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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9 11:00:06

오후 2시.

지안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과거의 서지안이었다면, 오늘 같은 날에는 강민우가 좋아하는 연한 파스텔 톤의 원피스를 입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지안에게 '지켜주고 싶은 여자'의 이미지를 원했다.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 옅은 화장, 수줍은 미소. 그것이 강민우가 세팅해 놓은 서그룹 후계자의 '목줄'이었다.

하지만 지금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완전히 달랐다.

몸의 실루엣이 날카롭게 떨어지는 짙은 블랙 슈트. 발목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는 스틸레토 힐. 그리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핏빛 레드 립스틱까지.

마치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목을 치러 가는 처형인 같기도 했다.

똑똑.

“지안아, 준비 다 했어?”

문밖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강민우였다.

지안은 천천히 화장대에서 몸을 돌려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지안의 모습을 확인한 강민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묘한 이질감이 스쳤다.

“어…… 지안아. 옷이…….”

“왜. 이상해?”

“아니, 이상한 건 아닌데. 오늘 우리 웨딩드레스 가봉하러 가는 날이잖아. 샵 스태프들도 다 볼 텐데, 너무 어두운 거 아닌가 해서. 네가 평소에 입던 스타일도 아니고.”

강민우는 눈웃음을 지으며 지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지안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허공에 머문 강민우의 손이 어색하게 갈 곳을 잃었다.

“평생 한 번 입는 웨딩드레스 보러 가는 날인데, 옷이 무슨 상관이야. 드레스만 하야면 됐지.”

지안의 무심한 대답에 강민우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네. 우리 지안이는 뭘 입어도 예쁘니까. 가자, 늦겠다.”

1층으로 내려가자,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두드리던 서유라가 벌떡 일어났다.

“어? 언니 다 입었어? 헉, 언니 오늘 스타일 완전 세다. 어디 시상식 가?”

“넌 왜 여깄어.”

지안이 싸늘하게 묻자, 유라는 민우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팔을 붙잡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형부, 아니 민우 오빠가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단 말이야. 언니 드레스 고르는 거 봐주라고. 나 미대생이잖아. 내 안목이 또 기가 막히거든.”

강민우가 멋쩍게 웃으며 거들었다.

“아무래도 남자 눈보단 동생인 유라가 봐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불편해?”

불편하냐고?

지안은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과거에도 그랬다.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날, 신혼집 가구를 보러 가는 날, 심지어 예물을 맞추는 날까지 서유라는 항상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때는 동생이 언니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도와주려 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서유라 특유의 기만이자 조롱이었다.

자신이 빼앗을 남자의 결혼 준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뒤에서는 강민우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지안을 바보 취급했던 것이다.

“상관없어. 가자.”

지안은 두 사람을 지나쳐 먼저 현관 밖으로 나섰다. 등 뒤에서 민우와 유라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청담동에 위치한 최고급 VVIP 웨딩드레스 샵, '루미에르'.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이곳은 재벌가 자제들이나 톱스타들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세 사람이 샵에 들어서자, 원장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서지안 본부장님, 강민우 이사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장은 지안의 시크한 블랙 슈트를 보고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프로다운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고급스러운 벨벳 소파와 샹들리에,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최고급 샴페인과 마카롱이 세팅되어 있었다.

“오늘 피팅하실 드레스는 총 세 벌입니다. 민우 이사님께서 세 달 전부터 이탈리아 밀라노 본사에 특별히 오더를 넣어서 공수해 온 하이엔드 라인들이죠. 이사님께서 신부님을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저희 스태프들 다 감동했잖아요.”

원장의 너스레에 강민우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유, 원장님도 참. 지안이한테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입혀주고 싶은 게 제 마음인걸요.”

“어머어머, 오빠 진짜 로맨티스트다. 언니, 좋겠다~”

서유라가 호들갑을 떨며 박수를 쳤다.

지안은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들의 삼류 연극을 무표정하게 감상했다.

역겨웠다. 저 주둥이에서 나오는 활자 하나하나가 구더기처럼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속이 매스꺼웠다.

“그럼, 첫 번째 드레스부터 입어보실까요, 본부장님?”

지안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피팅룸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거울로 된 피팅룸 안.

스태프들이 조심스럽게 첫 번째 드레스를 가져왔다.

