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네 엄마가 죽기 전에 남긴 통장이 있다.”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스튜디오 안은 조용했다. 유리문 밖 기자들의 웅성거림도, 빗소리도 멀게 느껴졌다.엄마의 통장.그 단어 하나가 서윤을 오래전으로 끌고 갔다.침대에 기대 앉아 있던 엄마. 창백한 얼굴로도 서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 병실 창가에 놓여 있던 작은 꽃병.엄마는 늘 웃었다.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서윤이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삼촌.”서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수화기 너머 외삼촌은 한숨을 삼켰다.“네 아버지는 네 엄마 병원비가 태경 돈으로 버텼다고 했지?”“네.”“거짓말이다.”서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외삼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처음 병원비는 네 엄마가 준비해 둔 돈으로 냈어. 보험금도 있었고, 외가에서 보탠 돈도 있었다. 네 엄마는 네 아버지한테 그 돈 함부로 쓰지 말라고 통장까지 따로 만들어 놨다.”서윤은 숨을 멈췄다.그녀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달랐다.아버지는 늘 말했다.엄마 병원비 때문에 빚이 커졌다고.그 빚 때문에 회사가 기울었다고.그래서 서윤이 조금은 가족을 이해해야 한다고.“그럼 태경 돈은요?”서윤이 물었다.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그 침묵이 이상하게 불길했다.“태경 돈은 병원비가 아니라.”외삼촌은 말을 멈췄다.“삼촌.”“네 아버지 회사로 들어갔다.”서윤은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뭐라고요?”“네 엄마 병원비 명목으로 받은 돈이었지만, 실제로는 한기석 회사 운영자금으로 들어간 흔적이 있다.”서윤은 작업대 끝을 붙잡았다.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머니의 병원비.그 이름으로 받은 돈.그 돈이 아버지 회사로 들어갔다.그렇다면 아버지는 엄마의 병까지 이용한 것이었다.그리고 그 거짓말 위에 서윤의 결혼을 올려놓았다.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맞은편에 서 있던 태오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그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 통장.”서윤이 힘겹게
게시되었습니다. 화면에 뜬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서윤은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언가가 끝난 것 같기도 했고, 이제야 시작된 것 같기도 했다. 손끝은 차가웠다. 마우스를 쥔 손가락이 굳어 있었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유리문 밖에서는 여전히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대표님! 입장문 올리신 겁니까?” “자료 공개하신 거 맞습니까?” “태경 측 반박에 대한 재반박입니까?”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더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방금 올린 글이 그녀의 첫 공식 대답이었다. 거기에 없는 말을 즉흥적으로 덧붙이면, 또 누군가 마음대로 잘라 쓸 것이다. 서윤은 노트북을 닫았다. 그때 유리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딸랑. 차태오가 들어왔다. 비에 젖은 코트 자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기자들 사이를 지나온 사람답게 얼굴이 굳어 있었다. “봤습니다.” 서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뭘요.” “입장문.” “내리라고 하려고요?” 태오의 입술이 굳었다. “아닙니다.” 서윤은 그제야 그를 보았다. 태오는 젖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 채 서 있었다. 예전의 차태오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정리된 사람. 흐트러지는 법이 없던 사람. 그런데 지금 그는 엉망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더 불편했다. “그럼 왜 들어왔어요?”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제가 괜찮은지요?” 태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네.” 서윤은 작게 웃었다. 웃음 끝이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따가웠다. “괜찮지 않아요.” 태오의 눈이 흔들렸다. 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괜찮지 않아도 제가 한 선택이에요.” 그 말에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오려다 멈췄다. 서윤은 그 작은 멈춤을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다가왔을 것이다. 잡았을 것이다. 괜찮지 않으면 자신
“태경 측은 한서윤 대표가 모든 조건을 알고 서명했다고 주장했습니다!”기자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순간 모든 카메라가 다시 서윤을 향했다.서윤은 숨을 멈췄다.방금 전까지 그녀는 겨우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몰랐던 것을 구분해서 밝히겠다고, 더 이상 남의 입으로 설명되지 않겠다고.그런데 태경은 단 한 줄로 그녀를 다시 밀어냈다.한서윤은 모든 조건을 알고 있었다.그 문장은 너무 간단했다.그래서 더 잔인했다.“한 대표님! 정말 몰랐습니까?”“태경은 서명 당시 충분히 고지했다고 합니다!”“거짓 해명을 하신 겁니까?”질문들이 쏟아졌다.서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옆에 있던 태오의 얼굴이 굳었다.“그 입장문, 누가 승인했습니까.”그의 목소리는 낮았다.그러나 기자들의 소음에 묻혔다.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오를 보았다.태오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제가 낸 게 아닙니다.”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말을 믿어야 할까.믿고 싶지 않았다.믿는 순간, 또다시 상처받을 자리를 내주는 것 같았다.하지만 태오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당황, 분노, 그리고 두려움.그는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그때 한 기자가 휴대폰 화면을 높이 들어 보였다.“공식 입장문 전문입니다. 태경그룹은 ‘한서윤 씨가 혼인 계약 및 부속 합의 내용을 충분히 확인한 뒤 자의로 서명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서윤은 그 문장을 들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자의.충분히 확인.그 단어들이 그녀를 다시 가두려 했다.마치 모든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는 듯.마치 그녀가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는 사람이라는 듯.서윤은 입술을 열었다.그러나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부친 채무를 갚기 위해 결혼한 게 맞습니까?”“어머니 병원비 지원도 알고 있었습니까?”“차태오 본부장과 짜고 피해자인 척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습니다!”피해자인 척.그 말에
