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차태오는 그날 밤, 결국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못했다.
펜은 손에 쥐고 있었다. 검은 만년필의 뚜껑도 열려 있었다. 서류 맨 아래, 한서윤의 이름 옆 빈칸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차태오.
석 자만 쓰면 끝나는 일이었다.
3년 전에도 그랬다. 결혼 서류에 이름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결혼이란 사업상 필요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한서윤은 그 결정의 조용한 상대였다.
말수가 적고, 선을 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여자. 공식 석상에서 웃어야 할 때 웃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그의 곁에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
태오는 그런 서윤이 편했다.
편하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는 그때 몰랐다.
펜촉이 종이 위에 닿았다.
차.
거기서 멈췄다.
태오는 한참 동안 미완성된 성씨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잉크가 종이 섬유 사이로 아주 조금 번졌다. 마치 지워지지 않을 흠처럼.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서명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넓은 집 안에 길게 울렸다.
그는 습관처럼 주방 쪽으로 걸었다.
컵장 두 번째 칸. 서윤이 늘 찻잔을 두던 자리였다. 손잡이가 얇은 흰 도자기 잔. 그녀는 그 잔을 태오의 것이라고 했다.
태오는 그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잔은 당신이 쓰세요.”
“굳이 정할 필요 있습니까.”
“필요 없으면, 제가 정할게요.”
그때 서윤은 살짝 웃었다. 눈꼬리가 아주 부드럽게 접히는 웃음이었다.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날도 차를 반쯤 남겼다.
그 잔은 없었다.
컵장 안은 정리되어 있었다. 지나칠 만큼 말끔하게.
태오는 문을 닫지 못했다.
그는 주방 상판을 짚었다. 손끝에 차가운 대리석 감촉이 닿았다. 새벽마다 불이 켜져 있던 주방. 아무 말 없이 데워져 있던 국. 그가 손대지 않아도 다음 날이면 사라져 있던 찻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있었다.
그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강유라였다.
태오는 받지 않았다.
벨소리는 집요했다. 한 번 끊기고, 곧 다시 울렸다. 화면 위의 이름이 검게 빛났다.
그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빈집은 소리를 냈다. 냉장고의 낮은 진동, 빗물이 창문을 치는 소리, 어딘가에서 작게 울리는 배관 소리.
그리고 없는 사람의 기척.
태오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낯선 공간이 나타났다.
서윤이 쓰던 쪽은 텅 비어 있었다. 옷걸이 몇 개만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향수 냄새도 거의 사라졌다. 다만 한쪽 선반에 놓인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태오는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낡은 커프스 단추 하나가 들어 있었다.
검은 자개가 박힌 단추. 그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다 없어진 줄 알았던 물건이었다.
왜 이게 여기에 있지.
상자 밑에는 작은 메모지가 깔려 있었다.
태오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왼쪽 단추가 조금 헐거워요. 다음에 수선 맡길 때 같이 보내야겠다.
서윤의 글씨였다.
단정하고 작았다.
그는 메모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기억이 느리게 되살아났다.
결혼식 다음 날 아침.
태오는 새벽 회의가 있었다. 웨딩 촬영도, 피로연도, 형식적인 인사도 끝난 뒤였다. 모두가 피곤해하던 아침,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셔츠를 입었다.
그때 서윤이 조용히 다가왔다.
“잠깐만요.”
그녀는 그의 소매 끝을 잡고 커프스 단추를 만졌다. 손끝이 아주 차가웠다. 태오는 그 온도만 기억했다.
“단추가 빠질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빠지면 잃어버려요.”
“그 정도 물건은 다시 사면 됩니다.”
그 말에 서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단추를 풀어 가져갔다.
태오는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버리지 않았다.
3년 동안, 이런 것까지 가지고 있었다.
태오는 메모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그는 곧 손을 풀었다.
구기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관 벨이 울린 것은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태오는 미간을 좁혔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었다.
인터폰 화면에 서 있는 사람은 강유라였다. 검은 코트 차림에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불쾌함이 먼저 떠 있었다.