순백의 실크 소재, 어깨선이 우아하게 드러나는 오프숄더 디자인, 그리고 수천 개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 수놓아진 화려한 베일.

그 드레스를 보는 순간, 지안의 숨이 턱 막혔다.

기억난다.

전생에서 지안이 입었던 바로 그 본식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를 입고 버진로드를 걸으며, 하객들의 축복 속에서 강민우의 손을 잡았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의 끝은 처참한 지옥이었다.

차디찬 강물 속으로 떨어지던 순간, 거센 물결에 찢겨 나가던 하얀 실크 자락. 피투성이가 된 채 굳어버린 자신의 얼굴.

“헉…… 하아…….”

지안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거울을 짚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본부장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스태프가 놀라 다가오자, 지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니다. 나는 죽지 않았다. 다시 돌아왔다. 저들에게 당하기 전으로.

공포를 삼키고, 그 자리에 차가운 분노를 채워 넣었다.

“입혀주세요.”

지안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잠시 후, 피팅룸의 무거운 커튼이 좌우로 천천히 열렸다.

무대 위로 눈부신 조명이 쏟아졌다.

소파에 앉아 샴페인을 홀짝이던 강민우와 서유라의 시선이 일제히 무대 위로 향했다.

“와…….”

강민우가 입을 반쯤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감탄이 서려 있었다.

“지안아…… 너 정말 천사 같아. 너무 아름답다.”

그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완벽한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 저 표정 하나에 지안은 평생을 속았었다.

서유라 역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대박. 언니 완전 예뻐. 오빠가 고른 드레스 진짜 언니한테 찰떡이다.”

유라의 목소리 끝에는 아주 미세한 질투와 시기가 묻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지안에게는 그 얄팍한 속내가 투명하게 보였다. 자기가 차지해야 할 남자의 돈으로, 자기가 입어야 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지안을 향한 노골적인 질투심.

지안은 전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아름답다라…….”

지안의 입에서 나온 건조한 중얼거림에, 강민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예뻐, 지금.”

지안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민우를 내려다보았다.

“벗을게요.”

“……어?”

피팅룸 안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스태프들도, 강민우도, 서유라도 당황한 표정으로 지안을 쳐다보았다.

“원장님. 커튼 닫으세요. 환복할게요.”

지안이 차갑게 명령하자, 원장이 허둥지둥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본, 본부장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부분이…… 치수가 좀 꽉 끼시나요?”

“아니요. 그냥, 옷이 너무 천박해서요.”

천박하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든,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에 맞먹는 드레스에 대고 할 소리가 아니었다.

강민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지안아, 천박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위해서 이탈리아 본사까지 연락해서……”

“강민우 씨.”

지안이 그의 말을 뚝 끊었다.

'오빠'가 아닌 '강민우 씨'라는 호칭에 강민우의 두 눈이 커졌다.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서늘한 호칭이었다.

“강민우 씨 안목, 원래 이렇게 수준 이하였어요? 실크 질감은 무겁기만 하고, 크리스털은 억지로 쑤셔 박아서 싸구려 티가 줄줄 흐르잖아요. 이걸 지금 내 결혼식에 입으라고 고른 거예요? 서그룹 후계자가 수준 떨어지게 이런 걸 입고 입장하길 바란 건가요?”

지안의 가차 없는 독설이 프라이빗 룸에 쩌렁쩌렁 울렸다.

스태프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로의 눈치만 보았고, 강민우의 뺨은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푸르스름해지기를 반복했다.

“서지안…… 너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강민우가 애써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려 했지만,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유라가 다가와 강민우의 편을 들었다.

“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민우 오빠가 언니 기쁘게 해주려고 얼마나 고생해서 고른 건데. 내 눈엔 엄청 예쁘기만 하구만! 언니가 오늘 기분 안 좋은 건 알겠는데, 오빠한테 이러는 건 아니지.”

유라는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민우의 앞을 막아서며 지안을 쏘아보았다. 강민우는 그런 유라를 기특하다는 듯, 또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며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다.

지안은 그 구역질 나는 연대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 눈엔 엄청 예뻐 보여?”

“어! 내가 보기엔 최고급이구만. 언니가 예민한 거야.”

“그래? 그럼 네가 입든가.”

지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라의 표정이 멍청하게 굳었다.

“……뭐?”

