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교지가 하루 먼저 왔는지 확인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승정원 출납부.
교지는 초안이 승정원에 들어온 날부터 어보가 찍혀 내려간 날까지, 한 줄도 빠짐없이 그 장부에 적힌다.
중전으로 있던 시절, 그녀는 그 출납부를 직접 펼쳐 본 적이 있었다.
역병 때 내려간 구휼 교지가 왜 3일이나 늦었는지 따지기 위해서였다.
그때 승정원 서리가 쩔쩔매며 안내하던 서가의 자리를, 그녀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말단 의녀가 승정원 문서고에 들어갈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서리들이 지키고, 밤에는 순라군이 돈다.
"연이야."
의녀청 뒤뜰에서 저녁 설거지를 하던 연이가 고개를 들었다.
순덕에게 말을 전하고 막 돌아온 참이라, 콧등이 찬 바람에 발갛게 얼어 있었다.
"오늘 밤, 나와 함께 담을 하나 넘어 주겠느냐."
연이의 손에서 바가지가 툭 떨어졌다.
"……스승님, 지금 도둑질하자는 거예요?"
"도둑질은 무슨. 복례가 남긴 말이 참인지 확인하려는 게다."
연이는 한참 서의를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오므렸다.
"위험한 거죠?"
"그래."
"들키면 경 치는 거고요?"
"아마도."
"……좋아요."
뜻밖의 대답에 눈을 깜빡이는 서의 앞에서, 연이가 바가지를 주워 들고 물기를 탈탈 털더니 씩 웃었다.
"스승님은 시체 말을 믿으시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스승님 말을 믿을래요."
서의는 대꾸 대신,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연이의 손등을 제 소매로 한 번 훔쳐 주었다.
***
처소를 나서기 전, 서의는 품에서 꺼낸 은비녀를 한동안 손바닥에 올려 두었다가 쪽 찐 머리에 밀어 넣었다.
폐위되던 밤 이후 처음으로, 머리에 다시 꽂아 보는 비녀였다.
누가 보냈든, 오늘 밤만큼은 이 비녀가 그녀를 중전이었던 사람으로 서 있게 해 줄 것 같았다.
자시가 가까운 밤, 승정원 문서고 담장 아래에 쪼그려 앉은 연이가 서의의 소매 끝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누가 오면 부엉이 소리를 내거라."
"저 부엉이 소리 못 내는데요. 부, 부엉……. 이거 부엉이 같아요?"
"……병아리 같구나."
"병아리도 새잖아요!"
"쉿."
연이의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담장 너머를 살피던 서의가, 인기척이 끊긴 틈을 타 기왓장에 손끝을 걸고 담을 넘었다.
문서고 안은 먹 냄새와 묵은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달빛이 창살 사이로 가늘게 스며들었고, 그녀는 그 빛에 기대어 서가를 더듬어 나갔다.
발등 위로 쥐 한 마리가 후다닥 지나가자, 서가 모서리를 움켜쥔 손에 땀이 배었다.
동쪽 3번째 서가, 폐위가 있던 그해.
손끝에 닿는 장부의 등을 하나씩 짚어 가다가, 마침내 찾던 해의 출납부를 빼 들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담장 밖 기척에 귀가 곤두섰다.
정월부터 한 장씩 넘겨, 원자가 쓰러진 늦가을의 달.
서의의 손가락이 한 줄 위에서 멈췄다.
폐위 교지 초안, 승정원 입고.
그 아래 적힌 날짜를, 그녀는 3번 읽었다.
사건 전날이었다.
원자가 쓰러진 것은 그다음 날 밤이었다.
은비녀가 검게 변하고, 왕이 "네가 했느냐"고 묻고, 그녀가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 밤.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그녀를 폐하는 교지는 이미 쓰여 승정원에 들어와 있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그 줄을 끝까지 따라가자, 초안을 올린 자의 이름을 적는 칸이 나왔다.
