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얼마나 배가 고팠던건지 벌써 밥 세공기째 비워내는 현빈을 보며 소하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흥신소에서 이 덩치 큰 사내를 굶기기라도 하는걸까?
소하는 밥 한 수저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복스럽게(아니 거의 무식하게) 밥을 먹어 치우고 있는 현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이 도깨비씨. 밥만 먹지 말고 아까 말한 부적 이야기좀 해봐요. 중대한 이야기라면서요"
현빈은 볼때기가 터져라 밥을 쑤셔 넣으며 웅얼거렸다.
"밥 먹을때는 개도 안건들인다고 했거든? 내가 도깨비라고 해서 예외라 생각하지마"
"근데 설마 흥신소에서 굶겨요? 뭐 이렇게 전투적으로 먹는거야..." "아니! 나 원래 이것보다 더 많이 먹는데. 오늘은 삐삐 생각해서 조금만 먹으려고"소하가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다가 저번부터 자신을 '삐삐'라고 부르는 것이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저번부터 나한테 삐삐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뭐 말괄량이 삐삐 이런건가?"
그 말에 현빈이 숟가락질을 멈추고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묘한 웃음소리에 소하는 기분이 급격히 껄쩍지근해졌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아니 저번에 나 인형이었을때 니가 나 꽉 안아줬잖아. 그때 그 느낌이...아마도...비..커...ㅂ.."
"야이씨 변태 도깨비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현빈의 머리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으아아악!! 잘못했어!! 미안!! 으악!! 아파!!"
"죽어봐라 이 변태 도깨비!!! 어디서 그런 소리를 지껄여!!"무차별적인 숟가락 폭행에 식당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한참을 숟가락으로 두들겨 맞은 현빈은 결국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덩치는 산만한 놈이 애처럼 우는 꼴을 보니 소하는 오히려 자기가 당황스러워졌다."이렇게 힘센 인간 여자는 처음이야...흐어어엉..."
"아니...아니 왜 울어요! 아 진짜 미치겠네" "흐어어엉...무서워..삐삐 무서워..." "뚝! 도깨비씨 뚝! 이제 안때릴께요 됐죠?"소하의 당황섞인 달램에도 현빈은 식당이 떠나가라 엉엉 울어댔고,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결국 소하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현빈의 옆으로 다가가 넓은 등을 토닥여야 했다.
"아이고 착하지! 울지마요. 내가 미안해요"
그제야 울음을 멈춘 현빈이 코를 훌쩍거리며 슥 눈물을 닦았다.
"그럼 메밀묵 사줘 삐삐야"
"아씨 그놈의 삐삐!!!" "흐어엉..봐봐 또 화내 무서워 흐어어어" "알았어요 알았어! 메밀묵?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요"결국 소하가 시골 시장을 이 잡듯 뒤져 겨우 찾아낸 메밀묵을 현빈의 손에 쥐여주고 나서야 식당안은 평화가 찾아왔다. 묵을 냠냠 받아먹는 현빈을 보며 소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니 무슨 도깨비가 이렇게 눈물이 많아요?"
"도깨비는 원래 마음이 약하거든? 장난을 좀 좋아해서 그렇지... 우리가 그렇게 나쁜 존재는 아니라구~ 오히려 우리는 내쫓는 인간들이 더 무서워 알아?"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코를 훌쩍이며 말하는 현빈을 보며 소하는 조금은 인간의 형상을 한 이 존재에 대해 궁금해졌다.
"근데 도깨비면 그 방망이 있어요? 금 나와라 뚝딱 그런거"
"있었었어" "에이.. 그럼 지금은 없다는거네? 아깝다.. 구경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근데 왜 없어요?" "뺏겼어 사자한테" "사자? 으르렁 사자요? 라이언"소하의 물음에 현빈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설마 동물의 왕 사자겠냐구..."
