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윤의 손에서 미끄러진 계약서가 바닥에 흩어졌다.
종이 몇 장이 회의실 테이블 아래로 밀려 들어갔다. 누군가가 그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정중한 미소와 형식적인 인사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계약 결혼 의혹. 그 짧은 단어 하나가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을 서윤에게로 끌어당겼다. 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리 없었다. 3년 동안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결혼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리였고, 스스로 견뎌 낸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시간은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추문이 되어 있었다. 계약서의 조항도, 식어 버린 찻잔도, 끝내 불리지 못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를 판단할 것이다. 태경그룹 본부장의 계약 아내. 버려진 여자. 혹은 돈을 받고 결혼한 여자. 상상은 너무 쉽게 이어졌다. 서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누가 흘렸습니까.” 태오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르듯 낮게 울렸다. 그는 서윤의 옆에 서 있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였다. 그의 시선은 담당 팀장에게 향해 있었지만, 손은 아주 미세하게 서윤 쪽으로 움직여 있었다. 마치 그녀가 무너지면 받아 내기라도 할 사람처럼. 하지만 서윤은 그 손을 보지 않았다. 담당 팀장은 창백한 얼굴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아직 기사화된 건 아닙니다. 몇몇 온라인 매체 쪽에 초안 형태로 돌고 있는 단계입니다. 제목은…” 그가 말을 흐렸다. 태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읽어.” “본부장님.” “읽으라고 했습니다.” 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태경그룹 차태오 본부장, 3년간 계약 결혼 의혹. 이혼 직후 정략 약혼 추진설까지… 라고 되어 있습니다.” 회의실 안에 낮은 술렁임이 퍼졌다. 서윤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이혼 직후 정략 약혼. 그 말에 강유라가 아주 작게 웃었다. 정말 작았다. 그러나 서윤은 들었다. “흥미롭네요.” 강유라가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아직 기사도 안 났는데 이렇게 반응이 크다니.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 아닌가요?” 태오가 그녀를 보았다. “강유라.” “왜요? 제가 틀린 말 했나요?” 강유라는 서류를 덮었다. “태경호텔은 이미지가 중요한 곳이에요. 하객, 웨딩, 브랜드 입점, 전부 신뢰로 움직이죠. 그런데 입점 예정 브랜드 대표가 본부장님과 계약 결혼을 했고, 이혼 직후 프로젝트 심사에 올랐다? 이게 기사화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회의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서윤에게 꽂혔다. 그 시선은 날카롭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노골적인 경멸보다 난처함이, 의심보다 조심스러운 거리감이 사람을 더 깊게 베었다. 태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 순간 서윤이 먼저 말했다. “그만하세요.”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만큼 또렷했다. 태오의 움직임이 멈췄다. 서윤은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천천히 주웠다. 종이 끝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눌러 폈다. 강유라가 미소를 지었다. “한 대표님, 지금 이 상황을 이해 못 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해하고 있습니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제 사생활을 이용해서 제가 준비한 프로젝트를 흔들려는 상황이죠.” 강유라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 “표현이 지나치네요.”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서윤은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제 사생활을 핑계로 제 능력을 지우려는 상황이요.” 회의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누군가가 서윤을 다시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스캔들의 중심에 선 사람으로 보던 시선이, 이제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는 시선으로 바뀌고 있었다. 서윤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겁이 났다. 하지만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이 프로젝트를 차태오 본부장님의 아내 자격으로 따낸 게 아닙니다. 서류 심사, 샘플링, 공간 제안서, 웨딩 플라워 동선 설계까지 전부 제 이름으로 통과했습니다.” 그녀는 담당 팀장을 바라보았다. “맞습니까?” 팀장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대표님의 제안서는 내부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강유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서윤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제 결혼이 계약이었다는 의혹만으로 모든 결과를 무효로 만들겠다는 건, 결국 이 프로젝트가 실력으로 평가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평가됐다는 뜻이 됩니다.” 서윤의 시선이 태오에게 닿았다. 아주 잠깐. “저는 그걸 인정할 수 없습니다.” 태오의 눈이 깊게 흔들렸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서윤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차태오 씨의 이름 뒤에 숨을 생각도 없습니다.” 태오의 입술이 굳었다. 그 말은 그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서윤은 다시 강유라를 보았다. “사생활 리스크를 검토하겠다면 하세요. 다만 같은 기준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이혼을 앞둔 여자는 리스크고, 정략 약혼을 추진하는 남자는 브랜드 가치입니까?” 누군가 숨을 삼켰다. 강유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금 저를 공격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서윤은 조용히 말했다. “기준을 묻는 겁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서윤은 방어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태오는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그가 알던 한서윤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불편한 말을 삼키고, 상처가 되는 순간에도 먼저 분위기를 살피던 사람. 