플래시가 다시 터졌다.서윤은 유리문 앞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작은 스튜디오 앞 골목은 어느새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우산들, 젖은 카메라 렌즈,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들. 그 모든 것이 좁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윤을 향해 있었다.“한서윤 대표님! 계약 결혼 사실입니까?”“차태오 본부장과 이혼 절차 중인 게 맞습니까?”“부친 채무 때문에 결혼했다는 보도 인정하십니까?”“태경그룹에서 어머니 병원비를 지원했다는 자료가 나왔는데요!”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서윤은 손을 꽉 쥐었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그 아픔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도망치고 싶었다.불을 끄고, 커튼을 내리고, 아무도 없는 사람처럼 숨고 싶었다.하지만 그러면 또 누군가가 그녀를 대신 설명할 것이다.아버지는 속 깊은 딸이었다고 말할 것이다.차명환은 은혜를 모르는 여자라고 말할 것이다.기자들은 계약 아내라고 쓸 것이다.그리고 사람들은 그 모든 말을 서윤보다 먼저 믿을 것이다.그건 싫었다.서윤은 노트북 화면을 한 번 돌아보았다.공식 입장문 파일이 열려 있었다.저는 제 인생을 더 이상 타인의 입으로 설명하게 두지 않겠습니다.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았다.딸랑.문이 열렸다.비 냄새가 밀려들어 왔다. 동시에 플래시가 터졌다.서윤은 눈을 찡그리지 않았다.골목에 모인 기자들이 한꺼번에 앞으로 몰렸다.“한 대표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계약 결혼 인정하십니까?”“차태오 본부장과는 현재 어떤 관계입니까?”서윤은 문턱 안쪽에 섰다.밖으로 완전히 나가지도, 안으로 물러서지도 않았다.그 경계 위에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한서윤입니다.”짧은 한마디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골목이 잠시 조용해졌다.서윤은 숨을 들이켰다.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그래도 말했다.“제 결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기자들의 녹음기가 앞으로 밀려왔다.서윤은 그것들을 보지 않으려 했다.
“당신 어머니가 누구 돈으로 버텼는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업대 위에는 오래된 영수증이 놓여 있었다. 납부자명. 차명환. 그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있는 순간, 같은 이름의 남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서윤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 돈으로 제 어머니를 살렸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틀린 말은 아니지.” 차명환은 낮게 웃었다.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서윤의 손이 수화기를 꽉 쥐었다. 은혜. 그 단어가 이렇게 차갑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은혜라면 왜 숨기셨습니까.”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서윤은 계속 말했다. “정말 제 어머니를 돕고 싶어서 낸 돈이었다면, 왜 제 결혼 계약에 묶으셨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차명환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기석은 돈이 필요했고, 태경은 안정된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거래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죠.” 서윤은 숨을 삼켰다. 거래. 적합한 사람.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적어도 그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계산이었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 이제라도 조용히 정리합시다.” 차명환이 말했다. “공식 입장문 같은 건 내지 마십시오. 당신 아버지 문제도, 어머니 병원비 문제도 밖으로 나가 봐야 당신만 다칩니다.” “제가 다칠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요?” “태오가 다칩니다.” 서윤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역시 그렇군요.” “뭐가 말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제 걱정은 아니셨네요.” 차명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영수증을 내려다보았다. 엄마의 이름. 한미정. 그 이름을 이런 식으로 더럽혀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저는 입장문 낼 겁니다.” “한서윤 씨.” 차명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으로 위협에 가까운 음색이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생각하고 말
서윤은 한동안 봉투를 열지 못했다.젖은 종이봉투는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가 빗물에 젖어 조금 울어 있었고, 안쪽의 서류들이 봉투 모양을 따라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아버지는 떠났다.카메라를 든 사람도 사라졌다.하지만 스튜디오 안에는 아직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남아 있었다.네 엄마 병원비도 그 돈에서 나왔어.서윤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아버지의 빚.태경의 지원.계약 결혼.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그런데 거기에 엄마의 이름까지 얽혀 있었다.서윤은 천천히 봉투 입구를 열었다.젖은 종이가 힘없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안에는 서류 뭉치가 들어 있었다.채무 조정 내역서.부속 합의서 사본.오래된 병원비 영수증.그리고 태경그룹 로고가 찍힌 내부 검토 문서.서윤은 가장 위에 있던 병원비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납부자명.차명환.그 이름을 보는 순간, 서윤은 숨을 멈췄다.차명환.태경그룹 회장.차태오의 아버지.영수증 위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한미정.진료일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약 1년 전이었다.서윤은 눈을 깜빡였다.글자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그녀는 영수증을 내려놓고 다음 서류를 펼쳤다.의료비 선지원 확인서.한미정 측 의료비 일부를 태경 측이 선지원한다.해당 금액은 한기석 대표의 기존 채무와 별도 관리한다.향후 혼인 계약 체결 시 별도 정산하지 않는다.서윤의 손이 멈췄다.혼인 계약.어머니의 병원비와 자신의 결혼이 같은 문서 안에 적혀 있었다.서윤은 다시 읽었다.그리고 또 읽었다.뜻은 바뀌지 않았다.엄마가 아팠을 때부터, 이미 자신은 태경의 계산 안에 들어가 있었다.3년 전 갑자기 시작된 계약이 아니었다.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진 거래였다.서윤은 의자에 앉았다.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그런데 웃을 수 없었다.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그런데 울 수도 없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차태오였다.서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