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현이 한수민의 비상금을 가지게 된 이후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도 걸지 않았다.한수민은 혼자 병원에서 지내며 딸을 몹시 그리워했다.“소현아, 보고 싶어. 언제 나 보러 올 거야?”“엄마, 죄송해요. 요즘 너무 바빠서요. 일이 끝나면 찾아뵐게요, 네?”윤소현이 대충 얼버무렸다.한수민의 눈빛은 한껏 어두워졌다.“알겠어. 근데 매일 무슨 일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은 전화를 끊었다.한수민은 전화를 내려놓으며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오늘 한수민을 돌보는 간병인의 딸이 찾아와 간병인과 담소를 나눴다.“엄마, 나 이제 돈 벌기 시작했으니 이런 일은 그만두세요. 제가 돈을 넉넉히 드릴게요.”“괜찮아. 엄마 아직 젊으니까 조금이라도 일할 수 있어.”“엄마가 걱정돼서 그래요. 이 돈으로 맛있는 음식이나 많이 사 드세요. 돈 아까워하지 말고.”한수민은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박민정을 떠올렸다.6, 7년 전 박민정은 무릎을 꿇고 그녀 앞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엄마, 이제 우리 힘으로 살아가요. 제가 엄마를 모실게요.”한수민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그녀는 베개를 집어 들어 문 쪽으로 던지며 소리쳤다.“나 돌보러 온 거야? 아니면 딸과 수다를 떨려고 왔어?”간병인이 그 말을 듣고는 바로 딸을 돌려보냈다.그리고 병실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한수민은 이미 간병인을 두 번 바꿨었다. 전에 있었던 두 명은 한수민의 성격 때문에 그만두었다.간병인은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 의자에 바로 놓았다. 그리고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셨잖아요. 화를 낼수록 병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고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하시면 돼요.”그 말을 들은 한수민은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난 돈도 있고, 권력도 있어. 그런데 마음에 걸릴 게 뭐가 있어? 웃기고 있네.”한수민은 강한 척했지만 간병인은 그게 연기라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간병인이 빠르게 손을 뻗어 한수민을 붙잡아 준 덕분에 한수민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았다.한수민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시 자리에 앉고는 간병인을 향해 박민정을 가리키며 말했다.“봤지? 이게 내 딸이야. 배은망덕한 불효녀라고. 돈을 달라고 해서 안 주니까 강제 집행을 신청하겠다는 거야!”간병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박민정을 바라봤다.나이 든 간병인은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했다.그녀의 눈에 박민정은 순하고 온화한 모습이라 불효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박민정은 변명하지 않고 단지 한마디만 남겼다.“돈이 없다고 하면 윤씨 가문에 가서 받을 거예요.”그녀는 한수민이 돈을 모두 윤씨 가문에 넘겼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어디 한 번 그렇게 해봐!”한수민은 분노에 차 있었다.지금의 한수민은 박민정의 눈에 그저 우스꽝스러운 광대에 불과했다.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또 물었다.“윤소현은 어디 있어요? 당신의 착한 딸은 왜 한 번도 병문안 오지 않았나요?”한수민은 박민정의 말에 격분하여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집어 던졌다.박민정은 당연히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 모두 날렵하게 피했다.“앞으로 매주 시간을 내서 여사님을 보러 올게요. 여사님이 그러셨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요. 당신이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거예요.”박민정이 또박또박 말했다.그녀는 이 말을 한 이유가 있었다.오늘 아침 정민기가 박민정에게 한수민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정확히 한수민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고 했다.박민정이 병원을 떠난 후에도 한수민은 여전히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간병인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사모님에게 딸이 하나뿐이라고 들었는데요?”한수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방금 그 애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야. 내 딸이 아니라고. 내 딸은 유명한 무용가 윤소현이야. 인터넷에 치면 바로 찾을 수 있는 유명한 인물이지.”“아, 그렇군요.”간병인은 마음속으로 의심을