그런데 지금의 서윤은 달랐다. 조용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분명했다. 태오는 그제야 깨달았다. 서윤이 약해서 침묵했던 게 아니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참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랑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더는 참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태오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강유라가 차갑게 말했다. “기사가 실제로 나갈지 확인될 때까지 프로젝트는 보류하는 게 맞습니다.” “보류하지 않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강유라가 그를 돌아보았다. “차태오 씨.” “이 프로젝트의 최종 승인권자는 나라고 했습니다.” “개인 감정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태오의 시선이 강유라에게 박혔다. “그 말은 내가 할 말입니다.” 강유라의 표정이 굳었다. “강 이사님은 현재 이 프로젝트의 공정성을 논할 위치가 아닙니다. 방금 사적인 정보를 회의 안건처럼 사용했고, 기사 초안이 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증거 있어요?” “찾으면 됩니다.” 태오의 목소리는 낮았다. “내가 잘하는 일이 그거니까.” 강유라는 입술을 다물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직원들은 눈치만 살폈다. 누구도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 태오는 담당 팀장에게 지시했다. “홍보팀, 법무팀, 보안팀 모두 소집하세요. 기사 초안 받은 매체 리스트 확보하고, 최초 발신 경로 추적합니다. 이 자리에서 나간 자료도 전부 확인하고.” “네, 본부장님.” “그리고 이 프로젝트 심사는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태오가 말을 마치자 서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태오도 그녀를 보았다. “서윤 씨.” “예정대로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태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그녀를 도우려 했다. 처음으로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그런데 서윤은 그것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입니까.” “지금 진행하면 사람들은 제가 차태오 씨 보호 아래 계약을 따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서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태오 씨가 말하지 못하게 하면, 사람들은 더 그렇게 생각해요.”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윤은 계약서를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저는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프로젝트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대신 오늘 심사는 보류해 주세요.” 강유라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서윤의 다음 말에 그 웃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일주일 뒤, 공개 프레젠테이션으로 다시 심사받겠습니다.” 담당 팀장이 놀란 듯 물었다. “공개 프레젠테이션이요?” “네. 내부 심사위원뿐 아니라 외부 브랜드 컨설턴트와 웨딩홀 운영팀, 플라워 실무 담당자까지 포함해 주세요. 제 제안이 정말 태경호텔에 필요한지, 사생활이 아니라 실력으로 판단받겠습니다.” 회의실 안에 조용한 긴장이 내려앉았다. 태오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분명 두려울 것이다. 당장이라도 기사화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더 큰 무대 위로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태오는 손끝이 저릿해졌다. 그가 3년 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람이, 지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강유라가 천천히 웃었다. “자신 있으신가 봐요.” “없습니다.” 서윤은 솔직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 강유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윤은 말했다. “무섭습니다. 억울하고요. 하지만 제 일이 누군가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무너지게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태오를 보지 않았다. 보면 흔들릴 것 같았다. “그러니 공식적으로 다시 판단받겠습니다. 차태오 씨가 아니라, 제 이름으로요.” 태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말하고 싶었다. 내가 막겠다고. 내가 지키겠다고. 내가 다시는 당신을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하지만 서윤은 이미 대답했다. 그런 방식은 싫다고. 그녀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다시 자신의 그림자 아래 세우지 말라고. 그래서 태오는 처음으로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알겠습니다.” 서윤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태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주일 뒤 공개 심사로 전환하겠습니다. 심사 과정에서 나는 빠지겠습니다.” 강유라가 날카롭게 그를 보았다. “정말 빠지겠다고요?” “네.” 태오는 낮게 답했다. “한 대표가 원하니까.” 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이상했다. 그 말이 아팠다. 예전에는 그렇게 해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늘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래서 지금 도착한 존중조차, 서윤에게는 기쁘기보다 쓰라렸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유라는 서류를 챙기며 서윤의 곁을 지나쳤다. “대단하네요.”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그렇게 버티면, 차태오 씨가 정말 당신 편이 될 것 같아요?” 서윤은 그녀를 보았다. 강유라는 웃고 있었다. “태경그룹 사람들은 사랑보다 손익을 먼저 계산해요. 차태오 씨도 결국 같아요.”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서윤이 말했다. 강유라의 미소가 차가워졌다. “판단할 기회가 남아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회의실을 나갔다. 서윤은 그제야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조금 풀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약간 떨렸다. 