그 칸에는 먹 대신, 종이 결이 거칠게 일어난 자국만 남아 있었다.
"……하."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숨이 새어 나왔다.
2년 동안 그녀는 하나만 붙들고 살았다.
그 밤, 왜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 말했기에, 무엇을 미처 증명하지 못했기에.
수없이 되감으며 제 목소리를 탓하고, 제 손을 탓했다.
그 아이에게 가르쳐 준 문장이 있었는데도.
'죽은 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말하지 못할 뿐이니, 어미가 대신 적는다.'
무릎 위에 앉아 그 말을 따라 하던 원자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마마마, 그럼 어마마마가 죽으면 누가 대신 적어 줘요?
그땐 네가 적어 주렴.
싫어요.
어마마마는 안 죽을 거잖아요.
그렇게 웃던 아이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어마마마, 배 아파…….
그 작은 몸을 끝까지 살펴 주지 못한 것도 어미가 모자란 탓이라고, 2년 내내 제 가슴을 쳤다.
이제 보니 그녀가 무슨 말을 했어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었으니까.
부엉-
담장 밖에서 어설픈 새소리가 들렸다.
부엉, 붱-
부엉이라기엔 너무 높고, 닭이라기엔 너무 짧은 소리였다.
서의는 장부를 품에 끌어안고 서가 뒤로 몸을 숨기며, 머리에 꽂은 은비녀가 서가에 부딪칠세라 고개를 한껏 수그렸다.
곧 바깥에서 등롱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방금 그거 무슨 새냐?"
"글쎄, 병든 닭인가."
"문서고 근처에 닭을 누가 키워."
"몰라, 춥다. 어서 돌자."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서의는 서가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판이 다 짜인 자리에서 혼자만 모른 채 목이 쉬도록 매달리던 중전을, 그들은 얼마나 우습게 내려다보았을까.
손등으로 틀어막은 입술 사이로, 울음이 새어 나가면 안 됐다.
대신 한 문장이 가슴 밑바닥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나는 그날 밤 폐위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이전에, 이미 폐비였다.
무릎 위에 펼쳐진 장부로 달빛이 비껴들었다.
이름이 지워진 칸을 손끝으로 쓸자, 보풀이 가시처럼 일어나 손가락에 걸렸다.
손톱으로 눌러 보아도 일어선 결은 눕지 않았고, 칼끝이 지나간 자리는 주변 종이보다 희었다.
2년을 묵은 흠이라면 덮인 장부의 무게에 눌려, 진작 납작하게 가라앉았어야 했다.
약재고 장부의 출납 서명도 칼로 긁혀 있었다고 했다.
같은 칼끝이 이 칸에도 다녀간 것이다.
등 뒤의 어둠이 갑자기 깊어진 것 같아, 서의는 저도 모르게 쪽문 쪽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그녀보다 먼저 이 장부를 펼쳤다.
그것도, 불과 며칠 사이에.
