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드래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을 납치해갔다.’
저택으로 돌아온 기사단장이, 병사들이 본 것을 그대로 읊었다. 드래곤이 나타나 모두가 엎드려 벌벌 떨고 있을 때, 벤자민이 홀로 일어섰고, 그 뒤에는 드래곤의 발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쓸모없는 녀석들.”
드완경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애써 침착하게 서 있던 드완 부인은 기사단장이 보고를 마치고 나가자마자 쓰러졌다.
“마님!!”
근처의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부축했지만, 드완경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벤자민이 납치되었다.’
케인, 샤인 쌍둥이와 이사벨라, 에스텔라 쌍둥이는 벤자민의 방에 모여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네리나는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 가족을 잃었다.’
그 사실이 네리나의 슬픔을 더했다. 시녀들은 쌍둥이들을 위로하며, 드래곤이니 어쩔 수 없다는 둥,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둥, 이미 벤자민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다.
네리나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구하러 가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벤자민을 구하러 가자고!”
쌍둥이들이 벌개진 눈을 들어 네리나를 쳐다보았다. 케인이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천 년 만의 드래곤이야. 드래곤에게 잡혀간 사람을 무슨 수로 구해?”
샤인이 덧붙였다.
“구하러 가는 사안의 현실성은 차치하고, 형을 구해왔을 때 드래곤의 분노는 누가 감당할건데?”
‘겁쟁이들.’
네리나가 혀를 즈려물며 생각했다. 벌써 그런 계산까지 마친 것이 퍽 귀족가의 도련님다웠다.
“네가 구하러 갈 수 있어?”
“무슨 수로?”
“무슨 재주로?”
이사벨라와 에스텔라가 번갈아가며 말했다. 네리나가 주먹을 꾹 말아쥐고는 뒤돌아 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 지!”
서재에 도착한 네리나가 처음 내뱉은 단어에 그녀 자신도 놀라고 드완경도 놀랐다. 그의 곁에는 드완 부인도 함께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는 네리나를 드완경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는 것이 그 다웠다.
“제가 구하러 갈게요. 제가, 벤자민을 구해 올게요.”
“호오.”
드완경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완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구해 보려무나. 어디 한 번 해 봐.”
“!”
네리나가 고개를 힘껏 들어 드완 경의 눈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비웃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감정이 드완 경의 눈에 들어 있었다.
“드래곤의 레어가 어디 있는지는 아느냐? 이미 사라진 지 천 년이 지난 드래곤들이다. 안다 한들, 갈 수는 있느냐? 이 금지된 숲조차 지나갈 수 없는 우리가 말이다. 간다 한들, 드래곤을 어찌 상대할 것이냐? 신이 손으로 직접 빚은 피조물이다. 상대한다 한들, 어찌 돌아올 것이냐? 드래곤의 분노를 온 세상의 인간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것인데!”
눈에 띄는 경멸의 어조에 네리나가 부들부들 떨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벤자민을 구하고 싶을 뿐,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벤자민은 포기하거라. 벤자민 하나로 드래곤을 다시 잠재울 수 있다면, 우리 가문의 영광일 것이야.”
무서웠다. 아버지의 핀잔이 무서웠고 벤자민이 없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곧 그녀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자, 드완 경은 혀를 한 번 쯧, 차고는 그대로 서재를 나가버렸다.
“….”
웬일인지 드완 부인은 남편을 따라 나가지 않고, 네리나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서재에 남아 있었다.
