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당황하며 물었다.“무슨 기사?”“인기 검색어에 올라와 있어. 켜자마자 보일 거야. 글쎄 내가 유남준이 좋은 사람 같지 않다고 했잖아.”조하랑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박민정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자 유남준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잠깐만. 지금 볼게.”전화를 끊은 후 웹페이지를 열자 맨 위에 있는 인기 검색어가 눈에 들어왔다.기사를 들어가 보자 눈에 띄는 몇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사진 속 이지원은 이불을 덮은 채 유남준의 품에 누워 있었고 두 사람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박민정은 자신이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진을 보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조하랑이 메시지를 보냈다.[민정아, 화내지 마. 이 세상에 남자는 많으니까.]박민정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응. 알겠어. 나 괜찮아.]그녀는 잠이 다 깨 일어나려던 참이었다.그런데 갑자기 유남준이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지금 몇 시야?”“6시 반이요.”박민정은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유남준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따뜻하게 말했다.“아직 이르네. 더 자.”“자고 싶지 않아요.”박민정이 손을 뿌리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유남준은 마침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왜 그래? 어디 아파?”박민정의 휴대폰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조하랑이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유남준은 그 소리를 듣고 연지석이나 다른 남자가 메시지를 보낸 줄 알고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뭐 하는 거예요?”“누가 메시지를 보냈어?”“신경 쓰지 마요.”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그런데 유남준의 손이 너무 커서 몇 번이나 시도해도 뺏지 못하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이리 내놔요!”그제야 유남준은 순순히 휴대폰을 돌려주었다.기분이 더욱 나빠진 박민정은 조하랑이 보낸 음성 메시지를 눌렀다.[하랑아, 지금 어디야? 내가 찾으러 갈게.][내가 말했잖아. 연지석이 낫다고. 적어도 전 여자 친구가 나타나
인터넷에 올라온 댓글 중 일부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인기 검색어가 삭제된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원래 이지원은 이미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는데 이번에는 여론의 헤드라인이 되어 다시 다른 의미로 인기가 높아졌다.김인우 역시 기사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이지원은 이미 정신병원에서 죽지 않았나? 누가 이 사진들을 공개한 거지?’외부 사람들은 이지원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도 몰랐고 화재에 대해서도 몰랐다.유남준의 옛 원수 중 한 명일까?김인우는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갔다가 혼자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조하랑의 모습을 보았다.들어가서 살펴보니, 세상에, 조하랑은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뭐 하는 거예요?”김인우는 의아해했다.조하랑은 풀을 뽑다가 멈추고 김인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떠올렸다.“그쪽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조하랑은 기분이 나빠 보였다.그녀는 인터넷 기사를 보고 박민정 대신 화가 잔뜩 났다.그런 은밀한 사진이 노출되었는데 배우자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김인우는 조하랑이 풀을 뽑다 못해 풀이 곧 사라질 것 같은 땅을 지켜보았다.“심심하면 나랑 유씨 집안에 갈래요?”조하랑은 원래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김인우의 말을 듣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정말요?”조하랑은 의아했다. 어제 할아버지가 김인우에게 그녀를 데리고 가족을 만나라고 할 때는 거절하더니 오늘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을까?“네. 예찬이도 데려와서 같이 가요.”김인우는 유남준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고 유남준의 아들을 만나고 싶기도 했다.습니다.“예찬이는 됐고 우리끼리 가요.”조하랑은 바로 거절했다. 만약 예찬이를 데려갔다가 무슨 일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당연히 예찬이랑 같이 가야죠.”김인우는 그녀의 말을 거절하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예찬이를 찾으러 돌아갔다.어쨌든 유남준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똑똑한 예찬이를 데
유남준이 말했다. “온라인 인기 검색어는 이미 내려놨으니 다시는 안 나올 거야.”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여전히 기분이 복잡했다.“네.”유남준은 자신과 이지원 사이에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었다.지금 박민정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그녀가 아직도 화가 나 있는지 궁금했다.유남준이 손을 내밀자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피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지원과 유남준이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사진을 직접 눈으로 본 그녀는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유남준의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지금은 남준 씨와 신체 접촉을 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박민정은 말을 마친 후 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지금까지 다른 남자와 신체 접촉을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당연히 불결한 유남준이 마음에 걸렸다.유남준과 이지원의 관계는 1년도 지속되지 않았고 박민정은 두 사람이 기껏해야 키스 정도 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유남준은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자신과 신체 접촉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무슨 말인지?자신은 박민정이 다른 남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박민정은 자신이 이지원과 만난 것 때문에 화가 나 있다니.유남준은 손을 내려놓고 얼굴을 찡그렸다.“민정아, 나는 네 과거를 싫어한 적이 없어.”박민정은 당황했다가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내 과거라뇨. 두 아이를 말하는 건가요? 싫으면 싫다고 해요. 하지만 나한테는 이해심을 바라지 말아요.”박민정은 도대체 이 관계에서 누가 더 아쉬운지 모르는 것 같았다.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그는 가볍게 웃었고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기색이 역력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박민정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일단은 거리를 유지해요.”거리를 유지하자니, 유남준의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박민정이 화를 내는 게 더 걱정되었다.“그래.”