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손바닥 아래의 나무 감촉이 차갑게 느껴졌다. “괜찮습니까.” 태오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서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괜찮아 보이나요?” “아니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서윤은 피곤하게 웃었다. 예전의 태오라면 괜찮냐고 묻지 않았을 것이다. 해결책을 말했을 것이다. 차를 보내겠다거나, 기사 막으라고 지시했다거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묻고 있었다. 그것이 서윤을 더 지치게 했다. “저를 도우려 하지 마세요.” “도와야 합니다.” “아니요.”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차태오 씨가 저를 도우면, 사람들은 제가 다시 당신에게 기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태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서윤은 그 흔들림을 들었다. 가슴이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세요.” 태오가 멈췄다. 서윤은 말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기사 유출 경로를 찾고, 태경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책임지세요. 하지만 제 발표는 제가 합니다. 제 계약도 제가 따냅니다. 제 이름은 제가 지킵니다.” 태오는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서윤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어려운 대답이라는 것을. 서윤은 가방을 챙겼다. 회의실 문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태오가 그녀를 보았다. “저를 지키는 척하면서 다시 당신 옆에 세우지 마세요.” 태오의 얼굴이 굳었다. 서윤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이제 당신 옆자리가 아니라, 제 자리에 서고 싶어요.”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태오는 따라가지 않았다. 따라가고 싶었다. 지금 당장 붙잡고 싶었다. 설명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이번에는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뻗지 않았다. 그녀가 잘한다고 했던 그 일을, 이번에도 해냈다. 안 잡는 것. 태오는 빈 회의실에 홀로 남아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때 담당 팀장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본부장님.” “보고해.” “기사 초안 유포 경로 일부 확인됐습니다. 최초 제보자는 익명 메일을 썼고, 첨부 자료가 있었습니다.” 태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첨부 자료?” “네. 3년 전 계약서 일부 스캔본으로 보입니다.” 태오의 손이 천천히 주먹이 되었다. 계약서 원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태오 자신. 서윤. 양가 법무 담당자. 그리고 태경그룹 내부 극소수. 담당 팀장이 망설이다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해.” “초안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오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내용.” 팀장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 결혼의 조건 중 하나가, 한서윤 대표님의 부친 회사 채무 정리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태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조항은 서윤도 모르는 내용이었다. 정확히는, 서윤에게 끝까지 알리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3년 전. 한서윤이 계약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 태오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늦었다. 또 늦었다. 그가 숨겨 온 진실이, 이제 서윤을 다시 찌르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태오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서윤 씨.” 수화기 너머의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태오 씨.”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다. “방금 기자한테 연락이 왔어요.” 태오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서윤이 말했다. “내가 몰랐던 계약 조건이 있다던데요.” 정적. 서윤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우리 결혼, 정말 내가 알고 있던 게 전부였어요?” 태오는 눈을 감았다. 대답해야 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서윤이 먼저 말했다.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만 몰랐던 건가요?” 태오의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질 뻔했다. 창밖으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늘게. 마치 끝난 줄 알았던 밤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외전 5화. 내일도 보는 사이금요일 밤 열 시 십삼 분.두 사람은 서윤의 작업실 앞에 서 있었다.태오가 데려다주겠느냐고 묻지 않은 첫날이었다.서윤이 택시를 잡으려 하자 자연스럽게 말했다.“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그래요.”그게 전부였다.허락을 받아냈다는 안도도, 선을 넘었다는 긴장도 없었다.차 안에서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서윤이 다음 주에 들어갈 현장.태오의 자문사에서 처음으로 받은 장기 프로젝트.점심으로 먹었던 국수가 생각보다 맛없었다는 이야기까지.작업실 앞에 도착하자 태오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서윤이 그를 올려다봤다.“내일 뭐 해요?”“오전에 운동할 생각입니다.”“그다음은?”태오가 잠시 생각했다.“별일 없습니다.”“그럼 나랑 화분 보러 갈래요?”이번에는 그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좋습니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안 물어보네요.”“뭘 말입니까?”“제가 정말 같이 가고 싶은 건지.”태오가 웃었다.“같이 가자고 먼저 말했으니까요.”“많이 늘었네.”“교육비가 비쌌으니까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백십억짜리 농담은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꽤 자주 쓰였다.“그럼 내일 열한 시.”“어디로 가면 됩니까?”“우리 집 앞으로 와요.”태오가 아주 잠깐 멈췄다.서윤이 곧바로 말했다.“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화분 사러 갈 거예요.”“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얼굴이 했어요.”
