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현빈의 눈에 귀신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팔을 붙잡고 있는 소하의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과 이가 맞부딪힐 정도로 격렬한 그녀의 떨림을 보니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수 있었다.
"이거..장난 아니네...."
현빈이 다급히 휴대폰을 들어올린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거대한 망치로 차체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차가 좌우로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으악!! 엄마야!!!!!!"
소하의 찢어지는 비명에 놀란 현빈도 엉겹결에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뭐야 차가 왜이래! 왜 흔들려!!!"
본래 영혼이란 이승의 물건에 간섭할 히미 미미한 법이다.
헌데 지금 차는 마치 거인이 장난감을 흔들듯 무섭게 들썩이고 있었다. 이건 필시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현빈은 다급하게 핸드폰에서 재민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수화기 너머에선 낭랑한 안내원의 목소리만 흘러 나올 뿐이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수 없사오니.... ]
"아 하여튼 안재 이새끼 도움이 안돼!!!"
현빈이 험한말을 내뱉으며 표정을 구겼고 욕이라도 한번 더 할까 싶었지만 옆에서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는 소하를 보니 투덜 댈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차가 뒤집힐 듯 흔들리는 와중에도 별표 버튼까지 꾹 눌러 음성 메세지를 남겼다."야 안재민! 빨리 튀어나와! 건물 앞 결계 풀렸어! 차 박살나기 일보 직전이라고!"
녹음을 마치자 마자 차가 45도 각도로 기울어졌다.
그 반동으로 현빈은 중심을 잃고 휴대폰을 바닥에 놓쳐 버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공포에 소하가 현빈을 향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이게 다 당신을 때문이잖아!!! 이 사기꾼들아!!! 어떻게 좀 해보라고요!!"
"아니 난 보이지도 않는데 뭘 어떻게 하라구!!" "아니 도깨비가 왜 귀신을 못봐! 이 허당 도깨비야!!!!"두 사람이 차 안에서 티격태격하며 놀이기구 타듯 몸을 가누지 못할때 쯤, 현빈은 결단을 내린 듯 차 문을 박차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들 제 눈엔 그저 귀신 한마리 보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울 방법이 없는 현빈은 들썩이는 차 안에서 고통받는 소하를 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으아....어쩌지..삐삐...어쩌지... 미안해 삐삐!"
흥신소로 뛰어 올라가 재민과 도훈을 끌고 올까 싶었지만 혼자 남겨질 소하의 비명 소리가 현빈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낮고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것은.."오랜만이네 도깨비?"
그 한마디에 현빈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겨울바람때문이 아닌, 본능적인 포식자를 만났을 때 느껴지는 생존 본능의 경고였다. 생존 본능 경고에 현빈은 천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영하의 날씨가 무색하게 얇은 검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있었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 그리고 서늘한 눈매가 현빈을 압도했다."....어...어..."
현빈은 입을 뻥끗거렸지만 여자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눌려 어버버 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현빈을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현빈 쪽으로 천천히 걸어와 차를 움켜쥐고 미친듯이 흔들어대는 영혼들을 귀찮다는듯이 보며 혀를 끌끌찼다."하여간... 이놈의 영혼들은 정말 끝이 없다니까"
팟-!
여자가 오른손을 가볍게 펼치자 허공에서 까만 부채가 하나 나타나 그녀의ㅣ 손에 쥐어졌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부채를 휘둘러 ㅊ차를 에워싼 귀신들의 등을 가볍게 툭툭 쳐냈다.신기하게도 부채가 닿는 곳마다 영혼들은 먼지처럼 스러지며 사라졌다.
요동치던 차의 신동이 서서히 멎어갈때 쯤 운전대를 꽉 붙잡고 고개를 쳐박고 있던 소하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차 밖, 운전석 창문 너머에는 피식 웃고 있는 검은 원피스의 여자가 서 있었고, 반대편 조수석쪽에는 흉측한 형상을 한 귀신 하나가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저 재씨 아직도 여기 있네? 안재민이 아직도 못잡았나보지?"