주차할 곳이 없어 최현아는 천천히 걸어왔는데, 아첨을 떨며 바로 다가오는 지원 엄마를 보고서 귀찮아했다.옆에서 눈치를 바로 차리 비서가 지원 엄마 앞을 막아섰는데, 최현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제가 아무 하고나 친구 하는 줄 아십니까?”학부모 위원회 회장은 아니지만 최현아는 유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다.지원 엄마는 기껏해야 졸부의 아내로 명문에 속하지도 못한다.그전까지 지원 엄마와 얘기도 자주하고 소통도 즐겨한 것은 그 손을 빌려 박민정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하지만 인제 이용할 가치가 없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가식을 떨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지원 엄마는 바로 제 자리에 굳어버렸고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비웃기만 했다.지원 엄마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간 손연서가 입을 열었다.“앞으로의 대인관계에서 보다 좀 솔직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뺀질거리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된다는 것도 꼭 명심하고요.”하지만 지금 사회에서 권력이 크고 재력이 뛰어난 사람의 힘을 빌려 ‘승승장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드문 현상이 아니다.그렇다고 하여 마지노선은 지켜야 하면 이중 스파이 따위는 더더욱 하면 안 된다.손연서는 지원 엄마한테 ‘교훈’을 남기고서 박민정과 도한 엄마에게 말했다.“앞으로 가서 아이들 기다리죠.”“네.”세 사람은 그렇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이 도한 엄마에게 물었다.“도한 엄마, 집사람은 무슨 사업에 종사하고 있죠?”그 말을 듣고서 도한 엄마는 먼저 한숨부터 내쉬었다.“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간당간당해요. 우리 남편 다음 달에 파산 신청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도와줄지 말지 박민정이 고민하고 있을 때 손연서가 먼저 말했다.“도한 엄마, 저 믿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우리 손씨 가문도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저희 아빠가 아시는 분이 좀 많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손연서는 누군가를 함부로 돕는 사람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선뜻 나서는 이
연신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고 나서야 최현아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되었다.박민정의 어느 정인인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는데.“박민정, 그렇게 외로웠어? 유남준은 저 남자 알아?”그 말을 듣고서 정민기는 눈살을 찌푸렸다.“저는 민정 씨 보디가드입니다.”“보디가드? 설마.”최현아는 동네방네 괴롭힘만 당했던 박민정이 보디가드까지 구했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박민정이 앞으로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는데, 설명은 아니라 ‘협박’이었다.“뺨 하나로 부족한가요?”최현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풀이 잔뜩 죽은 채 뒤돌아서서 유지훈 앞으로 다가가 손잡고 자리를 떠났다.떠나기 전에 박민정을 아주 매섭게 째려보기까지 하면서.“도와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최현아 씨한테 완전히 미움 사게 된 것 같네요.”옆에 있던 손연서가 박민정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두려울 것 하나 없는 손연서이지만 그 말을 듣게 되는 순간 무너지는 그녀이다.제삼자의 아들을 키우면서 제삼자한테 괴롭힘까지 당한다는 것.“괜찮아요. 이러한 일이 없어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아이러니하게도 착한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는 법이다.상대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건다는 것을 박민정은 잘 알고 있다.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을 우러러보게 된 손연서는 속으로 다짐했다.꼭 그녀와 친구가 될 것이라고.얼마 지나지 않아 박예찬도 교실에서 달려 나왔다.박예찬 뒤에는 껌딱지 조동민도 함께 나왔다.아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조동민 엄마가 바로 다가갔다.“동민아.”“엄마.”조동민 엄마는 그의 손을 잡고서 박예찬과 함께 박민정에게로 걸어갔다.“박 회장님, 시간 괜찮으시면 우리 집으로 가시지 않을래요? 아이들은 아이대로 놀고 우리 어른들은 커피 마시면서 담소도 나누고요. 조하랑 씨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사람 엄청 좋다면서요.”친구 조하랑한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조동민 엄마는 조하랑에게
