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재를 나온 네리나가 터벅터벅 방을 향해 가자 어디선가 나타난 케인과 샤인이 그녀의 뒷통수를 한 대씩 때리고는 키득대며 사라졌다. 이사벨라는 조각상 뒤에 숨어 있다가 발을 걸어 넘어지게 했다.
‘이게 일상이었지, 참.’
벤자민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들 모두는 태연해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네리나가 홀로 생각에 빠졌다.
‘나 혼자 구하러 갈 수는 없어. 어디인지도 모르고.’
문득 눈에 동화책 한 권이 들어왔다. 에스텔라가 네리나의 수준에 맞는 책을 줄 테니 서재에 얼씬도 말라며 두고 간 어린이용 동화책이었다.
“용사 바숨과 7인의 기사들…. 맞아, 난 동료가 필요해!”
네리나는 자신을 담당하는 하녀에게 사정사정하여 큰 종이 몇 장을 구해왔다.
‘원정대 모집’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더라.”
“형을 구하러 가려고?”
“엄마야!”
케인이었다. 그녀의 방에, 그것도 밤에,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네리나가 화를 내려 할 때였다.
“원정대를 모집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그쪽은 빈털터리나 마찬가지고.”
“나, 나도 알아.”
“드래곤을 죽일 거야?”
불쑥 들어온 물음은 제법 진지했다. 네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벤자민만 데리고 튈거야.”
“그러면 드래곤 레어의 보물들을 보상으로 내걸 수는 없겠군.”
“무슨 상관이야!”
“내가 상관이 없는 사람 같아?”
“그러면 네가 직접 가지 그래?”
“…형님이 없으면 내가 후계자야. 나는 후계자로서 가문을 지켜야 해.”
케인이 우물쭈물 말했다.
‘겁쟁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네리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세계 제일의 미인을 구하러 가는 것 자체를 명예로 여기는 머저리들을 데리고 갈 수밖에.”
“아이디어 고맙다, 케인. 그러면 이제 좀 꺼져줄….”
“내 이름 부르지마, 썩을.”
“꺼져.”
“응 그러려고.”
케인이 혀를 낼름 내밀고는 쿵쾅거리며 그녀의 방을 나갔다. 네리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다음날 새벽, 드완령 곳곳에 벽보가 붙었다.
[원정대 모집. 드래곤에게 납치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 벤자민을 되찾을 예정. 보수 미지급. 벤자민을 구해왔다는 명예만 남을 예정. 사흘 후 금지된 숲의 경계에서 11시 출발]
밤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보이는 게시판마다 벽보를 붙인 네리나가 탈진하다시피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아, 그냥 개구멍으로 들어올걸.’
아버지의 불호령에도, 피곤에 절어있는 네리나는 무서움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폐하께서도 덮으라 하신 일이다. 인간의 왕들이 모두 협의한 일이다. 그런데 이딴 벽보를 붙이고 다닌 게 너란 말이냐!”
네리나는 새카매진 눈 밑을 하고는 자신의 하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손톱을 뜯고 있었다.
“언제 협의했대요? 빠르기도 하지.”
네리나가 건방진 어조로 뱉은 말에 샤인이 주먹을 들어올리며 씩씩거렸다. 케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네리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네리나, 생각보다 용은 무서운 존재다. 드래곤이 강림했는데 벤자민 한 사람만 잃었어. 그렇게 인간 세상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야 우리 가문의 영광된 일이야.”
드완경은 노선을 바꾸어 다정하게 네리나를 어르기 시작했다.
“저는 벤자민을 구하러 가고 싶어요.”
“네리나.”
“누군가는 벤자민을 찾으려고 했다고, 그 애가 알게 하고 싶어요.”
“….”
드완 경은 잠시 아무말 없이 네리나를 노려보고는 말했다.
“지하에 가두거라.”
