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늘 선우유미가 한 말이 추월녀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무왕이 오래전부터 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하나 난 기억을 잃은 적이 없는데도 인상이 없어. 굳이 9년 전의 한 가지 일을 떠올리면 그 화재밖에 없는데? 그때 불 속에서 구출된 뒤로 거의 보름 동안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었지.’유상무가 억울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추월녀는 마치 9년 전의 그를 보는 듯했다.‘억울하고 서글프다고 내게 말하는 것 같네.’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추월녀 한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유상무는 고개를 돌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9년 전, 국공 어른께서 아바마마를 모시고 강평에 가셨을 때, 저희 황자들이 동행하였지요. 물론 월녀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그 말에 사람들은 9년 전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자객이 황제를 습격한 것은 물론 불까지 지른 탓에 추월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다쳤다.선대 국공은 황제를 보호하느라 어린 추월녀를 돌볼 겨를이 없어서 추월녀는 결국 앓아눕게 되었다.유상무가 말을 이었다.“그날 밤, 소자는 우연히 한 어린 계집아이를 구하게 되었사옵니다. 모두가 상처를 입은 아바마마를 보호하고 또 자객을 쫓느라 강평에 거의 보름 동안 머물렀지요. 물론 소자도 매일 호위무사들과 함께 자객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틈이 날 때마다 그 아이를 돌보러 갔사오나 그 아이가 약을 먹지 않아서 소자가 직접 먹여야 했사옵니다.”유상무의 말을 들은 추월녀는 본능적으로 옷깃을 움켜쥐더니 심장이 무언가에 찔린 듯 아픈 것을 느꼈다.유상무는 여전히 무표정을 한 채 황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보름 동안 돌봐오던 그 아이가 의식이 흐릿한 상태에서 소자의 품에 기댄 채 나중에 커서 소자에게 시집오겠다고 속삭이곤 했사옵니다. 물론 여덟 살짜리 아이가 한 말이라 의미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소자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나중에 그 아이를
그 말에 추월녀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추소하는 놀라서 안절부절못했으며 선우유미는 자신의 옷자락을 꼭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선우혁도 잠시 멍해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이 빌어먹을 놈이 드디어 입을 열었군.’황제와 황후도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서비가 이 자리에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유봉진이 다리를 다친 뒤로 서비는 매일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혀 불공을 드리며 아들의 쾌유를 빌고 있었다.황후와 말다툼을 벌일 후궁들이 없어서 연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으나 황후조차도 너무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한동안 넋 놓고 있던 황제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물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추월녀가 황제의 아들인 진왕과 정을 나누었던 사이라는 사실을 동릉의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비록 훌륭하다 할지라도 진왕과 파혼하자마자 황제의 다른 아들과 엮였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진다면 백성들이 황실을 우습게 볼 게 뻔했다.“아바마마, 소자는 오랫동안 월녀를 연모해 왔사옵니다. 월녀 또한 제 여인이 되겠다고 9년 전에 약조하였고요. 해서 소자는 늘 이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나이다.”유상무는 허리를 곧게 편 채 분노가 담긴 황제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이어서 말했다.“소자는 전장을 누비면서도 그 약조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사옵니다. 북강을 평정하고 돌아와서 월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고자 생각했었는데...”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무왕은 지난 몇 년간 줄곧 전장에 나가 있었다.특히 이번에는 북강을 수복하느라 무려 5년 동안 도성에 돌아오지 못했고.그를 몇 년 동안 전장에 보낸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황제는 북강 평정에 관한 얘기를 듣더니 유상무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유상무가 말을 이었다.“소자가 북강을 수복하면 아바마마께서는 상을 내리시겠다고 약조하
선우혁은 자신의 모가지가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어찌하여 벌써 혼수 얘기가 나오는 것이야? 이리하면 상무가 가만있지 않을 터인데?’“황후 마마, 폐하, 이… 혼사는 아무래도 귀국하여 아바마마께 아뢰고 나서...”“물론 그리해야겠지.”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 그의 말을 끊었다.“셋째 황자, 양측이 모두 이 자리에 있으니, 폐하께서 국서를 써서 귀국의 황제께 사정을 알리면 될 일이오. 월녀가 이 자리에 있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정녕 놓칠 생각이오?”비록 선우혁이 웃고 있었으나 마음속은 눈물바다였다.‘황후가 왜 기어이 이 혼인을 성사하려는지 모르겠네.’추월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월녀는 어찌 이리도 태연할 수가 있지?’속이 다 타들어 가던 선우혁이 계속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으나 추월녀는 가벼운 웃음을 짓거나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건가?’“월, 월녀야. 혹... 혹 내게...”그 순간, 차가운 시선이 하나가 선우혁의 얼굴을 스치자, 선우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물으면 안 돼! 그리했다가는 월녀가 모든 부담을 떠안을 수 있어. 그건 사내가 할 짓이 아니야. 그리고 상무 저놈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어.’“그, 그것이... 제 생각에는...”‘동주의 셋째 황자인 내가 왜 이리 말을 더듬는 것이야? 비록 천하의 영웅은 아니나 그래도 일국의 황자인데.’선우혁은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누가 날 좀 구해주라. 제발!’“셋째 황자, 혹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이오?”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그게... 실은...”“동주의 황실은 최근 몇 년간 상사가 없었으니 이 때문은 아닐 것이고.”황후가 또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부드럽게 웃었다.“당당한 셋째 황자가 자기 입으로 월녀를 취하겠다고 말했으니, 당연히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을 터.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런 말을 내뱉을 리 없지