박민정은 예찬이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웃음이 만발한 채로 김훈이 다가왔다.“우리 손자 왔어?”박예찬은 김훈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할아버지.”김훈은 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며 마치 보물을 바치는 듯했다.“할아버지가 심심할 때 만든 건데 어때?”“예뻐요. 하지만 이 부분에 디테일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박예찬은 흠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있는 그대로 짚어주었다.김훈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 예찬이가 지적해 준 부분에 신경 쓰면서 또 만들어볼게.”“먼저 들어가 있어. 엄마랑 얘기 좀 하고 들어갈게.”“네.”박예찬이 방에 들어간 뒤 박민정이 다가갔다.“할아버님.”예쁜 얼굴에 새로운 흉터가 또 생긴 것을 보고 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잡았어?”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해외로 도주한 거 같아요.”“감히 너랑 예찬이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해외든 어디든 내가 반드시 찾아내고 말 것이야.”빈말이 아니라 김훈은 이미 부하들에게 찾아보라고 지시를 내렸다.정수미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정수미 곁에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맙습니다.”“나한테 그럴 필요 없다. 예찬이가 내 증손자이면 넌 내 친손녀랑 다름이 없잖아. 그리고 나랑 네 할아버지 예전에 친한 친구였잖아.”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거 아니에요?”“다름이 아니라 인우 대신 너한테 사과하려고 그래.”김훈은 김인우가 생명의 은인을 잘못 알고 박민정에게 시시콜콜 시비를 걸었던 걸 알고 있다.“그놈이 하도 어리석어서 누가 자기를 구해줬는지 기억도 못 해.”박민정은 침묵을 유지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자기한테 상처를 줬던 사람을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김훈 역시 난처해하는 그 모습을 눈치채고 덧붙였다.“민정아, 내가 윗사람이라고 이렇게 너한테 무조건 용서를 바라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거 나도 알아. 인우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우리 집안을, 그리
그대로 굳어버린 박민정을 느끼지 못한 채 유남준은 몸을 한껏 더 숙여 입술에 뽀뽀했다.그 모습에 박윤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뽀뽀만 하라고 했지 입술에 키스하라고 하지 않았는데!’“엄마.”박윤우의 부름에 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유남준을 밀쳐냈다.“그만하고 밥 먹어요. 이러지 말고.”유남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그래.”그렇게 일가족이 단란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조금 쉬고 나서 9시쯤 씻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박윤우가 박민정의 손을 잡고 운을 떼기 시작했다.“엄마, 오늘 아빠하고 나하고 같이 자자.”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유남준이 먼저 대답했다.“윤우야, 인제 세 살짜리 어린이도 아니고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박윤우는 그 대답에 그저 멍하기만 했다.‘왜 이러시는 거지? 아빠 도와주려고 이러고 있는 거잖아!’하지만 유남준은 박윤우의 마음을 몰라주었고 박윤우 역시 어떻게 사인을 보내면 좋을지 몰랐다.“알았어요.”자기 마음을 몰라주니 박윤우는 더 이상 도와주기가 귀찮아졌다.하지만 유남준은 그 마음을 몰라준 것이 아니라 박민정과 단둘이 누워있고 싶었던 것이었다.먼저 방으로 박윤우를 보내고 나서 유남준은 박민정의 뒤로 쪼르르 따라갔다.박민정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는데.“왜 이렇게 쫓아다녀요?”유남준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같이 자려고.”“안방으로 들어가서 자요. 저는 객실에서 자면 돼요.”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박민정이 대답했다.임신한 몸이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유남준과 함께 눕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박민정이 거절할 것으로 생각지 못한 유남준은 두말하지 않고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번쩍 들었다.“아니, 같이 잘 거야.”박민정이 반항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안방으로 안고 갔다....고요한 밤.윤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잠에 들지 못했다.법원에서 보내온 압수 집행서를 보면서 윤석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박민정은 대체 어디서 그
