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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원한 건 너였어

이혼을 원한 건 너였어

Oleh:  포도빙수Tamat
Bahas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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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번째 이혼 요구마저 실패로 돌아간 뒤, 배강수는 더 이상 이혼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혼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못 볼 꼴까지 보일 만큼 처절하게 싸우곤 했다. 나는 손목을 긋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도 했고, 배강수와 여자 비서가 함께 침대에 있는 사진을 회사 로비에 도배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기자회견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송지아의 옷까지 벗겨 버렸다. 결국 송지아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앓게 됐다. 배강수는 나를 미워해야 했다. 그런데 배강수는 다시는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고 휴대폰도 내게 맡겼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행선지를 보고했고, 출장 중에도 24시간 내내 나와 영상통화를 연결해 두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줄곧 놓이지 않았다. 내가 매일 배강수에게 이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끈질기게 묻자, 진절머리가 났는지 남자가 되물었다. [내가 이 정도로 하는데도 부족해?] 사실은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오히려 현실 같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또 한 번 배강수를 미행하다 들키고 나서야, 남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10년 후의 내가 전화를 걸어왔어. 이혼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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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 1

제1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

“그걸 정말 믿는다고?”

“그 사람이 네가 불을 질러서 송지아를 죽였다고 했어.”

배강수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 서려 있었다.

“넌 정말 미쳤어. 나는 도박할 수도 없고 도박할 깜냥도 안 돼.”

“이번 생은 그냥 이렇게 살자.”

그냥 이렇게 살자는 그 한마디에 나는 허수아비처럼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배강수는 이혼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

생기 하나 없는 그 눈동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배강수는 후회한 것이 아니었고 정신을 차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두려워서 타협한 것이었다.

하지만 될 대로 되라는 듯 살아가는 이런 삶을 나는 갑자기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

내가 여전히 멍하니 있었지만, 배강수는 평소처럼 나를 달래주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외투를 걸쳐 입고, 조금 전 흐트러졌던 모습을 감추고는 진지하게 내게 일정을 보고했다.

“나 2시에 회사에 도착해. 3시에 회의가 있고 회의는 2시간 정도 걸릴 거야.”

한참 걸어가던 배강수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아, 맞다. 그동안은 전화도 영상통화도 못 받아. 못 믿겠으면 회의실 앞에 와서 기다리든지.”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배강수는 이미 차 문을 닫았다.

점점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와 배강수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배강수와 송지아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그날부터 나는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매일 소독약으로 배강수의 몸을 문질러 씻게 했고, 자외선으로 온몸을 샅샅이 훑었다.

머리카락 한 올만 발견해도, 이성을 잃은 나는 회사 사람들을 모조리 DNA 검사를 받게 했다.

배강수는 필사적으로 해명했고 누군가 약을 먹여 함정에 빠뜨린 것뿐이라고 했다.

심지어 내게 CCTV 영상과 혈액검사 결과까지 보여줬지만, 나는 배강수의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 배강수가 처음으로 내 앞에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

“청아야, 내 재산의 80%를 네게 줄게. 우리 이혼하자. 이런 삶은 너무 지쳤어.”

그날 밤, 나는 처음이 옥상에 올라갔다.

나를 난간 끝에서 끌어안고 데려온 배강수는 미친 사람처럼 무너진 듯 내게 소리쳤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나를 괴롭혀. 네가 어떻게 괴롭혀도 다 받아줄게. 그러니까 제발 너 자신을 해치지는 마! 네가 없으면 나는 죽을 거야...”

그런데 왜일까?

분명 나를 잃을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은 배강수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송지아를 위해 몇 번이고 내게 자신들을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또 비가 내렸다.

분명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펼쳐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나는 내가 틀림없이 배강수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 10년 동안 배강수가 차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것에 익숙해졌다.

내가 쇼핑할 때면 배강수가 우산을 들어주는 것에 익숙했고, 밥을 먹을 때면 입가를 닦아주는 것에도 익숙했다.

심지어 거리를 구경하러 갈 때조차 배강수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놓게 한 뒤, 내가 가고 싶은 가게 바로 앞에 차를 세울 정도였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자, 난 마치 심장을 통째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빈자리를 향해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 얼굴을 흠뻑 적신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나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뒤 나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배강수는 계속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끊임없이 미지근한 물로 내 몸을 닦아 열을 내려주었고, 15분마다 한 번씩 체온을 쟀다.

비서가 전화를 걸어 회의에 참석하라고 재촉했지만, 배강수는 욕설을 퍼부으며 전부 꺼지라고 했다.