태오는 문을 열지 않았다.
통화 버튼만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강유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문도 안 열어 줄 거예요?”
“용건부터 말하십시오.”
“태오 씨답지 않네요. 방금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늦었습니다.”
“그래서 왔어요.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유라는 화면 속에서 작게 웃었다.
“한서윤 씨 나갔다면서요.”
태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가 말했습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한 건 이제 계약이 끝났다는 거죠.”
그녀는 우산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우리 쪽도 움직여야 해요. 이사회 전에 약혼 기사 내보내는 게 낫겠어요. 어차피 한서윤 씨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태오의 손이 인터폰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말조심해.”
짧고 낮은 말이었다.
강유라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한서윤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
화면 속 정적이 길어졌다.
강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태오 자신도, 방금 제 입에서 나온 말을 한 박자 늦게 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서윤의 편을 들어 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강유라가 천천히 웃었다.
“이상하네요.”
“돌아가십시오.”
“진짜 이혼할 거잖아요.”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유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설마 이제 와서 아깝기라도 해요? 차태오 씨가?”
그 말은 정확했다.
아깝다.
잃기 싫다.
내 것이었으니 다시 돌려놓고 싶다.
그런 감정이라면 설명이 쉬웠다. 태오가 잘 아는 방식이었다. 소유, 통제, 회수, 정리. 그는 언제나 그런 단어들로 세상을 다뤘다.
하지만 서윤은 물건이 아니었다.
계약서의 조항도, 가문의 장식도, 그의 곁에 놓아둘 수 있는 조용한 그림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떠난 사람은, 다시 부른다고 돌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태오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아니.”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늦은 것 같습니다.”
강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요?”
태오는 인터폰 화면 속 자신의 흐릿한 얼굴을 보았다. 피로한 눈, 헝클어진 머리, 목까지 풀린 셔츠. 완벽과는 거리가 먼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너무 늦은 것 같다고.”
그는 통화를 끊었다.
벨이 다시 울리지 않았다.
태오는 현관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문 너머에 사람이 떠나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서윤은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작은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스튜디오 근처에 급하게 구한 집이었다. 방 하나, 거실 하나, 작은 주방. 태오의 집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좁았지만,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놓였다.
비에 젖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상자들은 아직 풀지 못했다. 작은 공간에 쌓인 짐들이 서윤의 지난 3년을 말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옷 몇 벌, 책, 작업 도구, 낡은 사진첩, 찻잔 두 개.
그녀는 그중 하나를 꺼냈다.
흰 도자기 잔.
태오가 한 번도 제대로 비우지 않았던 그 잔과 같은 세트였다. 원래는 두 개였다. 하나는 두고 왔고, 하나는 가져왔다.
서윤은 그 잔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다 손을 멈췄다.
버리는 것도 아직은 감정이 필요했다. 미워하는 일에도 힘이 든다는 걸, 서윤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녀는 대신 주전자를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메시지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서윤은 휴대폰을 엎어 두고 창가로 갔다. 오피스텔 창밖으로 새벽 도로가 보였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이 길게 번져 있었다.
그녀는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반지가 있던 자리는 하얗게 남아 있었다. 얇은 자국. 아주 오래 묶여 있다가 풀린 실처럼.
서윤은 그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아.”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찮다는 말은 아직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이 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주전자가 울었다.
서윤은 차를 우렸다. 이번에는 태오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손끝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식탁이라 부르기에도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계약 종료 후 해야 할 일들을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확장 계약 최종 확인.
변호사에게 이혼 서류 발송.
주소 이전.
새 명함 디자인.
태오 씨 물건 정리.
마지막 줄에서 펜이 멈췄다.
태오 씨.
서윤은 그 글자를 가만히 보다가, 두 줄로 지웠다.
그리고 다시 적었다.
차태오 관련 물건 정리.
이름 하나 바꾸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게 조금 우스워서, 서윤은 작게 웃었다.
웃음 끝이 젖어 있었다.
