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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있었다.
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흰 도자기 잔이 차가운 물에 닿자 작은 소리가 났다. 맑고 짧은 소리였다. 꼭 무언가가 끝났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
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낮은 전자음이 울리고,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차태오. 태경그룹 전략기획본부장. 그리고 서윤의 남편.
정확히는, 오늘 자정까지 남편인 남자.
“아직 안 잤습니까.”
태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서윤은 물기를 닦은 손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결혼반지가 낀 손가락이 낯설었다. 3년 동안 익숙해지려 애썼지만, 끝내 제 것이 되지 못한 물건처럼.
“기다렸어요.”
태오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곧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무슨 일입니까.”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낮고 건조했다.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다정함은 없었다.
서윤은 식탁 위에 놓아둔 봉투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
태오의 시선이 봉투에 닿았다.
“이게 뭡니까.”
“이혼 서류예요.”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밖에서는 빗물이 창문을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집요하게.
태오는 서류를 바로 열지 않았다. 봉투 위에 놓인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흰 종이 위에 보이지 않는 흠집이라도 있는 것처럼.
“날짜가 오늘이긴 하군요.”
그가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적힌 날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어요.”
태오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서류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종이 위에는 이미 서윤의 서명이 있었다. 한서윤. 세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태오는 그 이름을 오래 보았다.
“갑자기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갑자기는 아니에요.”
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3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잖아요.”
그 말에 태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윤은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서를 받았을 때, 예상 밖의 변수를 마주했을 때, 그는 딱 저만큼만 표정을 흐트러뜨렸다.
서윤은 한때 그런 미세한 변화까지 사랑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집은 이번 주 안에 비울게요. 필요한 절차는 변호사 통해서 진행하면 될 것 같고요.”
“한서윤 씨.”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었다.
아내라고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여보도, 당신도 아니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서윤 씨, 집에서는 한서윤 씨.
그 거리감이 처음에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선이라고 알았다. 지금은, 그저 끝내 넘지 못한 벽처럼 느껴졌다.
“말하세요.”
태오가 서류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조건을 바꾸고 싶습니까?”
서윤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조건.
역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윤이 이 밤까지 기다린 이유가 돈이나 집, 주식, 위자료 때문이라고.
“아니요.”
“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없어요.”
태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없다?”
“네. 아무것도요.”
서윤은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쉽게 빠지지 않았다. 3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빼 본 적 없는 반지는 살 위에 옅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서윤은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힘을 주었다.
반지가 손가락을 빠져나왔다.
작은 금속음과 함께 식탁 위에 놓였다.
태오의 시선이 그 소리에 붙들렸다.
“그건 두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 건 아니었으니까요.”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시선 하나에 먼저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의 침묵이 불편해서, 그의 무표정이 무서워서, 혹은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3년 동안 고마웠어요.”
서윤이 말했다.
태오의 입술이 굳었다.
“그 말은 이상하군요.”
“뭐가요?”
“마치 정말 끝내는 사람처럼 들립니다.”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창밖의 불빛들이 물에 번져 흐려졌다. 이 집은 늘 지나치게 넓고 조용했지만, 오늘따라 더 낯설었다.
“끝내는 거예요.”
그녀는 조용히 답했다.
“오늘이 그날이니까.”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의자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가방은 이미 현관 옆에 놓여 있었다. 큰 짐은 낮에 모두 옮겼다. 태오가 회사에 있는 동안, 이 집에서 자신의 흔적을 하나씩 지웠다.
화장대 위의 립밤, 욕실의 칫솔, 드레스룸 한쪽에 걸려 있던 얇은 원피스들. 냉장고 안의 반찬통까지.
마지막으로 남긴 건 식탁 위의 반지뿐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갑니까.”
태오가 물었다.
“제 집으로요.”
“여기가 당신 집입니다.”
서윤의 손이 현관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말, 3년 전에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등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윤은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복도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실내의 온기와 전혀 다른 공기였다. 어쩐지 숨이 쉬어졌다.
그때, 태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서윤.”
이번에는 씨가 붙지 않았다.