내가 아플 때마다 배강수는 늘 이렇게 안절부절못했다.

내 손을 잡은 배강수의 손은 따뜻했지만 몸은 여전히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지만 배강수는 아무리 울려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벨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 소리에 나는 결국 눈을 떴다.

알고 보니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울리고 있던 것은 내 전화였고, 배강수는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른 비릿한 맛을 힘겹게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 대표님이 오늘 회사에 오지 않으셨어요.]

그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 사설탐정은 계속해서 보고했다.

[대표님은 회사에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청산 요양센터로 가셨어요.]

[벌써 2시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으시고요.]

순간 속이 뒤집히듯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청산 요양센터는 송지아가 머물고 있는 개인 요양원이었다.

떠나기 전 배강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못 믿겠으면 문 앞에 와서 기다려.”

‘배강수는 도대체 내가 가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던 걸까?’

배강수는 일정을 보고할 때마다 이 말을 했고, 매번 믿지 않았던 나는 매번 찾아가서 기다렸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믿었지만 또 잘못 믿은 것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6시였다.

평소라면 배강수는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집에 도착했다.

또한 배강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면 됐다.

예전에는 내가 찾아갈 때마다 배강수가 내 앞에 이혼합의서를 내밀었지만, 이번에 다른 점이라면 거기에 내가 먼저 사인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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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그걸 정말 믿는다고?”“그 사람이 네가 불을 질러서 송지아를 죽였다고 했어.”배강수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 서려 있었다.“넌 정말 미쳤어. 나는 도박할 수도 없고 도박할 깜냥도 안 돼.”“이번 생은 그냥 이렇게 살자.”그냥 이렇게 살자는 그 한마디에 나는 허수아비처럼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배강수는 이혼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생기 하나 없는 그 눈동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배강수는 후회한 것이 아니었고 정신을 차린 것도 아니었다.그저 두려워서 타협한 것이었다.하지만 될 대로 되라는 듯 살아가는 이런 삶을 나는 갑자기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내가 여전히 멍하니 있었지만, 배강수는 평소처럼 나를 달래주지 않았다.그저 차분하게 외투를 걸쳐 입고, 조금 전 흐트러졌던 모습을 감추고는 진지하게 내게 일정을 보고했다.“나 2시에 회사에 도착해. 3시에 회의가 있고 회의는 2시간 정도 걸릴 거야.”한참 걸어가던 배강수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아, 맞다. 그동안은 전화도 영상통화도 못 받아. 못 믿겠으면 회의실 앞에 와서 기다리든지.”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배강수는 이미 차 문을 닫았다.점점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와 배강수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결국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배강수와 송지아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그날부터 나는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매일 소독약으로 배강수의 몸을 문질러 씻게 했고, 자외선으로 온몸을 샅샅이 훑었다.머리카락 한 올만 발견해도, 이성을 잃은 나는 회사 사람들을 모조리 DNA 검사를 받게 했다.배강수는 필사적으로 해명했고 누군가 약을 먹여 함정에 빠뜨린 것뿐이라고 했다.심지어 내게 CCTV 영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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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송지아의 방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십 명의 경호원이 몰려왔다. 내 모습을 보자 경호원들은 곧바로 잔뜩 경계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송지아 씨에게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두꺼운 벽 너머로도 나는 문에 붙어 있는 배강수와 송지아의 스티커 사진을 볼 수 있었다.분홍색 하트 테두리로 둘러싼 스티커였고, 그 아래에는 만화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수지성]배강수와 송지아에서 이름 하나씩 따와서 지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억지로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유치하네.”이런 스티커 사진은 나도 예전에 배강수에게 졸라 함께 찍은 적이 있었다.하지만 배강수는 늘 자신은 상장기업 대표라며 이런 유치한 짓은 할 수 없다고 했다.근데 지금 와서 보니 못 하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나는 아직 욱신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다 비켜요. 당신들도 알잖아요. 내가 미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걸요.”말을 마친 나는 품에서 휴대용 커터칼을 꺼냈다.원래는 그저 겁을 주려던 것뿐이었지만, 곧바로 한 경호원이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나를 바닥에 넘어뜨렸다.나머지 경호원들도 달려들어 내 몸을 꼼짝도 못 하게 짓눌렀다.“죄송해요, 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발작할 조짐만 보여도 즉시 제압하라고 하셨어요.”곧 다른 경호원이 곧바로 무전기를 꺼냈다.“대표님, 사모님이 오셨어요! 칼까지 가지고 오셨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전기 너머에서 배강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빨리 제압해! 이따가 지아한테 상처라도 나면 어떡해?]