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저녁 8시.

고이한이 딸과 함께 현관으로 들어섰다. 소예지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깡충깡충 뛰어 들어오는 딸을 보았다. 손에 본 적 없는 핑크 토끼 인형을 들고 있었다.

소예지가 다가가 안으려 하자 고하슬이 손으로 밀어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흥, 엄마가 안는 거 싫어요.”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그때 키가 훤칠한 고이한이 허리를 굽혀 부드럽게 불렀다.

“고하슬.”

고하슬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팔에 안기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예지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다섯 살 된 딸이 심유빈에게 3년이나 세뇌당한 건 그녀의 책임이지, 고하슬의 탓이 아니었다.

울컥한 마음을 애써 참으며 양희순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하슬이 목욕 좀 시켜줘요.”

“네, 사모님.”

양희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예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거실에서 고하슬의 웃음소리와 고이한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론에서 고이한을 딸 바보라고 칭했는데 그 점은 소예지도 동의했다. 이 세상에서 고이한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단연코 딸이었다.

소예지는 문틀에 기대어 지난날을 떠올렸다.

8년 전, 고이한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었는데 그때 그녀 아버지의 병원에서 1년간 혼수상태로 누워있었다.

그를 짝사랑했던 소예지는 1년 동안 휴학까지 내고 정성껏 보살폈다.

고이한은 깨어나고 나서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고이한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도 그는 소예지와 결혼했고 1년 후 딸을 낳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대했다.

그런데 딸이 두 살이 되던 해에 고이한의 해외 출장이 잦아졌고 딸도 이유 없이 그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눈치가 느렸던 소예지는 2년이 지나서야 다른 여자가 딸의 옆에서 엄마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심유빈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예술계의 재원이었다. 게다가 고이한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이젠 딸도 그녀를 무척이나 숭배했고 또 잘 따랐다.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그녀와 결혼한 걸 후회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지난 2년간의 행동은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소예지는 물을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고이한의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알아. 양치질 꼭 시킬게. 손가락에 약 바르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아. 고집부리지 말고.”

소예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심유빈과 통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유빈이 고하슬의 양치질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걸 보면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했고 고하슬이 단 걸 먹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심유빈이 고하슬을 기쁘게 해주는 흔한 수법 중 하나였다.

고이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묵인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밤새우지 말고 일찍 자. 끊을게.”

전화를 끊은 고이한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돌아섰다. 그런데 소예지를 보자마자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오늘 밤에는 하슬이 데리고 먼저 자. 난 이따가 화상 회의가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

달력을 확인한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8일이구나. 화상 회의 끝나면 네 방으로 갈게.”

고이한은 이 말을 던지고 가버렸다.

8일은 부부 관계를 하는 날이다.

한번은 소예지가 서럽게 울면서 하소연하자 고이한은 한 달에 네 번은 꼭 잠자리를 갖겠다고 약속했고 날짜까지 정해놓았다. 매달 1일, 8일, 16일, 26일이었는데 그가 집에 있는 날이면 반드시 잠자리를 해야 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다음에 하자.”

소예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녁, 양희순이 샤워를 마친 고하슬을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소예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을 들고 기다렸다.

“하슬아, 이리 와. 엄마가 책 읽어줄게.”

소예지가 고하슬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고하슬이 고개를 들고 양희순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공룡 가져다줘요.”

“알았어. 가져다줄게.”

양희순이 공룡 인형을 찾으러 나갔다.

소예지는 고하슬이 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고하슬이 공룡 인형을 안고 그녀의 옆으로 기어왔다. 이 공룡 인형은 고하슬의 네 번째 생일 때 외국에서 가져왔는데 심유빈이 선물한 것이었다. 이젠 잠잘 때 꼭 안고 자는 애착 인형이 되었다.

부드러운 조명이 고하슬을 비췄다. 금방 샤워를 마친 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긋한 냄새가 났다.

소예지는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하슬이 손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엄마 뽀뽀하는 거 싫어요.”

그녀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고하슬!”

“엄마는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맛있는 것도 안 사주고 날 안 좋아하잖아요. 흥, 나도 엄마가 싫어요.”