윤석후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주식을 팔자마자 유남준이 뒤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그의 모든 주식을 사들인 것에 대해.그것도 모르고 윤석후는 이득을 봤다며 좋아했을 것이다.“계속 소송 진행하지 않으면 박민정한테 무조건 그 돈을 다 갚아야 한다는 거잖아요?”윤소현이 물었다.이때 윤석후의 두 눈에 차가운 빛이 번쩍였는데.“소현아, 박민정이 저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는 건 내가 아직 네 엄마랑 부부 사이여서 그러는 거야. 만약 내가 이혼하면 이는 한수민 개인의 채무가 되는 거야.”그 말을 들은 윤소현은 반박하지 않았다.“내일 엄마 찾으러 가요.”한수민보다는 돈이 더 좋은 윤소현이다.다음날 이른 아침.한수민의 병실은 오랜만에 북적거렸다.윤석후와 윤소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자기를 보러 온 줄 알고 한수민은 윤석후를 일부러 상대조차 하지 않은 채 윤소현하고만 얘기를 주어 받았다.그동안 단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은 윤석후는 자기 입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윤소현에게만 눈짓을 했다.윤소현 역시 이에 대해 눈치 차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이윽고 윤소현은 박민정의 모든 행위에 대해 부채질하며 한수민에게 알려주었다.“미친 거 아니야? 정말로 돈을 요구했단 말이야?”모든 걸 듣고 난 한수민이 욕설을 퍼부었다.“엄마, 간병인한테 듣자 하니 박민정이 어제도 찾아왔다면서요. 무슨 일로 온 거죠?”“별거 아니고 그냥 돈 갚으라고 그 소리 하려고 온 거야.”한수민은 윤소현의 손을 잡고서 덧붙였다.“소현아, 네가 고생이 많다.”“앞으로 매주 찾아온다고 했었어 그 미친년이.”윤소현은 떠보며 물었는데.“엄마, 다른 방법은 없어요? 돈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나요?”잠시 침묵하더니 한수민은 말을 아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윤소현은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저희한테 있긴 해요.”“그게 뭔데?”“아빠랑 이혼해 주세요.”순간 벼락에 맞은 것만 같은 한수민이었다.두 사람이 이렇
“엄마, 또 바지에 오줌 눴어요?”싫어하는 모습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 윤소현이다.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한수민은 이불을 당기면 어떻게든 냄새를 가리려고 했다.그 모습에 윤소현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이 지경까지 되었으면 이혼할 법도 한데, 대체 왜 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이제 곧 죽게 될 몸인데, 짐이 되지 말고 홀로 모든 걸 안고 떠나라는 소리였다.하지만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난처하기 그지없는 한수민이다.“생각해 볼게. 그만 가 봐.”“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박민정이 모든 걸 빼앗아 갈지도 몰라요.”윤소현 역시 이곳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 윤석후를 데리고 떠났다.그들이 떠난 뒤 간병인이 바로 들어왔다.“사모님, 괜찮으세요? 선생님 불러드릴까요?”눈시울이 붉어진 한수민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시트 좀 갈아주세요.”외부인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던 그녀이다.간병인은 먼저 한수민을 부축해 일어서고 시트를 갈려고 했는데, 오줌을 눈 그곳에서 피가 가득했다.그동안 많은 환자들을 간병해 왔지만, 그곳을 보는 순간 간병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피... 피가 엄청 많아요...”한수민 역시 눈길을 돌렸는데,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어서! 어서 의사 불러와요.”죽음이 두려운 한수민이다.의사와 간호사가 급히 달려왔고 그들은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간호사가 한수민에게 말했다.“환자분, 마음 편히 놓으세요. 말기에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건 정상이거든요.”“제가 알아본 게 좀 있는데, 제가 곧 죽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요?”한수민이 간호사의 옷자락을 꽉 잡고 물었다.지금까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한 그녀는 아직 이 세상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간호사와 의사는 한수민에게 도저히 잔인한 사실을 말해줄 수 없었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쉬고 있으라고만 했다.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간병인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한수민을 바라보았다.“사모님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