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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가시관을 벗어던진 여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6 10:26:42

창밖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소리조차 시은의 서늘하고도 잔혹한 음성을 덮지 못했다. 

 

그것은 제국의 국모가 14년의 끔찍한 침묵을 깨고 내린 성은(恩)이자 어둠 속에서 평생을 숨죽여 온 사냥개에게 처음으로 허락된 핏빛 세례였다.

 

 

​시은의 명령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빗소리를 가르고 귓가에 꽂히는 순간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던 수석 호위무사 김민혁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언제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던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숨길 수 없는 기괴한 희열과 짐승 같은 맹목적인 충성심이 번뜩이고 있었다.

 

​시은은 천천히 손을 뻗어 민혁의 거친 뺨을 감싸 쥐었다.

 

15년 전 고아원의 흙구덩이 속에서 얼어붙어 가던 소년에게 내밀었던 그 작고 여린 손은 이제 제국의 옥좌를 피로 물들일 준비를 마친 여제의 단호한 손이 되어 있었다.

 

민혁의 불덩이 같은 뺨을 감싼 황후의 가녀린 두 손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체온은 오히려 민혁의 핏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흉포한 야성을 완전히 깨워버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마마의 뜻대로하시십시요"

 

​민혁은 낮게 마치 주인의 손길에 길들여진 맹수처럼 짐승의 으르렁거림을 흘리며 시은의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깊숙이 맞대었다. 

 

눈을 감은 그의 속눈썹 위로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방울이 맺혔다. 그것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었다. 

 

주군을 위해 기꺼이 지옥불에 뛰어들어 모든 죄업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절대적인 복종의 서약이자 자신의 목숨을 건 핏빛 맹세였다.

 

​짧고도 묵직한 인사를 끝으로 몸을 일으킨 민혁의 거대한 신형이 벼락이 치는 어둠 속으로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 나가듯 사라졌다.

 

​열린 창문 틈으로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빗물인지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피바람의 예언인지 모를 차가운 액체가 대리석 바닥에 흩뿌려졌다. 

 

시은은 허공에 남겨진 제 두 손을 말없이 응시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심장이 터질 듯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14년 동안 자신의 목을 조르고 온몸을 옭아매던 거대한 허울 '황실의 의무'와 '정략결혼'이라는 이름의 비극을 제 손으로 직접 산산조각 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해방감이었다.

 

​"한비서"

 

​시은이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나지막이 불렀다.

 

​"예, 시은마마"

 

​어둠 속 교태전의 가장 깊은 사각지대에서 숨죽이고 대기하던 한비서가 구두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재빨리 다가왔다. 

 

대한제국 재계 서열 1위 민석그룹이 시은을 위해 황실에 심어둔 최고의 두뇌 그의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날카로운 이성이 서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아버님께 당장 연락을 취해 내통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황실 통신망이나 도청될 위험이 있는 선은 절대 쓰지 말고 민석그룹 내부의 가장 은밀한 비상 채널만을 이용하라고 전해 그리고 아버님 본가 처소의 사설 경호 등급을 최고 수준으로 즉각 격상시켜라 단!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하게 보이도록 철저히 위장해야 한다."

 

​시은의 지시는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다. 

 

황제 유종석이 자신의 아버지를 치기 위해 암살자들을 보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명심하고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마 조금 전 대비전의 김비서님으로부터 추가 첩보가 당도했습니다."

 

​한비서가 품에서 암호화된 태블릿PC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신아리 측에서 내일 아침 어전 회의가 열리기 직전 마마를 흠집 낼 교묘한 허위 투서를 주요 언론사와 황실 출입 기자단에 대대적으로 뿌릴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권력을 남용하여 횡령을 주도했다는 식의 억지스러운 프레임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도 비릿한 조소가 새어 나왔다.

 

​"그 천박한 버릇은 14년이 지나도 고아원 시궁창에서 황궁으로 거처를 옮겨도 고쳐지질 않는구나 거짓 눈물과 모함으로 남의 것을 훔치려 드는 그 알량한 수작질 말이야."

 

​시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비바람이 들이치는 교태전의 거대한 유리 창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쾅-!

 

​육중한 창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요동치던 내실에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지독한 적막이 찾아왔다.

 

시은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허물 벗듯 떨어져 있는 황후의 족쇄와도 같았던 화려한 적의(翟衣)를 무참히 밟고 지나쳐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13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황태자의 다정한 눈길 한 번을 바랐던 황실의 안주인이 되겠노라 순진하게 다짐했던 가여운 소녀는 이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서릿발처럼 차가운 이성과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제국을 씹어 삼킬 눈빛을 한 피의 여제(女帝)만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네가 그토록 탐내는 이 자리 내 가문을 부수고 내 숨통을 조여서라도 기어오르고 싶었던 이 옥좌!'

 

​시은은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다.

 

​'기꺼이 핏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피바다로 만들어 주마 신아리 네가 감히 주인의 자리를 탐낸 대가가 어떤 지옥인지 뼈저리게 가르쳐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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