칼끝이 살갗에 닿기 직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몸이 홱 돌아가며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코끝으로 침향이 밀려들었다.찌익-비단 찢기는 소리가 귓가에서 났다.그녀를 감싼 팔이 크게 떨렸고, 머리 위에서 낮은 숨이 끊어지듯 새어 나왔다.고개를 들자, 흰 도포에 흑립을 눌러쓴 사내가 보였다.갓 그늘 아래, 이를 악문 턱선이 어스름 속에서도 또렷했다."……전하."대답 대신 이현이 그녀를 담벼락 쪽으로 밀어 넣었다.등 뒤에 그녀를 감추고 돌아선 그의 손에, 도포 안에서 뽑아 든 환도가 들려 있었다.자객의 칼이 다시 내리꽂혔다.챙-쇳소리가 좁은 골목 벽에 부딪혀 날카롭게 튀었다.동궁 시절 활터에서 해가 지도록 시위를 당기던 손목은 칼을 받아 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다만 막아 낼 때마다, 왼쪽 옆구리께 도포 자락이 검게 젖어 들었다.다음 칼이 들어오는 순간 반걸음 파고든 이현의 환도가, 자객의 칼 밑을 미끄러져 들어갔다.억눌린 신음과 함께 자객의 무릎이 꺾였고, 검은 천으로 싼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혔다."뒤에!"서의의 외침에 이현이 몸을 틀었다.골목 어귀를 막고 섰던 다른 하나가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들이닥쳐 있었다.옆구리를 감싼 채 도는 걸음이, 반 박자 늦었다.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서의는 품에서 은비녀
서의는 그 한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꼭' 자의 마지막 획 끝에 먹이 동그랗게 뭉쳐 있었다.받아 적던 붓이 거기서 한참을 머뭇거린 자리였다.등잔 가까이 종이를 들자, 약재 냄새 아래로 다른 냄새가 묻어났다.향이었다.법당 기둥에 오래 배었다가, 종이를 펼칠 때마다 조금씩 풀려나오는 냄새.종이 결도 궐에서 쓰는 것과 달랐다.닥 껍질을 덜 걸러 거뭇한 티가 군데군데 박힌, 두껍고 거친 종이였다.산중 절에서 스님들이 손수 떠 쓰는 종이가 꼭 이랬다.금란의 보따리에서 나온 약재 꾸러미 하나를 집어 들어 싸 맨 종이를 풀자, 접힌 귀퉁이 안쪽에 엄지손톱만 한 붉은 인이 찍혀 있었다.인수당.10여 개의 꾸러미가 하나같이 같은 인을 품고 있었다.구리개는 혜민서 앞으로 약재상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였다.보름이 멀다 하고 산길을 오르던 사람이, 그 길목에서 약을 짓고 갔다.위험한 곳에 혼자 가지 마라.처소 담벼락 앞에서 그가 어명이라며 붙인 조건이 귓가에 걸렸다.꾸러미를 도로 싸는 사이, 편전 서안 위 엎어진 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떠올랐다.이 종이를 들고 가면, 이것도 그 손바닥 아래로 들어갈 것이다.원자는 죽었다.그 한마디를 하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녀를 등지고 전각을 나선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연이는 짚방석 위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덮어 준 겉옷 아래로 동그랗게 웅크린 어깨가 숨결 따라 오르내렸다.
찻물이 식어 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서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그 밤 "네가 했느냐"고 묻던 목소리보다도 차분하게,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그러하옵니까."서의는 다관을 들어 식은 찻잔을 비우고, 새 차를 따랐다.손이 떨리지 않았다.떨리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제가 이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팽이는 증좌이옵니다. 검시실로 도로 가져가겠사옵니다.""이것은 짐이 둔다.""전하께서 판정에 손대지 않으시겠다 하셨사옵니다.""판정에는 손대지 않는다. 팽이에 손대는 것이다."서안 위 손을 거두지 않는 이현에게 더 청하지 않고, 서의는 다반을 거두어 일어섰다.