네리나는 정신없이 마사지를 받았다. 어찌나 힘이 억센지, 온 몸의 붓기란 붓기는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남편이 많이 잘해주나 봐요?”아리가 네리나에게 물었다. 네리나는 평소의 조세르를 떠올리며 대답했다.“맞아요. 좀 짓궂은 면이 있긴 하지만요.”아티가 네리나의 두피를 마사지하며 그녀를 연신 힐끔거렸다. 네리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저는 도우미 일족이잖아요?”“그렇죠, 아가씨.”“여기 엘실실라 사람들은 저랑 조세르가 부부라고 하니까 너무 놀라던걸요.”“엘실실라는 특히 폐쇄적인데다 우리 문화를 잘 모르니까요.”“일단 이틀은 절대 신랑을 만나면 안 돼요. 부정탄답니다.”네리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조세르가 부부행세를 하는 것이, 조세르의 고향인 아스완 왕국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네리나는 어느 가문을 돕고 있나요?”“네? 그게, 저….”“아리!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야.”다행이 끼어든 아티 덕분에 네리나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참 네리나의 몸 구석구석을 제모하고 닦고 마사지하던 이들은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네? 이틀동안 신랑을 볼 수 없다구요?”“맞아요. 이미 두 분만의 식
와글와글잼에 버터를 바른 토스트는 정말 맛이 있었다. 조세르는 네리나가 와구와구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얼굴을 흐렸다. 네리나는 도우미일족이라는 말이 조세르의 기분도 흐렸으리라는 짐작을 했다.“아스완 사절단이다!”“아스완에서 사람을 보냈어!”그떄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조세르처럼 흰 옷에 푸른 옥을 꿰어 만든 긴 목걸이를 한 사람들이 일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도 기쁨이 한가득했다.“조세르.”“…응, 네리나.”“아는 사람 있어요?”그 말에 조세르가 쿡쿡 웃고는 네리나를 쓰다듬었다.“아직. 나보다 더 조상인 것 같아.”그때 행렬 한 가운데 있는 남자가 그들에게 알은체를 했다.“아스완 분이시군요! 곁에는… 도우미 일족인가요?”“맞습니다. 저희는 부부입니다.”조세르가 젠체를 하며 말했다. 남자는 그 말에도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라, 네리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결혼식은 올리셨나요?”“아뇨, 사정이 있어서.”조세르는 모든 질문에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같았다. 네리나가 기가 차서 입을 다문 사이, 어느새 그들은 아스완 출신이지만 양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지 못해 엘실실라로 사랑의 도피를 와서 둘만의 식을 치르고 부부가 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아마 배반당한 용이 아니라면, 모두 떠날 것입니다. 물의 신께서 선포하신 바, 이 곳은 인간의 땅입니다.”신관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용은 인간에게 큰 위협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세르, 저 여자.”“쉿, 나도 듣고 있어.”네리나의 옆에 선 여자는 신관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저어….”“안돼, 네리나!”그녀가 여자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것과 동시에 조세르가 그녀를 막았다.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본 여자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왜 자꾸 뒤를 밟는 것이냐.”조세르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이쪽의 소중한 것을 그쪽이 데리고 있다.”순간 여자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변하더니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조세르가 재빨리 뒤를 돌아 네리나를 보호했다. 용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용이 한참을 포효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조세르와의 대화에서 네리나는 직감했다. 이 자가 벤자민을 납치한 그 용이라는 것을.“지금이라도 날아가요! 동족들을 따라가요!”“네리나, 과거의 존재에 말을 붙이는 건 조심해야 해!”
“내가 바닥에서 잘게요. 조세르는 침대에서 자요.”“…왜 그래야 하지?”“네?”네리나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조세르가 쓴 과일을 먹은 것 같은 얼굴로 친절히 말했다.“왜 우리가 따로 자야 하지, 여보?”“네에?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안그래도 되잖아요!”“난 한시도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당신도 그렇지?”조세르가 능글맞게 말했다. 네리나는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덥썩 좋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조세르가 다홍빛 눈동자를 살풋 접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침대로 이끌어 눕히자 네리나는 못이기는 척 그를 힐끔 바라보며 자리에 누웠다.그는 네리나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자신은 이불 위에 누웠다. 네리나는 내심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조세르.”“음?”“언제쯤이면 다 말해줄거예요? 약속이니, 아까 도우미 일족이니 하는 것이요.”“네리나, 그대의 영혼이 지식을 감당할 무게가 된다면.”네리나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언제냐구요.”조세르가 그녀의 양 입술을 엄지과 검지로 콱 집고 흔들었다.“그떄가 되면 내가 먼저 말하지, 나의 네리나. 그러니 이제 자 주겠어
