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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몰랐던 결혼

Author: Doong_E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4 22:20:45

“나만 몰랐던 건가요?”

수화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낮고, 조용하고, 차가웠다.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숨겨 온 진실은 한 문장으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서윤은 웃었다.

아주 작고 짧은 웃음이었다.

“그렇구나.”

“서윤 씨.”

“대답 안 해도 알겠어요.”

“듣고 설명하겠습니다.”

“설명?”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차태오 씨는 늘 그래요. 말하지 않고 숨겨 놓고, 일이 터진 뒤에야 설명하겠다고 해요.”

태오는 눈을 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늘 중요한 것을 결정한 뒤에 통보했다. 상대가 받을 충격보다, 문제가 정리되는 속도를 먼저 생각했다. 그것이 책임이라고 믿었다.

서윤에게도 그랬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방식이었는지, 그는 너무 늦게 배웠다.

“지금 어디입니까.”

태오가 물었다.

“왜요.”

“기자가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혼자 있으면 위험합니다.”

“또 보호하려고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섞였다. 그녀는 밖에 있는 듯했다.

그 사실에 태오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한서윤 씨, 지금 위치 말하십시오.”

“명령하지 마세요.”

그 한마디가 태오의 입을 막았다.

서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저 지금 태경호텔 앞이에요.”

태오의 몸이 굳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내가 갑니다.”

“오지 마세요.”

“서윤 씨.”

“제가 물을 게 있어요.”

태오는 입술을 다물었다.

서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약해서가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의 떨림이었다.

“3년 전 계약서에, 제 아버지 회사 채무 정리 조건이 있었다는 말. 사실이에요?”

태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사실입니다.”

정적.

수화기 너머에서 서윤의 숨이 아주 작게 끊겼다.

“그러면…”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 결혼은 태경그룹의 경영 안정 때문에 필요했던 게 아니라, 제 집 빚 때문에 필요했던 거예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럼 단순하게 말해 주세요.”

서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돈 때문에 팔려 온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태오가 거의 즉시 말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계약은 그렇게 되어 있었잖아요.”

태오는 말을 삼켰다.

서윤은 웃지도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게 더 두려웠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태오의 목소리가 잠깐 막혔다.

그는 3년 전을 떠올렸다.

한서윤이 처음 계약서를 받아 들던 날. 흰 블라우스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그녀는 질문을 많이 하지 않았다. 조건을 읽었고,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에 딱 하나만 물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뭔가요?”

그때 태오는 그녀가 담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었다.

담담한 게 아니라,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상처받을까 봐 말하지 않았습니다.”

서윤의 숨이 멎는 듯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그녀가 말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태오의 목이 굳었다.

“아닙니다.”

“상처받을까 봐 숨겼다고요.”

서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럼 저는요? 저는 3년 동안 뭘 믿고 있었는데요?”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적어도 제가 선택했다고 생각했어요. 사랑받지 못하는 결혼이어도, 제가 계약서를 보고 선택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요. 제가 감당하기로 한 일이니까.”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그런데 아니었네요.”

“서윤 씨.”

“제 선택도 아니었네요.”

“아닙니다. 당신은…”

“저는 절반만 알고 선택했잖아요.”

그 말에 태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윤의 말은 정확했다.

그녀는 선택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선택했다.

그러니 그 선택은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내가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하세요.”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들어야겠어요.”

태오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회의실 밖 복도 끝에서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 초안 유포 경로를 찾기 위해 홍보팀과 법무팀이 소집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이 멀게 느껴졌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수화기 너머의 서윤뿐이었다.

“3년 전, 한 대표님의 부친 회사는 부도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미 일부 채무는 사채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연대보증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당신에게도 책임이 넘어올 가능성이 컸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저한테 그런 얘기 안 했어요.”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태오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에게 이미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윤이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아픈 웃음이었다.

“미안하면 안 숨겼어야죠.”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태경이 그 빚을 정리했어요?”

“일부는 상환했고, 일부는 채권을 인수했습니다.”

“대가로 저와 결혼했고요.”

“그건…”

태오는 말을 멈췄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을 돌려 말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네.”

결국 그는 인정했다.

“계약 조건 중 하나였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윤이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태오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조용해지는 것이 무서웠다.

“서윤 씨.”

“재미있네요.”

서윤이 말했다.

“저는 3년 동안 제가 차태오 씨 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 계속 의심했어요. 당신 집안 사람들이 저를 볼 때마다 왜 저렇게 보는지, 왜 제가 늘 빚진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몰랐어요.”

태오의 눈빛이 무너졌다.

