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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구원의 손길처럼, 족쇄처럼

Author: 훌리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4 12:50:51

3화

지빌라는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회심의 미소를 띠며.

“신께 기도드리는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프레데리크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나야 함을 받아들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녀의 정원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뒤로 부하들이 따라 걸어 나갔다.

무언가를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발걸음. 검은 제복을 따라 흐르는 서늘한 기류가, 정원의 향긋함조차 삼키는 듯했다. 장신의 키와 짧게 자른 흑발은 꽃이 만개한 정원 속, 단 한 송이 검은 백합처럼 눈에 띄었다.

지빌라는 꿀벌이 다시 돌아와 꽃 위에 내려앉아 꽃 속을 파고드는 것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저 남자… 내가 반드시 살릴 거야.’

드디어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도 잠시. 그녀의 눈동자엔 결기가 번졌다.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시녀 에르나가 물었다.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외출해야겠어. 저들을 보내서 준비시켜.”

시녀 에르나는 황녀의 명을 받들어 다른 시녀들을 황녀의 드레스룸으로 보냈다. 그들은 가는 길에 황후나 일황자에게 들러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할 게 분명했다.

“전하…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요?”

“그래 맞아.”

곁에 남은 에르나는 그새 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온 황녀를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황녀의 손은 어느새 가슴께의 펜던트에 닿아 있었다. 선황후 나타리에가 남긴 유일한 유품. 황녀를 낳고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어머니였다. 황제는 그 이름을 차마 떠나보내지 못해, 갓 태어난 딸의 두 번째 이름으로 물려주었다.

멀어지는 시녀들의 뒷모습을, 에르나는 곁눈으로 좇았다. 황후의 사람들, 그리고 일황자의 사람들. 선황후가 떠난 해에 첫 황자를 낳고, 이듬해 둘째까지 안으며 황후의 관을 쓴 여인이, 이제는 병석의 황제를 대신해 제국을 쥐고 있었다. 황녀를 향한 황제의 지지가 아무리 견고했던들, 깨어나지 못하는 지지는 힘이 되지 못 했다.

‘폐하께서 쓰러지지만 않으셨어도, 전하께선 지금쯤…….’

에르나는 차마 끝맺지 못한 생각을 삼키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전하께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실수록… 오히려 더 걱정이 돼요.”

지빌라는 대답 대신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에르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했다. 황녀는 늘 그랬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사람. 그 품은 깊고도 멀어, 다 헤아릴 수 없는 별처럼 느껴졌다.

황녀가 더 이상 황위에 관심을 두지 않자, 황후는 이황자를 지지하며 대리청정을 잇고자 했다. 그럴수록 일황자와의 대립은 깊어졌다. 저 멀리서 다른 시녀들이 종종거리며 오는 것이 보였다.

“전하, 이제 옷을 갈아입으러 드셔도 될 것 같아요.”

“평상시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야겠어.”

“네… 전하.”

황녀의 궁에서 마차 한 대가 조용히 빠져나갔다. 지빌라는 델보 후작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지빌라는 다음 수를 함께할 중요한 인물과 조우할 예정이었다.

***

후작 영애는 황녀의 방문에 기함했다. 하필, 오늘이라니. 황녀와 대공이 만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귀족가는 수도에 없었다. 출처는 뻔했다. 황후궁에서 흘러나온 말이었고, 누구도 감히 탓하지 못할 뿐이었다.

대공의 혼사라면 사교계가 입에 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베라트 가문에서도 가장 짙은 피. 대적할 자 없는 외형과 검술. 그런 사내가 스물셋이 되도록 결혼의 'ㄱ' 자도 꺼내지 않았으니, 제국 전체가 한 사내의 침실을 주시하는 형국이었다.

사교계의 내기는 늘 한 사람을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곁을 지켜온, 동부 클레브 백작가의 외동딸. 모두가 그 오랜 순애보의 결실을 점쳤다. 그 예상이 오늘, 황녀의 등장으로 뒤집힌 것이다.

‘황후 폐하께서야 두 손 들고 반기실 일이지. 중립만 지키던 북부가, 황실의 사람이 되는 셈이니.’

후작 영애 역시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으나,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었다.

“황녀 전하…… 정말로 오늘 오실 줄은 몰랐어요.”

“샤를로트… 궁금한 게 많겠지만 나중에.”

“레오노라 클레브 백작 영애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죠?”

“맞아… 어디에 있지?”

“작품을 보고 있어요. 제가 정원 가장 안쪽의 전시실로 안내했어요.”

“고마워.”

황녀 지빌라는 오늘을 기다렸다.

레오노라 클레브.

그 이름은 지빌라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언제나 차가운 감정과 함께 떠올랐다. 그녀도 알 것이다. 지빌라가 프레데리크 대공을 만났다는 사실을.

회귀 전, 레오노라는 대공비였다. 프레데리크가 유일하게 곁을 내준 여자.

겨우 다섯 살의 나이에 가주가 되어 북부를 짊어졌던 소년의 곁에, 어릴 적부터 레오노라가 있었다. 그 시절, 두 집안은 우호를 맺었고 두 아이는 마치 혈족처럼 자랐다.

지빌라는 그들이 어떻게 혼인하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 했다. 레오노라의 오랜 순애보가 결국 그를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도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전장에 나선 프레데리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건 혼인인증서 한 장.

남겨진 레오노라는, 전사한 대공의 아내로서 살아야 했다.

‘무엇이었을까. 사랑, 아니면— 책임감? 그의 선택만큼이나, 그 여자의 선택도 궁금했다.’

지빌라는 그날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두 사람은 함께 황태녀였던 그녀 앞에 섰다. 혼인인증서에 인장을 나란히 받던 두 사람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그리고 이제, 지빌라는 그 인연을 스스로 갈라놓게 된 것이었다. 대공비 자리는 지빌라의 것이 되었고, 레오노라의 결혼은 절반쯤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지금만은 그때와 달라야 했다. 누군가의 진심이 억울하게 끝나는 일이, 또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지빌라는 델보 후작성의 긴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빛이 쏟아지는 저 문 뒤편에 레오노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딸깍.

회화를 바라보던 레오노라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문턱 너머로 다가오는 인물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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