"헐 그러면...저승...사..자..?"저승사자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현빈이 메밀묵을 먹다 말고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으으... 얘기도 꺼내지마. 그 악독한 사자 생각만 해도 소름 돋으니까"
그런 현빈을 보던 소하의 시선이 식당 구석의 낡은 TV로 향했다.
한창 미스테리 현상을 취재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귀신이 보이기 전까진 흥미진진하게 봤던 프로그램인데,
지금 그저 밥맛 떨어지는 광경일 뿐이었다.
[ 이곳은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된 마을입니다. 그런 재개발이 결정된 직후부터 해괴하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난다는데요....... ]
화면 속에는 아까 보았던 그 거대한 나무와 마을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소하가 홀린 듯 화면을 보고 있는데 메밀묵을 해치운 현빈이 벌떡 일어섰다.
"이제 서울 가자!!"
***
흥신소 앞까지 데려다 달라는 현빈의 부탁에 소하는 찜찜한 기분으로 서울까지 현빈과 함께 왔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했다간 또 저 덩치큰 사내가 이번엔 길바닥에서 빽빽 울어댈것 같았기에 어쩔수 없었다.
"고마워 삐삐! 넌 참 착한 인간인것 같아"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현빈의 팔을 소하가 다시 급히 붙잡았다.
"이봐요 도깨비씨! 부적 얘기 안해줄거에요? 아까부터 계속 딴소리만해서 까먹을뻔했네!"
"아 맞다! 지금 몇시야?" "여섯시 다 되어 가는데요??"현빈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소하를 쳐다보았다.
"헤헤..그 부적 말이야. 딱 48시간 짜리래. 그러니까...음... 조금있으면 결계가 풀려서
귀신들이 막 몰려올꺼야" "뭐라고요?!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요!" "내가 그런거 아니다! 그 못된 인간 둘이 짠거지! 아무튼 난 말했다?"현빈이 내빼려하는데 소하가 갑자기 '꺅!' 하며 비명을 지르며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덕분에 현빈은 다시 한번 조주석에 털퍼덕 주저 앉았다.
헌데 현빈의 팔을 잡고 있는 소하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삐삐...괜찮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시선이 차창 밖, 어두워진 골목길의 전신주 아래를 향했다.
"풀렸나봐요....결계....귀신들....저기....오는데...?"
골목 구석에서 입을 기괴하게 찢으며 다가오는 그림자들.
부적의 빛이 바래는 순간 기다렸다는듯 몰려드는 원혼들의 기운에 소하의 눈에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 소하의 모습에 현빈 역시 짧게 굵게 외쳤다.
"오 씨발..."
“와~ 박지훈 진짜 미쳤다. 너 또 전교 1등이냐?”“야- 너는 도대체 공부의 ‘공’ 자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어째 맨날 전교 1등을 찍냐고!”지금보다 앳된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18살의 지훈.그를 둘러싼 아이들이 부러움 반, 시샘 반이 섞인 눈빛으로 웅성거렸다.하지만 지훈은 그런 소란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책상 위 물건들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었다.“이것 봐 이것 봐. 야자도 맨날 빼먹는 놈이 성적은 괴물이라니까”“야- 박지훈 솔직히 말해봐. 너 사실 초능력 같은 거 있지?”장난 섞인 친구의 물음에 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그런 게 어딨냐 임마! 나 먼저 간다”“야! 어디 가는데?”멀어지는 지훈의 뒤로 친구들이 소리쳤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방끈을 고쳐 매며 대답했다.“여동생 보러”그 말에 친구들은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모았다.“지독한 시스터 콤플렉스 같으니라고”멀어지는 친구들의 야유를 배경음 삼아 지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섰다.***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지훈의 집 대문이 열렸다. 아까보다 한층 밝아진 표정의 지훈이 긴 다리로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고 외쳤다.“지민아! 오빠 왔다!”그 소리에 맞춰 작은 방 안에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다다다’ 소리를 내며 달려 나왔다.아이는 지훈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훈의 입가에도 그제야 숨길 수 없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무릎을 굽혀 앉아 여동생의 눈을 다정하게 맞췄다.“지민이 오빠 기다렸어?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아이는 대답 대신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훈에게 익숙한 듯 고사리 같은 한 손을 내밀었다.지훈은 오른손에 끼고 있던 얇은 가죽 장갑을 부드럽게 벗어 던졌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순간, 지훈의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 지민이가 보고 겪은 일들이 파노라마처
