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7화
누군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카드는 손에서 놓인 순간 허공에 가볍게 떠올라 흐르고 있었다.
샤를로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황자 전하를, 마음에 두고 있어요.”
지빌라는 놀란 듯 눈을 들었다. 그녀가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손끝에 감긴 기류가 카드를 한 장, 또 한 장, 그리고 세 번째까지 이끌어냈다.
첫 번째 카드를 펼치며 조용히 읊조렸다.
“밤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수레바퀴…… 인연이 닿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라.”
“얼마나 오래요?”
지빌라는 잠시 말없이 샤를로트를 바라보았다. 회귀 전이라면—2년 뒤 전쟁이 터지고, 그녀는 황태녀 자리에서 밀려 서부 변경백에게 시집가야 했다.
이황자는 황후와 함께 궁을 떠나 한적한 영지에 묻혔다. 그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그녀는 조심스레 답했다.
“……아직은, 몰라.”
두 번째 카드, 그리고 세 번째 카드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빌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치 못한 상징들이 겹쳐져 있었다.
“희망은 있어. 연인의 인연이긴 해. 하지만…… 델보 후작이 널 그만큼 오래 기다려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샤를로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도 혼담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혼인해야 한다니… 너무 억울해요.”
말을 끝낸 샤를로트는 커튼 너머, 황녀의 정원이 있을 쪽을 바라보았다. 시든 꽃잎 너머에서 아직 피지 못한 봉오리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터였다. 꼭 저 같다고, 그녀는 여겼다.
지빌라는 아르카나의 말을 가감 없이 전했다. 그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 운명을 보여주는 일과, 운명에 따를 것인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선택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었다.
회귀한 뒤, 지빌라도 스스로를 위해 아르카나를 펼쳐보았다. 그러나 카드들은 끝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운명을 한 번 다 겪은 자에겐 더 이상 보여줄 미래가 없다는 듯이.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지, 어떤 선택이 남아 있는지. 그저 고요한 수면 위를 걷듯, 묵묵히 제 길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샤를로트는 문득, 황녀의 삶을 떠올렸다. 제 고민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녀는 수도의 고위 귀족과 정략결혼을 할 테고, 원하는 삶의 궤도를 큰 탈 없이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황녀 전하께서는… 대공 각하와의 정략결혼이 두렵지 않으세요? 여인에게는 일생 한 번뿐인 결혼인데요. 게다가 황궁을 떠나, 먼 북부로 가셔야 하고…….”
샤를로트의 망설이는 듯한 질문에 지빌라는 미소를 지었다. 애틋하게 느껴지는 염려가, 오히려 귀엽기까지 했다.
“두렵지 않아.”
그녀는 그 말만큼은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만약 지난 생을 전생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녀는 이미 두 번의 결혼을 치른 몸이었다. 첫 번째 남편은 전장으로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 했다.
그 후, 패망한 제국의 황녀는 전리품처럼 붙들려 스트라톤으로 끌려갔다. ‘신부’라는 이름 아래, 이름조차 버린 채 타국의 여인이 되어야 했다.
그날 이후, 지빌라는 결심했다. 다시는 누구의 것도 되지 않겠다고. 이제는 오직 제국만을 지키겠다고.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 결심 위에 서 있었다.
제국이 다시는 무너지지 않기를.
그것이 그녀가 가진 마지막 욕망이자, 이 생을 바쳐 치르고자 하는 속죄였다.
***
한편, 프레데리크는 황녀를 만난 후 수하에게 지시했다.
“앞으로 대공비가 될 황녀다. 잘 지켜봐.”
“보이지 않게 기사를 붙여 두겠습니다.”
프레데리크는 귀족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 가까운 곳의 타운하우스에 머물고 있었다. 상견례와 약혼식을 거쳐 결혼식까지 치르기 위해, 빠르면 석 달, 길면 반년 가까이 이곳에서 머물러야 했다.
일주일이 지나 보좌관 랑베르가 다가와 황녀의 동선을 보고해 왔다.
“대공 각하와 만난 이후 델보 후작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레오노라 클레브 영애를 만나셨습니다.”
“레오노라를?”
“예.”
프레데리크는 황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에 대한 의혹을 풀고자 레오노라를 찾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레오노라를 왜 만났지?”
랑베르는 고개를 숙였다.
“그건… 두 분이 밀실에서만 말씀을 나누셔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프레데리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황녀는 왜 하필 레오노라였을까? 혹시—나를 의심하는 건가?’