외전 4화. 이번에는 연애부터서윤이 태오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작은 기업 자문사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작았다.대표실도 따로 없었다.유리벽 안쪽의 가장 평범한 책상이 태오 자리였다.“진짜 여기서 일해요?”“네.”“대표인데?”“대표가 제일 넓은 방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서요.”서윤이 피식 웃었다.“사람이 너무 바뀐 거 아니에요?”“불편합니까?”“또 물어본다.”태오가 입을 다물었다.그때 회의실에서 나오던 직원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순간 표정이 굳었다.서윤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한서윤 대표님입니다.”태오의 정정은 빨랐다.직원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한 대표님.”서윤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뒤 태오에게 물었다.“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할까 봐 바로 고친 거예요?”“그 호칭은 지금 사실이 아니니까요.”“예전에는 사실이었고?”태오가 잠시 침묵했다.“법적으로는요.”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았다.그렇다고 없던 일로 만들지도 않았다.둘은 근처의 작은 와인바로 갔다.서윤이 먼저
세 번째 금요일에는 서윤이 장소를 골랐다.호텔도, 유명한 레스토랑도 아니었다.작업실에서 십 분쯤 떨어진 작은 야외 정원이었다.태오가 입구의 안내판을 바라봤다.“여기였습니까?”“왜요. 싫어요?”“아닙니다.”그가 정원 안쪽을 바라봤다.“한서윤 씨가 만든 곳이라서요.”개장한 지 한 달 된 소규모 복합문화공간이었다.태오는 그 사실을 알고도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서윤이 보여 주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다렸다.“궁금하지 않았어요?”“많이 궁금했습니다.”“그런데 왜 안 왔어요?”“당신이 일하는 곳까지 제가 마음대로 들어가는 건 싫었습니다.”서윤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 먼저 걸었다.“오늘은 내가 초대한 거예요.”“네.”“그러니까 마음대로 봐도 돼요.”태오는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수로가 있었고, 돌 사이로 늦여름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예전의 서윤이 만들던 정원과 달랐다.화려한 꽃이 채우던 자리에는 바람이 드나드는 여백이 남아 있었다.식물과 돌 사이의 빈 공간마다 늦여름의 공기가 천천히 지나갔다.무언가를 끝까지 채워 넣지 않아도 완성된 정원이었다.“달라졌네요.”태오가 말했다.“뭐가요?”“예전에는 중심을 먼저 만들었습니다.”서윤이
금요일 오후 여섯 시 오십칠 분.서윤이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태오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는 입구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서윤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왜 안에 안 들어가 있었어요?”“같이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것도 물어보려고 기다린 건 아니죠?”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서윤은 한숨처럼 웃었다.“설마.”“먼저 들어가도 되는지는 못 물어봤으니까요.”“차태오 씨.”“네.”“이러다 나중에는 숨 쉬어도 되냐고 묻겠어요.”태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서윤은 먼저 식당 문을 열었다.“들어와요. 이건 허락 안 받아도 돼요.”예약한 자리는 창가였다.지난번 카페와 달리 이번 식당은 태오가 골랐다.서윤이 메뉴를 펼치며 말했다.“여기는 왜 골랐어요?”“작업실에서 가깝고, 예약할 때 알레르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만 물어봐서요.”“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식당은 피한 거고요?”“네.”“왜요?”“다시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서윤은 메뉴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그럼 오늘부터 다시 알아가려고요?”“그럴 생각입니다.”“조사하듯이?”“그건 자신 있습니다.”서윤이 웃었다.“그건 좀 무섭네요.”태오도 이번에는 농담인 것을 알아들었다.식사가 시작된 뒤 서윤은 일부러 예전에는 잘 먹지 않던 매운 요리를 주문했다.태오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매운 거 싫어하지 않았습니까?”“요즘은 좋아해요.”
