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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옥문의 개방과 핏빛 연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6 10:27:06

​같은 시각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지는 서울 외곽의 고급 주택강민회장댁이다.

 

대한제국 재계 서열 1위, 민석그룹 민현석 회장의 본가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진입로에는 평소 환하게 불을 밝히던 가로등마저 모두 꺼져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먹먹한 어둠 속을 소리 없이 기어가는 다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황제 유종석이 제국의 법망을 피해 자신에게 거슬리는 자들을 조용히 제거하기 위해 은밀하게 키워낸 황실 직속의 어둠, '흑영(黑影)' 소속의 최정예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의 오늘 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건방지게 황제에게 밉보인 민석그룹의 심장 민현석 회장의 목을 쥐도 새도 모르게 따오는 것이다.

 

 

​최신형 소음기 장착이 완료된 특수 총기를 차갑게 쓰다듬으며 암살조장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수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훈련받은 대로 높은 담장을 민첩하게 넘으려던 찰나였다.

 

​서걱-!

 

​거센 빗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린 그러나 뼈와 살을 가르는 기괴하고도 섬뜩한 파공음이 어둠을 찢었다.

 

​동시에 가장 뒤에 서 있던 암살자의 목통에서 시뻘건 핏물 분수가 뿜어져 나오며, 짐승이 앓는 듯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윽……! 커헉!"

 

​놀란 조장이 황급히 총구를 겨누며 뒤를 돌아본 순간, 밤하늘을 찢어발기는 새하얀 번개가 내리쳤다. 

 

찰나의 환해진 시야 속에,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갓 기어 올라온 듯한 야차(夜叉)의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제복이 빗물과 피로 흠뻑 젖은 거대한 사내 황후의 직속 수석 호위무사, 김민혁이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특수 제작된 티타늄 검의 칼날 끝에서는 빗물에 채 씻기지 못한 끈적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 초저녁 신아리의 은밀한 별채를 습격하여 정보를 캐내는 과정에서 입은 팔뚝의 깊은 자상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민혁은 고통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괴물처럼 기괴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너... 넌황후의 개!"

 

​조장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황궁의 사냥개가 어째서 황제의 직속 암살단보다 먼저 이곳에 도달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틀렸어 "

 

​민혁의 쇳소리 섞인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분의 그림자이자, 네놈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지옥으로 끌고 갈 사신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의 거대한 신형이 폭발하듯 앞으로 튕겨 나갔다.

 

​탕! 탕! 탕!

 

​다급해진 암살자들이 소음기를 통과한 총알을 어지럽게 십자 포화로 발사했지만 민혁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짐승 같은 반사신경으로 빗속의 궤도를 비틀며 암살자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단 한 번의 간결한 궤적 두 번째 사내의 총을 쥔 손목이 허공으로 날아갔고 뒤이어 몸을 회전시킨 민혁의 티타늄 검이 세 번째 사내의 심장을 등 뒤까지 관통할 정도로 깊숙하게 찔러 들어갔다. 

 

피가 비와 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그 여린 분의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혁의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얇은 퓨즈는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15년 전 피비린내 나는 폭우 속에서 제 눈앞에 무릎 꿇린 부모의 목이 베여 나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자신의 끔찍한 과거의기억이 되살아나고있었다.

 

그 핏빛 지옥의 진흙탕 속에서 짐승처럼 뒹굴던 자신에게 하얀 손수건을 내밀며 인간으로 구원해 준 유일한 빛 그 절대적인 신(神), 시은이 또다시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시은마마의 눈물 한 방울의 대가가 얼마나 무겁고 끔찍한지 네놈들의 뼈와 살로 똑똑히 맛보아라!"

 

​압도적이고도 숨 막히는 살기 앞에서는 십수 년을 고도로 훈련받은 황실의 암살자들도 한낱 도살장 앞의 양 떼에 불과했다.

 

​그것도 단 5분 이였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민혁의 발밑으로는 찢기고 잘린 다섯 구의 시신이 참혹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거센 빗물이 시신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피를 씻어내며 저택 앞마당을 붉은 강물로 만들고 있었다.