"뭐?.... 설마 .... 그 악령?"현빈의 물음에 여자는 대답 대신 부채를 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 기다려봐 저새끼 내가 지금 여기서 데려간다"
"어어어... 사자.. 그놈이라면 재민이가 직접 잡겠다고 벼르던 놈인거 알잖아? ...재민이가 알면 엄청 화낼텐데..." "영안 닫힌 능력없는 퇴마사새끼 이제 더는 못믿어"여자가 부채를 휘두르며 악령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흥신소 건물 안에서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훈,재민 그리고 지훈이 튀어나왔다.
그 기세에 눌린 걸까? 여자를 노려보던 귀신은 연기처럼 사락- 하고 사라져버렸다.현장으로 달려온 재민은 멈춰버린 차와 그 주변에 남은 잔류 기운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추적해오던 익숙하고도 불쾌한 악령의 냄새였다. 재민의 시선이 옆에 서있던 도훈에게 향했다. 도훈 역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야 이도훈 너 방금 뭐 봤지?"
"...내가?! ..내가 뭘봐....?"재민의 날 선 물음에 도훈을 시선을 피하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감지한 지훈이 끼어들었다.
"왜 그래 안재? 무슨 문제 있어?"
"이상해 방금.. 분명 그새끼 느낌었단 말이야 그 악령.." "뭐? 그놈이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다고?"재민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도훈의 뒤통수에 박혔다.
도훈은 따가운 눈초리에 뒷목을 긁적이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소리쳤다."아 근데 사자! 여긴 어쩐일이야 소식도 없이?"
도훈의 불음에 '사자'라고 불린 여자는 대충 도훈에게 눈인사를 하고선 다시 차안에서 여전히 물에 빠진 햄스터처럼 벌벌 떨고 있는 소하에게 고정했다.
"방금. 근데 저 여자는 누군데 이렇게 귀신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몰고 다니는걸까?
나한테 설명해줄래?"사자의 서늘한 눈동자가 소하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소하는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혈관 속의 피가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스러운 느낌에 짐작했다. 도깨비가 말한 사자가 저 여자라는것을 말이다.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들이 해골의 손가락처럼 뻗어 있는 깊은 산 속.소하의 등 뒤로 얼음장같이 서늘한 겨울바람이 휘몰아쳤다.바람은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는 소하와 그녀를 등 뒤에 숨긴 채 살벌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도훈, 그리고 그들을 비웃듯 마주 서 있는 담의 사이를 날카롭게 가르고 지나갔다.무거운 정적이 숲을 짓눌렀다. 서늘한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피가 흥건히 묻은 검은 단검을 든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담의 안광 때문일까.소하는 자신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르르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담이 쥔 단검에서 뚝, 뚝 하며 붉은 선혈이 흙바닥으로 떨어졌다.도훈은 그 피를 보는 순간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현빈의 피다.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남았던 그 바보 같은 도깨비의 피였다.“설마…… 그 피…….”도훈의 거친 숨소리가 공명하듯 숲을 맴돌았다. 소하 역시 담이 저지르려 했던 일을 예감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까 전, 인간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도깨비의 모습으로 변해 자신들에게 어서 도망가라 소리치던 현빈의 마지막 모습이 잔인한 잔상처럼 눈앞을 가렸다.[ 이도훈 삐삐 데리고 빨리 가-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야해 ][ 김현빈 너 혼자 여기서 남겠다는 거야? ][ 빨리 가라고!!! 시간이 없어! ]소하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현빈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고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하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담은 그런 소하의 기대를 비웃듯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손등으로 스윽 닦아냈다.그리고는 냉소 가득한 목소리로 짧게 내뱉었다.“도깨비....”그 한마디에 소하의 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주 흘러내렸다.도훈의 표정 또한 짐승처럼 일그러졌다. 현빈이 죽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이 괴물 같은 남자에게 처참히 당했다는 증거였다.“바보.......바보 도깨비......”“곰도......”건조하고 차가운 숲의 공기를 ‘스읍’ 하고 들이마신 담이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터벅... 터벅....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소하를 당장 어디론가 피신시켜야 한다는 중원의 성화에 소하와 현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하지만 도훈만은 달랐다.고서인 '선녀집'에 새겨진 그 기이한 기록들이 진실이라면 지금 당장 소하를 지켜줄 강력한 힘을 가진 신령 백호가 있는 산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도훈은 멍하게 서 있는 소하의 손목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차에 태우고는 조수석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뭐? 선녀? 내가..............?"