당사자인 추월녀와 선우혁조차도 잊고 있었는데 황후가 이를 언급했다.이에 깜짝 놀란 선우혁이 손을 움츠리자, 들고 있던 찻잔이 하마터면 부서질 뻔했다.사실 선우혁은 그 당시에 추월녀에게 진 것이 분했고, 또 유상무가 추월녀를 얼마나 연모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리 말했던 것이었다.‘그 대가를 충분히 치러서 상처받을 만큼 받았는데 또 받게 된다면 아마 미쳐 버릴지도 몰라.’“그, 그건...”나라의 체면이 걸린 문제라 물러설 수 없었던 선우혁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유상무를 바라보았으나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유상무는 이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듯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유상무의 성격에 대해 선우혁은 잘 알고 있었다.‘단순히 술 마시는 동작만으로도 몸에서 싸늘한 기운과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군.’선우혁이 또 조심스럽게 추월녀를 쳐다보니 마침 그녀도 겉보기에는 부드러우나 실은 차가움과 날카로움이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에 자신의 목이 당장이라도 누군가에 의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선우혁은 들었다.“그것이...”선우혁은 여전히 거절해 주길 간절히 바라며 추월녀를 바라보았다.‘어차피 너는 나와 혼인하고 싶어 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어서 거절하란 말이다.’하지만 추월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차만 마시며 선우혁을 쳐다보고 있었다.마치 자신이 뱉은 말을 스스로 주워 담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선우혁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그날 내가 왜 괜히 입을 놀려 벌집을 건드렸을까? 이를 어찌 수습해야지?’그는 또 한 번 추월녀에게 눈짓을 보냈다.‘거절하지 않고 뭣 하는 것이야? 네가 거절한다면 동주의 체면을 살릴 수 있어. 하나 내가 이를 거절하여 혼약을 파기한다면 양국의 두 황제가 나를 가만두지 않아. 추월녀야, 추월녀... 네가 유상무를 연모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어서 거절해.’드디어 추월녀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황후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천한 신분인 제가 어찌 감히 셋째 황자의
‘오래전부터라니?’“무왕 대군이 예전부터 전장을 누볐던지라 그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나도 나중에 오라버니를 따라 전장에 나간 탓에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을 터.”‘오래전부터 나를 마음에 품었다면 대체 언제 어디서 품게 된 것일까?’추월녀의 말에 선우유미도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무왕 오라버니가 오래전부터 월녀를 좋아한 게 틀림없어.’“월녀야, 혹 무언가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잘 생각해 봐. 무왕 오라버니가 오래전부터 널 좋아한 게 확실해. 여인이 옆에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분인데 네 옆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바로 앉지 않았느냐.”유상무에게 첫눈에 반했던 선우유미의 마음은 아프기 그지없었다.어릴 적에 그녀와 선우혁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준 사람이 바로 유상무였으니.그때부터 유상무의 영웅다운 모습이 선우유미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오랜 세월 유상무를 연모했음에도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했는데 오늘에 이리 다른 여인과 다정하게 있는 것을 봤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추월녀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와 무왕이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면 그게 대체 언제였을까?’살짝 머리를 두드려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다시 선우유미를 보니,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추월녀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이제 보니 너 무왕 대군을 연모하고 있구나. 한데 나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냐?”“그래. 난 무왕 오라버니를 연모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해서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선우유미의 마음은 복잡했다.비록 가슴 한편이 아려왔으나 추월녀가 무왕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기를 바랐다.그래야 무왕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무왕 오라버니는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 비록 영웅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사람들은 몰라.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고, 병상에서도 꼼짝도 못 한 채 몇 달을 누워있기도 했지.”선우유미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월녀야,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이냐?”유상무가 눈을 내리깔며 추월녀를 바라보았다.“네가 그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네 뜻에 따르겠다.”“나리 스스로 결정하시면 되는데 제 생각이 뭐가 중요합니까?”추월녀는 유상무와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그는 오히려 담담히 말했다.“실은 전부터 너를 우리 군의 책사로 임명하고 싶었다. 해서 네 생각이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해.”마치 아무도 없는 듯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존재감은 공기가 되어버렸다.그럼에도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의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했다.“북강에 있는 세력 중에 뛰어난 책사들이 많을 텐데 일개 여인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이에 유상무는 매우 진지하게 답했다.“봉진 같은 쓰레기조차도 네 도움을 받아 전쟁의 신이 되었는데 나처럼 무예가 뛰어난 자가 네 도움을 받는다면 남무와 북무를 평정하는 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구나.”“남무와 북무를 평정하겠다고요?”늘 침착을 유지하던 추월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추소하도 손을 덜덜 떨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그만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찻물이 사방으로 튀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추월녀는 유상무의 소매를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로... 남무와 북무를 평정하시려고요?”남무는 추월녀의 부모, 두 숙부, 셋째 당숙부, 그리고 영아란의 지아비가 목숨을 잃었던 위험한 곳이었다.물론 시신조차도 찾지 못했고.동릉이 건국된 이래 수백 년 동안 남무와 싸워서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비록 북강의 왕인 이 사내가 온갖 위기를 겪었더라도 과연 남무가 어떤 곳인지 알고는 있는 걸까?’“남무에는 기인과 술사가 넘쳐납니다. 게다가 진법, 고술, 독술, 환술, 미혼진 등 알 수 없는 전법을 사용하지요. 북강이 비록 위험하다고는 하나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 남무는 달라요.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하다 할지라도 고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