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벤자민? 너 뭐라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벤자민이 자신을 배척하는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만 가족 행세를 해줬다고 해서 좋아 날뛰는 모습이 참 웃겨.”
“아아….”
믿기지 않는 현실에 네리나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침대 기둥에 등을 대었다. 그때 손등에서 할짝임이 느껴졌다. 네리나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눈앞의 벤자민을 노려보았다.
“벤자민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벤자민은 그럴 아이가 아니야.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쭉.”
네리나가 말하자마자 눈 앞이 유리조각이 깨지듯 챙강챙강 소리를 내며 조각나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일행들은 네리나를 둘러싼 모양 그대로 쓰러져 있었고 오직 조세르만이 그녀을 끌어안은 채로 앉아 있었다.
“조세르?”
“이녀석한테 고맙다고 인사해.”
옆을 보니 자신이 구해주었던 사슴이 있었다.
“정신계 환각은 남이 개입하기 쉽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더군.”
“고, 고마워 사슴아.”
네리나는 문득 자신이 왜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네리나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가 찬 바닥에 누워있는 걸 내가 두고 볼 수는 없잖아, 네리나?”
“왜, 왜 이렇게 잘해줘요?”
네리나가 그의 품에서 후다닥 빠져나오며 물었다. 조세르는 아무 말없이 씨익 웃고는 숲 한가운데를 턱짓했다.
숲이 점점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숲 속에서 웬 중년 남자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리르카는 안다네, 네리나는 무서워하고 있지.
리르카는 안다네. 사슴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하지.
리르카는 싫다네. 나머지는 모두 잠들어있지, 요호 우 위르케 위르카 오!
리르카는 알아본다네 네리나야 네리나여 네리나다. 요호 우 위르케 위르카 오!
리르카는 고민되네, 네리나가 된다면 나머지도 된다네.”
눈 앞에 턱수염을 기르고 빵모자를 쓴, 키가 네리나의 반 정도 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네리나가 기겁하며 조세르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숲의 주인이시군.”
“오, 조세르여, 한참을 기다렸다네, 요호 우 위르케-.”
“길다 길어. 그래서, 일행들을 깨워줬으면 하는데.”
“그건 네리나가 직접 해야 한다네.”
자기의 이름이 호명되자 네리나가 펄쩍 뛰었다.
“제가요? 제가 뭘 어떻게 해요?”
“직접 이들의 환영에 들어가 데리고 나와야 한다네. 이 사슴이 그랬듯이.”
“위험하다면서요?”
네리나가 벌벌 떨며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말했다. 리르카는 한바탕 껄껄 웃고는 말했다.
“리르카가 허락하면 괜찮다네, 요호 우 위르케 위르카 오!”
“그냥 리르카씨가 깨워주면 안 돼요?”
“오, 오래된 것들의 약속이여! 이것만은 스스로 깨고 일어나야 한다네.”
젠장
속으로 욕설을 삼킨 네리나는 먼저 긴의 손을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긴과 오르하는 어둠 속에 멍하니 서있을 뿐이어서, 쉽게 꿈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다음은 톰의 차례였다.
교황의 사생아인 톰, 어머니는 버려지고 아버지가 거두었지만,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닳도록 읽은 책의 등장인물 톰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이봐, 자네 이름이 뭔가?”
어느날 그가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이름을 물었다.
“예? 막스입니다요.”
“모두가 이름이 있구나.”
“그렇지요.”
모두가 이름이 있지만 자신만 이름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톰이라고 부르며 책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톰?”
“으헝어 엄마 흐엉.”
“톰!”
“네리나씨? 아니 어떻게 내 방으로….”
“정신 좀 빨리 차리죠? 시간이 얼마 없다구요!”
“허억.”
톰이 정신을 차리니 주변에는 이미 긴과 오르하가 멍하니 숲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조세르는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네리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휴, 이제 에녹만 남았다.”
생각보다 술술 풀리는 일에 네리나가 땀방울을 닦았다. 그때 조세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리나.”
“네?”
“에녹이 뭘 보여주든 동요하지마. 환영일 뿐이니까.”
“알, 겠어요.”
조세르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려댔다.
