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장
남자의 걸음이 계단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처음에는 무심하던 그의 시선이 오로라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서서히 날카롭게 변했다. 턱이 굳게 다물렸고, 바지 주머니에 느슨하게 넣어 두었던 손도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로라...?”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로라의 가슴이 순식간에 조여 왔다. 에단? 그 이름이 악몽이 되살아난 것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수없이 재회를 상상했지만, 이런 방식은 단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 자신을 가족에게서 돈으로 데려간 남자의 집에서. 그리고 리처드 캘러웨이의 미래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왜 에단이 여기에 있는 거지...?’ 오로라는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파 근처에 서 있던 리처드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에단과 오로라 사이를 평소보다 오래 오갔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가 차분하게 물었다. 오로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반면 에단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오로라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리처드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 아는 사이인가?”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오로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단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너무도 빠른 그 대답에 오로라의 가슴 한편이 이상하게 저려 왔다. 에단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가까워질수록 1년 전과 달라진 그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에단은 여전히 오로라가 기억하는 그대로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누구죠?”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턱 근육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리처드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오로라를 힐끗 바라봤다. “내 미래의 아내다.” 에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로라는 그의 몸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리처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곧...” 잠시 말을 끊은 그는 태연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네 새어머니가 될 사람이기도 하지.” “뭐라고요?” 에단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오로라는 그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이 치켜올라갔고,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혀끝이 볼 안쪽을 스쳤다. 손을 너무 세게 움켜쥔 탓에 손등의 핏줄까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버지... 진심이세요?” 그가 낮게 물었다. 리처드는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에단은 짧게 헛웃음을 흘린 뒤 다시 오로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오로라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에단도 자신과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1년 전. 오로라가 자신의 손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내 버렸던 그날을. 지금 에단의 눈빛은 1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훨씬 차가웠다. 그리고 오로라는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를 망가뜨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오로라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테이블 아래로 떨리는 손을 감춘 채, 차갑게 보이려 애썼던 자신을. 사실은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는데도. 그때 에단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1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이어졌던 연애를 왜 갑자기 끝내려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하지만 오로라는 끝내 이별을 선택했다. 이 관계에 지쳤다고 말했다. 한 번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에단의 돈과 화려한 생활에만 관심이 있었다며 잔인한 말까지 내뱉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에단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가장 잔인했던 거짓말은 따로 있었다. 오로라는 자신보다 훨씬 부자인 다른 남자를 이미 만났다고 말했다. 그 말이 에단의 마음을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리처드가 선택한 여자가 되어 캘러웨이 저택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은, 그 거짓말이 사실이었다는 증거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에단의 눈빛은 그날보다도 더욱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로라는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안에 담긴 증오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계속 지켜보던 리처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다들 이렇게 조용하지?” 에단은 턱을 거칠게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그냥 놀라서요.” “뭐가 그렇게 놀랍지?” 리처드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에단의 시선이 다시 오로라를 향했다. 이번에는 더욱 날카로웠다. “아버지 취향이...”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비꼬는 미소를 옅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꽤 독특하시네요.” 오로라는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단의 말투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리처드는 오히려 여유롭게 웃었다. “당연하지. 아직도 잘생겼고 늙어 보이지도 않잖아?” 