“네가 입으라고. 강민우 씨 안목이랑 네 취향이랑 아주 딱 떨어지게 맞는 것 같네. 싸구려들끼리.”

“서, 서지안!!”

결국 강민우의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가 항상 쓰고 있던 '다정하고 완벽한 약혼자'의 가면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너 오늘 진짜 왜 그래!! 아침부터 사람 무안하게 만들더니, 지금 스태프들 다 있는 데서 동생한테 싸구려가 뭐고 나한테 수준 이하가 뭐야! 내가 무슨 죄졌어?!”

강민우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유라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강민우의 팔에 매달렸다.

“오, 오빠…… 화내지 마. 언니가 요즘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그럴 거야…… 흑.”

지안은 그 난장판을 무대 위에서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짐승들이 제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강민우가 이렇게 언성을 높이면 지안이 먼저 꼬리를 내리고 사과를 했었다. 자신이 예민했다고, 오빠 화풀라고.

하지만 지금의 지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 것뿐인데. 자격지심 있어?”

“뭐? 자격지심?”

“내가 내 돈 주고, 내 결혼식에 입을 옷 고르러 와서 마음에 안 든다고 말도 못 해? 누가 들으면 네가 내 드레스 값 내주는 줄 알겠네.”

정곡이었다.

이 샵의 드레스 비용부터 결혼식장 대관, 신혼집, 심지어 강민우가 지금 타고 온 벤틀리까지 모조리 서그룹, 즉 지안의 돈에서 나온 것이었다. 빈털터리 개천에서 용 난 강민우에게는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강민우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뻐끔거렸다.

“원장님.”

지안이 굳어있는 원장을 불렀다.

“네, 네! 본부장님!”

“오늘 피팅 취소할게요. 더 볼 것도 없네요. 샵도 다시 알아봐야겠어요.”

“보, 본부장님!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원하시는 디자인으로……”

“커튼 닫으세요.”

지안이 단호하게 말하자, 스태프들이 서둘러 무대의 커튼을 닫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안은 소파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밥 먹으러 가자며. 안 갈 거야? 난 배고픈데.”

지안이 태연하게 말하자, 강민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분노, 그리고 지안을 향한 미세한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온순한 양이, 갑자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강민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자. 예약해 뒀어.”

강민우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앞장섰다.

유라는 여전히 훌쩍거리며 지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니 진짜 너무해. 나 오늘 밥 안 먹어. 먼저 갈 거야!”

유라가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챙겨 들고 샵을 뛰쳐나갔다.

지안은 멀어지는 유라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뛰쳐나가면 강민우가 나중에 달래주러 오겠지. 뻔한 수작이었다.

저녁 7시.

강민우가 예약한 곳은 한남동에 위치한 미슐랭 3스타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평소 지안이 가장 좋아하던 곳이자,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인 곳.

두 사람은 한강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 프라이빗 룸에 마주 앉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웨이터가 최고급 한우 안심스테이크와 레드 와인을 서빙하고 나간 뒤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강민우였다.

그는 어떻게든 이 통제 불능의 상황을 다시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했다.

“지안아.”

강민우가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아까는 소리 질러서 미안해. 샵 스태프들도 있고, 유라도 있는데 네가 너무 날 선 말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그랬어. 욱하는 성격 고치겠다고 약속해 놓고 또 이랬네. 미안해.”

철저히 계산된 사과.

먼저 몸을 낮춤으로써 상대방의 죄책감을 유발하는 강민우의 주특기였다.

“네가 요새 이사회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거 알아. 내가 더 배려했어야 했는데. 드레스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시 예약하자. 응?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지안은 말없이 강민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입. 저 매끄러운 혀.

저 혀로 나를 사랑한다 속삭였고, 저 혀로 할아버지의 비자금을 조작했고, 저 혀로 나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지안의 시선이 천천히 테이블 위로 내려갔다.

강민우가 스테이크를 썰기 위해 나이프를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고기 덩어리를 썰어내자, 미디엄 레어로 구워진 붉은 핏물이 접시 위로 배어 나왔다.

순간, 지안의 뇌리 속에서 끔찍한 환상이 번쩍였다.

자동차 앞 유리를 뚫고 들어온 철근.

할아버지의 피투성이가 된 얼굴.

그리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며 으스러지던 자신의 팔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피.

“우욱……!”

지안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지독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 지안아, 왜 그래? 속 안 좋아?”