 

​민혁은 감정 없는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조장의 품을 뒤져, 황실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특수 통신기와 그들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식표를 무참하게 뜯어내어 품에 챙겼다. 

 

빼도 박도 못할 황제의 암살 지시 증거물이었다.

 

​그때 육중한 저택의 철문이 열리며 검은 우산을 든 한 무리의 사내들이 빠른 걸음으로 나타났다. 

 

민석그룹의 최정예 사설 경호팀과 한비서의 긴급 지시를 받고 대기 중이던 그룹 직속 정보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하얀 백발에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위엄을 지닌 노신사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대한제국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거인, 민시은의 아버지인 민현석 회장이었다.

 

​"수고가 많았네 김민혁 경호원"

 

​민 회장은 마당을 가득 채운 참혹한 시신들과 피투성이가 된 민혁의 모습을 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툭 가라앉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민혁은 검에 묻은 피를 허공에 강하게 털어내고는재빨리 검을 갈무리하며 민 회장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토막 내던 살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예의 바르고 완벽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시은마마의 하명으로감히 본가를 엿보던 쥐새끼들을 청소했을 뿐입니다. 회장님의 옥체 강녕하신지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구만 내 여린 딸아이가 결국 그 무서운 칼을 뽑아 들었군"

 

​민 회장의 깊게 주름진 눈가에감출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쓰라린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13살 그 어린 핏덩이 같은 딸을 그룹의 명운이라는 핑계로 볼모 삼아 황실이라는 아귀 다툼의 소굴에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밀어 넣었던 못난 아비였다. 

 

선황제의 막강한 권력과 정치적 압박 앞에 그룹과 수만 명의 직원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수백 번 자위했지만 매일 밤 낯선 별궁에서 홀로 소리 죽여 울었을 가여운 딸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뜯겨 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제 그 착하고 어린 딸이 무능한 아비를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의 하얀 손에 피를 묻히고 지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딸자식이 늙은 아비를 살리겠다고 피를 보았는데 아비 된 자가 늙었다고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당장 한비서에게 내 명을 전하게"

 

​민 회장의 눈빛이 순식간에 늙은 사자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굶주린 맹수처럼 매섭고 차갑게 빛났다. 

 

황실의 자금줄을 틀어쥐고 있는 재계 1위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내일 아침 대한증권거래소 장이 열리는 즉시 민석그룹 산하의 모든 계열사가 보유한 황실 관련 국채와 채권 그리고 공동 투자 지분 전부를 시장에 헐값에 매각해버리라고 전해라 그리고 황실 금고의 바닥을 어떻게 박살 내어 밑빠진 독으로 만드는지 대한제국 재계 서열 1위의 진짜 힘을 유종석 그 오만하고 멍청한 애송이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민 회장의 서슬 퍼런 선전포고에, 민혁은 말없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거대한 복수의 톱니바퀴가 핏물을 윤활유 삼아 굉음을 내며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제를 그 교만한 옥좌에서 질질 끌어내리고 신아리의 가증스러운 목통을 비틀어버릴 거대한 수레바퀴가 폭우 속에서 서서히 가속을 붙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시은은 숨 막히는 교태전 내실에 홀로 앉아 위태롭게 일렁이는 촛불의 그림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창밖에서 유리창을 때리며 부서지는 빗소리는 기묘하게도 그녀의 머릿속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과거의 파편들을 하나둘 끄집어내는 잔인한 재주가 있었다.

 

​'과거13살의 어리석은 맹세 그리고 12살의 징그러운 탐욕이지금까지 이어져온것이다.

 

​시은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황태자비 책봉식이 있던 14년 전의 그날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오늘과 똑같이 음산한 비가 내렸다.

 

​어린 목이 부러질 듯 무거운 가채를 견디며 시은은 붉은 융단 위를 걸어 자신의 지아비가 될 종석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단상 위에 선 소년 황태자 종석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정실부인 시은이 아닌 다른 곳을 묘하게 향해 있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의 끝 화려한 황실의 구석진 기둥 뒤에서 이쪽의 성대한 의식을 훔쳐보던 어린 궁녀가 있었다.