초인종이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서윤의 손이 멈췄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초인종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이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한서윤 씨 맞으십니까?”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태경그룹 법무팀입니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상대는 짧게 숨을 골랐다.
“차태오 본부장님 지시로 연락드렸습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벌써 시작이구나.
그가 서류 처리를 서두르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변호사를 통해 조건을 조정하자는 연락일 수도 있었다. 역시 그다운 방식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절차. 대화가 아니라 통보.
서윤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말씀하세요.”
상대가 말했다.
“이혼 서류 접수는 보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서윤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았다.
“무슨 뜻이죠?”
“본부장님께서 직접 만나 이야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피곤하고 창백했지만,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전 할 말 다 했습니다.”
“본부장님께서는...”
서윤은 조용히 말을 끊었다.
“그분께 전해주세요.”
차가운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 안에서 조금씩 식어 갔다.
“이번엔 제가 보류하지 않는다고요.”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낮고 익숙한 목소리.
“한서윤.”
서윤의 호흡이 멎었다.
법무팀 직원의 전화가 아니었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아니, 듣고 있었다.
태오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갈라졌다.
“한 번만 만나.”
서윤은 눈을 감았다.
예전의 그녀라면 그 한마디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부탁처럼 말했으니까. 명령이 아니라, 통보가 아니라, 어쩌면 처음으로.
그러나 서윤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테이블에 닿으며 낮은 소리를 냈다.
“싫어요.”
침묵.
그 짧은 한마디가, 3년 동안의 어떤 말보다 길게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태오가 아주 낮게 숨을 들이켰다.
“서윤아.”
처음이었다.
그가 그녀를 그렇게 부른 건.
서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다. 작은 방 안에는 비 내리는 소리와, 아직 식지 않은 차 향만 남았다.
서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대신 수첩을 다시 펼쳤다.
방금 지운 이름 아래에,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돌아가지 않는다.
펜 끝이 종이를 꾹 눌렀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차태오.
내일 오전 10시. 네 스튜디오로 가겠다.
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오지 마세요.
몇 초 뒤,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겠습니다."
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 새벽의 빗줄기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알았다.
진짜 폭풍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외전 5화. 내일도 보는 사이금요일 밤 열 시 십삼 분.두 사람은 서윤의 작업실 앞에 서 있었다.태오가 데려다주겠느냐고 묻지 않은 첫날이었다.서윤이 택시를 잡으려 하자 자연스럽게 말했다.“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그래요.”그게 전부였다.허락을 받아냈다는 안도도, 선을 넘었다는 긴장도 없었다.차 안에서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서윤이 다음 주에 들어갈 현장.태오의 자문사에서 처음으로 받은 장기 프로젝트.점심으로 먹었던 국수가 생각보다 맛없었다는 이야기까지.작업실 앞에 도착하자 태오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서윤이 그를 올려다봤다.“내일 뭐 해요?”“오전에 운동할 생각입니다.”“그다음은?”태오가 잠시 생각했다.“별일 없습니다.”“그럼 나랑 화분 보러 갈래요?”이번에는 그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좋습니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안 물어보네요.”“뭘 말입니까?”“제가 정말 같이 가고 싶은 건지.”태오가 웃었다.“같이 가자고 먼저 말했으니까요.”“많이 늘었네.”“교육비가 비쌌으니까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백십억짜리 농담은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꽤 자주 쓰였다.“그럼 내일 열한 시.”“어디로 가면 됩니까?”“우리 집 앞으로 와요.”태오가 아주 잠깐 멈췄다.서윤이 곧바로 말했다.“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화분 사러 갈 거예요.”“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얼굴이 했어요.”
