 카메라 렌즈,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들. 그 모든 것이 좁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윤을 향해 있었다.“한서윤 대표님! 계약 결혼 사실입니까?”“차태오 본부장과 이혼 절차 중인 게 맞습니까?”“부친 채무 때문에 결혼했다는 보도 인정하십니까?”“태경그룹에서 어머니 병원비를 지원했다는 자료가 나왔는데요!”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서윤은 손을 꽉 쥐었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그 아픔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도망치고 싶었다.불을 끄고, 커튼을 내리고, 아무도 없는 사람처럼 숨고 싶었다.하지만 그러면 또 누군가가 그녀를 대신 설명할 것이다.아버지는 속 깊은 딸이었다고 말할 것이다.차명환은 은혜를 모르는 여자라고 말할 것이다.기자들은 계약 아내라고 쓸 것이다.그리고 사람들은 그 모든 말을 서윤보다 먼저 믿을 것이다.그건 싫었다.서윤은 노트북 화면을 한 번 돌아보았다.공식 입장문 파일이 열려 있었다.저는 제 인생을 더 이상 타인의 입으로 설명하게 두지 않겠습니다.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았다.딸랑.문이 열렸다.비 냄새가 밀려들어 왔다. 동시에 플래시가 터졌다.서윤은 눈을 찡그리지 않았다.골목에 모인 기자들이 한꺼번에 앞으로 몰렸다.“한 대표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계약 결혼 인정하십니까?”“차태오 본부장과는 현재 어떤 관계입니까?”서윤은 문턱 안쪽에 섰다.밖으로 완전히 나가지도, 안으로 물러서지도 않았다.그 경계 위에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한서윤입니다.”짧은 한마디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골목이 잠시 조용해졌다.서윤은 숨을 들이켰다.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그래도 말했다.“제 결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기자들의 녹음기가 앞으로 밀려왔다.서윤은 그것들을 보지 않으려 했다.
“당신 어머니가 누구 돈으로 버텼는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업대 위에는 오래된 영수증이 놓여 있었다. 납부자명. 차명환. 그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있는 순간, 같은 이름의 남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서윤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 돈으로 제 어머니를 살렸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틀린 말은 아니지.” 차명환은 낮게 웃었다.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서윤의 손이 수화기를 꽉 쥐었다. 은혜. 그 단어가 이렇게 차갑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은혜라면 왜 숨기셨습니까.”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서윤은 계속 말했다. “정말 제 어머니를 돕고 싶어서 낸 돈이었다면, 왜 제 결혼 계약에 묶으셨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차명환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기석은 돈이 필요했고, 태경은 안정된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거래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죠.” 서윤은 숨을 삼켰다. 거래. 적합한 사람.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적어도 그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계산이었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 이제라도 조용히 정리합시다.” 차명환이 말했다. “공식 입장문 같은 건 내지 마십시오. 당신 아버지 문제도, 어머니 병원비 문제도 밖으로 나가 봐야 당신만 다칩니다.” “제가 다칠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요?” “태오가 다칩니다.” 서윤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역시 그렇군요.” “뭐가 말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제 걱정은 아니셨네요.” 차명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영수증을 내려다보았다. 엄마의 이름. 한미정. 그 이름을 이런 식으로 더럽혀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저는 입장문 낼 겁니다.” “한서윤 씨.” 차명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으로 위협에 가까운 음색이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생각하고 말
서윤은 한동안 봉투를 열지 못했다.젖은 종이봉투는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가 빗물에 젖어 조금 울어 있었고, 안쪽의 서류들이 봉투 모양을 따라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아버지는 떠났다.카메라를 든 사람도 사라졌다.하지만 스튜디오 안에는 아직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남아 있었다.네 엄마 병원비도 그 돈에서 나왔어.서윤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아버지의 빚.태경의 지원.계약 결혼.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그런데 거기에 엄마의 이름까지 얽혀 있었다.서윤은 천천히 봉투 입구를 열었다.젖은 종이가 힘없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안에는 서류 뭉치가 들어 있었다.채무 조정 내역서.부속 합의서 사본.오래된 병원비 영수증.그리고 태경그룹 로고가 찍힌 내부 검토 문서.서윤은 가장 위에 있던 병원비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납부자명.차명환.그 이름을 보는 순간, 서윤은 숨을 멈췄다.차명환.태경그룹 회장.차태오의 아버지.영수증 위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한미정.진료일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약 1년 전이었다.서윤은 눈을 깜빡였다.글자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그녀는 영수증을 내려놓고 다음 서류를 펼쳤다.의료비 선지원 확인서.한미정 측 의료비 일부를 태경 측이 선지원한다.해당 금액은 한기석 대표의 기존 채무와 별도 관리한다.향후 혼인 계약 체결 시 별도 정산하지 않는다.서윤의 손이 멈췄다.혼인 계약.어머니의 병원비와 자신의 결혼이 같은 문서 안에 적혀 있었다.서윤은 다시 읽었다.그리고 또 읽었다.뜻은 바뀌지 않았다.엄마가 아팠을 때부터, 이미 자신은 태경의 계산 안에 들어가 있었다.3년 전 갑자기 시작된 계약이 아니었다.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진 거래였다.서윤은 의자에 앉았다.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그런데 웃을 수 없었다.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그런데 울 수도 없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차태오였다.서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