한편 네리나와 조세르는 갑자기 북적이는 사람들에 놀란 눈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가만히 서있는 그들이 수상한지, 노부부가 다가와 그들에게 말을 붙였다.“둘은 무슨 사이인가? 여기 어쩐 일이지?”조세르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부부일세.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러 왔지.”노부부는 놀란 얼굴로 네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도우미일족과 사랑이라도 한다는 건가? 특이한 청년이군.”“….”조세르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네리나는 자신을 ‘도우미일족’이라고 칭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무슨 의미인지 추궁하려 할 때였다. 종소리가 뎅뎅 울리더니, 신관이 나타나 소리쳤다.“신전을 닫을 시간입니다. 모두 기도를 마무리하고 나가주시길 바랍니다.”“조세르, 이제 어떡해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아무래도, 네리나. 우리는 시간을 되돌아온 모양이구나.”태연하게 말하는 조세르조차도 얼굴은 초조해보였다. 그가 네리나의 어깨를 꽉 감싼 채로 신전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조세르와 네리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심쩍은 얼굴을 했다.“조세르. 도우미일족이 뭐예요?”“아직, 네리나. 아직 네가 준비가 되지 않았어.”“무슨 준
다음날, 일행은 정비를 마치고 엘프 왕국을 떠났다.“가지마, 인간.”“가지마, 네리나.”엘프 쌍둥이들이 눈물콧물을 흘리며 그들을 붙잡았다. 엘프 왕은 허허 웃으며 쌍둥이를 한 손으로 잡아채 양쪽으로 안아 들었다.“살아 돌아오시게.”왕의 배웅을 맞으며 일행은 남쪽으로 향했다. 엘프들은 남쪽은 위험하다고 신신당부를 한 후에야 그들을 보내주었다. 쌍둥이들은 울다 지쳤는지 왕좌에 드러누워 쌕쌕 잠이 들어 있었다. 엘프 왕국에서 식량을 두둑하게 챙겨준 덕에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1. 엘실실라의 사원일행은 너른 평야를 끊임없이 걸었다.“그나저나 분위기가 이상한데. 긴, 오르하. 너희 네리나와 동행했을 때 별 일 없었나?”조세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에녹이 조세르의 옆에 와 섰다.“아, 아무일도!”네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긴과 오르하는 그런 네리나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수상한데… 네리나가 톰이랑 에녹 근처에만 가잖아?”“그게 수상합니까?”톰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녹은 여전히 조세르의 옆에 서 있었다.네리나의 얼굴이 붉어지자 조세르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았다.네리나의 얼굴이 터지기 직전까지 가자 조세르는 그녀의 구불구불한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네리나, 나의 네리나. 그대가 나를 첫번쨰로 선택해줬으면 좋겠어.”조세르가 속삭였다. 네리나는 조세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질을 했다.“저기 봐요, 엘실실라의 사원같습니다.”톰이 말했다. 거대한 평야의 한쪽에 반쯤 무너진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조세르가 추억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엘실실라라…. 한 번도 짐을 이겨본 적 없는 나라였지.”“와, 한 번 들어가봐요.”네리나가 설레는 목소리로 말하자 일행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에녹이 네리나에게 물었다.“유적 좋아해?”긴이 눈을 크게 뜨고 에녹에게 말했다.“뭐야, 두 글자 이상으로 말할 수 있는 거였어?”“닥쳐.”“이봐, 에녹. 나한테도 길게 말해달라
고대 왕국의 터보다 더 서쪽에 있는 곳, 금지된 숲을 지나지 못하는 인간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에 두번째 엘프들의 왕국이 있었다.“가는 길에 시장이 있어요. 거기서 필요한 물건을 좀 보충할 수 있을 거예요.”“엘프들의 시장은 어떤 모습인가요 오르하?”“주로 하프엘프들이 물건을 파는 편이죠.”“하프엘프가 있어요? 인간이랑 교류는 거의 없지 않아요?”
“그 곳을 다시 들어가야한다면, 기꺼이.”“그나저나 오르하, 예쁜 얼굴이 널린 건 엘프 왕국일텐데 왜 인간 세계에서 지랄이야?”“긴, 정말 내가 긴 말을 하게 만드네요. 거기는 나같이 생긴 엘프들밖에 없다구요.”“아씨, 재수없어. 너도 니 얼굴이 예쁜 건 아나보지?”“정확히는 아름다운 거죠.”긴과 오르하가 투닥거렸다. 에녹은
“조세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요?”네리나가 투덜대자 조세르가 낄낄대며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할 수 있어 네리나. 방금 잘 안된 이유는… 비늘이 뭘 보여줄지 모르는 상태였기 떄문이겠지.”“맞아요. 이 비늘이 뭘 보여준다는 거예요?”조세르가 일행을 엄숙하게 둘러보고는 말했다.“비늘에 담긴 기억.”“이 비늘이 떨어질 당시의 기억을 보여준다는 겁니까?”오르하가 묻자 조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 네리나, 다시 한번 해볼래?”“왜 조세르가 안하고 나한테 해보라는 거예요? 이런 마법 같은 일은… 조세르한테
네리나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오르하가 나서며 말했다.“무슨 이유로 오크와 트롤이 인간의 터에 자리를 잡은 거냐?”“무리에서 쫓겨났다. 엘프. 토흐와는 우연히 만났어. 토흐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 동족들을 피해 북쪽으로 가던 중이었어.”“이 터에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을텐데.”“이게 있으면 괜찮았어.”오크가 꺼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