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뚜- 뚜- 뚜-.통신이 끊어진 위성 전화기 너머의 공허하고 소름 끼치는 기계음이 시은의 귓가에서 이명처럼 맴돌며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힘이 풀린 손에서 미끄러진 위성 전화기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소리조차, 아득하게 멀어진 채 들리지 않았다."마, 마마! 정신 차리시옵소서! 마마!!"사색이 된 한비서가 주저앉은 시은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흔들었지만, 시은의 텅 빈 동공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부유할 뿐이었다.'아버님..'14년 전, 고작 13살의 어린 딸을 늑대와 짐승들의 소굴 같은 황궁으로 시집보내며, 홀로 돌아서서 피눈물을 삼키던 아버지,무능하고 탐욕스러운 황제 유종석의 끝없는 핍박 속에서도, '민석그룹'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성벽을 피땀으로 쌓아 올려 기어이 딸의 가장 완벽하고 튼튼한 방패가 되어주었던,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따뜻했던 산,그 아버지가...무려 14년 동안 수족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믿고 의지했던 비서실장의 칼에 등 뒤를 찔려 피를 토하고,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 속에 묻혔다."아... 아아...아버님 아버님 !"
가장 치열하고 피비린내 났던 전장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역설적이게도 대한제국 황궁의 오후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눈부시게 평화로워 보였다.맑게 갠 하늘 아래로 따스한 가을 햇살이 황궁의 황금빛 기와 위로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대대적인 120명 고위직 숙청 작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썩은 권력의 잔재들은 차가운 법의 심판대와 백사 부대의 총구 앞에서 완벽하게 고개를 숙였다.황후 민시은은 내의전 특별 병동, 자경전(慈慶殿)에 누워있는 대비마마의 병문안을 마치고 긴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14년 동안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거대한 족쇄가 마침내 풀린 듯,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가벼워 보였다."마마"그녀의 반보 뒤를 조용히 따르던 한비서가 걸음을 멈추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그의 양손에는 최고급 은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밀랍으로 단단히 밀봉된 고급스러운 편지 한 통이 고이 놓여 있었다."아버님이신 민현석 회장님께서 보내신 친필 서신이 막 당도했습니다.""아버님께서?"시은의 차갑고 서늘했던
같은 날 오전 7시,동이 트며 평화롭고 고요하게만 보이던 대한제국의 아침은, 도시 전체의 정적을 찢어발기는 거친 사이렌 소리와 무장 헬기의 프로펠러 굉음과 함께 완벽한 아수라장으로 변모했다.쾅-!!"뭐, 뭣들 하는 짓이냐!! 내가 누군지 알아?! 명색이 이 제국의 국고를 책임지는 내각 재무대신이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군홧발로 현관문을 부수고 함부로 쳐들어와!!"수도 한복판에 자리 잡은 수백 평짜리 최고급 대저택,최고급 이탈리아산 실크 잠옷 차림의 재무대신 박기태가 아침 식사 중 별안간 들이닥친 괴한들에 놀라 식탁을 뒤엎으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고함을 질렀다.그러나 오만방자했던 그의 그 호통은, 육중한 방탄복과 검은 복면을 쓴 블랙 쉴드 정예 요원 십여 명이 그의 머리에 차갑고 시퍼런 소총 총구를 일제히 들이밀자, 단숨에 짐승의 비루한 앓는 소리로 변해버렸다."황후 마마의 특명이다."부대장이 얼어붙은 재무대신의 이마에 총구를 강하게 밀어붙이며 차갑게 선언했다."재무대신 박기태 당신을 국가 국고 3천억 횡령 및 반란 방조 그리고 내란 음모죄로 이 시간부로 긴급 체포한다.""황....황후가! 나....나는 폐하의 충신이 읍!"
