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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누몽
송청아는 잠옷을 단정히 여며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화미에게 머리를 빗게 했다.

그러고는 두 눈을 살며시 감은 채 오늘 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헤아렸다.

전생의 이맘때, 송청아는 이미 화리서(和離書: 옛날 이혼 합의서)를 써 두었다. 스스로 정실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얼마간 모아 둔 사비를 챙겨 도성을 떠나 한적한 고을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배윤호와 이야기를 나눌 틈조차 얻지 못한 채 그들의 계략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 밤 계획대로 일이 풀린다면, 기회를 보아 배윤호의 인장을 얻어 낼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을 미리 작성해 둔 화리서에 찍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뒤 화리하고 배씨 가문을 떠날 생각이었다.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등 뒤에서 화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도련님을 뵙습니다.”

송청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배윤호였다.

2년간 전장을 누빈 배윤호의 몸은 전보다 한층 크고 단단해져 있었다. 본래도 훤칠했던 소년은 어느새 침착하고 강인한 사내가 되어 있었고, 온몸에서 풍기는 기세도 더욱 냉엄하고 오만해졌다.

그러나 지금, 반듯하게 뻗은 눈썹 아래 자리한 깊고 형형한 두 눈에는 평소와 다른 부드러운 빛이 아른거렸다.

“내가 놀라게 했느냐?”

배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며 송청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송청아의 작은 얼굴은 맑고 깨끗했다. 놀란 사슴처럼 커다랗게 뜬 검고 투명한 눈망울은 절로 가엾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

새벽녘의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백합처럼 청아하고 순결했다.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얼굴 위에 번진 옅은 홍조는 그녀에게 화사한 아름다움과 은근한 요염함까지 더해 주었다.

배윤호는 송청아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송씨 가문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으면 장군부의 살림이 넉넉해지고 체면도 살릴 수 있다며 혼인을 권했다. 하지만 송청아가 이토록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가 돈 냄새 밴 상인의 딸과 혼인할 리 없었다.

그러나 배윤호는 송청아가 제 미모만 믿고 오만해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혼례를 올린 날 밤 일부러 술에 취한 척하며 합방을 피했다.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해 두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보낸 지난 2년 동안, 그는 종종 혼례 첫날밤의 송청아를 떠올리곤 했다.

수줍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미처 알지 못했던,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홀리던 그 모습을.

2년 만에 다시 만난 송청아는 이제 막 비녀를 꽂았던 소녀의 앳된 티를 벗고 완연히 피어나, 예전보다도 한층 눈부시게 아름다워져 있었다.

배윤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송청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녀가 물러나는 순간, 배윤호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었다.

얼굴에 어려 있던 온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눈빛은 다시 평소의 엄숙하고 냉오한 빛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2년 만에 만났는데, 서방님을 대하는 태도가 고작 이것이냐?”

배윤호는 죄인을 심문하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송청아는 조금 전의 긴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눈을 내리깐 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방님께서는 이제 막 도성으로 돌아오셔서 며칠 동안 처리할 일이 많으셨을 테니,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배윤호의 표정이 도리어 누그러졌다. 이내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까지 번졌다.

“그리도 서두르고 있었느냐?”

그가 손을 뻗어 송청아의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다분히 희롱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아라.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

갑작스러운 접촉에 송청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쟁터에서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끝이 그녀의 여리고 보드라운 피부를 천천히 문질렀다.

전생의 증오와 공포, 혐오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가슴속을 사납게 휘저었다. 송청아의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윤호는 그녀가 긴장과 설렘을 이기지 못해 떠는 것이라 여겼다.

가냘픈 몸이 제 손길 아래에서 희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자, 배윤호의 숨결도 조금씩 뜨거워졌다.

“오늘 안 어멈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잠시 후 내게 전부 보여 주거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윤호는 송청아를 번쩍 안아 들고 성큼성큼 침상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몸이 허공에 뜨자 송청아의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흐릿하던 시야가 다시 맑아졌을 때는 이미 배윤호가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 그 위를 짓누른 뒤였다.

