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 글자.‘에.’세레나의 손가락이 라엘의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검은 가시가 그녀의 목을 휘감아 꽃밭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고통으로 흔들렸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목소리 대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세레나!”라엘은 멀어지는 손을 붙잡았다.검은 가시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팔까지 휘감았다. 날카로운 끝이 피부를 찢고 영혼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라엘은 손을 놓지 않았다.꽃밭 아래에서 떠오른 거대한 눈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검은 눈동자 안에는 수백 명의 얼굴이 비쳤다. 아스테리아에게 피를 빼앗긴 사람들, 죽은 뒤에도 영혼을 붙잡힌 희생자들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내 진명을 입에 담는 순간, 세레나의 영혼부터 찢어질 테니까.’아스테리아의 웃음소리가 하얀 세계를 뒤흔들었다.‘그 아이가 네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니?’검은 가시가 더욱 거세게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발밑의 꽃들이 썩어 가며 검게 변했다.라엘은 세레나의 손목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말하지 않아도 돼.”세레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이름은 내가 찾을게.”‘라엘…… 님.’“그러니까 버텨.”라엘의 몸에서 금빛이 터져 나왔다.가시가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하나를 끊으면 두 개가 돋아났고, 두 개를 끊으면 네 개가 세레나의 영혼을 휘감았다.이곳은 세레나의 내면이었지만 이미 절반 이상 아스테리아의 저주에 잠식되어 있었다. 라엘이 무리하게 힘을 쓰면 세레나의 영혼도 함께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아스테리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해 봐.’검은 눈이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그 아이를 구하려고 힘을 쓸수록 네가 직접 세레나를 찢게 될 테니.’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가시를 태우던 금빛이 흔들렸다.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박동이 들렸다.쿵.세레나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라엘의 영혼과 연결된 또 하나의 심장.카시안이었다.‘라엘.’현실에서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하얀 세계까지 닿았다.‘눈을 떠.’은빛 실이 어
검은 장미에서 떨어진 꽃잎 하나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로 변했다.라엘의 가슴에 남은 꽃잎은 세 장.성휘제까지 남은 시간도 사흘이었다.‘꽃잎이 모두 떨어지는 밤, 네 몸은 나의 것이 된다.’아스테리아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라엘의 심장을 파고들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표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장미의 가시는 새로 만들어진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아래로 느리게 뛰는 심장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카시안이 망토 자락을 여며 라엘의 몸을 가렸다.“표식을 옮길 수 있나?”“다른 사람한테?”“내게 돌려놔.”라엘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제 눈에 담은 카시안의 얼굴은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고, 피가 묻은 얼굴에도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차갑지 않았다.걱정과 분노, 조금 전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느꼈던 두려움까지 감추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싫어.”라엘이 잘라 말했다.“왜지?”“겨우 빼앗아 왔는데 다시 줄 것 같아?”“그건 빼앗은 게 아니라 떠넘겨진 거다.”“결과는 같아. 아스테리아는 이제 너보다 나를 원하고 있어.”“그 사실이 마음에 드나?”“적어도 네 심장을 뽑겠다는 계획은 미뤄졌잖아.”카시안의 표정이 굳었다.“네가 대신 죽는다면 아무 의미 없다.”“죽을 생각 없다니까.”“아까 심장이 멎었다.”“그건 세레나의 몸이고, 지금 나는 멀쩡해.”라엘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자신의 심장이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세레나의 약한 육체를 빌리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박동이었다.그러나 카시안은 안심하지 않았다.“해가 뜨면 이 몸은 사라진다고 했지.”“응.”“그럼 표식은?”라엘의 손이 멎었다.그 부분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표식은 세레나의 육체가 아니라 라엘의 영혼을 따라왔다. 해가 뜬 뒤 임시 육체가 사라져도 저주는 영혼에 남을 가능성이 컸
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가 심장을 향해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하얀 피부 아래로 검은 핏줄이 빠르게 번졌다. 손목을 휘감은 가시는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올라왔고, 그 끝이 가슴을 향해 파고들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터졌다.라엘의 무릎이 꺾였다.“라엘!”카시안이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장부 조각 위에서는 여전히 붉은 글자가 번지고 있었다.〔성휘제 최종 제물 변경.〕〔라엘.〕카시안의 이름에 그어진 검은 선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더니 종이 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가느다란 연기가 된 선은 라엘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동시에 카시안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죽음의 표식도 반응했다.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전하!”다미안이 다급히 다가왔다.“가까이 오지 마!”라엘이 외쳤다.그녀와 카시안 사이에 검은 실이 나타나 있었다. 영혼의 공간에서 더 깊게 연결된 두 사람을 따라 저주가 옮겨 다니고 있었다.카시안에게 새겨졌던 제물의 표식이 라엘에게 넘어가는 대신, 라엘이 느끼는 고통이 카시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다미안이 검 끝으로 검은 실을 끊으려 했다.“자르면 안 돼.”라엘이 이를 악물고 그의 검을 붙잡았다.“이건 단순한 저주가 아니야. 제물의 자리를 바꾸는 계약이야.”“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우선 이 방에서 나가야 해.”바닥에 흩어진 거울 조각들이 일제히 떨리기 시작했다.조각마다 아스테리아의 얼굴이 비쳤다. 웃는 얼굴, 분노한 얼굴, 피를 마시며 황홀하게 눈을 감은 얼굴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라엘을 바라보았다.‘찾았다.’수십 개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네 영혼으로 향하는 길을.’깨진 거울 사이에서 검은 손들이 쏟아져 나왔다.다미안이 검을 휘둘렀다. 신력이 실린 검격에 앞쪽의 손들이 잘려 나갔지만, 거울 조각은 침실 바닥과 벽을 기어 다니며 끊임없이 새로운 손을 만들어 냈다.카시안은 고통을 누른 채 일어섰다.“장부를 챙겨.”“이미 있습니다.”다미안이 타다 남은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라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표면이 물처럼 출렁이며 손과 팔을 삼켰다. 