네리나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오르하가 나서며 말했다.“무슨 이유로 오크와 트롤이 인간의 터에 자리를 잡은 거냐?”“무리에서 쫓겨났다. 엘프. 토흐와는 우연히 만났어. 토흐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 동족들을 피해 북쪽으로 가던 중이었어.”“이 터에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을텐데.”“이게 있으면 괜찮았어.”오크가 꺼낸 것은 용의 비늘이었다.“어디에 있었던 거지?”오르하가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여기에 처음부터 있었어. 자르하가 주웠다.”오크는 주눅들어 보였다. 네리나는 오크의 흉측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엾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친구가 죽은 곳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자르하는 떠나겠다.”오크는 용의 비늘도 오르하에게 떨떠름하게 주고는 휘청이며 숲속으로 사라졌다.“숲으로 가도 괜찮을까요?”네리나가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은 조세르뿐이었다.“리르카가 한 번은 도와줄 거야. 나무나 생명들을 해치지만 않는다면.”“오크의 왕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오르하도 조세르에게 물었다. 긴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어쩌면 용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네리나는 덜덜 떨며 에녹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하지만 긴이나 톰도 나랑 마찬가지잖아.’네리나는 자신이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고민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 트롤의 시선을 끌 수는 있을 것 같았다.일행들은 트롤과 싸우고 있었다. 달달 떨고 있는 톰을 향해 트롤이 달려가자, 뒷편에서 오르하가 화살로 목덜미를 맞추었다.에녹은 긴 검을 휘둘러 트롤의 인대를 끊으려 했다. 조세르는 허공에 떠서 목걸이로 트롤 어깨에 앉은 오크를 후려쳤다. 오크가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자 트롤이 자리에 멈춰섰다.네리나가 나서 트롤의 시선을 끌었다.“여기야, 여기!”트롤이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깨에 타라는 신호인 것 같았다.“어?”네리나가 트롤처럼 멍청한 얼굴로 외마디를 내뱉었다. 트롤은 지금, 자신에게 명백히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네리나!!”조세르가 허공에서 소리쳤다. 오크는 피를 흘리다가 기절한 것 같았다. 바닥에 내려선 조세르가 그녀를 껴안았다.“위험한데 왜 이리로 왔어!”“나도, 나도 도와주려고.”“알아, 바보야.”
네리나가 문득 톰의 환영을 떠올리고는 물었다.“톰이라는 이름은 마음에 들어요?”“하하. 그 이름이 흔하다는 건 나도 이제 알아요. 하지만 내가 나에게 준 첫번째 이름이라서 그런지 애틋하네요….”“아….”“환영에서 본거죠?”네리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의 속 깊은 마음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그러면 내가 진짜 멋진 두번째 이름을 줄게요.”“정말? 네리나씨가요?”문득 은빛 머리에 자색 눈동자를 한 톰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 한 구석에는 애수가 묻어 있어, 괜히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자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네리나는 한참을 끙끙대며 고민한 끝에 이야기했다.“아우구스투스! 어떄요?”톰이 네리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예쁘게 웃으며 네리나에게 물었다.“네리나씨 이름의 뜻은 뭔가요?”“아 그게,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인데 뜻은 몰라요.”“아우구스투스라… 정말 멋있는 이름이네요.”속눈썹을 내리깐 톰이 네리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갖다댄 상태에서 그대로 속눈썹을 들어 네리나를 보았다.쿵네리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순간 조세르가 그녀의 앞으로 와 톰을 밀치고는 그녀를 안아들었다.“조세르! 뭐예요! 왜 마음대로 안아요!”네리나가 조세르의 가슴을 콩콩 내리쳤다. 조세르는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네 마음이 나를 거부하지 않길래.”조세르의 품은 뜨끈뜨끈했다. 조세르는 그녀를 한참이나 내려놓지 않았다. 씩씩대던 네리나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다음날, 소란스러운 소리에 네리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조세르와 나란히 누운 채, 그의 품에 한껏 파고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 옷매무새를 정리하는데, 조세르가 윙크를 하며 말을 걸었다.“푹 잤어, 자기? 난 자기가 자꾸 파고들어서 여러모로 힘들었지 뭐야.”“시, 실례했어요.”네리나가 최대한 앙칼지게 말했는데도 조세르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네리나는 괜히 얄미운 기분이 들었다.“넌 추운 걸 싫어하니까. 그럴 수밖