서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태오는 식탁 곁에 서 있었다. 늘 완벽하던 셔츠의 소매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손은 식탁 모서리를 짚은 채였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
하지만 서윤은 그 작은 흔들림을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았다.
“서류는 내일 오전까지 보내 주세요.”
서윤이 말했다.
태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지금 나가면 후회할 겁니다.”
예전의 서윤이었다면 멈췄을 말이었다.
그가 던지는 낮은 경고, 익숙한 통제, 차가운 확신. 그 모든 것에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윤은 가만히 웃었다.
슬프지도, 화난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후회는 제가 충분히 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이제 차태오 씨 차례예요.”
태오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서윤의 손목을 잡으려는 듯 팔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이 그녀의 코트 소매에 닿기 직전, 멈췄다.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걸, 그제야 떠올린 사람처럼.
서윤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녕히 계세요.”
문이 닫혔다.
태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현관문 너머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숫자가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이혼 서류와 반지가 놓여 있었다. 식어 버린 찻잔은 사라지고 없었다. 늘 당연하게 있던 것들이, 오늘은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태오는 천천히 식탁으로 돌아갔다.
반지를 집어 들었다.
작고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바닥이 무거웠다. 숨을 쉬는 법을 잠깐 잊은 사람처럼,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계약은 끝났다.
분명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가 원했던 결혼은 처음부터 감정 없는 결혼이었다. 서로를 필요 이상으로 침범하지 않는 관계. 태경그룹에 필요한 안정적인 그림. 그리고 3년 뒤, 조용한 이별.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왜.
태오는 빈 현관을 바라보았다.
왜 집이 이렇게 낯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 안의 반지를 세게 쥐었다. 금속의 둥근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강유라의 이름이 떠 있었다.
태오는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태오 씨, 기사 봤어요? 우리 약혼 얘기, 슬슬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이혼 서류 위에 멈췄다.
서윤의 서명.
한서윤.
태오는 그 이름을 보며 낮게 말했다.
“정리 못 합니다.”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네?”
태오는 천천히 반지를 움켜쥐었다.
그제야 알았다.
끝난 건 계약뿐이었다.
그는 아직, 한서윤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외전 5화. 내일도 보는 사이금요일 밤 열 시 십삼 분.두 사람은 서윤의 작업실 앞에 서 있었다.태오가 데려다주겠느냐고 묻지 않은 첫날이었다.서윤이 택시를 잡으려 하자 자연스럽게 말했다.“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그래요.”그게 전부였다.허락을 받아냈다는 안도도, 선을 넘었다는 긴장도 없었다.차 안에서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서윤이 다음 주에 들어갈 현장.태오의 자문사에서 처음으로 받은 장기 프로젝트.점심으로 먹었던 국수가 생각보다 맛없었다는 이야기까지.작업실 앞에 도착하자 태오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서윤이 그를 올려다봤다.“내일 뭐 해요?”“오전에 운동할 생각입니다.”“그다음은?”태오가 잠시 생각했다.“별일 없습니다.”“그럼 나랑 화분 보러 갈래요?”이번에는 그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좋습니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안 물어보네요.”“뭘 말입니까?”“제가 정말 같이 가고 싶은 건지.”태오가 웃었다.“같이 가자고 먼저 말했으니까요.”“많이 늘었네.”“교육비가 비쌌으니까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백십억짜리 농담은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꽤 자주 쓰였다.“그럼 내일 열한 시.”“어디로 가면 됩니까?”“우리 집 앞으로 와요.”태오가 아주 잠깐 멈췄다.서윤이 곧바로 말했다.“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화분 사러 갈 거예요.”“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얼굴이 했어요.”
