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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8시.

고이한이 딸과 함께 현관으로 들어섰다. 소예지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깡충깡충 뛰어 들어오는 딸을 보았다. 손에 본 적 없는 핑크 토끼 인형을 들고 있었다.

소예지가 다가가 안으려 하자 고하슬이 손으로 밀어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흥, 엄마가 안는 거 싫어요.”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그때 키가 훤칠한 고이한이 허리를 굽혀 부드럽게 불렀다.

“고하슬.”

고하슬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팔에 안기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예지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다섯 살 된 딸이 심유빈에게 3년이나 세뇌당한 건 그녀의 책임이지, 고하슬의 탓이 아니었다.

울컥한 마음을 애써 참으며 양희순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하슬이 목욕 좀 시켜줘요.”

“네, 사모님.”

양희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예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거실에서 고하슬의 웃음소리와 고이한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론에서 고이한을 딸 바보라고 칭했는데 그 점은 소예지도 동의했다. 이 세상에서 고이한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단연코 딸이었다.

소예지는 문틀에 기대어 지난날을 떠올렸다.

8년 전, 고이한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었는데 그때 그녀 아버지의 병원에서 1년간 혼수상태로 누워있었다.

그를 짝사랑했던 소예지는 1년 동안 휴학까지 내고 정성껏 보살폈다.

고이한은 깨어나고 나서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고이한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도 그는 소예지와 결혼했고 1년 후 딸을 낳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대했다.

그런데 딸이 두 살이 되던 해에 고이한의 해외 출장이 잦아졌고 딸도 이유 없이 그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눈치가 느렸던 소예지는 2년이 지나서야 다른 여자가 딸의 옆에서 엄마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심유빈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예술계의 재원이었다. 게다가 고이한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이젠 딸도 그녀를 무척이나 숭배했고 또 잘 따랐다.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그녀와 결혼한 걸 후회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지난 2년간의 행동은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소예지는 물을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고이한의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알아. 양치질 꼭 시킬게. 손가락에 약 바르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아. 고집부리지 말고.”

소예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심유빈과 통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유빈이 고하슬의 양치질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걸 보면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했고 고하슬이 단 걸 먹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심유빈이 고하슬을 기쁘게 해주는 흔한 수법 중 하나였다.

고이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묵인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밤새우지 말고 일찍 자. 끊을게.”

전화를 끊은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돌아섰다. 그런데 소예지를 보자마자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오늘 밤에는 하슬이 데리고 먼저 자. 난 이따가 화상 회의가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

달력을 확인한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8일이구나. 화상 회의 끝나면 네 방으로 갈게.”

고이한은 이 말을 던지고 가버렸다.

8일은 부부 관계를 하는 날이다.

한번은 소예지가 서럽게 울면서 하소연하자 고이한은 한 달에 네 번은 꼭 잠자리를 갖겠다고 약속했고 날짜까지 정해놓았다. 매달 1일, 8일, 16일, 26일이었는데 그가 집에 있는 날이면 반드시 잠자리를 해야 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다음에 하자.”

소예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녁, 양희순이 샤워를 마친 고하슬을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소예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을 들고 기다렸다.

“하슬아, 이리 와. 엄마가 책 읽어줄게.”

소예지가 고하슬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고하슬이 고개를 들고 양희순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공룡 가져다줘요.”

“알았어. 가져다줄게.”

양희순이 공룡 인형을 찾으러 나갔다.

소예지는 고하슬이 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고하슬이 공룡 인형을 안고 그녀의 옆으로 기어왔다. 이 공룡 인형은 고하슬의 네 번째 생일 때 외국에서 가져왔는데 심유빈이 선물한 것이었다. 이젠 잠잘 때 꼭 안고 자는 애착 인형이 되었다.

부드러운 조명이 고하슬을 비췄다. 금방 샤워를 마친 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긋한 냄새가 났다.

소예지는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하슬이 손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엄마 뽀뽀하는 거 싫어요.”

그녀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고하슬!”

“엄마는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맛있는 것도 안 사주고 날 안 좋아하잖아요. 흥, 나도 엄마가 싫어요.”

고하슬이 팔짱을 끼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이의 말에 소예지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를 쓰다듬고 달래려 했다. 그런데 고하슬이 점점 더 화를 내더니 엄청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엉엉 울었다.

“아빠, 아빠. 아빠랑 같이 잘 거예요.”

잠시 후 훤칠한 키의 고이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하슬은 작은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고이한이 아이를 안고 다정하게 물었다.

“하슬아, 왜 그래?”

“아빠랑 잘래요. 엄마랑 자기 싫어요.”

고하슬은 고이한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럼 아빠 엄마랑 같이 가자.”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예지는 옆으로 움직여 부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제야 아이는 순순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고이한은 다른 쪽에 누워 팔을 벌려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의 팔이 길어 손가락이 소예지의 어깨에 스친 순간 그녀는 흠칫 놀랐다가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고하슬이 앳된 목소리로 몇 마디 하더니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소예지도 눈을 감고 고이한이 나가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20분쯤 지나 고하슬이 잠들자 고이한은 팔을 빼내 아이에게 이불을 여며주고는 몸을 숙여 머리에 입을 맞췄다.

소예지는 그가 습관처럼 그녀에게도 입을 맞출 걸 알고 돌아누워 등을 보였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소예지는 다시 돌아누워 딸을 품에 안았다.

고하슬은 어릴 때처럼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면서 안정감을 찾았다. 말랑말랑한 작은 볼이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소예지는 딸과 이마를 맞대고 누워다. 이 아이는 그녀의 심장과도 같았고 열 달 동안 품다가 목숨을 잃을 위험까지 무릅쓰고 낳은 보물이었다.

이 결혼 생활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데려가고 싶은 게 바로 딸이었다.

심유빈이 고씨 가문 안주인의 자리를 원한다면 기꺼이 내줄 수 있지만 그녀의 딸을 빼앗으려 한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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