 

​고아원 후원 행사에서 우연히 연을 맺어 막 궐로 들어왔다는 12살의 신아리이였다.

 

​시은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기둥 뒤에 숨어있던 아리의 눈빛을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난과 허기에 찌들어 볼품없이 마른 몸이었지만 짙은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던 아리의 두 눈동자만은 감출 수 없는 맹렬한 탐욕과 시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입은 화려한 금박 비단옷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훑어보던 시선과 자신이 머리에 쓴 눈부신 화관을 당장 제 머리 위에 얹고 싶어 발악하던 그 징그럽고도 노골적인 갈망이 눈에 선했다.

 

​그 어리고 비천한 탐욕은 머지않아 시은의 삶을 파괴하는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

 

​입궁 후 아리는 의도적으로 종석의 곁을 맴돌며 끝없이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지어냈다. 

 

자신이 시은의 궁녀들에게 뺨을 맞고 괴롭힘을 당한다고 거짓 눈물을 짓고 시은이 아랫사람들을 핍박하는 잔인하고 오만한 성정이라며 밤마다 종석의 품에 안겨 교묘한 이간질을 해댔다.

 

​오만하고 허영심 가득했던 종석은 늘 바른말만 하고 우아하고 똑부러지는 시은보다 자신의 품에 파고들어 가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구원자이자 신처럼 추켜세워 주는 아리에게 속절없이 그리고 완벽하게 빠져들었다.

 

​"아리는 부모도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 핍박만 받은 불쌍한 아이다! 명색이 황후인 네가 그깟 질투심에 눈이 멀어 그 아이를 품지 못하고 흠집을 내려 하느냐!"

 

​종석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시은이 밤을 새워 열 손가락이 다 부르트도록 직접 수놓은 황제의 생일 장신구를 아리가 몰래 가위로 찢어놓았을 때도 한겨울 시은의 처소에 배당된 최고급 숯을 아리가 중간에서 빼돌려 황후가 혹한의 추위에 떨게 했을 때도 종석은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은 채 언제나 아리의 편에 서서 무작정 시은을 비난하고 나무랐다.

 

 

​'나는 당신의 그 알량한 사랑을 바란 것이 아니었어그저 한 나라의 국모로서 그리고 당신의 아내로서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바랐던 것뿐인데'

 

​시은은 어둠 속에서 쓰디쓴 조소를 흘렸다. 

 

13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시린 궁궐에서 지아비의 곁을 지키겠노라 품었던 고결한 맹세는 결국 12살 고아원 출신 악녀의 비열한 탐욕과 남편의 어리석음 앞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황후'라는 비참한 꼬리표가 내명부의 절대적인 주인이면서도 일개 궁녀의 치맛바람에 조롱당해야 했던 수많은 굴욕의 밤들도 있었다.

 

시은이 그 지옥 같은 14년의 세월을 스스로 입술을 깨물며 견뎌냈던 것은 오직 가문의 명예와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의 안위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이 시은이 목숨처럼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마지노선마저 무참히 짓밟았다.

 

​'폐하 당신은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제 역린(逆鱗)을 건드렸습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내실의 작은 비밀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짙은 비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밀려 들어왔다.

 

​시은이 번쩍 눈을 떴다.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민혁이었다.

 

​그는 비를 맞아 흠뻑 젖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헐떡이며 거친 숨을 내몰아쉬고 있었지만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은을 보고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마 명령하신 대로 본가를 노리던 쥐새끼들은 한 놈도 살려두지 않고 모두 처리했습니다 아버님은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으셨고 무사하십니다."

 

​시은의 가슴속에 꽉 막혀 있던 숨이 그제야 안도감과 함께 터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그녀는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민혁에게 다가갔다. 

 

검게 물든 그의 호위무사 제복에서는 아직도 식지 않은 따뜻한 피가 빗물과 섞여 배어 나오고 있었다.

 

​"민혁아 다치지 않았느냐."

 

​"마마의 안위에 비하면 제 몸의 이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은은 치맛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최고급 명주 실크 소맷자락을 '찌익' 소리가 나게 거칠게 찢어 살이 깊게 패어 피가 멈추지 않는 민혁의 팔뚝을 단단히 감싸주었다. 

