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2026년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자정을 넘긴 도심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거센 폭우와 몰아치는 강풍으로 기괴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평소라면 불야성을 이루며 화려하게 빛났을 거리의 네온사인마저 폭풍우에 짓눌려 숨을 죽인 듯했다.그러나 그 짙은 어둠을 찢어발기며, 무서운 굉음을 내뿜는 거대한 강철의 행렬이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수도 방위 사령부 산하, 제1 특수기갑여단,과거의 망령 백 장군의 지휘 아래 황제의 어명으로 불법 차출된 3천 명의 중무장 병력과 수십 대의 장갑차가 아스팔트 바닥을 무참히 짓이기며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그들의 목적지는 단 한 곳, 대한제국 경제의 심장이자 자본의 상징이라 불리는 초고층 빌딩 '민석 타워'와, 그 너머에 자리한 민현석 회장의 본가였다."속도를 더 높여라! 한 놈도 빠짐없이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포박해! 반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즉결 처분한다!"선두를 달리는 지휘 장갑차 안에서 백 장군이 무전기에 대고 악을 썼다.얼굴 절반을 덮은 흉측한 화상 흉터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탁한 눈동자에는 오랫동안 변방에서 굶주렸던 살육에 대한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황제의 은밀한 밀명이라는 완벽한 방패를 얻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건방지게 황실을 핍박하는 거추장스러운 재벌 늙은이의 목통을 물어뜯고 피를 마시는 일뿐이었다.하지만 오만에 빠진 백 장군과 황제 유종석은 한 가지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날아온 날카롭고 서늘한 단검 하나가 은쟁반을 정확히 꿰뚫으며달콤한 차가 담긴 찻잔과 다과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꺄아아아아악!" 코앞에 시퍼런 칼날이 박히자 놀란 아리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져 벽에 처박혔다. 단검에 부서진 찻잔에서 쏟아진 붉은 홍차가 차가운 감옥 돌바닥 위로 엎질러졌다. 그러자 치이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찻물이 닿은 돌바닥이 마치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독한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두 눈으로 목도한 아리의 얼굴이 피가 모두 빠져나간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도... 독..? 독이라고?! 이..이게 대체 무슨!" 그때 감옥의 나선형 돌계단을 내려오는 규칙적이고 날카로운 구두 발소리가 섬뜩하게 지하를 울렸다. 또각, 또각, "정말이지 구제 불능인 천박한 계집이로구나 그게 널 살려줄 동아줄인 줄 알았느냐? 썩은 동아줄을 잡고 불나방처럼 타들어 갈 뻔했군." 서늘하고도 뼛속까지 고고한 목소리 제국의 지배자 민시은 황후였다. 그녀의 곁에는 방금 전 단검을 던졌던 그림자 김민혁이 소리 없이 다가와 벽에 박힌 검을 거두어들였고 그 뒤에는 잔뜩 겁에 질려 덜덜 떠는 교도대장이 포박당한 채 내동댕이쳐졌다. 시은이 우아한 걸음으로 철창 앞으로 다가와 맹독으로 시커멓게 구멍이 파인 돌바닥을 몹시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네가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네 몸을 바쳐 충성했던 너의 유종석이 널 영원히 침묵시키기 위해 지하로 보낸 '선물'이다. 배가 고프다고 저것을 한입만 베어 물었어도 넌 검은 피를 토하며 네 내장을 손톱으로 긁어내며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것이다." 아리의 동공이 진도 9의 지진이라도 난
황궁의 가장 깊숙한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심야에 인적이 완전히 끊긴 편전 안에서는 오직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은밀한 밀실에는 퀴퀴한 최고급 시가 연기와 짙은 살기가 뱀처럼 소름 끼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부르셨사옵니까, 폐하"밀실의 짙은 어둠을 뚫고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의 오른쪽 얼굴 절반은 과거의 끔찍한 화염에 녹아내려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드러난 피부 위로는 굵은 핏줄이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과거 선황제 시절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도륙하며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데 일가견이 있어 '도살자'라 불렸던 자 그러나 그 잔혹함이 도를 넘어 결국 변방의 척박한 땅으로 유배되었던 '백 장군' 이었다.피비린내를 맡고 오랜만에 깨어난 늙고 굶주린 사냥개처럼그의 탁하고 붉은 눈동자는 미친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유종석은 초조함에 시가를 잘근잘근 짓씹으며 백 장군을 노려보았다. 황후 민시은과 민석그룹에 의해 자신의 검은 자금줄이 완벽하게 차단당하고 목이 조여오는 지금 벼랑 끝에 몰린 그에게 남은 마지막 패는 오직 헌법과 제국의 법도를 깡그리 무시한 '절대적인 무력'뿐이었다."그래 변방의 쥐새끼처럼 찌그러져 처박혀 있던 너를다시 이 화려하고 비린내 나는 수도로 불러올린 이유를 알고 있겠지.""황후 마마와 그 배후인 민석그룹이 감히 폐하의 고결한 옥좌를 능멸하려 든다는 불충한 소문은척박한 변방의 차가운 바람을 타고 익히 들었사옵니다.""능멸 정도가 아니다."종석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그 독부가 내명부를 완벽히 장악하고내명(內命)의 법도를 빙자해 나의 충실한 수족들을 하나씩 무자비하게 잘라내고 있어 거기에 민현석 그 늙은이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칼을 쥐고 내 황실의 목을 서서히 조르고 있다."
