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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누몽
봉 어멈은 송청아가 화리를 결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송청아가 안쓰럽고 가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이 이대로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송청아가 고요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봉 어멈도 보지 않았나. 서방님의 마음속에서는 송채리가 나보다 훨씬 중요하네.”

“헌데 두 분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이지 않습니까. 큰부인께서 큰도련님을 얼마나 마음에 두셨는지 소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봉 어멈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큰도련님께서 직접 송씨 가문으로 청혼하러 오셨던 날, 나리와 마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생에는 오직 송씨 가문의 여식만을 부인으로 맞아 평생 아끼겠다고 맹세하셨지요. 그 말씀을 소인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린 봉 어멈의 눈빛에 희미한 기대가 어렸다.

“큰도련님의 마음속에도 분명 큰부인이 계실 겁니다. 그저 잠시 그 아가씨에게 눈이 먼 것뿐이지요. 그러니 때를 보아 큰도련님과 마주 앉아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눠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분명 마음을 돌리실 겁니다.”

마음을 돌린다고?

송청아의 입가에 자조 어린 웃음이 스쳤다.

그럴 리가.

그에게 천 번, 만 번의 기회를 더 준다 한들 배윤호는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송청아가 배윤호를 처음 만난 것은 열세 살 때였다.

배윤호는 말수가 적고 성정도 냉정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빈틈없이 반듯했다. 적어도 그녀의 체면을 헤아려 주었고, 다른 이들 앞에서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열네 살 무렵, 송청아는 어느 후작 부인이 주최한 봄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화창한 봄볕 아래 화원의 꽃향기가 짙게 번지던 날이었다. 그러나 명문가의 귀녀들과 관가의 규수들이 내뱉는 말은 봄바람과 달리 매섭고 차가웠다.

그들은 상인 집안이라는 천한 신분으로 감히 고관대작의 연회에 얼굴을 내밀었다며 송청아를 조롱했다. 귀한 공자에게 빌붙어 신분을 높여 보려는 모양인데 꿈도 야무지다며, 명문가의 첩실로 들어갈 자격조차 없다고 비웃었다.

수많은 눈길과 비웃음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쏟아졌다. 송청아가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난처해하던 바로 그때, 배윤호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섰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던 찻잔을 대신 막아 냈다. 옷자락에 따뜻한 찻물이 번졌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송청아의 앞을 가로막아 섰고, 그녀를 대신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끝내 송청아를 괴롭히던 명문가의 아가씨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 순간 배윤호는 마치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해 준 영웅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송청아의 마음은 온통 그에게 매여 버렸다.

그가 한결같이 냉담한 태도를 보이고 말끝마다 그녀의 흠을 잡아도, 송청아는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어쩌다 한 번 내비치는 희미한 온정이라도 얻고 싶어 한사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비위를 맞췄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때의 자신은 참으로 비굴했다.

진작 그의 마음속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가 자신을 부인으로 맞은 것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배씨 가문과 송씨 가문 어른들이 정해 놓은 혼사를 따랐을 뿐이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늦지는 않았다.

송청아는 이미 화리서를 손에 넣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배윤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람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듯한 소용장군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 저들을 편하게 해 줄 생각은 없었다.

화리하기에 앞서 지난 수년 동안 장군부의 안살림에 보태느라 쏟아부은 지참금을 모조리 되찾고,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향료점의 수익금도 받아 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배씨 가문에서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게도 하나하나 고통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 줄 것이다.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송청아는 봉 어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어멈, 사내의 마음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법이라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조금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봉 어멈은 크게 놀랐다. 그제야 자신이 모시는 큰부인이 큰도련님에게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송청아를 품에 안고 키웠고, 송씨 가문에서 소용장군부까지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송청아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의 큰부인은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이었다. 비록 속내를 쉽게 입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한번 마음먹은 일은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다.

봉 어멈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길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끝내 송청아의 결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송청아는 봉 어멈의 어깨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어멈, 너무 속상해하지 말게. 내가 평소 쓰는 옷가지와 침구, 그릇 따위를 별채로 옮겨 주게. 앞으로는 그곳에서 지낼 생각이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빛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리고 서방님께서 군을 이끌고 개선하여 도성으로 돌아올 때, 그 송채리도 군을 따라 함께 온 것이 맞는가?”

봉 어멈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헌데 큰부인, 여인을 진중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군율을 어기는 일이 아닙니까? 큰도련님께서 어찌…….”

“봉 어멈.”