“그랬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제가 진짜 빚진 사람이어서 그랬군요.”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서윤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돈으로 산 결혼이었고, 저는 그 돈의 이유였잖아요.”

“당신을 산 게 아닙니다.”

태오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그런 식으로 당신을…”

“그럼 뭘 샀는데요?”

서윤이 물었다.

“태경그룹의 안정적인 그림? 차태오 씨의 결혼한 남자라는 이미지? 제 아버지의 침묵? 아니면 저의 3년?”

태오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그를 찔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그가 외면한 진실이 있었다.

“처음엔 그랬을지 모릅니다.”

태오가 낮게 말했다.

“나는 그 결혼을 거래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오는 주먹을 풀었다. 손바닥에는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 말 들으려고 전화한 거 아니에요.”

“압니다.”

“지금의 차태오 씨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요.”

서윤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제 인생에서 가장 비참했던 3년의 이유를 남들 입을 통해 알게 됐다는 거예요.”

태오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가 무너질 자격도 없었다.

“미안합니다.”

너무 늦은 말이었다.

그리고 너무 작은 말이었다.

서윤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태오는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망가뜨렸는지 선명하게 보았다.

이혼 서류를 내밀던 밤.

그녀가 반지를 두고 떠나던 손.

스튜디오에서 자신에게 서명하라고 말하던 얼굴.

회의실에서 자신의 이름 뒤에 숨지 않겠다고 말하던 목소리.

그 모든 순간에 그는 한 발씩 늦었다.

늘 늦었다.

“차태오 씨.”

서윤이 말했다.

“네.”

“이 기사 막지 마세요.”

태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건 안 됩니다.”

“왜요.”

“당신이 다칩니다.”

“이미 다쳤어요.”

서윤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막는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아요. 그리고 차태오 씨가 막으면, 저는 또 당신이 정리해 준 사람으로 남겠죠.”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제가 말할 거예요.”

태오는 숨을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기자한테 직접 답하겠다고 했어요.”

“한서윤.”

이번에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서윤은 피하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했죠.”

“그건 위험합니다.”

“알아요.”

“상대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먼저 말해야 해요.”

서윤의 목소리가 조금씩 단단해졌다.

“제가 모르는 제 이야기를, 남들이 먼저 쓰게 두고 싶지 않아요.”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몰랐던 조건이 있었다면, 그건 차태오 씨와 태경그룹이 설명해야 할 일이에요. 하지만 제가 그 결혼 안에서 무엇을 견뎠는지는 제가 말할 거예요.”

태오는 눈을 감았다.

막아야 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막는 순간, 그는 또 그녀의 선택을 빼앗는 사람이 된다.

“어디서 만납니까.”

그가 물었다.

“기자요?”

“네.”

“태경호텔 앞 카페요. 20분 뒤.”

“혼자 만나지 마세요.”

“저 혼자 만날 거예요.”

“서윤 씨.”

“대신.”

그녀가 말을 끊었다.

“차태오 씨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태오는 숨을 들이켰다.

“유출 경로를 찾으라는 겁니까.”

“네.”

“찾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요.”

서윤의 목소리가 다시 차가워졌다.

“제 아버지와 태경 사이에 오갔던 모든 자료, 저한테 주세요. 계약서 원본, 채무 정리 내역, 제가 몰랐던 조항까지 전부요.”

태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요구였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해서는 안 됐다.

“보내겠습니다.”

“오늘 안으로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서윤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제가 물어보기 전에 숨기지 마세요.”

태오의 목이 굳었다.

“그러겠습니다.”

“이번엔 믿겠다는 뜻 아니에요.”

“압니다.”

“확인하겠다는 뜻이에요.”

태오는 낮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전화가 끊겼다.

태오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은 어두웠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낯설 만큼 초라했다.

“본부장님.”

담당 팀장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3년 전 계약 관련 자료 전부 준비해. 누락 없이.”

“전부요?”

“전부.”

태오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고 유출자 찾기 전까지, 관련자들 외부 연락 전부 확인해.”

“네.”

“강유라는?”

“방금 호텔을 나갔습니다.”

태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차량 동선 확인해.”

“알겠습니다.”

팀장이 나가고, 태오는 창가로 걸어갔다.

호텔 앞 도로가 내려다보였다. 흐린 하늘 아래로 사람들이 작게 움직였다. 그중 어디엔가 서윤이 있을 것이다.

혼자 서서, 자신이 몰랐던 결혼의 진실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태오는 유리창에 손을 짚었다.

지금 당장 내려가고 싶었다.

그녀 앞에 서고 싶었다.

기자에게서 막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참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그것을 빼앗지 않기로 했다.