외전 4화. 이번에는 연애부터서윤이 태오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작은 기업 자문사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작았다.대표실도 따로 없었다.유리벽 안쪽의 가장 평범한 책상이 태오 자리였다.“진짜 여기서 일해요?”“네.”“대표인데?”“대표가 제일 넓은 방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서요.”서윤이 피식 웃었다.“사람이 너무 바뀐 거 아니에요?”“불편합니까?”“또 물어본다.”태오가 입을 다물었다.그때 회의실에서 나오던 직원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순간 표정이 굳었다.서윤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한서윤 대표님입니다.”태오의 정정은 빨랐다.직원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한 대표님.”서윤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뒤 태오에게 물었다.“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할까 봐 바로 고친 거예요?”“그 호칭은 지금 사실이 아니니까요.”“예전에는 사실이었고?”태오가 잠시 침묵했다.“법적으로는요.”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았다.그렇다고 없던 일로 만들지도 않았다.둘은 근처의 작은 와인바로 갔다.서윤이 먼저
세 번째 금요일에는 서윤이 장소를 골랐다.호텔도, 유명한 레스토랑도 아니었다.작업실에서 십 분쯤 떨어진 작은 야외 정원이었다.태오가 입구의 안내판을 바라봤다.“여기였습니까?”“왜요. 싫어요?”“아닙니다.”그가 정원 안쪽을 바라봤다.“한서윤 씨가 만든 곳이라서요.”개장한 지 한 달 된 소규모 복합문화공간이었다.태오는 그 사실을 알고도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서윤이 보여 주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다렸다.“궁금하지 않았어요?”“많이 궁금했습니다.”“그런데 왜 안 왔어요?”“당신이 일하는 곳까지 제가 마음대로 들어가는 건 싫었습니다.”서윤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 먼저 걸었다.“오늘은 내가 초대한 거예요.”“네.”“그러니까 마음대로 봐도 돼요.”태오는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수로가 있었고, 돌 사이로 늦여름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예전의 서윤이 만들던 정원과 달랐다.화려한 꽃이 채우던 자리에는 바람이 드나드는 여백이 남아 있었다.식물과 돌 사이의 빈 공간마다 늦여름의 공기가 천천히 지나갔다.무언가를 끝까지 채워 넣지 않아도 완성된 정원이었다.“달라졌네요.”태오가 말했다.“뭐가요?”“예전에는 중심을 먼저 만들었습니다.”서윤이
금요일 오후 여섯 시 오십칠 분.서윤이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태오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는 입구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서윤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왜 안에 안 들어가 있었어요?”“같이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것도 물어보려고 기다린 건 아니죠?”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서윤은 한숨처럼 웃었다.“설마.”“먼저 들어가도 되는지는 못 물어봤으니까요.”“차태오 씨.”“네.”“이러다 나중에는 숨 쉬어도 되냐고 묻겠어요.”태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서윤은 먼저 식당 문을 열었다.“들어와요. 이건 허락 안 받아도 돼요.”예약한 자리는 창가였다.지난번 카페와 달리 이번 식당은 태오가 골랐다.서윤이 메뉴를 펼치며 말했다.“여기는 왜 골랐어요?”“작업실에서 가깝고, 예약할 때 알레르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만 물어봐서요.”“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식당은 피한 거고요?”“네.”“왜요?”“다시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서윤은 메뉴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그럼 오늘부터 다시 알아가려고요?”“그럴 생각입니다.”“조사하듯이?”“그건 자신 있습니다.”서윤이 웃었다.“그건 좀 무섭네요.”태오도 이번에는 농담인 것을 알아들었다.식사가 시작된 뒤 서윤은 일부러 예전에는 잘 먹지 않던 매운 요리를 주문했다.태오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매운 거 싫어하지 않았습니까?”“요즘은 좋아해요.”