외전 4화. 이번에는 연애부터서윤이 태오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작은 기업 자문사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작았다.대표실도 따로 없었다.유리벽 안쪽의 가장 평범한 책상이 태오 자리였다.“진짜 여기서 일해요?”“네.”“대표인데?”“대표가 제일 넓은 방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서요.”서윤이 피식 웃었다.“사람이 너무 바뀐 거 아니에요?”“불편합니까?”“또 물어본다.”태오가 입을 다물었다.그때 회의실에서 나오던 직원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순간 표정이 굳었다.서윤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한서윤 대표님입니다.”태오의 정정은 빨랐다.직원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한 대표님.”서윤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뒤 태오에게 물었다.“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할까 봐 바로 고친 거예요?”“그 호칭은 지금 사실이 아니니까요.”“예전에는 사실이었고?”태오가 잠시 침묵했다.“법적으로는요.”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았다.그렇다고 없던 일로 만들지도 않았다.둘은 근처의 작은 와인바로 갔다.서윤이 먼저
세 번째 금요일에는 서윤이 장소를 골랐다.호텔도, 유명한 레스토랑도 아니었다.작업실에서 십 분쯤 떨어진 작은 야외 정원이었다.태오가 입구의 안내판을 바라봤다.“여기였습니까?”“왜요. 싫어요?”“아닙니다.”그가 정원 안쪽을 바라봤다.“한서윤 씨가 만든 곳이라서요.”개장한 지 한 달 된 소규모 복합문화공간이었다.태오는 그 사실을 알고도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서윤이 보여 주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다렸다.“궁금하지 않았어요?”“많이 궁금했습니다.”“그런데 왜 안 왔어요?”“당신이 일하는 곳까지 제가 마음대로 들어가는 건 싫었습니다.”서윤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 먼저 걸었다.“오늘은 내가 초대한 거예요.”“네.”“그러니까 마음대로 봐도 돼요.”태오는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수로가 있었고, 돌 사이로 늦여름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예전의 서윤이 만들던 정원과 달랐다.화려한 꽃이 채우던 자리에는 바람이 드나드는 여백이 남아 있었다.식물과 돌 사이의 빈 공간마다 늦여름의 공기가 천천히 지나갔다.무언가를 끝까지 채워 넣지 않아도 완성된 정원이었다.“달라졌네요.”태오가 말했다.“뭐가요?”“예전에는 중심을 먼저 만들었습니다.”서윤이
금요일 오후 여섯 시 오십칠 분.서윤이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태오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는 입구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서윤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왜 안에 안 들어가 있었어요?”“같이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것도 물어보려고 기다린 건 아니죠?”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서윤은 한숨처럼 웃었다.“설마.”“먼저 들어가도 되는지는 못 물어봤으니까요.”“차태오 씨.”“네.”“이러다 나중에는 숨 쉬어도 되냐고 묻겠어요.”태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서윤은 먼저 식당 문을 열었다.“들어와요. 이건 허락 안 받아도 돼요.”예약한 자리는 창가였다.지난번 카페와 달리 이번 식당은 태오가 골랐다.서윤이 메뉴를 펼치며 말했다.“여기는 왜 골랐어요?”“작업실에서 가깝고, 예약할 때 알레르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만 물어봐서요.”“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식당은 피한 거고요?”“네.”“왜요?”“다시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서윤은 메뉴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그럼 오늘부터 다시 알아가려고요?”“그럴 생각입니다.”“조사하듯이?”“그건 자신 있습니다.”서윤이 웃었다.“그건 좀 무섭네요.”태오도 이번에는 농담인 것을 알아들었다.식사가 시작된 뒤 서윤은 일부러 예전에는 잘 먹지 않던 매운 요리를 주문했다.태오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매운 거 싫어하지 않았습니까?”“요즘은 좋아해요.”
