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고이한이 술잔을 비운 때였다.잔을 들고 지나가던 직원 한 명이 미처 소예지를 보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왔고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소예지가 알아차리고 몸을 피하려는데 허리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고이한의 손이었다.그저 가볍게 감싸고 있을 뿐인데도 손길에는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감과 은근한 소유욕이 묻어났다.소예지는 몸을 굳힌 채 고개를 들어 고이한을 바라봤지만 정작 고이한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괜찮아?”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딪힐 뻔한 소예지를 붙잡아준 자연스러운 행동에 불과했다.하지만 소예지는 알았다.단순히 그런 뜻만 담긴 행동이 아니라는 걸.조금 전 자신이 다가오는 걸 막지 않겠다고 하자마자 고이한은 기다렸다는 듯 허락받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있었다.“고 대표님과 소 박사님은 정말... 천생연분이시네요.”아까 술을 권했던 중년 남성이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 말에 소예지의 마음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중년 남성이 자리를 뜨자 소예지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고이한의 손을 밀어냈다. 적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이한도 더 욕심부리지 않고 순순히 손을 거뒀다.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소예지가 자신의 접근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잠시 후 고이한이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웠고 소예지도 이서연을 비롯한 연구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축하 연회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고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던 중 비서 한 명이 소예지에게 다가왔다.“소 박사님, 아까 테라스 쪽에서 고 대표님을 봤는데 위가 많이 아프신지 힘들어 보이셨어요. 먼저 모시고 가서 쉬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소예지는 표정을 굳히고 곧바로 테라스로 향했다.밖으로 나가자 고이한이 난간을 붙잡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손으로 배를 누른 채 통증을 참고 있는 듯 얼굴에도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왜 그래
“강 박사나 임 대위, 윤하준처럼 말이야.”고이한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소예지를 바라봤다.“그 사람들처럼 나도 당신에게 다가갈 기회를 갖고 싶어.”시선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존심이라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만큼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있었다.목소리에는 애원에 가까운 간절함이 묻어났고 그와 동시에 소예지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강한 집념도 느껴졌다.소예지는 최근 고이한이 보여준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달라진 모습도, 자신에게 다가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과거에 받은 상처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3년 동안 혼자 살아오면서 이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다시 누군가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려면 그만큼 큰 용기가 필요했다.“당신 술 많이 마신 거 아니야?”소예지는 혹시라도 술기운에 하는 말인가 싶어 물었다.방금 마신 와인도 이미 절반 이상 비운 데다 점심때 마신 술까지 생각하면 지금 얼마나 맨정신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아니야. 나 정말 정신 멀쩡해.”고이한은 고개를 저으며 더욱 진지하게 바라봤다.“그냥 당신이 고개만 끄덕여주면 돼.”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당신한테 다가갈 수 있게 해줘. 그래도 될까?”밤바람이 불어와 소예지의 뺨을 스쳤다.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가뜩이나 복잡한 마음까지 덩달아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소예지는 눈앞의 고이한을 가만히 바라봤다. 눈에는 집착이라 해도 좋을 만큼 짙은 간절함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이제는 알 수 있었다.고이한은 취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소예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고이한, 감정은 거래가 아니야.”“알아. 나도 알아.”고이한이 곧바로 대답했다.“내가 이기적인 것도 알아. 그런데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소예지.”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당신이 강준석을 보면서 웃는 것도, 나보다 젊은 남자들이 당신한테 웃으면서 다가오는 것도 질투가
“응.”소예지가 웃으며 대답했다.고이한은 말없이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엘리베이터가 연회장 층에 도착하자 안시윤이 먼저 내린 뒤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두 사람을 기다렸다.소예지는 고맙다는 듯 미소를 보이고 고이한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그때 고이한의 시선이 안시윤에게 향했다.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해 보였지만 묘하게 압박감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안시윤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가 이내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소예지는 먼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원과 이서연도 이미 도착해 있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강준석도 보였다.소예지가 강준석에게 다가가자 강준석도 몸을 돌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이한의 마음속에 또다시 초조함과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고이한은 이렇게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을 싫어했다. 더구나 자신이 풋내기 소년처럼 소예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마음을 졸이게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대표님.”이서연과 이지원이 다가와 인사하자 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예지 곁으로 걸어갔다.강준석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고 대표님, 오셨네요.”“강 박사님, 이번 발표회 성공한 것 축하드립니다.”고이한이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를 청했다.“감사합니다. 소예지 씨와 고 대표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프로젝트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강준석이 겸손하게 답했다.현재 강준석이 담당한 제품들은 같은 분야에서도 손꼽히는 인기 제품으로 자리 잡았고 실제 사용자들의 반응 역시 매우 좋았다.“강 선배, 축하해.”소예지도 잔을 들었다.강준석은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잔을 마주쳤다.소예지는 강준석이 오늘도 분위기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술자리를 소화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였다.“강 선배, 너무 많이 마시지 마.”“알겠어.”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듣고 있던 고이한은