“....곰도랑 이도훈이 아마 왔었지....”대리석으로 차갑게 이어진 복도를 걷던 지훈은 '302호'라고 적힌 문 앞에 멈춰 섰다.무거운 정적만이 감도는 문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도어록 위에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올렸다.손바닥이 매끄러운 기계 표면에 닿는 순간 지훈의 신경계가 곤두섰다.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이코메트리. 사물에 깃든 기억의 잔상을 읽어내는 그의 능력이 회색빛 노이즈를 뚫고 과거의 목소리들을 길어 올리기 시작했다.[ 헤헤 삐삐~ 나 아까 활약 봤어? 대박이지? ][ 아 네네- 알겠습니다! 아주 대박이었어요 ][ 오, 비밀번호 0428! 나는 봤다! ][ 저기요- 도깨비 씨? 지금 사생활 침해하신 거 아세요? ][ 뭐야~ 우리 사이에 사생활 침해라니~ ]현빈의 철없는 웃음소리와 소하의 짜증 섞인 대꾸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더 깊은 기억의 층위를 파고들었다. 뒤이어 도훈의 낮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야 곰도 너 병신이냐? 전에 강소하 사주 풀 때 생일이 5월 30일이라고 했잖아. 옆에 있었으면서 그새 까먹었냐? ][ 그럴 수도 있지! 병신은 뭐냐, 이 무당 새끼야! ][ 능력도 없는 곰도 주제에 뭐? ][ 야- 너 잘못하면 내 방망이에 세상 하직할 수 있거든? ][ 하직? 너 비구름에 쓸려서 태평양에서 생 마감하고 싶냐? ]웅웅거리는 소음 사이로 소하의 지친 외침이 쐐기를 박듯 들려왔다.[ 아오! 좀 그만해요, 그만해! 0428... 부모님 기일이에요! 기일! ]“기일........”지훈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0428. 5월 28일. 소하의 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신 날.“강소하 부모님이 그녀가 17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나........ 4월 28일.......”심장 언저리가 기분 나쁘게 요동쳤다. 아닐 것이다.설마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며 고개를 휘휘 저었지만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식은땀은 멈추지 않았다.지훈
검찰청 취조실의 공기는 질식할 듯 무거웠다.5평 남짓한 좁은 사각형의 공간, 재민은 팔목을 조여오는 은색 수갑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다.정면의 특수 거울 속에는 며칠 사이 유령처럼 수척해진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이번에도 네가 하는 건 그저 묵비권 행사인가?”어지럽게 머릿속을 휘젓던 목하와의 기억에 재민의 눈가가 잠시 젖어 드는가 싶더니, 이내 담당 검사 태준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재민은 두 뺨 위로 흐르려던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타들어 가는 목구멍 안으로 슬픔을 꾹꾹 눌러내었다.“....죽이지 않았어요...”“하...... 이번에는 부인인가?”태준이 서류 뭉치를 거칠게 넘기며 비웃었다.“여길 봐... 처음 신고한 건 자네의 새어머니 이혜영이야. 그녀의 진술에 의하면 비서 엄준민과 함께 안회장의 방에 들어갔을 때이미 안회장은 숨이 끊어진 뒤였고 너는 피 묻은 손으로 그 방안에 서 있었다더군. 정황이 이렇게 확실한데 언제까지 오리발을 내밀 셈이지?”태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재민의 가슴을 후볐다. 재민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태준을 똑바로 응시했다.“새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세요.”“뭐?”“형... 아니... 검사님.... 새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5년 전 목하가 죽던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취조실 안에는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타탁, 타탁’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재민은 불안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연신 매만졌다. 창밖은 이미 매서운 한겨울이건만 재민의 손바닥에서는 축축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그때 무거운 철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굉장히 온화하고 단아한 표정의 계모 이혜영이 들어와 재민의 맞은편에 앉았다.“도대체 우리 아버지께 무슨 짓을 한 거야?”재민의 분노가 섞인 목소리에도 그녀는 눈 하나