서윤은 카페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든 컵은 이미 식어 있었다. 아메리카노 표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서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태경호텔의 거대한 유리 외벽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 3년 동안 그녀가 드나들었던 세계. 늘 반듯하고, 비싸고, 조용했던 곳.

그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한 발 뒤에 서 있었다.

차태오의 아내.

정확히는, 계약상의 아내.

이제는 그 말조차 온전히 그녀가 알고 있던 뜻이 아니었다.

부친 회사 채무 정리.

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태오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그녀를 제외했다.

그게 가장 참을 수 없었다.

미움보다 모멸감이 더 컸다.

그때 카페 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손에는 태블릿과 녹음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서윤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서윤 대표님이시죠?”

“네.”

“연락드렸던 이민재 기자입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녹음기를 꺼냈다.

“녹음 괜찮으실까요?”

“네.”

서윤은 대답했다.

“대신 저도 녹음하겠습니다.”

기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물론입니다.”

서윤은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기자는 잠시 그녀를 살폈다. 예상보다 침착한 반응에 조금 놀란 듯했다.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차태오 본부장님과 3년간 계약 결혼 관계였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서윤은 컵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작게 났다.

“결혼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계약 결혼도 사실입니까?”

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 한마디를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는 거짓 위에 서고 싶지 않았다.

“네.”

기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서윤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제가 오늘 말하고 싶은 건 그 단어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 결혼 안에 있던 사람입니다.”

기자의 손이 멈췄다.

서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계약 결혼이라고 하면 돈, 조건, 스캔들을 먼저 떠올리겠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선택했다고 믿었고, 견뎠고, 상처받았고, 끝내 떠나기로 한 사람이요.”

기자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한 대표님께서는 피해자라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불쌍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제 이야기를 남들이 대신 쓰게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카페 안의 소음이 멀어졌다.

서윤은 태경호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기자를 보았다.

“저는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집니다. 하지만 제가 몰랐던 조건이 있었다면, 그 책임은 저 혼자 질 수 없습니다.”

기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몰랐던 조건이라면, 부친 회사 채무 관련 조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서윤의 손끝이 굳었다.

역시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자료를 줬다.

“그 자료, 누가 줬습니까.”

기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보자 보호 원칙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기사에도 쓰지 마세요.”

“그건 어렵습니다.”

서윤은 조용히 웃었다.

“제보자는 보호하면서, 제 인생은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기자의 얼굴이 굳었다.

“대표님.”

“그 조항은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기자의 손이 멈췄다.

“정말입니까?”

“네.”

서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니 그 내용을 쓰고 싶다면, 적어도 이렇게 쓰세요. 한서윤은 그 조건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 전체를 요구한 상태다.”

기자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을 것이다.

서윤은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

그녀가 직접 만든 명함이었다.

“그리고 제 직업도 정확히 써 주세요.”

기자가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플라워 스튜디오 대표.”

“네.”

서윤은 똑바로 말했다.

“차태오 본부장의 전 아내가 아니라, 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 대표요.”

그 순간 카페 문이 다시 열렸다.

서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강유라가 들어오고 있었다.

흰 수트 차림 그대로였다. 조금 전 회의실에서 보았던 그 미소를 띤 채.

기자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서윤은 그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기자와 강유라는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강유라는 천천히 다가와 서윤의 테이블 앞에 섰다.

“생각보다 용감하시네요.”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여긴 무슨 일이죠?”

강유라는 기자를 흘끗 보았다.

“확인하러 왔어요.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서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보자가 강유라 씨였군요.”

강유라는 웃었다.

“증거 있어요?”

그 말투는 아까 회의실에서 태오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서윤은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곧 생기겠죠.”

강유라의 미소가 아주 잠깐 멈췄다.

그때 기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자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었다.

“이사님.”

강유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예요?”

기자는 난처한 얼굴로 태블릿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막 올라온 속보 알림이 떠 있었다.

태경그룹, 계약 결혼 의혹 관련 내부 자료 유출 조사 착수.

차태오 본부장, “한서윤 대표의 프로젝트 평가는 사생활이 아닌 실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강유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서윤은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태오가 움직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녀를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아내라고 부르지 않았다.

전 부인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한서윤 대표.

그 이름을 그대로 세워 두었다.

서윤의 마음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강유라가 차갑게 말했다.

“차태오 씨가 생각보다 감정적이네요.”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강유라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서윤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조금 제대로 한 것 같네요.”

강유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순간 서윤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차태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자료 보냈습니다.

당신이 몰랐던 것까지 전부입니다.

서윤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도착한 두 번째 메시지를 확인했다.

유출자도 찾았습니다.

서윤의 손끝이 멈췄다.