“아직 자고 있어서 부를 수 없어.”유남준이 차갑게 거절했다.김인우는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남준아, 나 벌써 여기 온 게 두 번째인데 아이를 보여주면 안 돼? 절대 깨지 않게 조심할게.”“안 돼.”김인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유남준이 아이를 어찌 아끼는지 보여주지도 않을까.김인우는 오늘도 아이를 못 봐서 너무 아쉬웠다.“그래, 알겠어. 화장실 다녀올게.”안 보여주면 몰래 보면 된다....밖에 있는 정원에서 박민정과 조하랑은 산책하고 있었다.조하랑은 박민정이 불편해할까 봐 기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근황에 대해서 얘기했다.박민정은 조하랑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이번에는 자신이 절대 억울하게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그제야 조하랑은 마음을 내려놓았다.“기분 나쁜 일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야 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그녀는 대답하자마자 조하랑에게 물었다.“김씨 집안에서는 잘 지내고 있어?”김씨 집안을 언급하자 조하랑은 전처럼 적개심을 보이지 않았다.“김인우 말고는 다 좋아. 아무튼 우리 집에 있는 거보다는 좋아. 할아버지가 현명한 분이셔. 그래서 나 매일 자유롭게 지내고 있어. 할아버지께서 내가 다시 변호사 하는 것도 지지해 주셔.”김훈을 언급하자 조하랑은 또 뭔가 떠올랐다.“아참, 민정아, 할아버지께서 예찬이가 김인우 아들이 아닌 거 아셔. 그런데 내 아들이 맞으면 된다고 하셨어. 날 정말 친손녀처럼 대해 주셔.”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진심으로 기뻐했다.조하랑은 계속해서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예찬이를 예뻐하시는지 몰라. 오늘 원래 김인우가 예찬이도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예찬이와 바둑을 둬야 한다고 하셨거든.”“어른들이 예찬이를 예뻐하지.”박민정은 조하랑의 말을 통해서만 김훈이 예찬이를 예뻐한다는 것을 들었지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예찬이가 눈에 익다고 생각했어요. 남준이 아들이라 그런 거군요.”김인우는 지금 생각해 보니 유남준이 어렸을 때 예찬이와 유난히 닮았다고 생각했다.조하랑은 마음이 불편했다.‘내가 언제 유남준 아이라고 했어?’지금 설명하면 김인우가 분명 조사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말을 많이 할수록 진실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럼 아이를 언제 돌려줄 생각이에요?”김인우는 조하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저렇게 예찬이를 좋아하시는데 진실을 알게 되시면 하랑 씨를 내쫓을 것 같은데요?”김인우는 조하랑이 겁먹을 거라 생각했었다. 김씨 집안을 떠나면 조씨 집안 사람들이 또 어떻게 부잣집을 넘볼 수 있겠는가?그런데 조하랑이 겁을 먹긴커녕 하품하면서 여유롭게 말할 줄은 몰랐다.“잘됐네요. 김인우 씨랑 결혼하기 싫었는데.”조하랑이 유일하게 걱정하는 것은 김훈이 실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예찬이를 예뻐하시니 말이다.김인우는 말문이 막혔다. 이 나쁜 계집애.“아무튼 지금은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말아요. 이제 천천히 기회를 보죠.”김인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네. 어쩌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했네요.”...유씨 집안.박윤우는 옷을 다시 입었다. 아직도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쓰레기 아빠의 친구가 그러면 그렇지. 김인우는 윤우의 방에 들어갔다가 윤우를 보고 놀라더니 그를 들어 올리며 예찬이의 이름을 불렀다.“윤우야, 놀라지 않았어?”박민정은 관심하며 물었다.박윤우는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그냥 그 아저씨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괜찮으면 다행이야. 그 아저씨는 신경 쓰지 마. 앞으로 혹시나 그 아저씨 마주치면 멀리 피해.”박민정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정말로 김인우가 두 아이가 똑같이 생긴 것을 발견하고 무슨 짓을 벌일 줄 알았다.박윤우에게 옷을 갈아입힌 후 박민정은 정리를 마치고 유남준더러 두원으로 돌
커피숍에서.박민호는 커피를 젓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서 기다렸다.마침내 박민정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박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누나, 여기 앉아.”박민정은 그의 친절함을 무시했다.“경비원이 네가 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야?”“엄마가 암에 걸렸는데 말기야.”박민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박민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어제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엄마가 구치소에서 갑자기 기절해서 병원으로 옮겨져 검사했는데 뇌암 판정을 받았대. 이미 말기라고 하더라.”박민호가 덧붙였다.박민정은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합의서라도 써서 그 사람을 구해줬으면 좋겠어?”한수민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암에 걸릴 수 있을까?은정숙에게는 가족이 없어서 박민정은 그녀의 양딸과 다름없었다.박민정이 합의서를 작성하면 한수민은 가벼운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박민정, 너 마음이란 게 있어? 우리 친엄마인데 정말 엄마가 죽는 걸 보고 싶어? 그 도우미는 자살한 거라고 엄마가 말했잖아.”박민호는 증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러나 박민정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자살이라고? 우리 엄마는 한수민에게 살해당했어.”“누구더러 엄마라는 거야? 그 여자는 그냥 열등한 쓸모없는 도우미일 뿐이야...”짝!박민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때렸다.박민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을 쳐다보며 말했다.“도우미 따위 때문에 날 때렸어?”“아줌마는 내 마음속에서 도우미가 아니라 내 친엄마보다 나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할 거면 입 다물고 있어!”박민호는 얼굴이 뜨거웠다. 입에서 나온 모욕적인 말은 박민정의 날카로운 눈빛에 강제로 되돌려졌다.왠지 모르게 그는 박민정이 조금 두려웠다.“좋아.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말고 우리 친엄마 얘기를 하자. 엄마가 아무리 잘못했다