강민우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지안이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오지 마.”

“너 안색이 너무 창백해. 병원 갈까? 체한 거야?”

지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 위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거칠게 밀어버렸다. 챙그랑-! 은식기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지안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강민우를 노려보았다.

“역겨워.”

“……뭐?”

“음식이. 너무 비려서 토할 것 같다고.”

지안이 혐오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내뱉었다.

강민우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서지안. 너 진짜 오늘 왜 이래?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사람 피 말리게 할 건데?!”

강민우가 결국 다시 폭발했다. 그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지안을 향해 이를 갈았다.

지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강민우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강민우.”

서늘하고 고요한 목소리.

“네가 내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내가 널 사랑해서 다 받아주니까.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널 ‘사람’ 취급해 주니까 가능한 거야.”

“너…… 그게 무슨……”

“착각하지 마. 넌 내 옆에서 꼬리 흔드는 개일 뿐이야. 주인이 주는 밥 먹고 살면, 주인 물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안 그래?”

강민우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경악, 수치심, 그리고 분노. 그의 얼굴이 온갖 감정으로 일그러지며 흉측하게 변했다.

“서지안!!!”

강민우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지안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었다.

과거의 지안이었다면 이 폭력적인 모습에 겁을 먹고 벌벌 떨었겠지만, 지안은 오히려 차갑게 비웃었다.

“이거 놔.”

“너 방금 한 말, 다시 해봐. 내가 뭐? 개? 네가 언제부터 날 그렇게 벌레 보듯 무시했다고……”

“안 놓으면, 이 손목 잘라버릴 거야.”

지안의 두 눈에서 형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농담이 아니었다. 진짜로 눈앞의 남자를 찢어 죽일 것 같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의 눈빛이었다.

압도적인 기세에 눌린 강민우의 손아귀 힘이 스르르 풀렸다.

지안은 핸드백을 챙겨 들고 미련 없이 룸을 나섰다.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던 그녀가, 잠시 멈춰 서서 어깨너머로 강민우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 표정, 제법 볼만하네.”

쾅.

단호하게 문이 닫혔다.

홀로 남겨진 강민우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자신이 수년간 정성껏 빚어온 완벽한 조각상.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 줄 동아줄.

서지안이라는 여자가, 지금 자신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씨발…….”

강민우가 짐승 같은 욕설을 내뱉으며 와인 잔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와장창-!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붉은 와인이 피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완벽했던 그의 계획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택시에 올라탄 지안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후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강민우의 일그러지던 표정, 당황하던 그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끓어올랐다.

첫 단추를 뀄다.

완벽한 약혼자라는 강민우의 허울 좋은 가면에 시원하게 침을 뱉어주었다.

하지만 지안은 알고 있었다.

오늘의 통쾌함은 그저 작은 감정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민우는 이 정도 굴욕을 당했다고 제 발로 떨어져 나갈 놈이 아니다. 그는 서그룹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삼키기 위해, 내일부터라도 당장 바닥에 엎드려 꼬리를 흔들며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것이다.

단순한 파혼으로는 부족하다.

강민우와 서유라, 두 인간쓰레기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철저히 짓밟고,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현재 서그룹 내에서 자신의 입지는 생각보다 탄탄하지 않다. 이사회는 호시탐탐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승냥이 떼들로 가득하고, 강민우는 이미 그들 중 절반 이상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해 둔 상태다.

이 불리한 판을 단숨에 뒤집어엎을 조커가 필요하다.

지안의 뇌리에 한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서 강민우가 가장 두려워하고 껄끄러워했던 인물.

국내 재계 1위, 태성그룹의 숨겨진 사생아이자 사교계의 미친개로 불리는 남자.

태성그룹 회장의 버려진 자식이지만, 뒷세계와 막대한 사모펀드를 쥐고 흔들며 웬만한 재벌 총수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실력자.

강민우가 그토록 원했던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는,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맹수.

“차태경.”