고하슬이 팔짱을 끼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이의 말에 소예지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를 쓰다듬고 달래려 했다. 그런데 고하슬이 점점 더 화를 내더니 엄청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엉엉 울었다.

“아빠, 아빠. 아빠랑 같이 잘 거예요.”

잠시 후 훤칠한 키의 고이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하슬은 작은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고이한이 아이를 안고 다정하게 물었다.

“하슬아, 왜 그래?”

“아빠랑 잘래요. 엄마랑 자기 싫어요.”

고하슬은 고이한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고이한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럼 아빠 엄마랑 같이 가자.”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예지는 옆으로 움직여 부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제야 아이는 순순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고이한은 다른 쪽에 누워 팔을 벌려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의 팔이 길어 손가락이 소예지의 어깨에 스친 순간 그녀는 흠칫 놀랐다가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고하슬이 앳된 목소리로 몇 마디 하더니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소예지도 눈을 감고 고이한이 나가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20분쯤 지나 고하슬이 잠들자 고이한은 팔을 빼내 아이에게 이불을 여며주고는 몸을 숙여 머리에 입을 맞췄다.

소예지는 그가 습관처럼 그녀에게도 입을 맞출 걸 알고 돌아누워 등을 보였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소예지는 다시 돌아누워 딸을 품에 안았다.

고하슬은 어릴 때처럼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면서 안정감을 찾았다. 말랑말랑한 작은 볼이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소예지는 딸과 이마를 맞대고 누워다. 이 아이는 그녀의 심장과도 같았고 열 달 동안 품다가 목숨을 잃을 위험까지 무릅쓰고 낳은 보물이었다.

이 결혼 생활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데려가고 싶은 게 바로 딸이었다.

심유빈이 고씨 가문 안주인의 자리를 원한다면 기꺼이 내줄 수 있지만 그녀의 딸을 빼앗으려 한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00화

    소예지는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팔짱을 낀 그녀의 입술에는 조롱이 서린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를 응시하던 소예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씁쓸한 고이한의 눈빛도 갈피를 잡지 못한 복잡한 감정으로 심하게 흔들렸다.소예지는 방으로 들어가 딸을 재웠고 고이한 역시 샤워를 마치고 곧이어 딸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린 딸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재잘거리자 그는 몇 번이나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공주님, 아빠의 귀염둥이.”고이한은 젖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딸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한 번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내 몸을 숙여 소예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예지는 순간 온몸이 굳어졌지만 딸 앞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그가 방을 나서자 소매로 서둘러 이마를 문질렀다.새벽녘이었다.고이한은 침대 위에 팔을 베고 누운 채 휴대폰으로 한 동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 장면은 8년 전의 모습이었다.병상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그 곁에서 한 소녀가 손을 꼭 잡은 채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어때? 새로 배운 노래야. 자장가처럼 불러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서 좋다고 말해줘야 해.”소녀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으며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이번엔 새로운 동화책 읽어줄 거야. 듣기 싫으면 빨리 일어나서 말해줘. 그렇지 않으면 싫다고 할 때까지 계속 읽어줄 거니까.”중환자실 안에서 소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아 생동감 넘치는 표정으로 동화책을 읽어 내려갔다.고이한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팔을 베고 누운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난 반년 동안 소예지가 자신에게 보인 차가운 태도가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마다,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소예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양희순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고하슬은 여러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9화