송청아가 조용히 말을 끊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봉 어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일렀다.

“앞으로 며칠 동안 다른 처소의 어멈이나 시녀들과 한담을 나눌 때 이 이야기를 슬쩍 흘려 두게. 특히 행춘당의 설 소실 처소 사람들 귀에 반드시 들어가게 해야 하네. 내 말 알아들었나?”

봉 어멈은 송청아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큰부인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따를 생각이었다.

“예,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송청아는 흡족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복수는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

그날 밤, 배윤호는 예상대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송청아는 제향방에서 갓 보내온 향분과 향로 견본을 하나하나 살펴 정리했다. 은은한 향이 방 안에 옅게 머물렀다. 일을 마친 뒤에는 시어머니 고씨에게 문안을 올리기 위해 안순당으로 향했다.

입춘은 이미 지났지만, 전날 내린 큰눈으로 도성에는 다시 매서운 추위가 내려앉았다. 처마 끝에는 녹다 만 눈이 얼어붙어 있었고, 뺨을 스치는 바람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배어 있었다.

정원을 지나던 송청아는 문득 걸음을 늦추었다.

몇몇 하인이 화원 동남쪽에 허리를 굽힌 채 그곳에 심어 놓은 두약을 뿌리째 뽑고 있었다.

분홍빛과 자줏빛이 어우러진 자그마한 꽃송이들은 아무렇게나 한쪽에 내던져져 있었다. 꽃잎은 희끗한 눈과 축축한 흙 위에 어지럽게 흩어졌고, 가느다란 줄기와 뿌리에는 검붉은 흙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한때 싱그럽게 피어 있던 꽃들은 이미 생기를 잃고 처참하게 짓밟혀 있었다.

송청아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자 봉 어멈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순간, 봉 어멈은 안색이 변해 다급히 소리쳤다.

“당장 멈추거라! 누가 이것들을 뽑으라고 했느냐? 큰부인께서 날마다 약재로 쓰시는 두약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송청아는 어려서부터 향을 배합하는 일에 깊이 빠져 있었다. 한번 향을 만드는 데 몰두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 끼니를 놓치기 일쑤였고, 때로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기도 했다.

그런 생활이 오래 이어지면서 비위가 상하고 말았다. 부득이 날마다 두약을 넣어 달인 약으로 비위를 따뜻하게 보해야 했기에, 송청아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 약재로 쓸 수 있도록 화원 한쪽에 두약을 심어 두었다.

봉 어멈의 외침을 들은 하인들은 일제히 손을 멈췄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그들은 흙 묻은 손을 옷자락에 닦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봉 어멈, 저희라고 큰부인의 사정을 모르겠습니까. 헌데 이는 큰도련님의 분부입니다. 오늘 정오까지 이 두약을 모조리 치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저희는 그저 분부대로 일을 하는 것뿐이니, 부디 큰부인께서도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봉 어멈이 자세히 캐묻고 나서야 사정을 알게 되었다.

송채리가 타고난 체질 탓에 두약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배윤호는 앞으로 그녀가 장군부를 드나들 때 과민 증세가 재발할까 염려하여, 미리 화원의 두약을 모조리 뽑아 버리라고 명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봉 어멈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무도 기가 막힌 나머지 목소리까지 가늘게 떨렸다.

“너희는 큰도련님께 이 두약이 큰부인의 약재라고 말씀드리지도…….”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청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봉 어멈, 서방님의 분부이니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네. 그대로 뽑게 두게.”

“헌데…….”

봉 어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송채리가 두약에 과민하다는 이유로 큰도련님은 자신의 부인에게 한마디 묻지도 않은 채 두약을 모조리 뽑으라고 했다.

정작 송청아가 날마다 약재로 써야 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송채리의 몸은 그토록 귀하면서, 자신의 부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인가?

봉 어멈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와 근심을 읽은 송청아는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달랬다.

“나는 괜찮네. 앞으로는 어멈의 말을 잘 듣고 제때 끼니를 챙겨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아무렴 무엇보다 제 몸이 가장 소중하지 않겠나.”

사실 송청아는 두약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혼례 첫날밤, 배윤호가 방 안에 은은하게 번지는 향을 맡고 무심코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었다.

“이 두약 향은 제법 괜찮군.”