세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 자료를 넘긴 사람은 강유라가 아닙니다.

서윤의 시선이 천천히 강유라에게 향했다.

강유라는 여전히 그녀 앞에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서윤이 모르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짧은 한 문장이었다.

당신 아버지입니다.

서윤의 세상이, 그 순간 소리 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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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homejoa
남이야 무슨 결혼을 하건말건 사람들이 뭔 상관이야? 빚 갚아줄꺼야? 3년간 아내노릇 잠자리 해주면 빚탕감 해준다는 계약이 더럽다는 뜻? 그게 얼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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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 4화. 이번에는 연애부터서윤이 태오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작은 기업 자문사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작았다.대표실도 따로 없었다.유리벽 안쪽의 가장 평범한 책상이 태오 자리였다.“진짜 여기서 일해요?”“네.”“대표인데?”“대표가 제일 넓은 방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서요.”서윤이 피식 웃었다.“사람이 너무 바뀐 거 아니에요?”“불편합니까?”“또 물어본다.”태오가 입을 다물었다.그때 회의실에서 나오던 직원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순간 표정이 굳었다.서윤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한서윤 대표님입니다.”태오의 정정은 빨랐다.직원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한 대표님.”서윤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뒤 태오에게 물었다.“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할까 봐 바로 고친 거예요?”“그 호칭은 지금 사실이 아니니까요.”“예전에는 사실이었고?”태오가 잠시 침묵했다.“법적으로는요.”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았다.그렇다고 없던 일로 만들지도 않았다.둘은 근처의 작은 와인바로 갔다.서윤이 먼저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외전 3화] 놓지 않아도 되는 손

    세 번째 금요일에는 서윤이 장소를 골랐다.호텔도, 유명한 레스토랑도 아니었다.작업실에서 십 분쯤 떨어진 작은 야외 정원이었다.태오가 입구의 안내판을 바라봤다.“여기였습니까?”“왜요. 싫어요?”“아닙니다.”그가 정원 안쪽을 바라봤다.“한서윤 씨가 만든 곳이라서요.”개장한 지 한 달 된 소규모 복합문화공간이었다.태오는 그 사실을 알고도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서윤이 보여 주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다렸다.“궁금하지 않았어요?”“많이 궁금했습니다.”“그런데 왜 안 왔어요?”“당신이 일하는 곳까지 제가 마음대로 들어가는 건 싫었습니다.”서윤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 먼저 걸었다.“오늘은 내가 초대한 거예요.”“네.”“그러니까 마음대로 봐도 돼요.”태오는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수로가 있었고, 돌 사이로 늦여름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예전의 서윤이 만들던 정원과 달랐다.화려한 꽃이 채우던 자리에는 바람이 드나드는 여백이 남아 있었다.식물과 돌 사이의 빈 공간마다 늦여름의 공기가 천천히 지나갔다.무언가를 끝까지 채워 넣지 않아도 완성된 정원이었다.“달라졌네요.”태오가 말했다.“뭐가요?”“예전에는 중심을 먼저 만들었습니다.”서윤이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외전 2화] 허락하지 않아도 되는 것

    금요일 오후 여섯 시 오십칠 분.서윤이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태오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는 입구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서윤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왜 안에 안 들어가 있었어요?”“같이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것도 물어보려고 기다린 건 아니죠?”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서윤은 한숨처럼 웃었다.“설마.”“먼저 들어가도 되는지는 못 물어봤으니까요.”“차태오 씨.”“네.”“이러다 나중에는 숨 쉬어도 되냐고 묻겠어요.”태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서윤은 먼저 식당 문을 열었다.“들어와요. 이건 허락 안 받아도 돼요.”예약한 자리는 창가였다.지난번 카페와 달리 이번 식당은 태오가 골랐다.서윤이 메뉴를 펼치며 말했다.“여기는 왜 골랐어요?”“작업실에서 가깝고, 예약할 때 알레르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만 물어봐서요.”“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식당은 피한 거고요?”“네.”“왜요?”“다시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서윤은 메뉴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그럼 오늘부터 다시 알아가려고요?”“그럴 생각입니다.”“조사하듯이?”“그건 자신 있습니다.”서윤이 웃었다.“그건 좀 무섭네요.”태오도 이번에는 농담인 것을 알아들었다.식사가 시작된 뒤 서윤은 일부러 예전에는 잘 먹지 않던 매운 요리를 주문했다.태오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매운 거 싫어하지 않았습니까?”“요즘은 좋아해요.”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외전 1화] 다시 묻는 사람