카페 문을 먼저 연 사람은 서윤이었다.태오는 뒤따라 들어왔지만 자리를 고르지 않았다.창가와 안쪽 테이블 사이에서 서윤이 잠시 둘러보자 그가 물었다.“어디가 좋습니까?”서윤은 웃을 뻔했다.삼 년을 함께 살았던 남자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물어보고 있었다.“창가요.”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태오가 종이봉투에서 메뉴 카드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뭘 마실래요?”그 질문에도 서윤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예전의 태오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아침마다 마시던 커피도, 싫어하던 향도 알고 있었으니까.“내가 뭘 마시는지 알잖아요.”“알았죠.”태오가 메뉴를 내려다봤다.“삼 년 전의 한서윤 씨가 뭘 마셨는지는.”서윤의 시선이 멈췄다.“지금도 같은지는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서윤은 메뉴를 넘겼다.“오늘은 라테요.”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그건 그대로네요.”“네. 바꿀 이유가 없어서.”“모든 걸 바꾸려고 애쓰는 줄 알았는데.”태오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잘못한 것과 원래 좋아했던 것까지 전부 버리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서윤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아주 짧았지만 태오의 눈이 멈췄다.그는 그 웃음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주문한 음료가 나온 뒤에도 둘은 한동안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서윤의 새 작업실.최근 맡은 호텔 정원 프로젝트.태오가 요즘 하고 있는 일.그는 태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섯 달 뒤.차명환은 증거인멸 교사와 사문서위조 교사,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윤재헌은 자신이 보관한 지시 기록을 제출했지만 실행자로서의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정현수와 강유라 역시 각자가 관여한 범위에 따라 재판과 조사를 받았다.한기석도 예외가 아니었다.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참작될 수 있었다.그러나 한미정이 쓰러진 것을 알고도 채무 약정에 서명하고, 딸을 계약의 대가로 넘긴 선택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서윤은 아버지의 사과문을 받았다.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조차 더는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한미정의 원본 녹음은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됐다. 사건과 관련된 구간만 법정에서 검증됐고,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비공개 상태로 봉인됐다.서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았다.태경의 이사회는 최대주주와 경영진의 이해관계를 분리하는 내부 통제안을 통과시켰다. 회장실 비상 권한은 폐지됐고, 주주 정보 접근과 전자 서명 복구에는 외부 감사인의 승인이 필요해졌다.태오는 그 과정에 직함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대표이사도, 전무도, 후계자도 아니었다.자신의 의결권으로 개편안에 찬성한 뒤 주주석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백십억 원의 상환도 개인 자산으로 마쳤다.그가 잃은 것은 아버지가 허락한 자리였다.그가 남긴 것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은 자기 이름이었다.서윤은 태경과 관련된 마지막 합의서를 검토했다.[한서윤에 대한 채무·혼인·비밀유지 관련 모든 부속 약정의 효력 부인.][향후 어떠한 명목으로도 권리 포기 또는 침묵을 요구하지 않음.]그녀는 서명하지 않았다.서윤의 외부 변호인이 의아한 표정
당신 아버지입니다.서윤은 화면 위의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처음에는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아버지. 너무 익숙한 단어라서, 오히려 낯설었다. 어릴 때 자신을 업어 주던 사람.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서 있던 사람. 서윤이 플라워 스튜디오를 처음 열었을 때,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와 어색하게 웃던 사람.그 사람이.자신의 결혼 계약서를.기자에게 넘겼다고.서윤의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휴대폰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강유라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윤을 보았다.
“나만 몰랐던 건가요?”수화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낮고, 조용하고, 차가웠다.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숨겨 온 진실은 한 문장으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웠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서윤은 웃었다.아주 작고 짧은 웃음이었다.“그렇구나.”“서윤 씨.”“대답 안 해도 알겠어요.”“듣고 설명하겠습니다.”“설명?”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차태오 씨는 늘 그래요. 말하지 않고 숨겨 놓고, 일이 터진 뒤에야
서윤의 손에서 미끄러진 계약서가 바닥에 흩어졌다.종이 몇 장이 회의실 테이블 아래로 밀려 들어갔다. 누군가가 그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정중한 미소와 형식적인 인사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계약 결혼 의혹.그 짧은 단어 하나가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을 서윤에게로 끌어당겼다.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괜찮아.아니, 괜찮지 않았다.괜찮을 리 없었다.3년 동안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결혼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리였고, 스스로 견뎌 낸 시간이었
서윤은 오전 아홉 시에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밤새 비가 내린 골목은 아직 젖어 있었다. 유리문 앞 작은 화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간판 아래로 희미한 햇빛이 번졌다.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서윤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은 창백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입술에도 옅은 색을 올렸다.괜찮아 보이는 얼굴.그거면 됐다.딸랑.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실내를 흔들었다. 작업대 위에는 새벽 시장에서 들여온 꽃들이 놓여 있었다. 흰 라넌큘러스, 연분홍 작약, 짙은 녹색 유칼립투스.서윤은 코트를 벗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