문턱을 넘어 돌아서 문을 닫는 사이, 문틈으로 그가 보였다.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그제야 조금 들려 있었다.엎어진 팽이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 등이 한껏 굽어 있었다.문이 닫혔다.밤이 깊어서도 의녀청 검시실에는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연이는 구석 짚방석 위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먼저 가라고 3번을 일렀는데, 시신 곁에 스승님 혼자 두고는 못 간다며 기어이 버틴 끝이었다."의녀."문간에 선 허진은 의금부 복색 소매에 먹물이 튄 채, 옆구리에 두툼한 장부 한 권을 끼고 있었다."약재고 출납부를 빌려 왔소. 비상 1냥이 나간 줄, 출납 서명 칸이 또 칼로 긁혀 있더이다."장부를 받아 등잔 아래 펼치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손톱으로 눌러 보아도 보풀은 눕지 않았다.눈을 감자, 승정원 문서고에서 달빛 아래 펼쳐 두었던 출납부가 되살아났다.폐위 교지 초안을 올린 자의 이름 칸에서 손가락에 걸리던 보풀이, 그 결 그대로 떠올랐다."칼끝이 왼편에서 들어가, 획 끝에서 위로 들리며 빠졌사옵니다. 그래서 오른편 끝에만 종이가 뜯겨 말려 올라가 있사옵니다."허진이 등잔 곁으로 몸을 숙였다."……정말 그렇군. 그런데 그걸 어찌 그리 단번에 보오?""전에 같은 결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어디서인지
"스승님, 뭐라고 쓰여 있어요?"고개를 들이미는 연이 앞에서, 서의는 팽이를 손바닥 안에 접어 쥐었다."……아무것도. 흠집이다."팽이를 무명에 다시 싸 소매 깊숙이 넣었다.손이 떨리지 않도록, 손목에 힘을 주었다.'아직이야.'꺾이려는 무릎을 버티며, 서의는 금란의 굳은 손을 붙잡았다.죽은 이의 손이, 산 사람의 손보다 단단했다.'아직은 무너지면 안 돼.'"시신을 의녀청 검시실로 옮기거라. 표주박과 보따리도 함께. 내 눈앞에서 하나도 흘리지 말고."군사들이 들것을 펴는 동안, 서의는 협문 앞 흙바닥을 살폈다.금란이 쓰러진 자리에서 협문까지는 이슬 젖은 흙바닥 위로 10걸음 남짓이었다.몇 걸음만 더 갔으면, 금란은 궐 밖 길 위에서 쓰러졌을 것이다.궐 밖에서 죽은 나인은 궐의 검험을 거치지 않는다.길에서 객사한 나인으로 적히고, 보따리는 길바닥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터였다.독을 탄 손이 셈한 것보다, 비상이 조금 빨리 돌았다."연이야.""네, 스승님.""오늘 본 팽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금란이 조카에게 주려던 것이다. 그리 알거라."눈을 끔뻑이는 연이의 얼굴에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기색이 어렸지만, 서의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들것이 검시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낯익은 짤랑거림이 회랑 끝에서 다가왔다."비상 중독이라지. 약재고 비상이 빈 일과 엮인 시신이니, 내의원이 거두어 가겠네."남궁도가 하리 2명을 앞세우고 웃으며 섰다.서의는 들것 앞으로 나서서, 소매에서 상아 패를 꺼내 들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 나리. 이 시신의 검안이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옵니다."남궁도의 눈이 패 뒷면의 어압에 닿았다.웃음은 그대로였는데, 열쇠 꾸러미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솟았다."……전하께서 귀한 것을 내리셨구먼."하리들에게 턱짓하고 돌아서기 직전, 남궁도의 눈이 들것 끝에 얹힌 금란의 보따리에 한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검시실에서 서의는 검안서를 써 내려갔다.침방 나인 금란,