라엘이 반대편 손으로 거울의 은제 테두리를 붙잡았지만, 발밑이 미끄러지며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렸다.“라엘!”카시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거울 안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사람 하나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라엘의 어깨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카시안은 그녀의 몸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세게 당겼다.그러나 두 사람의 몸에 이어진 신력이 동시에 반응했다.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와 카시안의 심장 옆에 박힌 죽음의 표식이 붉게 빛났다.쿵.거울 너머에서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한 번의 박동이 침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카시안의 발이 바닥에서 밀렸고, 거울 가까이에 있던 촛대와 탁자까지 검은 표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다미안이 카시안의 망토를 붙잡았다.“전하!”그 순간 침실 문이 부서졌다.쾅!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저택의 기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목이 기이하게 꺾인 자도 있었고 가슴에 검이 박힌 채 걷는 자도 있었다.죽은 자들을 움직여 만든 인형이었다.다미안은 한 손으로 카시안의 망토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가장 먼저 달려든 인형의 목이 잘려 나갔지만,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목을 잃은 시체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이런 빌어먹을…….”다미안이 이를 악물었다.거울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카시안의 상체까지 검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엘의 몸은 이미 절반 이상 보이지 않았다.카시안은 자신의 망토를 붙잡고 있던 다미안의 손을 떼어 냈다.“밖을 맡아.”“전하, 안 됩니다!”“거울이 닫히지 않게 해.”“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그래서 혼자 보낼 수 없다.”카시안은 망설이지 않았다.라엘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준 채 거울 속으로 몸을 던졌다.“전하!”다미안의 외침이 멀어졌다.시야가 검게 뒤집혔
“공작부인에게서 왜 이렇게 진한 피 냄새가 나는 걸까요?”라엘의 물음이 떨어진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소리가 멎었다.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도, 신관들의 예복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도 사라졌다. 라엘의 손을 잡고 있던 아델리아의 손가락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러나 당황은 찰나였다.아델리아는 금세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피 냄새라니요?”“아주 많은 사람의 피가 엉겨 붙은 냄새예요.”“성녀님께서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아델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새벽, 신전 서쪽 구호소 일부가 무너졌답니다. 저도 부상자들을 옮기는 일을 도왔으니 그때 피가 묻었을지도 모르겠어요.”“그래요?”“예. 보시다시피 급히 오느라 옷도 갈아입지 못했으니까요.”장미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아델리아가 향이 밴 소매를 일부러 라엘 가까이 가져온 듯했다.하지만 라엘이 맡은 피 냄새는 옷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아델리아의 살갗 아래, 본래 그 몸에 속하지 않은 영혼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마신 피와 빼앗은 생명력이 영혼에 눌어붙어 만들어 낸 악취였다.라엘이 천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이상하네요. 옷이 아니라 공작부인의 몸속에서 나는 것 같은데.”사절단에 섞여 있던 신관 하나가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말없이 아델리아를 바라보았고, 다미안의 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아델리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죽음의 기운이었다.가느다란 검은 실이 라엘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와 손목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을 직접 노리고 들어오는 저주였다.동시에 아델리아의 몸 안에서 낯선 얼굴이 웃었다.연한 금발과 청명한 녹색 눈동자. 오래전 신전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에서라면 누구보다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였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욕망과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옛 성녀 아스테리아.그녀의 입술이 움직
끝없이 펼쳐진 하얀 들판 위로 바람이 불었다.이름 모를 꽃들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하늘도, 땅도, 멀리 보이는 지평선도 지나칠 만큼 희었다. 천상과 닮았으나 천상은 아닌 곳. 누군가의 영혼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작은 안식처였다.라엘은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신비로운 연보라색 머리카락. 눈을 감고 있어도 단정하고 온화한 인상이 느껴지는 얼굴. 라엘이 지금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진짜 주인이었다.“세레나.”불러도 대답은 없었다.라엘은 꽃을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세레나의 모습은 흐릿해졌다. 손끝이 햇빛에 녹는 눈처럼 투명했다.하지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세레나는 잠들어 있었다.누군가에게 힘을 빼앗긴 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라엘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려는 순간, 꽃밭이 일그러졌다.낯선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신전의 정원이었다. 눈이 보이던 시절의 세레나가 하얀 장미를 다듬고 있었다. 그 앞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아델리아 로젠하르트.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성녀님을 생각하며 특별히 주문한 것이랍니다.’상자 안에는 은빛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중앙에 박힌 보랏빛 보석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것처럼 영롱했다.세레나는 의심하지 않았다.아델리아는 오랫동안 신전을 후원해 왔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구호소를 세웠고, 흉년에는 누구보다 많은 식량을 내놓았다.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과 병든 이들을 위한 요양원도 운영했다.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 불렀다.세레나 역시 그녀를 선한 사람이라고 믿었다.‘제가 직접 걸어 드려도 될까요?’아델리아가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차가운 보석이 세레나의 가슴에 닿던 순간, 아주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착각이라 여기고 넘길 만큼 희미한 소리였다.그날 밤부터 세레나는 악몽을 꾸었다.검은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이름 없는 이들이 어둠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