 

새하얀 비단이 순식간에 그의 붉은 피를 빨아들이며 젖어 들어갔다.

 

​민혁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자신의 비천하고 더러운 피가 제국의 국모인 황후의 고결한 손을 더럽히는 것이 두려워 황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시은은 단호하고 강한 힘으로 그의 팔을 꽉 쥐었다.

 

 

​"피하지 마라 이 상처는 나를 위해,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네가 대신 얻은 것이다."

 

​시은의 처연하고도 깊은 눈빛과 마주친 순간, 민혁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묵직한 애절함과 고통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황제에게 무참히 버림받고 이 거대하고 차가운 얼음성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다짐했던 단 하나의 절대적인 신(神)

 

​"시은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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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명이 밝아오는 황궁,​어젯밤,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호위무사 김민혁이 신아리의 독방에 잠입해 소리 없이 빼내 온 극미량의 혈액 샘플. 그 작은 핏방울이 품고 있는 끔찍한 진실을 낱낱이 해독하기 위해, 황실 지하 벙커의 초정밀 양자컴퓨터는 밤새도록 쉬지 않고 육중한 기계음을 뿜어내고 있었다.​밤새 피비린내 나는 폭풍이 휩쓸고 간 궐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만, 황후전 집무실의 공기만큼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마마 민석그룹 양자컴퓨터 연구소에서 급파된 수석 연구원이 도착했습니다."​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한비서의 다급한 안내를 받으며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손에는 삼중으로 굳게 봉인된 티타늄 금고가 들려 있었다.​지난밤 채취한 신아리의 혈액과, 과거 유종석 및 김태혁의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밤새도록 교차 대조한 가장 완벽하고도 잔혹한 '최종 분석 결과'였다.​"이리 가져오라."​거대한 자단목 책상 앞에 꼿꼿하게 앉아 있던 시은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명령했다.​연구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금고의 암호를 해제하고, 붉은 황실의 인장이 묵직하게 찍힌 서류 봉투를 시은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민혁은 시은의 등 뒤에 거대한 산처럼 서서, 그 얇은 서류 봉투를 뚫어질 듯 예리하고 살벌하게 주시하고 있었다.​시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봉투의 밀봉을 미련 없이 뜯어냈다.​바스락거리는 종이 마찰음만이 숨 막히는 집무실의 정적을 채웠다.

  • 잔혹한황실    [제68화: 핏줄의 굴레, 그리고 잔혹한 진실의 서막]

    "마마! 신아리가 냉궁에서 깨진 유리 조각으로 쇠사슬을 끊고, 제 몸에 상처를 내며 탈주를 시도하다 발각되었습니다!" ​어스름한 새벽, 황후전 집무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김비서의 다급한 보고에 시은의 맑은 눈동자가 북해의 빙하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젯밤, 달빛 아래 야외 테라스에서 민혁과 나누었던 온기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유리 조각이라니 감시가 그리 철저하거늘, 기어이 제 목숨과 뱃속의 핏덩이를 담보로 황실을 겁박하려 드는구나." ​"제압하는 과정에서도 제 배를 끌어안고, 뱃속의 황손이 잘못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악귀처럼 발악을 해대어 감찰 상궁들이 진땀을 뺐사옵니다." ​시은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며칠 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신아리가 단두대 밑에서 마지막 발악처럼 던졌던 '회임'이라는 단 한마디. 그것은 단순한 비루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은이 자신의 아버지를 희생하며 피눈물로 힘겹게 쌓아 올린 이 모든 숙청과 개혁의 정당성을, 단번에 '황실의 적통을 무참히 살해한 잔혹한 반역'이라는 더러운 프레임으로 완벽하게 짓이겨버리겠다는, 악녀다운 가장 교활하고 악랄한 역습이자 방패였다. ​시은은 핏빛 적의(翟衣)를 차려입고 곧장 대비마마가 머무는 자경전(慈慶殿)으로 향했다. ​병석에 기대어 있던 대비마마 역시 이미 냉궁의 소란을 전해 들었는지, 핏기가 가신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를 짚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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