방금까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나는 갑자기 조용해졌다.“제압했어요. 별장으로 돌려보낼까요? 아니면 일단 가둬둘까요?”무전기는 잠시 조용해졌다가 배강수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됐어. 데리고 들어와.”손에 들고 있던 커터칼을 빼앗겼지만,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손목을 베이고 말았다.방 안으로 끌려 들어갈 때도 손목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나는 아랫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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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송지아의 몸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저,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나는 차갑게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사람은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배강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벽처럼 송지아를 등 뒤에 가렸다.“그만해!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뭐든 다 안다는 듯 굴지 마. 다시는 지아를 모욕하게 두지 않을 거야.”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나 역시 이 병을 앓은 지 십여 년이 됐다.내 눈앞에서 엄마가 죽은 그날부터, 엄마의 몸 아래로 피가 퍼져 나가던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구토와 울음이 멈추지 않았고 자신을 해치기도 했다.나는 누구에게도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아빠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뒤, 엄마는 건물에서 뛰어내려서 죽었다.그랬기에 나는 평생 결혼이라는 족쇄에 붙잡혀 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하지만 배강수는 B그룹의 앞날과 자신의 남은 인생을 모두 걸고 내게 맹세했다.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그래서 나는 다시는 엄마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결국 나 역시 엄마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게 됐다.미친 듯이 몰아붙이는 원망과 세상이 뒤집힐 만큼의 감정이 속절없이 나를 무너뜨렸다.하지만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나는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미리 서명해 둔 이혼합의서를 꺼내려고 했다.그 순간 배강수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소리를 질렀다.“뭐 하려는 거야!”“붙잡아!”미처 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경호원들에게 거칠게 바닥에 짓눌렸다.배강수가 다가오더니 내 가방을 발로 걷어찼다. 그 충격에 손바닥이 저릿했다.“내가 살아 있는 한, 지아한테 다시는 조금이라도 손을 대게 두지 않을 거야!”나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엉킨 배강수의 눈을 멍하니 바라봤다.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배강수가 내가 잠든 틈을 타 몰래 자리에서 일어났던 날이었다.나는 또 송지아를 만나러 가려는 줄 알고 몰래 뒤를 따라갔다.그런데 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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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진짜야?”배강수의 온몸이 크게 떨리더니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당연히 진짜지.”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돌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나랑 이혼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서 속인 거야.”배강수가 잠시 말을 멈췄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그런데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겪은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었어.”나는 가볍게 비웃었다.“그러니까 내가 널 잘 안다는 뜻이라고. 어떻게 협박해야 가장 효과적인지도 알고.”배강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배강수에게 내가 필사적으로 참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바닥만 보고 있었다.우리가 처음 만난 뒤로, 내가 배강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어쩌면 정말 10년 후의 전화가 있었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그때 배강수가 정말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지쳤다.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든 나는 건방지고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생각했어? 사인할 거야, 말 거야?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없어.”그러자 짝하는 소리와 함께 배강수의 손바닥이 내 뺨에 세차게 내리꽂혔다.순식간에 얼굴 전체가 화끈거리며 얼얼해졌다.“평소에 네가 얼마나 미쳐 날뛰든, 얼마나 난리를 치든 상관없어. 하지만 이번 일은 선을 넘었어.”“고청아, 너 정말 미쳤구나!”배강수가 손을 휘둘러 비서를 불렀다.“이혼합의서 다시 출력해. 지금 당장 사인할 거니까!”나는 이제 더는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텅 비어 버린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차갑고 아팠다.새로 출력한 합의서가 곧바로 도착했고, 배강수는 서명을 마친 뒤 그것을 내 얼굴에 힘껏 내던졌다.“한 푼도 빠짐없이 재산의 절반은 줄게. 하지만 명심해. 앞으로는 다시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말이 끝나자 경호원들이 마침내 나를 놓아주었다.엉망이 된 채 바닥에서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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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지나자 더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다.그때 아빠는 해외에서 치료받고 있었는데, 하필 배강수가 송지아를 데리고 태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찾아온 모습을 마주쳤다.