그는 황녀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 몇 가지를 떠올렸다. 성인이 된 그녀는 개인금고에 1년 치 예산을 지급받았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을 쓸모없고 화려한 것들에 탕진했다.
물론 황녀의 개인 소비를 탓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다만 그 과도함이 제국민들의 눈총을 사,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할 정도였다.
‘이 정도야, 귀여운 축이지.’
황녀는 자숙 중에도 음악회를 열었다. 연어의 죽음을 주제로 한 곡을 연주시킨 뒤, 끝나자 흐느꼈다.
“그이가 나를 부숴줬다면… 나는 완성됐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이는 다들 한결같이 말했다. 황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수도에 온 이후,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황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의회든 연회든, 모두가 그녀 이야기를 수군거리며 안줏거리 삼았다. 어떤 이들은 그 소문을 대화의 서두로 꺼내기도 했다.
“황녀가 말하기를 그이가 나를 부숴줬다면, 나는 완성됐을 거라고 했답니다.”
“누군진 몰라도, 밤잠 좀 설쳤겠군.”
황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본 이들은 저마다 그녀의 환심을 얻기 위해 분주해졌다. 사치스럽고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평이 따라다녔지만, 그녀를 얕볼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느 황족과는 견줄 수 없는 치명적인 매혹.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결국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프레데리크는 이마를 문질렀다. 황녀와 처음 마주했던 날의 차가운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그 눈빛에 어쩐지 익숙함을 느꼈다.
보좌관 랑베르는 창백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프레데리크는 문득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내려다보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무슨 소문?”
“황녀께서 전하와 레오노라 영애의 관계를 의심하고 계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시녀로 삼아 곁에 두려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떠돕니다.”
그는 말끝을 흐렸다가, 이내 단단히 각오한 듯 덧붙였다.
“황녀께서 전하를… 침실로 불렀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69화북부의 대공비로서 후계자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프레데리크와의 초야는 원래 없던 일이었다.두 번째 그와 몸을 섞었을 때,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여운 속에서 지빌라는 제 마음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절박하게 놓인 운명을 어떻게 수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레오노라…….’그녀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무겁게 되뇌었다.회귀 후 최대의 악수였다.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려던 선택은 철저히 어긋났다.“…내 오해라고 해야겠지.”회귀한 지금이라면, 그 죽음조차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전쟁의 불씨를 잠재웠고, 그에게 운명이 될 검을 전달했다.하지만 제 역할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면?그녀가 북부의 후계자를 가짐으로써 일어날 만약의 일들이 두려웠다.만에 하나, 프레데리크는 예정대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이용당할까 봐 겁이 났다.회귀했으니 이런 두려움 따위 없을 줄 알았다. 그저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라고 믿었는데.***지빌라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한 기척에 눈을 뜨려 했지만, 이미 그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프레데리크……?’그 침입
68화클로리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전하, 요제파가 누구예요?”지빌라는 제가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는 걸 깨달았다.“……아, 아직 이름을 안 지었지.”“…네?”“아니야. 혼잣말이었어.”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저 백마는 누구의 말이니?”클로리스도 창밖을 보며 답했다.“오라버니의 말이에요. 가문의 씨말에서 태어난 말인데, 두 살이에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서…….”지빌라는 눈을 떼지 못한 채, 기억이 살아 돌아왔다. 그녀를 회귀 전으로 끌어당기듯.조프루아는 결혼 선물로 순백의 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그 말을 ‘요제파’라 이름 지어 온갖 사랑을 쏟았다.하지만 전장에서 조프루아가 죽은 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서부를 떠나야만 할 때, 요제파를 데려갈 수 없었다. 그녀를 따라 쫓아오던 요제파는 레나토의 기사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그 순간의 고통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회귀 후 떠올리고 싶은 않은 기억 중 하나라 깊이 파묻었었다.지금 창밖에서 날뛰는 저 말― 요제파.분명, 너겠지.