내명부 예법실 지하, 수십 년간 잊혀졌던 폐비들의 원혼이 잠든 차갑고 습한 무덤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낡은 철제 함그 안에서 잠들어 있던 엄지손가락만 한 마이크로 SD 카드는 결코 단순한 저장 매체가 아니었다.그것은 지난 14년이라는 길고도 참혹했던 세월 동안, 거대한 대한제국의 핏줄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백성들의 고혈을 게걸스럽게 빨아먹던 거대한 기생충들의 명단이자, 썩어빠진 권력의 심장부를 완벽하게 꿰뚫고 폭파시킬 가장 치명적인 사형 선고장이었다.황후전의 가장 깊고 서늘한 메인 집무실,동이 트기 전, 새벽의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빛이 거대한 통유리창을 넘어 무겁게 스며드는 가운데, 집무실 중앙에 띄워진 거대한 홀로그램 모니터 위로는 참혹한 진실들이 붉은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수백 명에 달하는 황실 내수사 고위직, 내각의 핵심 관료들, 그리고 국가의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군부 장성들의 이름, 그 옆으로 그들이 유종석과 신아리의 비호 아래 착복한 천문학적인 비자금 내역과 검은 거래의 흔적들이, 마치 멈추지 않는 폭포수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이토록 깊고, 이토록 추악하게 썩어있었단 말인가."시은은 차가운 황금 옥좌에 등받이를 기댄 채, 끝없이 이어지는 배신자들의 명단을 핏발 선 서늘한 눈으로 훑어 내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뼈가 시릴 정도의 지독한 허탈감과 구역질이 묻어났다.
다시 황궁의 가장 밑바닥, 쥐새끼들이 들끓는 내명부 지하 감옥,어둠 속에서 자신이 승리할 날만을 망상하며 미친 듯이 실실거리던 아리의 귓가에, 감옥 복도를 울리는 또각, 또각, 하는 소름 끼치게 규칙적이고 고고한 구두 발소리가 들려왔다.철컹-!독방의 철문이 열리고, 눈부신 감옥의 역광을 받으며 황후 민시은이 지옥의 염라대왕처럼 차갑고도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그녀의 양옆로는 민혁과 횃불을 든 근위병들이 굳건하게 도열했다."민시은! 드디어 내 발밑에 무릎을 꿇으러 친히 행차하셨나 보지?"아리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며, 승리에 찬 끔찍한 웃음을 흘렸다.하지만 시은은 그런 아리의 도발에도 단 한 치의 동요조차 없이, 서늘하고 오만한 시선으로 바닥을 구르는 그녀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그리고, 시은이 가죽 장갑을 낀 하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을 때,그녀의 손가락 사이에는, 민혁이 방금 전 폐위된 후궁들의 무덤 아래에서 파내어 온 그 작고 검은 'SD 카드' 하나가 조롱하듯 쥐여 있었다."이것을 찾느라, 먼지를 뒤집어쓰며 제법 애를 먹었구나, 아리야"시은이 손바닥 위에서 그 작은 카
황궁을 뒤흔들었던 전대미문의 가면무도회 참극과, 제국의 절대자였던 황제 유종석의 비참한 폐위 그리고 광화문 광장의 거대한 인파 앞에서 펼쳐진 황후 민시은의 혁신적이고도 파격적인 철혈 선언은 대한제국이라는 거대한 거함을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 밀어 넣었다.백성들은 부패한 황실의 고름을 스스로 짜내고 자신들의 고혈로 채워진 자산을 환원하겠다는 황후의 결단에 눈물 흘리며 열광했으나, 폐허와 잿더미 위에서 간신히 피어난 평화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살얼음판과 같았다.황실의 안팎에는 여전히 시은의 서늘한 권위를 시기하고, 유종석과 혈랑회가 남겨둔 핏빛 권력의 잔재를 탐하려는 썩은 귀족들과 대신들의 검은 그림자가 독사처럼 도처에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웅장한 황궁의 가장 깊고 음산한 밑바닥, 내명부 지하 감옥의 최하층에 위치한, 빛 한 줌조차 허용되지 않는 가장 어둡고 축축한 독방,그 짐승의 우리와도 같은 곳에서, 전직 제국의 황귀비이자 안주인을 꿈꾸던 요녀 신아리는 넝마가 된 한복 자락을 오물에 적신 채 바닥을 개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14년의 세월 동안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제국의 정점에 올라 민시은의 목을 치려던 그 화려하고 오만했던 악녀의 자태는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간밤에 벌어진 참혹한 고문과 충격으로 인해 허연 살결 곳곳에는 시퍼런 멍과 핏자국이 가득했고, 허리까지 내려오던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시궁창의 오물과 뒤섞여 기괴하게 굳어 있었다.손톱은 바닥을 긁어대느라 모조리 뒤집어져 검붉은 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