    “알겠어요, 제가 데리고 갈게요.”“정말 화가 나서 못 살겠다니까! 예지 걔는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더 세지니 원. 너희 둘 결혼한 지 벌써 6년이나 됐는데도 어린애처럼 철이 없으니 말이다!”진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불만을 쏟아냈다.“어머니,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고이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달랬다.“내가 그때 왜 그렇게 결혼을 반대했는지 이제는 너도 알겠지? 결국 이런 문제가 터지잖니. 사리 분별은커녕 어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잖아!”진가영은 오늘만큼은 꼭 참아온 말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어머니 최현숙이 서 있었다. 진가영은 급히 휴대폰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이만 끊자.”최현숙은 이미 그녀가 하는 말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며느리랑 티격태격하니?”“어머니, 방금 걔가 얼마나 고집을 부리는지 못 보셔서 그래요. 내 딸이었으면 진작에 혼냈죠. 며느리니까 참고 있는 거죠.”진가영이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하자 최현숙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애들 사이가 좀 냉랭해진 거 모르니? 젊은 사람들 일에 너무 끼어들지 마라.”진가영도 물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오히려 안쓰럽고 마음 아팠다.“우리 이한이가 한 달 생활비만 몇억씩 꼬박꼬박 챙겨주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잘해줘야 하나요? 그런데도 매번 그렇게 싸늘하게 구니...”최현숙은 손자가 최근 너무 바빠 손자며느리를 외롭게 만든 탓이라 생각했다.‘앞으로 이 늙은이가 잘 다독여서 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야겠어.’고이한의 별장.“엄마, 이것 봐요! 내가 그린 그림이에요. 엄마, 아빠, 나랑 젤리까지 다 있어요!”딸 고하슬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달려왔다.소예지는 딸의 귀여운 볼을 살짝 비비며 칭찬했다.“우리 하슬이 정말 잘 그렸네! 내일 쉬는 날인데 어디 가고 싶어?”아이는 엄마의 목을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8화

    “나 안 가려고.”소예지가 단호히 거절했다.“왜 안 가? 야근도 없잖아.”소예지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로 향했다. 이서연이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 티켓, 40만 원이나 하는 거라고!”잠시 후 이서연은 안채린에게 다가가 불만을 털어놓았다.“소예지 걔 도대체 뭐야? 네가 좋은 마음으로 준 티켓인데 고마워하긴커녕 받지도 않아.”안채린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안 받을 줄 알았어.”“설마 아직도 인터뷰 뺏긴 일 때문에 너한테 앙심 품고 있는 거 아니야?”“겉으론 괜찮은 척하지만 속으론 분명 화났겠지.”안채린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걔가 안 가면 우리끼리 가지 뭐. 네가 준 스무 장 티켓 다 나눠줬어. 다들 벌써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강 선배도 티켓 받았대?”안채린이 물었다.“조수한테 줬어. 강 선배가 사무실에 없더라고.”안채린은 강준석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가 온다면 둘만의 아름다운 저녁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한편, 강준석과 소예지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화제는 심유빈의 연주회로 흘러갔고 강준석 역시 갈 생각이 없었다.오후 내내 연달아 회의를 끝낸 강준석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매곡 마을 주민들이 화학공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그쪽에서 증거 자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강준석은 곧 법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라는 요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며 소예지에게는 참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강 선배도 조심해. 지난번 경고 전화는 화학공장 측에서도 대응에 나섰다는 뜻일 테니까.”실험실로 돌아온 소예지는 박시온과 영상통화를 했다.“오늘 심유빈 단독 연주회 날이잖아.”박시온이 아이패드를 들고 몇 번 화면을 넘기다가 심유빈의 홍보 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 체육관의 대형 LED 광고판엔 온통 심유빈의 포스터가 가득했다.“정말 팬이 많긴 많네.”박시온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심유빈의 회사는 그녀를 완벽하게 포장했다. 그녀의 이름 앞엔 언제나 글로벌 스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7화

    심유빈의 눈가엔 미묘한 도발이 깃든 미소가 감돌았다.“소예지 씨, 그 목걸이 말이에요. 내가 양보할게요.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내가 관심 없는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돼요.”소예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그녀의 말끝이 슬쩍 심유빈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기울었다. 뜻을 곱씹게 만드는 묘한 말이었다.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고이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호기심과 탐색의 시선으로 소예지를 빤히 응시했고 심유빈 역시 소예지를 천천히 훑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문득 눈앞에 있는 소예지가 반년 전 자신이 알던 사람과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졌다.과거의 소예지는 마음속을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상대가 되어 있었다.그때 강준석과 윤혁이 다가왔다. 윤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이한에게 물었다.“고 대표님, 얘기는 잘 끝나셨나요?”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심유빈을 향해 말했다.“우리 먼저 내려가지.”잠시 후 윤혁 일행은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고이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조용한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여보세요.”“이한아, 과학기술원에서 6월에 의학 시상식을 열 예정인데 자네를 시상자로 초청하고 싶다고 하네. 시간 괜찮겠지?”“영광입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좋아, 그럼 만나서 다시 얘기하지.”통화를 마친 고이한은 다시 심유빈에게 다가가 말했다.“지 대표님 쪽에서 연구실 지원을 약속했어.”심유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역시 오빠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줄 알았어.”“그리고 과학기술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6월에 있을 시상식에 나를 시상자로 초대한다고 해.”심유빈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나도 따라가도 될까?”그러더니 마치 문득 떠올린 듯 덧붙였다.“내 동생이 주인공이 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고이한 역시 이번 시상식에서 특효약 개발자가 수상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6화