에단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네, 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오로라는 어깨가 아플 정도로 가방을 꼭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그저 이 저택에서 사라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존재는 모든 상황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나마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랐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1년 전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여자를 에단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 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단이 나지막이 말했다. “방으로 올라가겠습니다.” 리처드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완전히 떠나기 직전, 그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오로라는 다시 자신에게 향하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그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실망감도. 몇 초 뒤 에단은 그대로 사라졌다. 오로라는 그제야 참아 왔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에단의 눈빛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리처드는 잠시 오로라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정말 탄탄을 모르는 건가?” 오로라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에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하지만 리처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라의 얼굴을 몇 초 동안 바라보며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듯했다. 오로라는 식은땀이 밴 손바닥을 감추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마침내 리처드는 시선을 거두었다. “클레어.” 조금 전의 하녀가 곧바로 다가왔다. “네, 도련님.” “아가씨를 객실로 안내해.” “알겠습니다, 리처드 님.” 오로라는 다시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 떠나기 전 잠시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파에 앉아 서류를 펼쳐 보고 있었다. 오로라는 클레어를 따라 저택의 웅장한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이 집의 모든 공간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웠다. 은은한 조명, 벽에 걸린 값비싼 그림들, 공기 속에 퍼지는 고급 원목과 향수 냄새. 모든 것이 자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했다. “아가씨 방은 저 끝입니다.” 클레어가 친절하게 말하며 크림색으로 꾸며진 넓은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오로라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예전 자신의 방보다 훨씬 넓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침대 옆 버튼을 눌러 주세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한 뒤 방을 나갔다. 오로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가방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오로라는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는 정말 울고 싶었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졌다. 자신이 이제 리처드 캘러웨이의 미래의 아내라는 사실도. 에단의 미래의 새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오로라는 체념이 섞인 작은 웃음을 흘렸고, 결국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던 순간. 똑똑. 똑똑. 똑똑. 노크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몸을 떨었다. 오로라는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어느새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온 걸까?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가운데, 오로라는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살짝 여는 순간. 그녀의 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문 앞에는 에단이 서 있었다. 그는 아까와 같은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훨씬 더 차가워져 있었다. 굳게 다문 턱과, 오로라가 다 읽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한 눈빛. 오로라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에단은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와 침실 문을 세게 닫았다. 쾅! “뭐 하려는—” 쾅! 에단은 거칠게 오로라의 손목을 붙잡아 그대로 뒤로 밀어붙였다. 오로라는 작게 신음했다. “아파... 에단...” “그때 네가 말했던 그 남자...” 에단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던 거냐?”제129장 (최종장)일 파라디소 로비에 감돌던 위스키 잔향과 팽팽한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색한 정적이 채웠다. 루나—아니, 오로라는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붉은 벨벳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애수 어린 그녀의 두 눈은 리처드의 팔에 여전히 올려져 있는 바네사의 손을 직시했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통증과 함께 고집스러운 질투심이 불길처럼 치밀어 올랐다.앞에 선 여자의 몸이 경련하듯 굳어지는 것을 감지한 리처드는 차가우면서도 단호한 동작으로 자신의 팔을 쥐고 있던 바네사의 손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그는 아까부터 자신의 직감을 집요하게 자극하던 확신을 확인하려는 듯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리처드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주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패닉에 빠진 루비가 루나의 손목을 불쑥 낚아챘다."루나, 당장 뒷문으로 나가자! 니콜라스 오빠가 우리를 데리러 보디가드 팀을 보냈을 거야!" 루비는 거의 친구를 소파에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하며 외쳤다.