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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 손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2:14:13

서가 그림자 속에서 숨을 죽인 서의 쪽으로, 등롱 불빛이 서가 사이를 한 칸씩 밝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곳은 많지 않았다.

웅크린 채 들키면 도둑이 되고, 먼저 나서면 길 잃은 의녀쯤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매는 맞겠지만, 의금부로 끌려가느냐 마느냐는 그 한 걸음에 달려 있었다.

서의는 치맛자락을 털고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 있사옵니다, 대감."

얼굴 정면으로 쏟아진 등롱 불빛에 눈이 시었지만, 서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기서 고개를 돌리면,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이 된다.

"……의녀?"

정 대감이 미간을 좁혔다.

2년 사이 아버지는 부쩍 늙어 있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고 눈가 주름이 깊게 패었지만,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이 야심한 시각에 좌의정이 몸소 열쇠를 들고 문서고를 찾을 까닭은 많지 않았다.

오늘 아침 박 의관이 약재고 장부를 들고 편전에 들었고, 부자 반 근이 빈 것이 왕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밤, 아버지가 이곳에 왔다.

무언가를 확인하러, 혹은 치우러.

"어전 전속 검시 의녀이옵니다, 대감."

"아, 네가 그 산골 의녀로구나."

정 대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비틀렸다.

딸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기색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등롱이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의 관복 가슴께에서 매화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중궁전에 들렀다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이 밤중에 중전을 만나고, 곧장 문서고로.

2년이었다.

뺨 아래부터 목덜미까지 불에 덴 살이 엉겨 붙었고, 목소리는 일부러 긁어 낮췄다.

그래도 서의는 어딘가 기대하고 있었다.

아비라면, 걸음걸이든 눈매든 무언가 하나쯤은 알아보지 않을까 하고.

"의녀가 이 시각에 승정원 문서고에는 무슨 일이냐."

"검안서를 승정원에 올리러 왔다가 길을 잃었사옵니다."

"길을 잃어? 담을 넘어서?"

정 대감이 등롱을 내려 그녀의 손을 비췄다.

"산골 출신치고는 손이 곱구나."

거두지 않은 손등을 타고 올라간 불빛이 손목의 오그라든 살갗에 닿자, 정 대감이 코끝을 찡그리며 등롱을 거뒀다.

"흉하군."

그 한마디로, 아버지는 딸을 알아볼 기회를 지나쳐 갔다.

"그런데도 전하의 눈에 들었다지. 그 몰골로 사내 눈에 드는 재주가 있나 보구나."

대꾸 대신, 물음 하나가 속에서 맴돌았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딸에게만은 하지 않던 말을, 남의 딸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었을까.

"중전마마께서 너를 몹시 언짢아하시더구나."

정 대감이 턱밑까지 들이민 등롱에서, 뜨거운 기운이 턱 끝을 핥았다.

"내 딸이 언짢으면, 나도 언짢다."

내 딸.

서의는 그 두 글자를 꼭꼭 씹어 삼켰다.

이 사람에게 이제 딸은 하나뿐이었다.

"요즘 궐에 쥐새끼가 많더구나. 남의 장부를 뒤지고 다니는."

서가를 훑던 등롱 불빛이 출납부가 꽂힌 자리를 지나, 안쪽 궤 위에서 멈췄다.

걸쇠가 비뚜름하게 걸려 있었다.

서두르느라 미처 바로 걸지 못한 걸쇠였다.

정 대감의 눈매가 단번에 가늘어졌다.

"무얼 보았느냐."

"아무것도 보지 못했사옵니다."

"무얼 보았냐고 물었다."

그가 성큼 다가섰다.

어린 딸을 번쩍 안아 올리던 넓은 어깨가, 이제는 담벼락처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보았다 한들 소인이 무얼 알겠사옵니까, 대감. 의녀는 시체만 읽을 줄 아옵니다."

말이 혀끝에서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이 사람에게 배운 글씨로 방금 이 사람의 죄를 베껴 놓고도, 목소리는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시체를 읽는 눈이 종이는 못 읽는다? 그 혀로 내 앞에서 장난을 치느냐."

"……."

"천한 것이 감히."

짝-!

고개가 홱 돌아갔다.

뺨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서의는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바로 했다.

눈앞에 아버지의 손이 있었다.

5살 때 열병을 앓던 밤, 밤새 그녀의 이마를 짚어 주던 손.

시집가던 날,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

그 손이 지금 그녀의 뺨을 쳤다.

정 대감은 그 손바닥을 소매에 문질러 닦았다.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사람처럼.

뺨은 금세 얼얼해져 감각이 무뎌졌는데, 명치 아래 어딘가가 얼음을 삼킨 듯 시렸다.

"여봐라!"

정 대감이 쪽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문서고에 도둑이 들었다. 이것을 끌어내 의금부로 넘겨라!"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뛰어 들어온 승정원 하리 둘이, 서의의 양팔을 우악스럽게 붙들었다.

팔이 뒤로 꺾이자 저고리 안섶에서 종이가 버석거렸다.

아버지의 글씨를 베낀 그 종이였다.

한 번만 더 몸을 비틀면, 안섶 밖으로 미끄러져 나올 것이었다.

버티던 팔에서 힘을 빼고 하리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가슴께만은 꼿꼿이 펴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를 숨 속에 묻었다.

"의금부 도사에게 단단히 일러라."

정 대감이 하리들 쪽으로 턱을 들었다.

"입을 열 때까지, 손톱을 하나씩 뽑아도 좋다고."

서의는 어금니를 맞물었다.

의금부로 끌려가면 문서고에 숨어든 까닭을 캐물을 것이고, 해령 고을의 의녀 서의가 누구인지도 캐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2년 전 불에 타 죽었어야 할 여자가 나올 것이다.

담장 밖의 연이까지 함께.

"마지막으로 묻겠다. 무얼 보았느냐."

정 대감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끝까지 입을 다물겠다면, 그 입부터 찢어 주마."

손바닥이 바람을 가르며 내려왔다.

서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똑똑히 보아 두고 싶었다.

나를 버린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러나 손은 그녀의 뺨에 닿지 않았다.

허공에서 누군가 그 손목을 낚아챘다.

정 대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서의를 붙든 하리들의 손이 동시에 풀렸다.

고개를 든 서의의 눈에, 등롱 불빛 너머로 짙은 용포 자락이 들어왔다.

손목을 쥔 손등 위로, 불에 녹았다 굳은 듯한 흉터가 드러나 있었다.

"좌상."

낮은 목소리가 문서고 안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짐의 의녀요. 손 치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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