오르하가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네리나가 입을 떡 벌렸다.“안들려요?”“적어도 내 귀에는 아무것도 안들리는….”톰마저 한 마디를 보탰다. 네리나가 희게 질리자 조세르가 입을 열었다.“나의 백성들이 묻혀있는 무덤이다. 우리는 영생을 산다고 알려져 있지. 이들은 끝까지 버텼고, 영생을 누리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거야.”“그러면, 그러면 왜 내 손이 닿자마자 빛으로 변해서 없어진 거예요?”“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군. 확실한 건 네 손길이 그들에게는 안식이라는 거야 네리나.”조세르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또다시 너는 구원이구나, 네리나.”“아가씨가 마법의 손을 가지고 있든 말든, 여기 한가운데에서는 식수를 구할 수도 없으니 이동하는 게 어떻겠소, 조세르씨?”“긴… 왜 조세르한테 물어봐요? 대장은 나라구요.”“아, 일 번 대장이 끙끙 앓아눕고 있으니 이 번 대장한테 물어볼 수밖에.”“세상에. 난 멀쩡해요!”“그러면 옷부터 챙겨입어 아가씨. 여벌 옷은 있지?”“…치. 긴은 너무해.”“긴은 현실적인 거랍니다.”네리나가 투덜거리며 담요 속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새 옷은 뽀송해서 네리나의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었다.“긴은 빚쟁이잖아요. 왜 돈도 안드는 이런 여행에 따라온 거예요?”“빚쟁이라니… 받을 빚이 있는 거랑 빚쟁이는 현저히 다른….”“아, 어쨌든요!”“빚쟁이는 빚을 받기 위해서는 지구 끝까지 쫓아간답니다.”긴이 그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렸다. 네리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벤자민이 언제 저렇게 젊은 긴에게 돈을 빌렸단 말인가? 가문의 장남이라 돈이 모자라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었다.“그러면 얼른 강을 건너요. 어차피 강을 다 건너려면… 족히 두시간은 걸릴 것 같아요.”“아가씨 분부대로.”일행이 다시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망자들이 다리 난간 위로 손을 뻗어왔다. 조세르가 했던 말을 떠올리니, 네리나는 괜히 안
오르하가 엘프의 말로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말했다.“제1시대 마지막 전쟁이야.”“그렇게 부르나보군, 제1시대라고.”오르하의 말에 조세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망자들 중 유독 많은 이들이 다홍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에녹을 비롯한 일행이 조세르를 힐끔 쳐다보았다.강의 한 가운데 돌과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마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가도 좋을 만큼 넓은 다리였다. 조세르를 필두로 다리를 건너는데,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어?”네리나가 귀를 기울였다.“왜 그래, 아가씨?”“무, 무슨 일 있어요?”긴과 톰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톰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지 어느새 에녹의 곁에 바짝 붙은 채였다.“쯧.”에녹은 혀만 한 번 찰 뿐, 톰을 내치지는 않았다.계속되는 노랫소리에 네리나가 힐끔 뒤돌아보다, 물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노래하는 시신과 눈이 마주쳤다.다홍빛 눈동자를 한 시신이 씨익 웃었다. 흰 옷에 파란 목걸이를 한 시신이었다.네리나가 풍덩, 강에 빠져들었다.네리나가 정신을 차린 건 강에 빠져든 직후였다.‘내가 왜 뛰어들었지?’그렇게 생각하며 허우적대자 주변의 시신들이 자꾸만 손에 걸렸다
에녹의 환영 속에는 네리나 자신이 울고 있었다. 에녹이 네리나의 환영에게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점점 멀어졌다. 에녹이 손을 툭 떨구고는 고개를 숙였다.“에녹!”에녹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 앞에 네리나가 서 있었다.“에녹, 정신차려봐요!”에녹이 환하게 웃었다. 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눈꼬리 쪽을 훑고는 만족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이게 무슨 상황이지?”“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요.”네리나가 불퉁하게 말했다. 왜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시늉을 했는지, 겁에 질린 자신을 골리는 것만 같았다.“어쩄든, 여기는 현실이 아니라 환영이에요. 자, 일어납시다.”“환영? 아아… 그렇군.”주변이 챙강챙강 소리를 내며 깨지기 시작했다. 네리나는 속으로 왜 자신이 에녹의 환영 속에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자자, 일행이 다 모였구만, 요호-.”“우 위르케 위르카 오! 됐죠? 으휴 저 영감 계속 저 말을 덧붙이고 있어.”“말이 아니라 노래라네, 젊은 긴이여.”“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영감.”“리르카를 화나게 하지 말게. 리르카는 화가 나면 무서워진다네.”“요호 우 위르케 위르카 오!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