67화프레데리크는 지빌라가 아무 말이 없자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일정에 차질이 생겼다고 말한 이라도 있나?”그가 오해한 듯해, 곧바로 말했다.“그런 일은 없었어요. 다만…….”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단지, 저를 배려해서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이었어요.”고요가 잠시 흘렀다.프레데리크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지만, 감정은 여전히 단단히 가려져 있었다.“일정에 관한 건 내 소관이야.”“알고 있어요. 처음 일정대로 따르겠단 뜻이었어요.”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황녀의 본모습은 어떤 것이지?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기라도 하면 누가 헤치기라도 하나?”지빌라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저는 이제 대공비로서 드리는 말이에요. 철없던 황녀 시절은, 잊어주세요.”프레데리크는 미묘한 감정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겉모습은 여전히 사치스러운 황녀였다. 눈부신 장식, 정교한 자수, 티 하나 없이 정제된 표정.하지만 그 껍데기 너머의 말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
66화재난으로 무너진 서부는 이미 전선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보급은 늦어졌고, 황실 지원군은 약속만 남긴 채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잦은 전쟁을 치르느라 지쳐 있었다.그 와중에, 용병국이 틈을 타 들이닥쳤다. 산맥을 따라 몰래 침투한 그들은 짐승처럼 빠르고 잔혹했다. 그때, 그의 손에 남은 건 검 하나뿐이었다.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그 검은 마치 스스로 적을 베는 듯, 그의 팔을 이끌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 검이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예언의 물건임을.지빌라가 그것을 그에게 건넸다는 것은 단순한 배려나 정략 이상의 의미였다.‘신의 검으로 인해, 죽음 속에서 베라트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그것은 오직 후계자에게만 전해지던 오래된 신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베라트의 피는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한다는 예언.세대를 거듭하며 수많은 후계자들이 그 말을 증명하듯, 스물다섯의 나이를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그 또한 예외일 수 없다고 믿어왔다.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온 세월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알 수 있었다.지빌라와의 혼인은 단순한 정략이 아니게 되었다. 그녀가 그의 운명을 비틀어, 전혀 다른 길로 이끌고 있었다.체념 같던 불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체온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지빌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렴풋한 어둠 속, 익숙한 숨소리가 멀어지자 곁에 다가온 이가 있었다.에르나였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지빌라를 부
65화지빌라는 감각을 버티지 못하고 등받이를 움켜쥐고 손톱으로 긁어댔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들썩이며 발작처럼 흔들렸다. 퍼져나간 불씨는 점점 속도를 높이면서 그녀의 몸을 집어삼켰다.“아! 아흣!”허벅지가 저릿하게 당기며 힘이 빠졌다. 기둥이 박힐 때마다 자궁벽이 덜컥거리며 울렸고,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전해졌다.숨이 가빠지며 목울대가 들썩였다. 뜨거운 감각이 서서히 아래에서부터 차올라 배 안쪽을 꽉 채우는 듯했다.“하아, 하… 앗!”등을 젖히자 허리까지 저린 쾌감이 밀려 올라왔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며, 다리에 힘이 풀려 제멋대로 떨렸다.그때 프레데리크의 치골이 그녀의 아랫배에 깊숙이 맞닿았다.쿵.그 묵직한 압박이 자궁 깊숙이까지 번져 전해졌다.“흐읏…!”지빌라는 숨이 막히며 몸을 활처럼 휘었다. 감각은 끝까지 쥐어짜듯 치솟아, 시야가 아득해질 만큼 끌어올려졌다.프레데리크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힘을 주어 간신히 제동을 걸었다. 움직임과 허리 속도를 조절하며, 감각을 내려놓게 했다.눈을 내리깐 채,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배에서 가슴까지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손끝은 살갗의 결 하나하나를 확인하듯, 한 곳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쪽.턱에 닿았던 입술이 점점 올라가 코
64화거리낌 없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높다란 콧대가 음핵 위를 짓누르자, 예민하게 반응하던 몸은 그 사소한 자극에도 미세하게 움찔거렸다.“흐으…, 프레데리크… 이제 그만, 그만…….”지빌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눌러 참으며, 몸을 조금이라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길과 힘의 무게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어느 순간 그는 후들거리는 그녀의 다리를 내려주고 상체를 들었다. 그가 기어왔다. 이어 손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부여잡았다.“……!”검고 깊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 눈빛 하나만으로 가슴 안쪽이 두근거렸다.무심한 듯 권태로워 보이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납게 굳었다. 목젖이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모습까지 지빌라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한입에 삼켜 버리려는 짐승의 눈으로, 화를 내듯 그녀를 훑어 내렸다.그 시선을 받으며 눈꼬리에서 귓불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채, 지빌라는 그저 그 앞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그녀만 바라보았다. 눈빛이 점점 가까워지자, 지빌라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했다. 심장이 어긋나게 뛰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순간이었다.“웁…!”신음만 흘리느라 바싹 마른 지빌라의 입술에, 프레데리크의 젖은 혀가 닿았다. 방금 그녀를 핥고 온 혀였다. 입술이 벌어지자마자 그 뜨거운 것이 난폭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