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소하는 황당하고도 허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소하를 따라 뒷좌석에 급히 올라탄 현빈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싶었지만 중원과 도훈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님을 직감했다.현빈은 앞 좌석에서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는 소하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운전석에 올라탄 도훈에게 물었다."이도훈..... 아까 진짜 책에 그렇게 써 있었어? 그 땡중이 한 말이 다 사실인거야?"".......어 아마도.... 아니- 틀림없어...."도훈이 세심하게 소하의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짐짓 침착하게 엑셀을 밟았다.차가 비명을 지르며 도로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한참 동안 침묵만이 감도는 차 안에는 오직 불안한 소하가 엄지손톱을 질질 깨무는 서글픈 소리만 울려 퍼졌다."옛날 아주 먼 옛날에......... 옥제,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옥황상제에게 귀하디귀한 딸이 하나 있었대...."긴 침묵을 깬 것은 도훈의 낮은 목소리였다. 손톱을 깨물던 소하도, 창밖을 보던 현빈도 숨을 죽이고 도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도훈은 앞만 주시한 채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잠시 인간 세계에 내려온 옥제와 인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딸. 옥제가 금이야 옥이야 아꼈던 옥선녀"소하가 빨리 다음 이야기를 해보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보았다.도훈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입을 뗐다."
(비밀의 서막 챕터와 이어집니다.)[ 속보입니다. ST그룹 안성민 회장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안 씨는 안성민 회장의 아들로 확인되었으며....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재민이 수많은 기자에게 둘러싸인 채 살인 용의자로 검찰청에 들어가는 모습이 뉴스 화면을 가득 채웠다.흥신소 거실에 모여 있던 현빈과 도훈, 그리고 소하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전히 TV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의 목소리에 시선을 고정한 소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설마..............저거 진짜예요? 정말 우리가 아는 그 싸가지 안재민 씨 맞는거에요?"".............아무리 봐도 그 안재민이 맞는 것 같은데.,,,"현빈이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훈은 기가 찬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뱉었다."아니 이 자식은 집에 간다더니 함흥차사여서 어디서 오도가도 못하나 했더니만 지금 뉴스에 살인 용의자로 나와서 안부를 전하는 거야?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그나저나 살인 용의자라니요.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니 아무리 안재민 씨가 싸가지 밥 말아 먹긴 했어도....."소하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때 현빈과 도훈이 동시에 단호하게 입을 뗐다."안재민이 그럴 놈은 아니지""절대 아니지. 그 자식은 자기 손에 피 묻히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놈이야"멤버들의 신뢰 섞인 말이 오가는 그때였다.갑자기 한 손에 낡고 헤진 고서를 든 중원이 방문을 박차고 튀어 나왔다. 그는 뉴스 속 재민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소하의 손목목을 낚아채듯 휘어잡았다.중원의 눈등자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광기 어린 흥분이 서려 있었다."너였어? 그 나머지 반쪽이 정녕 너였던거야?!""네? 아.........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거 좀 놓고 말씀하세요....."소하가 당황하여 고개를 갸우뚱하며 팔을 빼려 했으나 중원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듯 손에 든 고서를 소하의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그의 목소리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가쁘게
“담이 지금 그곳으로 갔어연목하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자매........ 옥선녀의 쪼개진 나머지 반쪽 영혼을 가진 강소하가 있는 곳으로...”구미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재민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위협적으로 구미호에게 다가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죽은 목하의 이름과 소하의 이름이 왜 함께 나오는 것인지그리고 그들이 쌍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대체 무엇인지. 재민은 묘하게 뒤틀린 표정으로 물었다."목하가 강소하랑.......... 쌍둥이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재민의 격앙된 반응에도 구미호는 ‘흐응’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그녀는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뉘고는 재민을 비웃듯 앞에 놓인 펜을 손가락으로 데굴데굴 굴렸다.입가에 머금은 조소는 마치 어리석은 인간을 농락하는 포식자의 여유와 같았다."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말해!"재민은 당장이라도 구미호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수갑에 묶인 두 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취조실 안은 그의 고함 소리로 윙윙 울려 퍼졌다. 구미호는 귀찮은 듯 귀를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성질을 냈다."소리 좀 죽여. 그런다고 죽은 연목하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그 더러운 입에 목하 이름 담지 마! 죽여버릴 거야!"오열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재민이 구미호에게 달려들던 그때였다.굳게 닫혀 있던 취조실 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지훈이었다.그는 재민보다 빠르게 구미호에게 다가서더니 품에서 꺼낸 부적으로 감싼 예리한 칼날을 구미호의 목줄기에 들이밀었다."허- 어이없네?"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구미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구미호.....""박지훈- 너 어떻게 여기를...."지훈의 등장에 재민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의 바르르 떨리는 등을 바라보았다.지훈의 등 뒤로는 억누를 수 없는 살기와 분노가 진동하고 있었다. 지훈의 뺨을 타고 뚝뚝