먼저 움직인 것은 서의였다.다반 위의 손을 거두어 무릎에 내려놓고, 문지방까지 들리도록 고개를 숙였다."……의녀는 누구의 잔이든 먼저 살피옵니다. 전하께서 2년 전 일을 떠올리실 만큼 흔한 버릇이옵니다.""그러하냐.""은비녀가 희다고 다 깨끗한 것도 아니옵니다."서의는 왕 앞의 잔을 도로 끌어와, 새끼손가락 끝을 적셔 혀에 댔다.마른 국화와 대추, 꿀 조금.혀끝이 저리지도, 목이 조이지도 않았다."독은 없사옵니다.""그래도 물리라."윤 상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다관을 거두었다.허리를 펴는 사이, 그 눈이 서의의 품께에 한 번 머물렀다.비녀를 넣은 바로 그 자리였다.윤 상궁이 물러가자, 이현이 복내관에게 눈짓했다.복내관이 소리 없이 그 뒤를 밟아 나갔다가, 한 식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소주방에도 다방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중궁전 안채로 들었사옵니다. 다관은 그대로 손에 든 채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날 미시의 찻상은, 빈 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끝까지 조용했다.그날 밤 서의는 처소 문고리에 머리카락을 끼우며, 처음으로 손끝이 떨렸다.흔한 버릇이라는 말이 윤 상궁의 귀에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버릇은 여전하구나'는, 훨씬 오래 남았을 터였다.이튿날 동이 트기 전이었다."스승님! 스승님!"다급하게 처소 문을 두드리던 연이가, 문이 열리자 숨이 턱에 닿은 얼굴로 서쪽을 가리켰다."서쪽 협문 앞에 침방 언니가 쓰러져 있대요! 그 언니요, 순덕 언니 대신 약재 심부름 다니던!"서의는 신을 꿰며 품을 더듬었다.은비녀와, 상아 패.수문장과 군사 몇이 둘러선 서쪽 협문 앞, 그 가운데 나인 하나가 모로 누워 있었다.등에 멘 보따리 끈이 어깨를 파고든 채였다."물러서라. 내의원에 기별을 넣었으니-"앞을 막아서는 수문장에게, 서의는 소매에서 패를 꺼내 내밀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수문장의 눈이 상아 패의 어압에 닿자마자 허리가 접혔다.연이가 서의의 등 뒤에서 입을 떡 벌
"……차, 말이옵니까."서의는 제 귀를 의심했다.혼자 다니지 말라는 어명보다도 더 엉뚱한 조건이었다."기미상궁이 있사옵니다.""기미상궁의 차는 쓰다.""찻잎을 오래 우리지 말라 이르시면 될 일이옵니다.""이르면 그날만 덜 쓰고, 이튿날 또 쓰다."이현이 태연하게 소매를 털었다."매일 미시, 편전으로 차를 들이라. 증거든 검안서든, 그 찻상에 얹어 오면 된다. 의녀가 날마다 편전을 드나들 핑계로 그만한 것이 없지."듣고 보니 그럴듯했다.그럴듯해서, 더 얄미웠다."……둘째 조건은 무엇이옵니까.""차 맛을 보고 정하마."이튿날 미시, 다반을 받쳐 들고 편전에 드는 서의의 뒤를 연이가 화로와 탕관을 끌어안고 바짝 따랐다."제가 들어 드릴게요! 탕관이 얼마나 무거운데요!""편전 안에는 못 든다.""문간까지만요! 문간에서 얌전히 있을게요!"정말로 문간에 얌전히 무릎을 꿇은 연이는, 서의가 찻잎을 덜기도 전에 벌써 손가락 하나를 접고 있었다.첫날, 이현은 찻잔을 입술에 대자마자 내려놓았다."싱겁구나."이튿날은 한 모금을 넘기고 미간을 좁혔다."쓰다."서의는 다반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세자빈 시절에도 이 사람은 꼭 이랬다.새 찻잎을 들이면 하루는 싱겁다, 하루는 쓰다 트집을 잡다가, 3일째에야 아무 말 없이 잔을 비우고 빈 잔을 그녀 쪽으로 밀어 놓곤 했다.그때도 그녀는 그 트집이 찻잎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동궁전 다방에서 차를 내오는 나인을 두고, 굳이 빈궁을 불러 앉히려는 핑계였다.3일째 되는 날, 이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밀었다.또 비우고, 또 밀었다.곁에 선 복내관이 품에서 꺼낸 일지 위를, 붓끝이 사각사각 긁었다.'전하, 차 3잔 비우심. 쓰다는 말씀 없음. 평소엔 반 잔.'"복내관.""……예, 전하.""무얼 적느냐.""날씨이옵니다. 오늘 볕이 참 좋사옵니다."창밖에는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이현은 대꾸하지 않고 빈 잔을 또 한 번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