나는 눈시울을 붉힌 채 배강수에게 달려가 따져 물었다.하지만 배강수는 내가 송지아를 해칠까 봐 나와 언성을 높이며 다퉜다.그렇게 다투는 사이, 내가 무서워 도망치려던 송지아는 아빠의 휠체어에 부딪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결국 뜻하지 않게 유산했다.아빠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뒤, 내게 배강수를 떠나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다.[청아야, 아빠가 그때 잘못해서 네가 어릴 때부터 엄마를 잃게 만든 게 지금까지도 너무 후회가 된단다.][아빠가 너한테도 말했잖아. 무슨 일을 겪든 아빠가 다 책임져 주겠다고.][걔가 널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혔는데, 왜 이제야 떠나겠다는 거냐?]나는 잠시 침묵했다.“사람이 다 그렇잖아. 벽에 부딪혀 봐야 돌아설 줄 아는 거지.”“아빠는 엄마가 처음부터 죽고 싶어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 엄마도 마음이 완전히 죽어 버리고 나서야 그 길을 택한 거야.”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나와 아빠 모두 마음이 아팠다.그리고 엄마가 떠난 뒤, 아빠는 다시는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어 내게 보상하려고 했다고,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만 내게 주었다.가장 좋은 음식과 옷, 가장 좋은 학교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항상 좋은 걸 누렸다.배강수와의 결혼 역시 아빠가 여러 방면으로 꼼꼼하게 알아보고 따져 본 뒤에야 비로소 허락했다.아빠도 분명 밤마다 수없이 후회했을 테지만, 어떤 일은 후회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어떤 상처는 마음에 남고, 아무리 애써도 보상할 수 없는 게 확실했다.긴 비행 끝에 나는 마침내 일 년 내내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의사는 이곳이 아빠의 병과 내 병을 요양하기에 적합하다고 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눈부신 햇살에 눈을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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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배강수가 단번에 내 팔을 붙잡더니 나를 품에 끌어안으려고 했다.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끝에 겨우 배강수에게서 벗어났다.“배강수! 우리 이미 이혼했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러자 배강수는 이혼합의서를 꺼내 들더니 다시 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아직 공식적으로 절차가 끝나지 않았잖아. 그러니 이혼한 게 아니야.”미간을 찌푸린 채 배강수를 바라보는 내 얼굴에는 거부감이 역력했다.“그래 봤자 소용없어. 이제 3개월 안에 이혼 신고만 하면 끝이야. 네가 안 해도 돼. 내가 할 거니까.”“대체 왜 이러는 거야?”배강수가 한 걸음 다가와 다시 내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배강수의 손은 허공에 멈춰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내가 온 건 너한테 묻고 싶어서야. 그 전화 정말 네가 건 거야?”나는 가볍게 웃었다.“내가 건 전화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해?”“중요해!”배강수의 눈에는 초조함과 짜증이 가득했다.“난 반드시 알아야겠어!”나는 고개를 저었다.“내가 건 건 아니야.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송지아를 불태워 죽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왜?”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배강수를 바라봤다.“뭐가 왜야? 내가 송지아를 불태워 죽이길 바라는 거야?”배강수는 곧바로 눈길을 내리깔았다.눈동자에는 내가 보는 걸 원하지 않는 뭔가가 일렁이는 듯했다.“왜 거짓말을 했냐는 말이야.”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너희 둘을 위해서야.”배강수의 온몸이 크게 떨렸다.그것은 분명 배강수가 줄곧 바라던 일이었다.그런데 지금 내 입으로 직접 그 말을 하고 나니 가슴이 또다시 은근히 아파왔다.“원하는 대답은 이미 해줬어. 더 할 말이 없으면 나는 먼저 갈게.”“잠깐!”배강수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청아야.”목소리는 쉰 데다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떨림까지 섞여 있었다.“정말 조금도 미련이 없어? 우리가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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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집에 돌아오자, 아빠는 배강수가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아빠는 미간을 찌푸렸고 온화하던 눈에는 지금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그놈이 감히 너한테 손을 댔다고?”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과장할 일은 아니에요. 그냥 이혼합의서의 사인 때문에 찾아온 것뿐이에요. 게다가 경호원이 다 알아서 쫓아냈잖아요.”“됐어요, 됐어요. 화내지 마요!”배강수가 나타난 건 내게 그저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다시는 배강수가 나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아빠와 함께 아예 집도 다시 옮겼다.나는 여전히 햇살과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속에 드리웠던 어둠을 조금씩 걷어냈다.시간이 흐르면서 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점차 회복됐다.엄마 이야기를 다시 꺼내도 이제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아빠의 몸 상태도 점점 좋아졌다. 몇 차례 재검사를 받은 뒤에도 암세포는 더 이상 재발하지 않았다.그런데 아빠는 더는 회사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억지로 내게 자신의 모든 사업체를 넘겨받게 했다.처음에는 나도 겁이 조금 났지만, 아빠의 인내심 있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나 역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3년이 지나자 나는 더 이상 배강수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던 여자가 아니었다.뛰어난 사업 감각과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재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먼저 아빠가 해외에서 운영하던 사업 일부를 넘겨받아서 빈틈없이 관리했고, 그다음에는 직접 투자회사를 설립했다.