그저 스치듯 흘린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송청아는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 뒤로 방 안에는 늘 두약 향을 피웠고, 화원을 꾸밀 때도 무의식중에 두약을 한 무더기 심었다. 곁에 없는 그를 기다리며 향으로나마 그리움을 달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배윤호라는 사람조차 버리기로 했는데, 그가 좋아한다던 두약을 남겨 둘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뽑으라면 뽑으라지.

시든 마음을 붙잡고 있듯 저 꽃들을 계속 바라보는 것보다, 차라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송청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더는 진흙 속에 나뒹구는 두약을 돌아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소맷자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안순당의 안채에 도착하니, 시어머니 고씨는 연탑에 단정히 앉아 손가락으로 염주를 굴리며 눈을 감고 불경을 외고 있었다. 방 안에는 향불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고, 염주알이 맞부딪치는 작은 소리만이 고요한 실내에 잔잔히 울렸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을 들은 고씨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염주를 내려놓은 그녀는 송청아를 향해 더없이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청아가 왔구나. 어서 이리 와 앉거라.”

송청아는 가볍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린 뒤, 연탑 곁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고씨는 손을 뻗어 송청아가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차가운 손을 끌어다 잡았다. 마치 마음 깊이 염려하기라도 하는 듯 손을 감싸 쥔 채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고는 가엾다는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많이 서러웠겠구나.”

고씨는 자애롭고 선량한 인상을 지닌 여인이었다. 평소 별다른 일이 없으면 불경을 외고 부처에게 예를 올렸으며, 말투 또한 온화하고 부드러워 마치 봄바람을 맞는 듯한 편안함을 주었다.

하지만 그 따스한 겉모습에 속아 넘어간다면, 끝내 뼈도 남기지 못한 채 모조리 뜯어 먹히고 말 것이다.

송청아는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음속으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예전과 다름없이 공손하고 얌전했다.

“어머님, 과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조금도 서럽지 않습니다.”

고씨는 얼굴 가득 애처로운 기색을 띤 채 송청아의 손등을 다독였다. 손길만 놓고 보면 세상없이 다정한 시어머니였으나, 정작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 온기와는 전혀 달랐다.

“네 동생은 어려서부터 객지를 떠돌며 자랐으니 예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간 고생이 많았을 테니 참으로 가엾은 아이이기도 하고.”

고씨는 송청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윤호도 그 아이가 불쌍해 조금 더 마음을 써 주었을 뿐이란다. 너는 정실부인인 데다 그 아이의 언니이기도 하니, 조금 더 너그럽게 양보해 주거라. 괜히 윤호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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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은 왜 그래? 어쩌다 다쳤느냐?”서늘한 바람과 함께 누군가 들어온 기척에 송청아가 돌아보았다. 문간에 선 배윤호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그녀의 팔을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은근한 책망까지 어려 있었다.송청아는 경계하며 몇 걸음 물러났다.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친 뒤 그를 흘겨보았다.“알면서 물으시는 건가요?”배윤호는 곧 한 가지 짐작에 이르렀다.처음 향낭의 약에 취했던 사람은 송청아였던 걸까. 제 몸을 지키려고 스스로 팔에 상처를 내고 달아난 것인가?하지만 송씨 집안은 그녀의 친정이었다. 어찌 그녀를 해친단 말인가.그는 위로하듯 한마디 건넸다.“걱정 말거라. 오늘 누가 이런 함정을 팠는지 반드시 밝혀낼 테니.”송청아는 우스웠다. 누가 벌인 일인지 굳이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속으로는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그러나 그와 다툴 기운조차 없었다. 배윤호는 인정하기 싫은 일이라면 아무리 많은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외면할 사람이었다.송청아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담담한 목소리에 희미한 짜증이 묻어났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배윤호는 그녀가 여전히 강한 척 버티고 있다고 여겼다. 천천히 다가가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말투에도 조금은 미안한 기색이 실렸다.“해명하러 왔다. 오늘 일은 내 뜻이 아니었다. 최음향에 취하는 바람에…….”“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 알아들었으니까요.”송청아가 무심히 말을 끊었다.“이제 나가 주시겠어요? 자고 싶어요.”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려 침상으로 향했다.배윤호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불쾌감이 치밀었다.“송청아, 나한테 무슨 내숭이냐? 채리까지 두고 일부러 돌아와 해명하는데, 네 태도가 고작 이것이냐?”송청아가 몸을 조금 틀어 그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비웃듯 말했다.“그러세요? 그럼 돌아가서 그 소중한 채리 곁을 지켜 주시면 되겠네요.”배윤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손목을 움켜쥐어 제 앞으로 잡아당겼다.“이렇게 심통을 부