쿠구구구궁-!황궁 밖 도심을 가로지르는 무자비한 쇳소리가 진동했다. 백 장군이 이끄는 황실 정규군 전차 부대가 민석그룹 본사를 향해 육중한 포신을 겨눈 채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그에 맞서는 민석그룹 본사 외곽어둠 속에 도열한 최정예 사설 용병 '블랙 쉴드' 대원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거대한 방패벽을 세우고 황제군을 향해 일제히 총구를 겨누었다.철카닥-! 촥, 철컥-!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차가운 장전 소리 궐내 역시 황실 근위대원들이 총검을 치켜들고 황후전으로 향하는 길목을 삼엄하게 에워싸며 노리쇠를 당겼다.누군가의 첫 방아쇠 한 번이면 당장이라도 피바람이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수라장 양측 모두 극도의 긴장감 속에 숨을 죽인 폭풍전야의 대치 상태였다.그러나 밖의 그 숨 막히는 살기와는 대조적으로황후전의 내실만큼은 폭풍의 눈처럼 기괴하리만치 고요했다.넓고 고요한 내실에는 이제 오직 시은과 민혁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거대한 정규군과의 무력 충돌을 앞둔 끔찍한 압박감 때문이었을까결연했던 시은의 좁은 어깨가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철의 여인처럼 이성적으로 대처하려 발악해도 자신의 손짓 한 번과 결정 하나에 핏줄인 아버지의 목숨과 수천 명의 무고한 피가 달려있다는 사실은27세의 젊은 여인이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잔인한 형벌과도 같은 짐이었다."마마"언제나 그림자처럼 말이 없던 민혁이낮고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은을 불렀다. 시은은 애써 자신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몸을 돌려 넓은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이 마치 내일 흘리게 될 피를 머금은 듯 섬뜩하고도 구슬프게 황궁의 지붕을 물들이고 있었다."민혁아.. 내가 너무나도 두렵다."
"네놈들이 주군이라 모시는 자도, 네놈들도 반드시 저주받을 것이다! 내 아들이 반드시 너희들의 목을 따서...!"푹-! 서걱!어머니의 피맺힌 저주가 다 끝나기도 전에 서늘한 검날이 무자비하게 그녀의 가슴을 관통했다. 어머니의 몸이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좁은 벽장 문 너머로 끔찍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벽장 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힌 어린 민혁은 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과 함께 민혁의 마음속에서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미친 듯이 메아리쳤다.'어...어 머니 제발 일어나세요 어머니! 안 돼요 절 두고 가지 마세요!'민혁은 어머니의 마지막 숨결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생지옥을 맛보았다.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민혁은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부르고 또 불렀다.'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제..발..제발 눈을 떠보세요!'그날 밤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어린 민혁의 입을 틀어막고 비좁은 벽장 속에 숨긴 채 문밖에서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목이 베여 나가는 소리를 숨죽여 들어야만 했던 그 참혹한 밤 소년 김민혁의 세상은 그 순간 완벽하게 박살 나고 멈춰버렸다.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쫓기는 들개처럼 뒷골목을 전전하다 가장 냄새나고 썩어빠진 시궁창 같은 고아원까지 흘러들어왔다.세상에 대한 복수심민혁은 밤마다 고아원 뒷산으로 몰래 올라가 제 주먹에서 피가 터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굵은 나무 기둥을 내리치며 독학으로 살인 무술을 연마했다. 언젠가 반드시
흙먼지가 묻어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사내의 마음을 홀리는 아리의 크고 깊은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처절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너무나도 가련하고 아름다운 희생양의 모습이었다.갑작스러운 소란에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을 내려던 황태자 종석은 제 발밑에 납작 엎드려 자신을 마치 유일한 구원자처럼혹은 절대적인 신처럼 우러러보는 소녀의 묘한 눈빛에 멈칫했다."아프냐?"종석이 짐짓 근엄한 척 거드름을 피우며 묻자아리는 기다렸다는 듯 종석의 바짓가랑이를 가녀린 두 손으로 꽉 부여잡았다.최고급 실크 바지에 끈적한 진흙이 묻어났지만, 종석은 웬일인지 발을 빼지 않았다. "흐윽, 황태자 전하…… 제,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아리의 가냘픈 목소리가 봄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애처롭게 떨렸다."이곳의 악마 같은 원장이 밤마다 이유 없이 저를 때리고 어두운 지하실에 가둡니다. 흐흑…… 너무 아파서 이제는 뼈가 부서질 것 같아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전하께서 자비로운 손길로 저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내일 아침 매를 맞아 차가운 주검이 되고 말 거예요. 제...제발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전하!"종석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처절하게 매달리는 이 어리고 가녀린 소녀를 흥미로운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황태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우러러보며 맹목적으로 구원을 비는 이 절대적인 복종과 의존 그것은 15살 종석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음습하게 똬리를 틀고 있던 비열한 우월감과 알량한 지배욕을 완벽하게그리고 달콤하게 자극했다. 늘 자신과 동등한 아니 오히려 더 기품 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