네리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에녹의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와글와글잼에 버터를 바른 토스트는 정말 맛이 있었다. 조세르는 네리나가 와구와구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얼굴을 흐렸다. 네리나는 도우미일족이라는 말이 조세르의 기분도 흐렸으리라는 짐작을 했다.“아스완 사절단이다!”“아스완에서 사람을 보냈어!”그떄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조세르처럼 흰 옷에 푸른 옥을 꿰어 만든 긴 목걸이를 한 사람들이 일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도 기쁨이 한가득했다.“조세르.”“…응, 네리나.”“아는 사람 있어요?”그 말에 조세르가 쿡쿡 웃고는 네리나를 쓰다듬었다.“아직. 나보다 더 조상인 것 같아.”그때 행렬 한 가운데 있는 남자가 그들에게 알은체를 했다.“아스완 분이시군요! 곁에는… 도우미 일족인가요?”“맞습니다. 저희는 부부입니다.”조세르가 젠체를 하며 말했다. 남자는 그 말에도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라, 네리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결혼식은 올리셨나요?”“아뇨, 사정이 있어서.”조세르는 모든 질문에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같았다. 네리나가 기가 차서 입을 다문 사이, 어느새 그들은 아스완 출신이지만 양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지 못해 엘실실라로 사랑의 도피를 와서 둘만의 식을 치르고 부부가 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아마 배반당한 용이 아니라면, 모두 떠날 것입니다. 물의 신께서 선포하신 바, 이 곳은 인간의 땅입니다.”신관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용은 인간에게 큰 위협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세르, 저 여자.”“쉿, 나도 듣고 있어.”네리나의 옆에 선 여자는 신관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저어….”“안돼, 네리나!”그녀가 여자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것과 동시에 조세르가 그녀를 막았다.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본 여자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왜 자꾸 뒤를 밟는 것이냐.”조세르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이쪽의 소중한 것을 그쪽이 데리고 있다.”순간 여자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변하더니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조세르가 재빨리 뒤를 돌아 네리나를 보호했다. 용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용이 한참을 포효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조세르와의 대화에서 네리나는 직감했다. 이 자가 벤자민을 납치한 그 용이라는 것을.“지금이라도 날아가요! 동족들을 따라가요!”“네리나, 과거의 존재에 말을 붙이는 건 조심해야 해!”
“내가 바닥에서 잘게요. 조세르는 침대에서 자요.”“…왜 그래야 하지?”“네?”네리나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조세르가 쓴 과일을 먹은 것 같은 얼굴로 친절히 말했다.“왜 우리가 따로 자야 하지, 여보?”“네에?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안그래도 되잖아요!”“난 한시도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당신도 그렇지?”조세르가 능글맞게 말했다. 네리나는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덥썩 좋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조세르가 다홍빛 눈동자를 살풋 접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침대로 이끌어 눕히자 네리나는 못이기는 척 그를 힐끔 바라보며 자리에 누웠다.그는 네리나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자신은 이불 위에 누웠다. 네리나는 내심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조세르.”“음?”“언제쯤이면 다 말해줄거예요? 약속이니, 아까 도우미 일족이니 하는 것이요.”“네리나, 그대의 영혼이 지식을 감당할 무게가 된다면.”네리나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언제냐구요.”조세르가 그녀의 양 입술을 엄지과 검지로 콱 집고 흔들었다.“그떄가 되면 내가 먼저 말하지, 나의 네리나. 그러니 이제 자 주겠어
한편 네리나와 조세르는 갑자기 북적이는 사람들에 놀란 눈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가만히 서있는 그들이 수상한지, 노부부가 다가와 그들에게 말을 붙였다.“둘은 무슨 사이인가? 여기 어쩐 일이지?”조세르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부부일세.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러 왔지.”노부부는 놀란 얼굴로 네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도우미일족과 사랑이라도 한다는 건가? 특이한 청년이군.”“….”조세르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네리나는 자신을 ‘도우미일족’이라고 칭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무슨 의미인지 추궁하려 할 때였다. 종소리가 뎅뎅 울리더니, 신관이 나타나 소리쳤다.“신전을 닫을 시간입니다. 모두 기도를 마무리하고 나가주시길 바랍니다.”“조세르, 이제 어떡해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아무래도, 네리나. 우리는 시간을 되돌아온 모양이구나.”태연하게 말하는 조세르조차도 얼굴은 초조해보였다. 그가 네리나의 어깨를 꽉 감싼 채로 신전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조세르와 네리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심쩍은 얼굴을 했다.“조세르. 도우미일족이 뭐예요?”“아직, 네리나. 아직 네가 준비가 되지 않았어.”“무슨 준