박민정은 집으로 돌아가서 한수민이 건강 문제로 가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장명철 변호사가 전화했다.“민정아, 내가 보낸 메시지 받았어? 병원에서 한수민이 뇌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렸고 보호자가 대신 가석방을 신청했어.”“네, 저도 봤어요.”박민정은 휴대폰을 들고 밖에 서서 바람과 눈을 얼굴에 맞으며 말했다.“장 변호사님, 한수민은 전혀 아프지 않아요. 이건 그 여자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에요.”“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디에 있겠어. 잡힌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갑자기 뇌암 판정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그럼 그 여자를 다시 감옥에 넣을 방법은 없나요?”박민정은 은정숙의 죽음을 억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한수민이 은정숙을 죽인 진짜 범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강요하지 않았다면 은정숙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병원이 허위 진단서를 발급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어려워.”장명철은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하지만 병원 측에서 가짜 진단서를 발급했다면 어떻게 인정하겠어?”“그럼 다른 의사에게 감정을 다시 해달라고 요청하면 안 되나요?”박민정이 물었다.“그건 되지만 한수민은 절대 협조하지 않을 거야.”박민정은 가슴 한구석이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냥 이렇게 한수민을 풀어줘야 하는 것일까?“아참.”장명철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민정아, 유 대표님께 부탁 좀 해봐. 그분은 김인우 씨와 친구 아니야? 김인우 씨가 나서면 병원에서도 감히 거짓말을 못 할 거야.”진주시의 의료 자원은 대부분 김씨 가문에서 장악하고 있고 심지어 작은 병원들도 김씨 가문에 의존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박민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좀 더 생각해 볼게요.”그녀는 김인우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박민정은 밖에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망설였다.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위층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층에서 큰 소리가 들린 후에야 박민정은
박민정은 순간 움찔하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뭐 하는 거야?”유남준은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박민정은 유남준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박민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시울은 분노로 붉어지고 입안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싫어?”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은 유남준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여러 번 문질렀다. 박민정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내가 다른 사람이랑 잔 사진을 보면 어떻게 할 거예요?”이미 난리를 치고도 남았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자 박민정은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지난번에 그녀가 물었던 자국이 아직도 어깨에 남아있었다.“왜 대답하지 않아요?”박민정이 물었다. 유남준은 다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그 자식을 죽여버릴 거야.”박민정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난 어떻게 할 건데요?”유남준은 흠칫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널 가둬두고 다리를 확 부러뜨릴 버릴 거야.”박민정은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고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일어날래요.”그녀는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유남준은 그제야 몸을 비키고 진지하게 물었다.“박민호는 왜 널 찾아온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수민이 꾀병을 핑계로 삼아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말만 했어요.”박민정은 간결하게 말했다. 한수민이 나이가 많지 않았더라면 임신을 통해 보석 출소했을지도 모른다.“요즘은 가짜 병력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텐데 밝혀내기도 어렵겠지.”유남준은 천천히 말했다.“김인우더러 알아보라고 할게.””그럴 필요 없어요.”박민정은 얼른 거절했다.“인우 씨한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요.” “인우가 너한테 목숨을 빚진 거잖아. 이런 작은 일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해야지.”“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에요.”박민정은 김인우의 도움을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