그 세 사람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무엇보다 고이한이 신경 쓰이는 건 그들과 소예지 사이에는 아무런 상처도, 얽힌 과거도 없다는 점이었다.마음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처음부터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자신은 달랐다.과거 소예지를 실망시켰고 깊은 상처까지 남겼다. 두 사람 사이에 딸아이가 있었기에 다시 관계를 이어갈 기회라도 생긴 것이었다.‘만약 하슬이가 없었다면...’고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든 와인잔에 비친 눈에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자격지심이 어려 있었다.재산도, 지위도, 능력도 소예지 앞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했다. 소예지는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당히 설 수 있었다.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소예지가 고개를 들었다.맞은편에 앉은 고이한은 와인잔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분명 눈은 이쪽을 향하고 있는데도 어딘가 초점이 흐릿했다. 자신을 보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왜 그래? 음식이 입에 안 맞아?”소예지가 먼저 묻자 고이한은 그제야 생각에서 빠져나왔다.맑고 평온한 눈과 마주하자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이제 소예지는 자신을 적대하지도 않았고 예전처럼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이한이 바라는 감정 역시 보이지 않았다.소예지에게 자신은 이제 친구나 가족처럼 편하고 익숙한 사람일 뿐인지도 몰랐다. 한때 자신을 바라볼 때 느껴졌던 연인으로서의 설렘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것 같았다.고이한은 마음속에서 뒤엉키는 감정을 애써 눌러놓고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야. 맛있어.”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소예지는 그런 고이한을 가만히 살폈다. 아무래도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혹시 지난번 N국에서 생긴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위가 계속 불편한 건지 잠시 생각하다 먼저 물었다.“위는 아직 불편해?”“많
그런 소예지는 무척 매력적이었다.고이한은 목울대를 천천히 움직이다 옆에 놓인 생수를 집어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6시 반쯤 되어서야 소예지와 임재석의 이야기가 끝났다. 임재석은 자료를 정리한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대표님, 소 대표님. 두 분 저녁 식사는 3층 프렌치 레스토랑에 준비해 뒀습니다.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고마워요.”고이한은 제법 마음에 든다는 눈빛으로 임재석을 바라봤다.임재석이 나간 뒤 소예지는 통유리창 앞으로 다가가 팔짱을 낀 채 바깥을 바라봤다. 해가 저물면서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있었다.고이한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느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다가가 그대로 품에 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하지만 결국 마음만 먹었을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아무래도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절제하며 사는 것도 문제였다. 누릴 수 있는 행복까지 자꾸만 제 손으로 밀어내게 되니까.소예지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돌아섰다.“가자. 식당으로 내려가자.”그런데 고이한은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예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아니.”고이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냥 문득 소 박사님이 갈수록 대단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소예지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언제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 수는 없잖아.”고이한은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심이야. 예지야, 지금의 당신을 보면 정말 기뻐.”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고이한과 눈을 맞췄다. 조금 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빈말이 아니라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시선을 거뒀다.“식당이나 가자.”“응.”두 사람은 나란히 회의실을 나섰다. 고이한은 평소처럼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춰 소예지의 걸음에 맞췄다.“오늘 저녁에는 드레스로 갈아입을 생각 없어?”소예지가 긴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난
소예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젊었지만 누구도 더 이상 그녀를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주주들 역시 이미 나름대로 알아볼 만큼 알아본 상태였다.특히 소예지와 고이한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지고 있는 건지, 소예지가 앞으로도 고신 그룹 사모님의 자리를 지키게 될지 모두 속으로 저마다의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소 박사님은 정말 보기 드문 인재입니다. 회사의 민간 프로젝트 분야에서만 뛰어난 게 아니라 국가 차원의 의약 연구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내셨죠. 이 점은 저희 모두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한 원로 주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이사님, 과찬이세요.”소예지가 옆에 앉은 이 이사를 향해 겸손하게 답했다.이 이사는 고신 그룹의 초기 주주 중 한 명으로, 고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후계자 문제로 회사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에도 흔들림 없이 고이한을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소예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주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한아, 소 박사님처럼 현명한 안주인... 아니, 이렇게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둔 건 우리 고신 그룹의 복이야.”‘안주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몇몇 주주들이 의미심장하게 웃었고 시선도 자연스럽게 소예지와 고이한 사이를 오갔다.조금 전까지 진지했던 회의실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고 고이한의 굳어 있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양 이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고신 그룹의 복이죠. 그러니 앞으로 진행될 민간 프로젝트 투자에도 다들 이견 없으시겠죠?”“물론입니다. 미래 전망도 밝고 인류에도 도움이 되는 사업이니 저는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저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역시 이한이가 보는 눈이 있어. 우리 고신 그룹을 의료 분야로 이끌었잖아. 앞으로 회사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될 거야. 초기 투자 규모는 크지만 그만큼 전망도 밝고.”주주들이 잇달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가운데 방재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