다음날, 일행은 정비를 마치고 엘프 왕국을 떠났다.“가지마, 인간.”“가지마, 네리나.”엘프 쌍둥이들이 눈물콧물을 흘리며 그들을 붙잡았다. 엘프 왕은 허허 웃으며 쌍둥이를 한 손으로 잡아채 양쪽으로 안아 들었다.“살아 돌아오시게.”왕의 배웅을 맞으며 일행은 남쪽으로 향했다. 엘프들은 남쪽은 위험하다고 신신당부를 한 후에야 그들을 보내주었다. 쌍둥이들은 울다 지쳤는지 왕좌에 드러누워 쌕쌕 잠이 들어 있었다. 엘프 왕국에서 식량을 두둑하게 챙겨준 덕에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1. 엘실실라의 사원일행은 너른 평야를 끊임없이 걸었다.“그나저나 분위기가 이상한데. 긴, 오르하. 너희 네리나와 동행했을 때 별 일 없었나?”조세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에녹이 조세르의 옆에 와 섰다.“아, 아무일도!”네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긴과 오르하는 그런 네리나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수상한데… 네리나가 톰이랑 에녹 근처에만 가잖아?”“그게 수상합니까?”톰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녹은 여전히 조세르의 옆에 서 있었다.네리나의 얼굴이 붉어지자 조세르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았다.네리나의 얼굴이 터지기 직전까지 가자 조세르는 그녀의 구불구불한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네리나, 나의 네리나. 그대가 나를 첫번쨰로 선택해줬으면 좋겠어.”조세르가 속삭였다. 네리나는 조세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질을 했다.“저기 봐요, 엘실실라의 사원같습니다.”톰이 말했다. 거대한 평야의 한쪽에 반쯤 무너진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조세르가 추억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엘실실라라…. 한 번도 짐을 이겨본 적 없는 나라였지.”“와, 한 번 들어가봐요.”네리나가 설레는 목소리로 말하자 일행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에녹이 네리나에게 물었다.“유적 좋아해?”긴이 눈을 크게 뜨고 에녹에게 말했다.“뭐야, 두 글자 이상으로 말할 수 있는 거였어?”“닥쳐.”“이봐, 에녹. 나한테도 길게 말해달라
“말투는 이렇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야.”“그걸 왜 여기서 말하는데요!”“여기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긴의 다정한 다갈색 눈동자는 오롯이 네리나를 담고 있었다. 네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뒤돌았다.긴이 그녀의 등에 머리를 기대었다.“이정도는 괜찮아?”“뭐가요. 안괜찮아요.”그가 머리를 기댄 채로 말하자 네리나의 가슴까지 그의 목소리가 닿는 듯 했다. 긴이 곧바로 머리를 떼어내며 소리내어 웃었다.“기억하라고, 아가씨. 오늘은 긴이 고백한 날이야. 적어도 내일까지는 내 생각으로 가득하겠지.”네리나는 갑작스러운 긴의 고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긴의 고백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긴은 굳이 네리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용의 비늘! 벌써 찾았군요!”톰이 눈에 띄게 네리나와 긴을 반겼다. 그가 덥썩 용의 비늘을 잡으려 했다.“워워, 내 생명과 맞바꿔서 가져온거라고. 통구이 되기 싫으면 물러서.”긴이 그리 말하며 용의 비늘을 조세르에게 넘겨주었다.“나는 만질 수조차 없더군요.”“필히 그럴 것이니.”조세르가 우아하게 대답하며 비늘을 받아들었다. 그가 검지손가락으로 비늘을 톡 건드렸다.
“절대 아냐 아가씨. 그 부분만큼은 안심해도 돼.”“네리나, 나에게도 관심을 좀 가져 주겠어?”조세르가 툭 끼어들었다. 그는 네리나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는 참이었다.“맞다, 조세르 궁금한 게 있어요.”“뭐지, 내 사랑?”네리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크게 움찔했다. 조세르는 그저 킬킬대며 웃을 뿐이었다
네리나의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조세르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검지로 튕겼다. 네리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숨겼다.오염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보온에 도움이 되는 로브는 모든 일행이 구입했다.“이런, 이 몸에게 필요없는 것을.”조세르가 투덜거렸지만, 네리나가 로브를 보며 기쁘고 신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자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네리나, 발 조심.”에녹이 구덩이에 빠질뻔한 네리나를 뒤에서 잡아챘다.“앗, 고마워요 에녹.”“천만에.”긴과 오르하가 쑥덕였다.“’천만에’라고 한거야 지금? 저 양반이 말을 받아줬다고?”“네리나양은 특별하니까요, 긴.&rdqu
고대 왕국의 터보다 더 서쪽에 있는 곳, 금지된 숲을 지나지 못하는 인간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에 두번째 엘프들의 왕국이 있었다.“가는 길에 시장이 있어요. 거기서 필요한 물건을 좀 보충할 수 있을 거예요.”“엘프들의 시장은 어떤 모습인가요 오르하?”“주로 하프엘프들이 물건을 파는 편이죠.”“하프엘프가 있어요? 인간이랑 교류는 거의 없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