“천계에서부터 이어진 자네를 포함한 여섯 명의 질긴 인연.........”스님의 나직하고도 깊은 목소리가 법당 안의 정막을 깨뜨렸다.잠시 몽롱하게 어두운 과거의 잿더미 속에 빠져들었던 지훈의 정신이 그 목소리에 이끌려 현재로 끌어 올려졌다.지훈은 방금 본 환영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직감하며 의문이 가득 서린 눈으로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스님 말처럼 모든 게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면.... 옥선녀, 그리고 천계.......그 모든 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이토록 잔인하고 끔찍한 운명을 만든 거죠?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겁니까?”격양된 지훈의 목소리가 법당 천장에 매달린 연등을 가늘게 떨게 했다.하지만 스님은 요동치는 지훈의 감정과는 대조적으로, 호수처럼 고요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이제 자네들도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지.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그 지독한 전쟁의 끝이 다시 시작될 터이니....”스님은 옆에 놓여 있던 다섯 개의 작은 단지 중 하나를 천천히 탁자 중앙으로 옮겼다.단지 표면에는 해묵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이게 뭐죠? 이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겁니까?”“이 안에는 200년전 자네들의 기억을 강제로 봉인해 놓은 영혼의 구슬이 담겨 있네..”지훈은 단지들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문득 위질감을 느꼈다.“.......기억이라고요? 헌데, 우리 인연이 여섯이라 하셨으면서 왜 단지는 다섯 개뿐인 거죠?”“여섯 중 한 명의 기억이 이미 돌아왔기 때문이라네. 주인에게 돌아간 기억의 구슬은 저절로 깨져 사라지는 법이지”그 순간 지훈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최근 들어 부쩍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 사람“.........설마 스님......... 그 한 명이라는 ......... 이정혁입니까?” [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기억이 나게 해주지. ]지훈은 정혁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를 떠올렸다.스님
“어머,지훈아!” “박지훈! 정신 차려!”귓가를 찢는 고함 소리에 지훈은 남자의 역겨운 과거로부터 서서히 현실로 끌어올려졌다.간신히 눈을 뜨자 거실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붙잡고 흔드는 어머니와 당황한 안색의 아버지, 그리고 오빠의 팔을 꼭 쥔 채 펑펑 울고 있는 지민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지훈은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옮겼다. 난장판이 된 식탁 너머 그곳에는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인자한 가면에 가려졌던 포식자의 눈빛. 지훈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괜찮니- 지훈아? 갑자기 왜 그래?”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이성이 마비된 자리에 짐승 같은 본능만이 남았다. 지훈은 순식간에 남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다.“이 개새끼야! 죽여버릴 거야!”광기 어린 비명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돌발 행동에 어머니는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고 지민은 겁에 질려 오열했다.‘짝-!’그때 거실을 울리는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지훈의 몸이 저만치 내동댕이쳐졌다.지훈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남자가 컥컥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이게 무슨 짓이야! 박지훈!”주방을 울리는 아버지의 노호. 지훈은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며 아버지를 노려보았다.붉게 충혈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저 남자가......... 지민이를 노린다고요! 저 괴물이!”“지훈아! 너 정말 왜 이러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어머니가 울먹이며 지훈을 말렸지만 아버지는 참담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미안하네.... 내 아들이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요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야...”“아닙니다 검사님.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남자는 여전히 선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뒷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지훈은 마지막 힘을 짜내 비명을 질렀다.“저놈 장기매매 브로커라고요! 지민이가 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