카페 문을 먼저 연 사람은 서윤이었다.태오는 뒤따라 들어왔지만 자리를 고르지 않았다.창가와 안쪽 테이블 사이에서 서윤이 잠시 둘러보자 그가 물었다.“어디가 좋습니까?”서윤은 웃을 뻔했다.삼 년을 함께 살았던 남자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물어보고 있었다.“창가요.”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태오가 종이봉투에서 메뉴 카드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뭘 마실래요?”그 질문에도 서윤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예전의 태오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아침마다 마시던 커피도, 싫어하던 향도 알고 있었으니까.“내가 뭘 마시는지 알잖아요.”“알았죠.”태오가 메뉴를 내려다봤다.“삼 년 전의 한서윤 씨가 뭘 마셨는지는.”서윤의 시선이 멈췄다.“지금도 같은지는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서윤은 메뉴를 넘겼다.“오늘은 라테요.”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그건 그대로네요.”“네. 바꿀 이유가 없어서.”“모든 걸 바꾸려고 애쓰는 줄 알았는데.”태오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잘못한 것과 원래 좋아했던 것까지 전부 버리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서윤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아주 짧았지만 태오의 눈이 멈췄다.그는 그 웃음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주문한 음료가 나온 뒤에도 둘은 한동안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서윤의 새 작업실.최근 맡은 호텔 정원 프로젝트.태오가 요즘 하고 있는 일.그는 태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섯 달 뒤.차명환은 증거인멸 교사와 사문서위조 교사,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윤재헌은 자신이 보관한 지시 기록을 제출했지만 실행자로서의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정현수와 강유라 역시 각자가 관여한 범위에 따라 재판과 조사를 받았다.한기석도 예외가 아니었다.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참작될 수 있었다.그러나 한미정이 쓰러진 것을 알고도 채무 약정에 서명하고, 딸을 계약의 대가로 넘긴 선택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서윤은 아버지의 사과문을 받았다.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조차 더는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한미정의 원본 녹음은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됐다. 사건과 관련된 구간만 법정에서 검증됐고,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비공개 상태로 봉인됐다.서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았다.태경의 이사회는 최대주주와 경영진의 이해관계를 분리하는 내부 통제안을 통과시켰다. 회장실 비상 권한은 폐지됐고, 주주 정보 접근과 전자 서명 복구에는 외부 감사인의 승인이 필요해졌다.태오는 그 과정에 직함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대표이사도, 전무도, 후계자도 아니었다.자신의 의결권으로 개편안에 찬성한 뒤 주주석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백십억 원의 상환도 개인 자산으로 마쳤다.그가 잃은 것은 아버지가 허락한 자리였다.그가 남긴 것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은 자기 이름이었다.서윤은 태경과 관련된 마지막 합의서를 검토했다.[한서윤에 대한 채무·혼인·비밀유지 관련 모든 부속 약정의 효력 부인.][향후 어떠한 명목으로도 권리 포기 또는 침묵을 요구하지 않음.]그녀는 서명하지 않았다.서윤의 외부 변호인이 의아한 표정
서윤은 오전 아홉 시에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밤새 비가 내린 골목은 아직 젖어 있었다. 유리문 앞 작은 화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간판 아래로 희미한 햇빛이 번졌다.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서윤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은 창백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입술에도 옅은 색을 올렸다.괜찮아 보이는 얼굴.그거면 됐다.딸랑.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실내를 흔들었다. 작업대 위에는 새벽 시장에서 들여온 꽃들이 놓여 있었다. 흰 라넌큘러스, 연분홍 작약, 짙은 녹색 유칼립투스.서윤은 코트를 벗고
차태오는 그날 밤, 결국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못했다.펜은 손에 쥐고 있었다. 검은 만년필의 뚜껑도 열려 있었다. 서류 맨 아래, 한서윤의 이름 옆 빈칸은 지나치게 깨끗했다.차태오.석 자만 쓰면 끝나는 일이었다.3년 전에도 그랬다. 결혼 서류에 이름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결혼이란 사업상 필요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한서윤은 그 결정의 조용한 상대였다.말수가 적고, 선을 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여자. 공식 석상에서 웃어야 할 때 웃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그의 곁에 있어
비가 오고 있었다.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나만 몰랐던 건가요?”수화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낮고, 조용하고, 차가웠다.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숨겨 온 진실은 한 문장으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웠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서윤은 웃었다.아주 작고 짧은 웃음이었다.“그렇구나.”“서윤 씨.”“대답 안 해도 알겠어요.”“듣고 설명하겠습니다.”“설명?”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차태오 씨는 늘 그래요. 말하지 않고 숨겨 놓고, 일이 터진 뒤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