재민과 목하가 처음으로 만났던 교정 그 옥상이었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져 옥상 바닥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둘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어느 때보다 크고 둥글게 떠오른 만월을 바라보았다.차가운 달빛이 내린 눈에 반사되어 옥상은 마치 낮처럼 환했다.“이제 30분 남았네.”재민이 손목시계를 들어 목하 앞에 흔들어 보였다. 목하는 재민을 바라보며 방긋 웃더니 다시 보름달이 걸린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길게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긴장돼?”“조금? 나 사실.. 저번에 공사장에서 구미호를 만나기 전까지는 간과하고 있었나 봐. 나를 노리는 자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말이야”목하의 말에 재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목에 걸린 붉은 염주를 내려다보았다.잠시 두려움이 서려 있던 목하의 눈동자가 다시 생기를 되찾더니 그녀는 돌발적으로 옥상 난간 턱 위로 올라섰다.&ldqu
시간은 느린 듯하면서도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재민의 열여덟 여름부터 시작된 인연은 계절의 마디를 부지런히 넘어 어느덧 열아홉의 목하와 스무 살의 재민을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길목에 데려다 놓았다.저승사자가 탐냈던 재민의 재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남들이 평생을 바쳐도 도달하기 힘든 퇴마의 경지를 재민은 무서운 속도로 흡수해 나갔다.이제 그는 목하의 뒤를 쫓는 조력자를 넘어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영력을 갖춘 퇴마사로 거듭나 있었다.그리고 그해 가을 비극의 전조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원래 병원 터였다가 폐허로 변해버린 공사장. 그곳은 땅 밑바닥부터 썩어 문드러진 음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재민과 목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악령들에게 둘러싸여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재민아! 왼쪽!”목하의 다급한 외침에 재민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손 안에서 발악하는 귀신의 이마에 부적을 박아 넣은 그가 가볍게 몸을 회전하며 달려드는 처녀귀신의 기세를 꺾었다.
재민에게 소녀 목하는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위로였다.영가들을 본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혀야 했던 소년에게 목하는 네가 미친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는 우리처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아주 많다고 온몸으로 말해주었다.목하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했다.사람의 마음부터 상처 입은 영혼, 심지어 시들어가는 식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만물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고귀한 힘.부모의 얼굴조차 모른다는 목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산속의 한 노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랐고 스님으로부터 그 치유의 힘을 이용해 이승을 떠도는 가여운 영혼들을 달래 승천시키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내가 정말 그곳에 가도 되는 거야?”목하가 열일곱, 재민이 열여덟이 되던 해의 어느 여름날이었다.목하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자신이 자라온 은밀한 거처인 절로 재민을 초대했다.“가도 된다니까? 내가 우리 대장 스님한테 너 얘기 정말 많이 했어-”“내 얘기를... 했다고?”“응! 내 눈보다 훨씬 더 깊고 뛰어난 눈을 가진 친구가 있다고 자랑했지”목하의 해맑은 눈웃음에 재민은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이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단짝이었지만 재민에게 목하는 이미 우정을 넘어선 사랑이었다.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었다가 그 소중한 관계마저 깨어질까 봐 그래서 더는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없게 될까 봐 그는 늘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그렇게 열여덟 재민의 첫사랑은 우정이라는 얄팍한 가면을 쓴 채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한참을 산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이었다.어디선가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재민의 젖은 이마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재민이 고개를 들자 바람 소리와 함께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청명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양옆으로 곧게 뻗은 푸른 나무숲의 끝에 위엄 넘치는 절의 입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귓가로 넘실거리며 흘러드는 풍경 소리와 뺨에 닿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