송청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긴장했다.

이토록 가냘픈 몸으로는 전장을 누비며 단련된 배윤호의 힘을 도저히 막아 낼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말을 걸어 그의 주의를 돌리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서방님, 잠시만요.”

송청아는 손으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가슴을 막아 세웠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배윤호는 그녀의 옷깃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그윽한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미 욕망에 정신이 흐려진 그는 다소 성가시다는 듯 짧게 물었다.

“무엇이냐?”

“서방님께서는 제 동생 송채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채리의 이름이 나오자 배윤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혼미하던 정신도 조금은 맑아졌다.

“그 아이가 네 자리를 대신할까 봐 두려운 것이냐?”

송청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배윤호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 아이가 네 자리를 대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내게 송채리는 그저 동생일 뿐이다.”

여자란 본래 이런 존재였다.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남자의 마음이 정말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려 들었다.

배윤호는 그런 행동이 몹시 따분하게 느껴졌다.

송청아가 다시 입을 열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고개를 숙여 희고 매끄러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송청아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바로 그때, 안채 밖에서 다급한 울음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도련님! 저희 아가씨께서 타고난 과민 증세가 도져 고열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정신을 잃고 계속 도련님의 성함만 부르고 계시니, 제발 송씨 가문으로 가서 아가씨를 살펴 주십시오!”

송청아의 흐릿하던 눈빛이 순간 또렷해졌다.

왔다!

송채리가 예상대로 제 곁의 어멈을 보낸 것이다.

외침을 들은 배윤호는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침상에서 내려가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송청아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서방님께서는 송씨 가문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배윤호는 고개를 숙여 허리띠를 매면서 대답했다.

“그래. 채리가 고열에 시달린다니 가서 살펴봐야겠다.”

옷매무새를 모두 정돈한 그는 곧바로 밖으로 향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송청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안함이 스쳤다.

“오늘 밤은 기다리지 말거라. 나중에 다시 네 방으로 오겠다.”

송청아는 침상에 옆으로 누운 채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더없이 이해심 많고 너그러운 부인처럼 보였다.

“괜찮습니다. 채리의 몸이 우선이지요. 서방님께서도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배윤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여자는 어째서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 듯한가?

바로 그때, 송청아가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서방님!”

배윤호의 마음에 은근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역시 자신을 보내기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송청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향료점에서 온 전표 가운데 서방님께서 확인하고 도장을 찍으셔야 할 것이 몇 장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인장을…….”

송청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윤호는 품에서 인장을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네가 알아서 서명하고 도장을 찍어라. 내게 보여 줄 필요 없다.”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이 안채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 어멈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안채로 들어왔다.

송청아가 넋이 나간 듯 침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 봉 어멈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번졌다.

“큰부인, 소인이 송씨 가문으로 돌아가 그 소식을 전했더니, 송 아가씨가 소인의 면전에서 갑자기 과민 증세가 도졌다며 여 어멈을 함께 보내 큰도련님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봉 어멈은 분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헌데 큰도련님께서는 정말 이대로 가 버리신 겁니까? 이제 큰부인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봉 어멈의 말은 한마디도 송청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청아는 배윤호의 인장을 꽉 움켜쥔 채 침상에서 내려왔다. 신을 챙겨 신을 겨를조차 없이 맨발로 상자 앞까지 달려가, 그 안에서 미리 작성해 둔 화리서를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배윤호의 인장을 그 위에 힘껏 눌러 찍었다.

이어 붓과 먹을 꺼내 화리서의 반대편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큰부인마저 화리서에 서명하는 모습을 본 봉 어멈은 불평을 쏟아 내던 입을 다물었다. 이내 복잡한 심경이 담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큰부인, 정말 큰도련님과 화리하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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