카페 문을 먼저 연 사람은 서윤이었다.태오는 뒤따라 들어왔지만 자리를 고르지 않았다.창가와 안쪽 테이블 사이에서 서윤이 잠시 둘러보자 그가 물었다.“어디가 좋습니까?”서윤은 웃을 뻔했다.삼 년을 함께 살았던 남자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물어보고 있었다.“창가요.”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태오가 종이봉투에서 메뉴 카드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뭘 마실래요?”그 질문에도 서윤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예전의 태오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아침마다 마시던 커피도, 싫어하던 향도 알고 있었으니까.“내가 뭘 마시는지 알잖아요.”“알았죠.”태오가 메뉴를 내려다봤다.“삼 년 전의 한서윤 씨가 뭘 마셨는지는.”서윤의 시선이 멈췄다.“지금도 같은지는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서윤은 메뉴를 넘겼다.“오늘은 라테요.”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그건 그대로네요.”“네. 바꿀 이유가 없어서.”“모든 걸 바꾸려고 애쓰는 줄 알았는데.”태오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잘못한 것과 원래 좋아했던 것까지 전부 버리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서윤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아주 짧았지만 태오의 눈이 멈췄다.그는 그 웃음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주문한 음료가 나온 뒤에도 둘은 한동안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서윤의 새 작업실.최근 맡은 호텔 정원 프로젝트.태오가 요즘 하고 있는 일.그는 태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섯 달 뒤.차명환은 증거인멸 교사와 사문서위조 교사,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윤재헌은 자신이 보관한 지시 기록을 제출했지만 실행자로서의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정현수와 강유라 역시 각자가 관여한 범위에 따라 재판과 조사를 받았다.한기석도 예외가 아니었다.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참작될 수 있었다.그러나 한미정이 쓰러진 것을 알고도 채무 약정에 서명하고, 딸을 계약의 대가로 넘긴 선택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서윤은 아버지의 사과문을 받았다.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조차 더는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한미정의 원본 녹음은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됐다. 사건과 관련된 구간만 법정에서 검증됐고,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비공개 상태로 봉인됐다.서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았다.태경의 이사회는 최대주주와 경영진의 이해관계를 분리하는 내부 통제안을 통과시켰다. 회장실 비상 권한은 폐지됐고, 주주 정보 접근과 전자 서명 복구에는 외부 감사인의 승인이 필요해졌다.태오는 그 과정에 직함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대표이사도, 전무도, 후계자도 아니었다.자신의 의결권으로 개편안에 찬성한 뒤 주주석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백십억 원의 상환도 개인 자산으로 마쳤다.그가 잃은 것은 아버지가 허락한 자리였다.그가 남긴 것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은 자기 이름이었다.서윤은 태경과 관련된 마지막 합의서를 검토했다.[한서윤에 대한 채무·혼인·비밀유지 관련 모든 부속 약정의 효력 부인.][향후 어떠한 명목으로도 권리 포기 또는 침묵을 요구하지 않음.]그녀는 서명하지 않았다.서윤의 외부 변호인이 의아한 표정
“나만 몰랐던 건가요?”수화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낮고, 조용하고, 차가웠다.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숨겨 온 진실은 한 문장으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웠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서윤은 웃었다.아주 작고 짧은 웃음이었다.“그렇구나.”“서윤 씨.”“대답 안 해도 알겠어요.”“듣고 설명하겠습니다.”“설명?”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차태오 씨는 늘 그래요. 말하지 않고 숨겨 놓고, 일이 터진 뒤에야
서윤의 손에서 미끄러진 계약서가 바닥에 흩어졌다.종이 몇 장이 회의실 테이블 아래로 밀려 들어갔다. 누군가가 그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정중한 미소와 형식적인 인사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계약 결혼 의혹.그 짧은 단어 하나가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을 서윤에게로 끌어당겼다.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괜찮아.아니, 괜찮지 않았다.괜찮을 리 없었다.3년 동안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결혼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리였고, 스스로 견뎌 낸 시간이었
서윤은 오전 아홉 시에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밤새 비가 내린 골목은 아직 젖어 있었다. 유리문 앞 작은 화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간판 아래로 희미한 햇빛이 번졌다.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서윤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은 창백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입술에도 옅은 색을 올렸다.괜찮아 보이는 얼굴.그거면 됐다.딸랑.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실내를 흔들었다. 작업대 위에는 새벽 시장에서 들여온 꽃들이 놓여 있었다. 흰 라넌큘러스, 연분홍 작약, 짙은 녹색 유칼립투스.서윤은 코트를 벗고
비가 오고 있었다.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