지안의 입술 사이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지금쯤 그는 철저히 베일에 싸인 채,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제국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안은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강민우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보다 더 지독한 악마와 손을 잡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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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민우의 후회(2) 밤 10시. 한남동 펜트하우스. 은은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거실은 바깥의 차가운 밤공기와는 대비되게 뜨겁고 나른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아, 아앗……." 어두운 조명 아래, 거대한 통유리창에 두 손을 짚은 채 서 있는 지안의 입에서 달콤하고도 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뒤에는 차태경이 빈틈없이 밀착해 있었다. 태경의 단단한 가슴이 지안의 부드러운 등에 닿을 때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짐승 같은 열기가 지안의 온몸을 속절없이 녹여 내렸다. "오늘 카메라 앞에서는 아주 매섭게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40 화

    47화 민우의 후회(1) "아, 씨발 진짜! 언제까지 이 구석탱이에서 썩고 있어야 하냐고!"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모텔방. 찌든 담배 냄새와 곰팡내로 가득한 방 안에서, 강민우가 신경질적으로 소주병을 벽에 집어 던졌다. 쨍그랑-!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탁한 소주가 장판을 적셨다. "꺄악! 미쳤어?! 왜 나한테 지랄인데!"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명품 쇼핑몰을 뒤적거리던 서유라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헝클어진 머리에 번진 화장.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한 그녀의 몰골은 예전의 화려했던 티 안 나는 여우의 모습은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39 화

    지안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지만, 태경은 지안의 턱을 붙잡고 다시 입을 맞추며 그녀의 실크 블라우스 단추를 거칠게 뜯어냈다. 투둑-! 단추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지안의 하얀 가슴골과 검은색 레이스 속옷이 훤히 드러났다. "회사면 어때.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새끼는 이제 아무도 없잖아. 네가 왕인데." 태경이 지안의 목덜미부터 쇄골을 타고 내려오며 집요하게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붉은 키스 마크가 하얀 피부 위로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아앗……! 거기, 흣……!" 태경의 거친 손이 스커트 안으로 쑥 밀려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38 화

    46화 가문의 실세(2) 오후 3시. 서그룹 본사 최상층, 새롭게 배정받은 부사장 집무실. 본부장 시절 쓰던 사무실과는 차원이 다른 넓이였다. 바닥에는 최고급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창 너머로는 서울 도심의 전경이 발아래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지안은 푹신한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서그룹 총괄 부사장 서 지 안] '드디어.' 지안의 입가에 서늘하고도 짜릿한 미소가 번졌다. 전생에서 이 자리는 강민우의 차지였다. 강민우는 이 의자에 앉아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3 화

    퍼엉-! 폭탄이 터졌다.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아까보다 열 배는 더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고, 장내에 있던 모든 재벌 총수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에이펙스 코퍼레이션과 서그룹의 결합. 이것은 단순한 재벌가의 혼맥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의 포식자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선전포고였다."뭐…… 뭐라고……?"인파 틈에 끼어 있던 민우의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결혼? 차태경이랑 결혼?"아니야! 저럴 리가 없어! 지안아!"이성을 잃은 민우가 괴성을 지르며 기자들을 밀치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2 화

    강민우였다.그는 평소처럼 명품 슈트를 빼입고 있었지만, 안색은 흙빛이었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사방을 훑고 있었다.어제 상견례 자리에서의 파혼 선언.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대산건설 본사에 들이닥친 검찰의 대대적인 압수수색. 하루아침에 강민우의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버렸다."민우야. 넌 대체 여기 왜 온 거냐. 서 회장님은 아예 참석도 안 하셨다는데."강 회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민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른 기업의 회장들은 이미 대산건설을 부도난 기업 취급하며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아버지. 지안이가 올 겁니다.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1 화

    오후 5시. 한남동 저택의 드레스룸.전면 거울 앞에 선 지안은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최고급 실크 소재로 맞춤 제작된 검은색 홀터넥 드레스. 등선이 허리선까지 깊게 파여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깊게 트인 슬릿 사이로 하얀 허벅지가 아슬아슬하게 비쳤다. 우아하면서도 지독하게 관능적인, 그야말로 완벽한 사냥꾼의 차림새였다."수고하셨어요. 나가보세요."지안의 말에 스타일리스트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빠르게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 지안이 화장대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0 화

    오후 2시, 여의도 에이펙스 코퍼레이션 본사 최상층.통유리창 너머로 한강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차태경의 대표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최고급 가죽 소파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서늘한 긴장감과, 어젯밤의 농밀했던 열기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지안은 다리를 꼰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천천히 넘겼다. 정갈한 명조체로 인쇄된 서류의 맨 위에는 [혼인 계약서]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계약 기간 2년."지안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기간 동안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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