자신의 비밀이 폭로될까 봐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인 오로라는 즉시 몸을 돌려 루비의 이끌림을 따라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끌리는 적포도주색 드레스 자락과 서두르는 발걸음이 얽히면서, 그녀는 미끄러운 로비 복도의 시야를 놓치고 말았다.쿵!뒷골목으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려던 바로 그 순간, 루나의 날씬한 몸이 관리사무실 방향에서 막 걸어 나오던 한 남자의 넓은 가슴에 세게 부딪혔다. 제법 강했던 충격 탓에 오로라는 균형을 잃고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남자의 단단한 두 손이 잽싸게 앞으로 뻗어 나와,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루나의 가는 허리를 잡아채어 받쳐주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반사 신경 탓에, 루나의 머리 뒤에 매여 있던 가면 끈이 남자의 양복 소매 버튼에 걸려버리고 말았다.툭.은색 자수가 놓인 상아빛 베네치아 가면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 챙그랑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어스름한 로비
제128장새틴 셔츠를 입은 남자가 배경 기둥 근처로 구석에 몰린 루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루나의 매끄럽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광기 어리게 번뜩였다. "이 바보 같은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 좀 볼까, 예쁜이?"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더러운 손가락을 뻗어 루나의 목 피부 표면에 닿으려 했다.루나는 극심한 두려움의 눈물을 참아내며 두 눈을 감았고,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떨렸다.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퍽!묵직하고 거친 주먹 하나가 갑자기 새틴 셔츠를 입은 남자의 턱에 정확히 꽂히며 끔찍한 뼈 소리를 냈다. 취한 남자의 몸은 붕 떠올라 무대 바닥 위로 나뒹굴었고, 몇 개의 술병을 끌고 가 산산조각 내며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루나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억센 체구의 남자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슴을 위아래로 크게 헐떡이고 서 있었다. 리처드 캘러웨이는 여전히 단단히 쥔 주먹을 든 채, 굶주린 짐승처럼 덤벼들던 주변의 남자들을 향해 서슬 푸른 눈빛을 쏘아보고 있었다."누구든 저 아이에게 다시 손을 대는 놈은, 평생 그 손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리처드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바리톤 목소리가 치명적인 지배자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번개처럼 울려 퍼지자, 다른 취객들은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무대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본 루비는 즉시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요! 잘하셨어요, 기사님!" 루비가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며 외쳤다.한편, 루나라는 신분 뒤에 숨어 있던 오로라는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불과 몇 인치 앞에 있는 리처드의 단단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마치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가슴속을 채웠던 패닉은 이제 다른 종류의 두려움으로 바뀌어 요동쳤다. 한때 자신의 몸을 차지했던 이 중년의 남자에게 자신의 위장이 파헤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리처드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루나에게 다가섰다. 여자가 피할 겨를도
제127장단 하나의 사파이어빛 조명이 천장에서 내리꽂히며 메인 홀의 어둠을 가르고, 무대 중앙에 서 있는 루나의 날씬한 실루엣에 꽂혔다. 바이올린 연주곡의 선율이 하프 튕기는 소리와 섞여 천천히 흘러나오며, 신비로우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루나는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체형을 감싼 적포도주색 실크 드레스가 유연하게 나부꼈고, 허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밤바람에 놀아나는 한 송이 깃털처럼, 회전하고 튀어 오르는 그녀의 발놀림은 지극히 가벼웠다. 허공을 그리는 길쭉한 손가락의 움직임은 신비로운 무용수의 매혹에 완전히 매료된 수백 쌍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의 시끄러운 수군거림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숨이 막힐 듯한 열정과 감탄이 섞인 시선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하지만 그 마법은 VIP석 맨 앞줄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선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은 무대를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완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용수의 날렵한 움직임은 서서히 아득해졌고, 그 자리를 뉴욕의 가랑비 속에서 애교 있게 웃던 오로라의 잔상이 채웠다. 빌어먹을, 가슴을 짓누르는 이 답답함은 오히려 가슴을 더욱 강하게 죄어왔다.바로 옆에 앉은 리처드 역시 같은 표정의 일렁임을 내비치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위스키 잔을 세게 쥐고 있었다. 가면을 쓴 무용수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상하기는커녕, 리처드의 눈에는 저택에서 오로라와 보냈던 마지막 밤의 잔상이 투영되고 있었다. 떠나기 전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저택의 온기를 모조리 빼앗아가 버린 그날 밤이. 오로라라는 이름은 두 캘러웨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저주처럼 울려 퍼졌다.관객석 뒷줄에서는 니콜라스의 양복 주머니 속에 든 전화기가 강렬하게 진동했다. 27세의 남자는 기기를 꺼내 들었고, 화면에 떠오른 수석 비서의 이름을 확인하