남다른 투자 감각 덕분에 투자한 여러 프로젝트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불과 몇 년 만에 고청아라는 이름은 국제 재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아빠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랑스러워했다.“내 딸이에요! 내 뛰어난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거든요! 사업 감각 하나는 정말 타고났죠!”아빠는 나를 칭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내 의사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괜찮은 청년들을 한 명씩 소개해 주려고 했다.내가 지금은 오로지 사업에만 집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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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캘리포니아를 떠난 뒤, 배강수는 줄곧 10년 후에서 걸려 온 그 전화를 떠올렸고 한 번 더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다.그 전화가 진짜라면 10년 후의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대체 송지아가 고청아에게 불에 타 죽은 것이 후회할 만큼 괴로운 일인지, 아니면 고청아를 잃은 것이 자신을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든 것인지 말이다.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고청아가 사라진 집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빈 집은 차갑기만 했다.예전 고청아가 이곳에서 배강수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랬다.매일 아침이면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고, 늦은 밤까지 일하는 날이면 커피 한 잔을 타주었다.중요한 프로젝트를 따냈을 때는 함께 술을 마시며 축하했다.분명 이곳에는 두 사람의 추억이 가득했는데, 고청아가 곁에 있을 때는 늘 귀찮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이제 고청아가 사라지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또 텅 비어 버렸다.배강수는 미친 듯이 일하면서 바쁜 일로 자신을 마비시키려고 했다.하지만 바쁘게 지낼수록 고청아의 모습은 오히려 머릿속에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그래서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자주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텅 빈 방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청아의 이름을 불렀다.송지아는 처음에는 배강수가 특별히 자신을 위해 꾸며준 요양원의 방에서 계속 남자를 기다렸다.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배강수의 집으로 들어갔다.처음에는 고청아가 떠난 일 때문에 배강수가 송지아에게 화풀이하며 차갑게 대했다.하지만 술에 취하면 가끔 송지아를 고청아로 착각했다.송지아를 품에 안고 눈물을 쏟으며 후회하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여자는 속으로 이를 갈 정도로 분했지만, 어쨌든 배강수는 자신에게 인색하지 않았다.자신을 고청아로 착각할 때마다 또다시 미친 듯이 보상해 주었다.어느 순간, 송지아는 문득 예전의 고청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누군가에게 하찮은 취급을 받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몸소 느꼈으니까.하지만 배강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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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눈앞의 배강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재계에서 이름을 떨치며 거침없이 결단을 내리던 모습은 지금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지금의 배강수는 술이 이성을 집어삼켜 버린 술주정뱅이 같았다.나는 한 걸음 물러나면서 배강수와 거리를 벌렸다.“배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남아 줘, 응? 내 곁으로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정말 내가 잘못했어! 회사를 줄게. 뭐든 다 줄게. 그러니까 남아줘!”주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들은 모두 배강수가 나중에 새로 채용한 사람들이었기에, 내가 예전에 대표의 사모님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얼굴에 약간의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배 대표님, 비켜 주시죠. 지금 우리는 그저 협력 관계일 뿐이에요. 업무 이야기라면 몰라도 다른 이야기는 그만해 주세요.”“싫어! 안 비켜!”배강수는 고집스럽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청아야,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난 거야? 나를 때려도 되고 욕해도 돼. 뭐든 다 괜찮으니까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마!”바로 그때 송지아도 달려왔다.배강수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굴고 있는데 나는 차갑기만 한 모습을 보자, 송지아는 곧바로 질투심에 휩싸였다.앞으로 달려온 송지아는 배강수의 팔짱을 끼고, 도발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너무한 거 아니에요? 대표님은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하시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 계속 그러는 거예요?”“그때는 본인이 먼저 떠났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와서 대표님의 회사를 인수하겠다고요? 대체 무슨 속셈이에요?”나는 송지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다시 말할게요. 지금 나는 B그룹과 협력 관계일 뿐이에요. 두 사람의 집안일은 알아서 집에 가서 해결해요.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요.”그런데 배강수는 송지아를 보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하면서도, 동시에 원수라도 만난 듯했다.배강수는 송지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사납게 노려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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