    카페 문을 먼저 연 사람은 서윤이었다.태오는 뒤따라 들어왔지만 자리를 고르지 않았다.창가와 안쪽 테이블 사이에서 서윤이 잠시 둘러보자 그가 물었다.“어디가 좋습니까?”서윤은 웃을 뻔했다.삼 년을 함께 살았던 남자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물어보고 있었다.“창가요.”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태오가 종이봉투에서 메뉴 카드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뭘 마실래요?”그 질문에도 서윤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예전의 태오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아침마다 마시던 커피도, 싫어하던 향도 알고 있었으니까.“내가 뭘 마시는지 알잖아요.”“알았죠.”태오가 메뉴를 내려다봤다.“삼 년 전의 한서윤 씨가 뭘 마셨는지는.”서윤의 시선이 멈췄다.“지금도 같은지는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서윤은 메뉴를 넘겼다.“오늘은 라테요.”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그건 그대로네요.”“네. 바꿀 이유가 없어서.”“모든 걸 바꾸려고 애쓰는 줄 알았는데.”태오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잘못한 것과 원래 좋아했던 것까지 전부 버리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서윤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아주 짧았지만 태오의 눈이 멈췄다.그는 그 웃음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주문한 음료가 나온 뒤에도 둘은 한동안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서윤의 새 작업실.최근 맡은 호텔 정원 프로젝트.태오가 요즘 하고 있는 일.그는 태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계약서 없는 시작

    여섯 달 뒤.차명환은 증거인멸 교사와 사문서위조 교사,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윤재헌은 자신이 보관한 지시 기록을 제출했지만 실행자로서의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정현수와 강유라 역시 각자가 관여한 범위에 따라 재판과 조사를 받았다.한기석도 예외가 아니었다.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참작될 수 있었다.그러나 한미정이 쓰러진 것을 알고도 채무 약정에 서명하고, 딸을 계약의 대가로 넘긴 선택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서윤은 아버지의 사과문을 받았다.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조차 더는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한미정의 원본 녹음은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됐다. 사건과 관련된 구간만 법정에서 검증됐고,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비공개 상태로 봉인됐다.서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았다.태경의 이사회는 최대주주와 경영진의 이해관계를 분리하는 내부 통제안을 통과시켰다. 회장실 비상 권한은 폐지됐고, 주주 정보 접근과 전자 서명 복구에는 외부 감사인의 승인이 필요해졌다.태오는 그 과정에 직함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대표이사도, 전무도, 후계자도 아니었다.자신의 의결권으로 개편안에 찬성한 뒤 주주석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백십억 원의 상환도 개인 자산으로 마쳤다.그가 잃은 것은 아버지가 허락한 자리였다.그가 남긴 것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은 자기 이름이었다.서윤은 태경과 관련된 마지막 합의서를 검토했다.[한서윤에 대한 채무·혼인·비밀유지 관련 모든 부속 약정의 효력 부인.][향후 어떠한 명목으로도 권리 포기 또는 침묵을 요구하지 않음.]그녀는 서명하지 않았다.서윤의 외부 변호인이 의아한 표정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계약이 끝나는 밤

    비가 오고 있었다.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문밖의 아버지

    스튜디오 유리문 너머로 아버지가 서 있었다.한기석.서윤은 그 이름을 속으로 천천히 불렀다.아버지라고 부르면, 또 무너질 것 같아서.그는 비에 젖은 코트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문은 잠겨 있었다.한기석이 손잡이를 한 번 더 잡아당겼다.딸랑.문 위의 작은 종이 흔들렸다.“서윤아.”유리문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문 열어. 아빠랑 얘기 좀 하자.”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작업대 위에는 아직 쓰다 만 공식 입장문이 떠 있었다.저는 제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빚

    당신 아버지입니다.서윤은 화면 위의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처음에는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아버지. 너무 익숙한 단어라서, 오히려 낯설었다. 어릴 때 자신을 업어 주던 사람.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서 있던 사람. 서윤이 플라워 스튜디오를 처음 열었을 때,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와 어색하게 웃던 사람.그 사람이.자신의 결혼 계약서를.기자에게 넘겼다고.서윤의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휴대폰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강유라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윤을 보았다.

  • 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당신 이름 뒤에 숨지 않겠습니다.

    서윤의 손에서 미끄러진 계약서가 바닥에 흩어졌다.종이 몇 장이 회의실 테이블 아래로 밀려 들어갔다. 누군가가 그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정중한 미소와 형식적인 인사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계약 결혼 의혹.그 짧은 단어 하나가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을 서윤에게로 끌어당겼다.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괜찮아.아니, 괜찮지 않았다.괜찮을 리 없었다.3년 동안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결혼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리였고, 스스로 견뎌 낸 시간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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