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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모든 화살의 끝

Auteur: 훌리아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09 07:00:58

119화

지빌라는 잠시 시선을 떨군 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미묘한 열기가 번지는 것을 느끼자, 스스로를 나무랐다. 생각이 어디까지 닿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괜한 상념에 발이 묶였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

프레데리크는 기사단의 훈련을 마치고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갑주를 벗자 어깨에 남아 있던 열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지만,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들은 그를 쉬게 두지 않았다.

식사는 들지 않았다. 몸의 피로보다도, 머리가 멈추지 않는다는 감각이 먼저였다.

문이 열리며 토르벤이 들어왔다. 시종장은 잠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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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120화 곁에 설 사람

    120화프레데리크는 고개를 들어 곁에 서 있던 보좌관들을 불렀다.“랑베르.”“예, 각하.”“피엘.”“명하시면.”프레데리크는 단호하게 말했다.“대공비의 호위기사를 새로 임명한다. 각자 한 명씩—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사로 추천해.”이건 선택이 아니라 대비였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을 향한, 가장 조용한 준비.프레데리크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시험대 위에 올려둘 생각이 없었다.***조용하던 대공성에,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긴장이 스며들었다.본성 홀의 문이 열리자 열 명의 기사 후보들이 동시에 들어섰다. 깔끔한 북부의 검은 기사복을 입은 채, 숨을 삼키는 소리만은 숨길 수 없었다. 바닥의 석재 위로 발꿈치를 미세하게 옮겼다.대공의 보좌관 랑베르와 피엘은 홀 가장자리에 물러서 있었다. 각자가 고른 다섯 명. 검술, 가문, 충성, 모두 계산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기준을 묻는 이는 없었다. 선택은, 대공비의 몫이었다.잠시 후.홀의 공기가 달라졌다. 문지기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고, 이어 시종들이 한 박자 늦게 숨을 죽였다.지빌라가 들어섰다. 황녀이자

  •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119화 모든 화살의 끝

    119화지빌라는 잠시 시선을 떨군 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얼굴에 미묘한 열기가 번지는 것을 느끼자, 스스로를 나무랐다. 생각이 어디까지 닿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괜한 상념에 발이 묶였다는 자각 때문이었다.‘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프레데리크는 기사단의 훈련을 마치고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갑주를 벗자 어깨에 남아 있던 열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지만,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들은 그를 쉬게 두지 않았다.식사는 들지 않았다. 몸의 피로보다도, 머리가 멈추지 않는다는 감각이 먼저였다.문이 열리며 토르벤이 들어왔다. 시종장은 잠시 그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각하, 대공비 전하께서 온실 정원을 마련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허락을—”“이미 말했을 텐데.”프레데리크는 말을 끊었다.“전부 위임했어. 성 안의 일은, 그녀가 결정한다.”그러나 토르벤은 물러서지 않았다.“그럼에도 전하께서… 큰 변동이 있는 사안은 재차 확인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저희에게까지요.”그리고 레오노라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보고했다.프레데리크는 잠시 침묵했다.그 뜻을 이

  •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118화 은밀해질 수 있는 것들

    118화지빌라는 개인 서재에 앉았다. 책상 위에 종이를 올려두고 잠시 펜을 멈췄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기 전,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클로리스였다.서부에서 북부로 떠나오던 날, 끝내 말로 다 하지 못했던 것들. 그 모든 것을 편지에 담아내듯, 그녀는 천천히 글을 적어 내려갔다.클로리스에게.서부를 떠나 북부로 오는 동안, 네 생각을 참 많이 했단다. 덕분에 무사히, 그리고 생각보다 잘 도착했어.처음 겪어 본 북부는 차갑고, 화려함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곳이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단다.함께하던 신부 수업은 잘 이어가고 있니? 장부 보는 일은 이제 제법 눈에 익었을 테고, 말 타는 것도—네가 겁내던 것에 비해 꽤 나아졌을 거라 믿어.괜히 잔소리처럼 느껴질까 싶어도, 자꾸 네 근황이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봄이 되면, 서부에 남아 있던 북부 기사들이 돌아올 예정이야. 그때 기회가 된다면, 함께 북부로 놀러 오지 않겠니?눈이 녹은 뒤의 풍경은, 지금과는 전혀 다를 거야.조만간 다시 편지할게.그때는, 조금 더 여유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늘 너를 걱정하는,지빌라가.마지막 문장에 점을 찍고 나서야, 지빌라는 숨을 고르듯 펜을 내려놓았다. 편지는 다정했고, 거짓은 없었다. 클로리스를 걱정하는 마음도,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애틋함도 모두 진심이었다.