제126장오로라는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가면 뒤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가슴을 막아서는 고통을 내뱉은 뒤, 몸을 돌려 탈의실을 향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양심을 계속해서 갉아먹는 과거의 죄악에 짓눌려, 걸음을 옮기는 매 인치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한때 이선과 나누었던 금지된 관계, 그리고 리처드의 오만함 앞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야 했던 기억은 그녀가 돌아갈 자격을 박탈하는 두꺼운 벽이 되어버렸다. 소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그 현실이 계속해서 맴돌며, 멀리 떠나 있는 것만이 모두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되새겨주었다.한편, 여전히 긴장의 잔재가 감도는 로비 구석에서 오드리는 손가락에 쥐어진 손수건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녀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는 이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의 시선을 파괴적인 과거의 소용돌이로부터 돌리려 애썼다."이선 씨,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시고요." 오드리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는 상사의 단단한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오늘 밤 메인 홀에서 특별 무용 공연이 있어요. 자, 안으로 들어가서 관람해요. 머릿속의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잊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이선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꽉 다물어진 입술 틈새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오드리. 오늘 밤은 머릿속이 너무 가득 차서 그 어떤 것도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아." 이선이 쉴 대로 쉰 헛헛한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머릿속이 가득 차 있으니까 더더욱 비워내셔야죠." 오드리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이선의 눈가에 남아 있던 축축함을 다시 한번 닦아주며 채근했다. "어서요, 적어도 이선 씨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해요."이선이 오드리의 청을 따라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순간, 클럽 일 파라디소(Il Paradiso) 로비의 유리문이 다시 한번 요란하게 딸랑거렸다. 정장 차림의 검은색 맞춤 양복을 입은 억센 실루엣이 압도적인 지배의 아우
제125장루나의 급한 발걸음이 적포도주색 실크 드레스와 부딪히며 미세한 마찰음을 냈고, 일 파라디소(Il Paradiso) 로비의 어스름한 정적을 갈랐다. 그녀는 고개를 최대한 깊이 숙이고 두 팔을 몸 옆에 바짝 붙인 채, 소파 구석에 앉은 매의 눈을 가진 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만을 가슴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이선이 앉아 있는 벨벳 소파의 그림자 경계선을 루나의 구두 뒤꿈치가 막 지나는 순간, 캘러웨이 가문의 청년이 갑자기 허리를 바짝 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어쩌면 지극히 짙게 얽힌 기억의 실타래거나, 공기 중에 남아 있던 익숙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이선의 중추신경을 강렬하게 자극했다."잠깐만!" 이선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쉴 대로 쉬었지만, 안쪽 방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의 쿵쾅거리는 비트를 뚫고 나갈 만큼 강렬했다.쿵.루나에게는 세상이 회전을 멈춘 것만 같았다. 두 다리의 모든 관절이 마치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시멘트로 고정된 것처럼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너무나 미친 듯이 뛰어서, 극심한 패닉의 충격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이선은 탁자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음료 잔을 무시한 채 신속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폭이 넓고 가파른 그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며, 둘 사이의 거리를 1미터도 채 남지 않을 때까지 좁혀왔다. 남자는 호흡을 불규칙하게 몰아쉬며 제 앞에 서 있는 자그마한 뒷모습의 실루엣을 똑바로 응시했다."오로라...?" 이선이 소름 끼칠 정도로 격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음성에는 솟구치는 불신과 함께 짙은 그리움이 넘쳐흘렀다.루나는 상아색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두 눈을 감겼다. 패닉에 빠진 신음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그녀의 턱이 꽉 다물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얼굴 상반신이 은색 브로케이드 조각 가면으로 촘촘히 가려져 있는데도, 어떻게 이 남자는 단 한 번 지나치는 것만으로 자신을 알아볼
제125장루나의 급한 발걸음이 적포도주색 실크 드레스와 부딪히며 미세한 마찰음을 냈고, 일 파라디소(Il Paradiso) 로비의 어스름한 정적을 갈랐다. 그녀는 고개를 최대한 깊이 숙이고 두 팔을 몸 옆에 바짝 붙인 채, 소파 구석에 앉은 매의 눈을 가진 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만을 가슴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이선이 앉아 있는 벨벳 소파의 그림자 경계선을 루나의 구두 뒤꿈치가 막 지나는 순간, 캘러웨이 가문의 청년이 갑자기 허리를 바짝 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어쩌면 지극히 짙게 얽힌 기억의 실타래거나, 공기 중에 남아 있던 익숙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이선의 중추신경을 강렬하게 자극했다."잠깐만!" 이선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쉴 대로 쉬었지만, 안쪽 방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의 쿵쾅거리는 비트를 뚫고 나갈 만큼 강렬했다.쿵.루나에게는 세상이 회전을 멈춘 것만 같았다. 두 다리의 모든 관절이 마치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시멘트로 고정된 것처럼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너무나 미친 듯이 뛰어서, 극심한 패닉의 충격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이선은 탁자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음료 잔을 무시한 채 신속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폭이 넓고 가파른 그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며, 둘 사이의 거리를 1미터도 채 남지 않을 때까지 좁혀왔다. 남자는 호흡을 불규칙하게 몰아쉬며 제 앞에 서 있는 자그마한 뒷모습의 실루엣을 똑바로 응시했다."오로라...?" 이선이 소름 끼칠 정도로 격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음성에는 솟구치는 불신과 함께 짙은 그리움이 넘쳐흘렀다.루나는 상아색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두 눈을 감겼다. 패닉에 빠진 신음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그녀의 턱이 꽉 다물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얼굴 상반신이 은색 브로케이드 조각 가면으로 촘촘히 가려져 있는데도, 어떻게 이 남자는 단 한 번 지나치는 것만으로 자신을 알아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