  • 장군님이나 잘하세요   제96화

    그러다 무슨 변고라도 당하면 그녀의 인생은 그대로 끝장이었다.송세안은 진심으로 송청아를 위한다고 믿었다.송청아는 그 말이 역겨워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모두에게 좋은 방안이라고요? 송채리는 첩이 될 수 없는데, 저는 왜 되어야 하죠? 송씨 집안의 피가 흐르지 않아서요?”송세안은 이미 수없이 되풀이했던 말을 또 꺼냈다.“네가 언니니 동생에게 양보해야지. 게다가 채리는 너 대신 십팔 년이나 고생하지 않았느냐. 네가 조금 참으면 어디가 덧나느냐?”송청아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사이 눈물과 콧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송씨 집안의 핏줄이 아니니, 이 모든 일을 감내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인가.송채리가 뒤바뀌어 변방에서 십팔 년을 고생한 것이 자신의 잘못인가. 제가 일부러 꾸민 일도 아니지 않은가.송관산 부부가 자신을 도성으로 데려올 때, 단 한 번이라도 좋으냐고 물었던가.그런 말을 전하라고 보낸 사람이 하필 송세안이었다. 한때 자신을 손안의 보물처럼 아끼던 오라버니의 입을 빌려, 기어이 가슴속까지 도려내려는 것이었다.생각할수록 서러웠다. 견딜 수 없이 억울했다.송청아의 울음이 거세지자 송세안은 다시 어찌할 줄을 몰랐다.그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다. 어릴 때처럼 품에 안고 다정한 말로 달래 주고 싶었다.그러고 보니 그녀를 안아 본 지도 오래였다. 향긋하고 부드러운 몸과 한 팔로도 감싸 안을 수 있던 가느다란 허리가 문득 그리워졌다.그러나 손이 어깨에 닿기 무섭게 송청아가 소매를 휘둘러 떨쳐 냈다.“손대지 마세요! 나가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라고요!”송세안의 가슴이 더욱 아파 왔다. 커다란 손에 심장을 꽉 붙들린 듯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하지만 송청아는 곁에 다가오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별 위로도 되지 못할 말 몇 마디를 남긴 채, 쫓기듯 돌아섰다.송씨 부저로 돌아가는 내내 송청아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울어서 붉어진 눈, 가냘프게 떨리던 어깨, 희고 긴 손가락

  • 장군님이나 잘하세요   제95화

    송세안이 흠칫했다. 그제야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 모든 일이 송씨 집안의 잘못이라고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인정하다니, 무슨 소리냐? 향낭에 문제가 있었으면 버리면 될 것 아니냐. 왜 하필 채리에게 준 것이냐? 네 동생이잖아. 어떻게 그런 악독한 수를 써서 그 애의 순결도 명성도 망가뜨릴 수 있어!”송청아가 코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눈에 서늘한 조소가 어렸다.“큰오라버니 말씀대로라면, 부모님과 할머님이 저를 해치려 한다는 걸 알아도 얌전히 그 향낭을 차고 있어야 했겠네요. 약효가 돌면 준비해 둔 방에 들어가, 그분들이 골라 놓은 사내와 순순히 몸을 섞고요.”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날을 세웠다.“그런 다음에는 부모님과 시부모님께서 손님들을 데리고 들이닥치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나요? 제 명절을 짓밟고 집 밖으로 내쫓으시기 좋게요. 송채리의 명예만 소중하고, 제 명예는 아무것도 아닌가요!”송세안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었다.눈물이 어린 송청아의 눈을 바라보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안에 뒤엉킨 분노와 억울함, 상처와 고집이 가시 돋친 덩굴처럼 천천히 가슴을 휘감았다.가슴속으로 쓰라림과 미안함,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특히 붉어진 눈꼬리를 보니 심장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손을 뻗어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오라비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울지 말거라.”송세안이 손을 내밀자 송청아가 홱 쳐 냈다. 그러나 그 바람에 팔의 상처가 당겼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들이켜고, 저도 모르게 다친 팔을 감쌌다.“왜 그러는 것이냐?”송세안이 걱정스레 다가왔다.송청아는 몸을 살짝 돌리며 무심히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러나 송세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그녀 앞으로 돌아와 손목을 붙들더니 소매를 걷어 올렸다.드러난 팔뚝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붉은 핏자국이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이건…….”그 광경이 송세안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가슴도 덩달아 움켜쥐듯 조여들었다.송청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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