  •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117화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117화토르벤은 레오노라에게 굳이 되묻지 않았다. 대공비의 의중을, 그것도 시녀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일은 오히려 무례에 가까웠다.“확인해 두지요.”짧은 대답이었지만, 충분히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드레스 한 벌이 완성되는 데에는 수개월이 걸리는 일이었다. 대공비가 요구한 드레스만 해도 여러 벌이었다. 속도를 높여야 했다.레오노라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돌아서며 비로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회와 드레스 제작에 맞춰, 성 안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게 될 터였다.그녀는 정치적인 부분까지는 그 진위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분위기만큼은 짐작하고 있었다. 황실에서부터 서부를 거쳐 북부에 이르기까지, 불안 요소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프레데리크는 지빌라를 보호하듯 지켜내고 있었다.‘…왜?’그는 황녀이자 대공비가 된 지빌라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아낸 사람처럼 달라져 있었다.레오노라조차 황녀가 겉보기와 다르다는 점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레데리크는 이제, 그보다 더한 진실을 알아낸 사람처럼 보였다.남녀 사이가 되고, 내밀한 것까지 나누게 된 걸까. 그 믿음과 신뢰가 금이 가고 조각나게 된다면……연회가 열리면 곧, 대공 부부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선언이 될 터였다. 그 사실이 가슴 어딘가를 무겁게 눌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은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생각도 없었다.&n

  •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116화 그날을, 나도 기다리고 있어

    116화거처로 걸어가는 동안, 지빌라는 문득 깨달았다. 성 안의 모든 시선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그녀에게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노골적이지는 않았다. 수군거림도, 과한 예도 없었다. 다만 스쳐 가는 눈길 하나하나에 비슷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기대.그 사실이 순간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황녀로서 받아 온 시선과는 달랐다. 여기서의 기대는 찬사도, 호기심도 아니었다.지켜보고 싶은 마음.그리고 기다려 온 마음.지빌라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생각했다. 이 성의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다려 왔다. 젊은 대공들이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 자리를 메울 후계자는 언제나 말로만 존재했다.그 기다림이 한 사람에게 쏠릴 때, 그 무게가 얼마나 조용하고 무서운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부담스러웠지만, 외면할 수는 없었다.그들의 시선 속에는 조급함보다도, 간절함보다도, 마치 오랜 겨울 끝에 찾아올 봄을 믿어 온 사람들의 체념에 가까운 희망,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품고 있던 바람 같은 것이 있었다.지빌라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이 성이 그녀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이제는 알고 있었다.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무거운 대신, 조금은 단단하게 그녀를 받쳐 주고 있었다.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빌라는 더 묻지 않았다. 북부의 정비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군무가 얼마나 바쁜지, 그가

  •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115화 오래된 의무를 다하듯

    115화브람은 대공비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가 대공의 말을 돌보고 있는 만큼 대공비의 말 또한 함께 관리하는 일이 완전히 무리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무엇보다 아이는 늘 그의 그림자처럼 곁에 붙어 있었다.“레온, 고개 숙여 인사드리거라.”레온은 잠시 지빌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지빌라는 그것을 수락으로 받아들이고 말했다.“고맙구나, 레온.”그제야 지빌라는 아이의 옷차림이 이 겨울을 나기에는 지나치게 얇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전쟁 통의 그 겨울에도, 아이들은 늘 버텨내지 못했다. 그녀는 함께 온 에르나와 레오노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시종장에게 전해. 이곳으로 따뜻한 옷감으로 지은 새 옷을 여러 벌 보내도록.”“네.”브람은 즉흥적으로 내려진 하사에 놀랐다. 황녀였던 대공비의 씀씀이가 남다르다는 생각이 스쳤다.“전하… 감사하오나, 저희는 이미 충분한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지빌라는 브람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 성실해 보여서 그래요. 부담 갖지 말아요.”그때 마구간 입구로 프레데리크가 들어섰다. 무기고와 군마의 정비 상태를 살피던 중, 대공비가 애마를 보러 왔다는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언제든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이상하리만큼 차분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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