    십여 점의 경매품은 순식간에 모두 주인을 찾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물품은 심유빈의 차지가 되었다.곧이어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됐다.잔잔한 음악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고급 와인의 은은한 향기가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참석자들은 여전히 방금 전까지 진행된 경매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소예지가 윤혁에게 물었다.“선배, 곧 9시인데 지 여사님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야.”마침 그때 조명이 바뀌었다. 아늑하던 실내가 은은한 댄스홀 분위기로 변했고 음악도 우아한 춤곡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도윤재는 용기를 내어 안채린에게 춤을 신청했으나 그녀는 춤을 출 줄 모른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망해진 도윤재를 외면한 채 안채린은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강준석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을 초대해 주기를 기다렸다.바로 그 순간 윤혁의 휴대폰 화면이 환히 빛났다. 그는 급히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강준석과 소예지에게 말했다.“지금 나랑 같이 가자.”세 사람은 윤혁을 따라 연회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채린은 질투 어린 눈길로 소예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내내 강준석의 시선은 오직 소예지에게만 향해 있었다.한편, 2층의 호화로운 휴게실 앞에서는 심유빈이 고이한의 넥타이를 부드럽게 고쳐주고 있었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이한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이 소예지와 마주쳤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선 소예지와 강준석은 마치 서로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연인 같았다.고이한은 심유빈에게 짧게 말했다.“나 먼저 들어갈게.”“그래.”심유빈이 사랑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고이한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심유빈은 우아한 걸음으로 소예지 일행에게 다가왔다.“강 선생님, 또 뵙네요.”윤혁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고이한은 분명 소예지의 남편인데 방금 본 심유빈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부적절해 보였다. 그러나 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소예지 씨, 잠깐 기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5화

    소예지는 조용히 자리를 골라 앉았고 마침 맞은편에 고급스럽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미녀가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은 소예지가 단숨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여배우들이었다.“공익광고 모델, 원래 이수정 아니었어? 갑자기 피아니스트 심유빈으로 왜 바뀐 거야?”“고신 그룹하고 지온 재단이 원래 협력 관계였잖아. 모델 정도는 저쪽에서 한마디만 하면 바로 바뀌지 뭐.”“부럽다, 그런 운은 아무한테나 오는 게 아니지. 듣기로는 심유빈이 고이한 곁에 있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됐다던데. 고이한이 다른 여자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유빈만 총애한다고 하더라.”“정말이야?”“나도 들은 얘기지만, 원래 임은우 회사가 먼저 경기장 사용 계약을 마쳤대. 그런데 임은우 콘서트 일정이 8월로 미뤄지고 심유빈이 먼저 독주회 장소로 쓰게 됐다고 하더라고.”“임은우 콘서트가 미뤄졌다고?”소예지 역시 그 이야기에 잠시 놀랐다. 임은우는 지난 10년간 최고의 인기를 누려온 스타였다.잠시 후 매니저들이 나타나 여배우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고 소예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으로 향했다.연회장에 들어서자 화려한 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참석자들의 존경 어린 시선만 봐도 그녀가 오늘 행사를 주최한 지온 자선재단의 지유선 대표임을 알 수 있었다.지유선은 10년 넘게 자선활동에 헌신한 인물로 정·재계 인사들이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오늘 밤 모두 이 자리에 참석한 듯 보였다.그때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자선 경매가 진행됩니다. 먼저 지유선 대표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지유선이 무대에 올라 진심 어린 눈빛으로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전한 후, 간략히 경매 물품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었다.사람들은 준비된 자리에 자유롭게 앉기 시작했다. 소예지 일행은 뒷줄에 자리를 잡았고 고이한과 심유빈은 가장 앞줄의 특별석에 앉았다.윤혁이 소예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너도 가서 고 대표 옆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