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잉-. 지이잉-.
어두운 택시 안. 핸드백 안에서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지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액정에 뜬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강민우]
레스토랑에서 밥상을 엎어버리듯 빠져나온 지 30분째. 강민우는 벌써 스무 통이 넘는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택시를 타고 쫓아오거나 집 앞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고 쇼를 했겠지만, 오늘 지안이 보여준 모습은 그가 감히 섣불리 다가오지 못할 만큼 이질적이고 서늘했을 것이다.
지안은 진동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자마자 전원 버튼을 꾹 눌러 휴대폰을 아예 꺼버렸다.
검게 죽은 액정 위로 차가운 얼굴이 비쳤다.
“후우…….”
택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지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레스토랑에서 강민우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을 때의 그 짜릿한 희열은 잠시였다. 이성을 되찾은 지금, 머릿속은 오히려 얼음물에 담근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단순히 소리를 지르고 망신을 주는 것은 진정한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감정의 배설일 뿐.
강민우는 잡초 같은 놈이다. 개천에서 용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 올라온 독종. 오늘 한 번 뺨을 맞았다고 해서 순순히 서그룹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포기할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의 일로 위기감을 느낀 강민우는 더 치밀하고 은밀하게 움직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기를 기다리며 이사회의 임원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유라를 이용해 지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들 테지.
전생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강민우는 결혼 후 단 2년 만에 서그룹의 알짜배기 계열사들을 자신의 지인들로 채워 넣었다. 지안이 회사 일에 치여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는 할아버지의 비자금 장부를 조작해 지안을 협박할 무기까지 완벽하게 세팅해 두었다.
지금 당장 파혼을 선언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런 증거 없이 "저놈이 날 배신할 놈이다"라고 말해봤자, 임원들은 혼기를 앞둔 후계자의 히스테리 정도로 치부할 것이다. 오히려 강민우가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동정 여론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았다.
“완벽하게 짓밟아야 해.”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파멸.
강민우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사회적 지위, 평판, 인맥,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까지 모조리 산산조각 내야 한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두 번 다시 내 앞에서는 고개조차 들 수 없도록 철저히 부숴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강민우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기어 다닐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권력과 자본.
현재 지안의 위치로는 부족했다. 서그룹의 후계자이긴 하지만, 아직 경영권을 온전히 승계받지 못한 상태였다. 회사 내부에 뿌리내린 강민우의 세력을 단숨에 뽑아내려면 외부의 강력한 조력자가 필수적이었다.
지안은 번쩍이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을 헤집었다.
‘강민우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간.’
전생의 3년. 강민우는 서그룹의 실세로 군림하며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웬만한 재벌 2, 3세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던 그였다.
하지만 그런 강민우조차 꼬리를 만 개처럼 덜덜 떨며 알아서 기어 다니게 만들었던 유일한 인물이 딱 한 명 있었다.
기억의 파편이 2년 전, 어느 겨울의 VVIP 자선 파티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전생의 기억]
재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인 최고급 호텔의 연회장.
그날도 강민우는 지안을 옆에 세워두고, 여러 임원진 앞에서 어깨에 한껏 힘을 주고 있었다.
"하하, 이번 서그룹의 신규 프로젝트는 제 선에서 다 정리할 겁니다. 아버님(서 회장)께서도 전적으로 저한테 일임하셨거든요. 이사님들도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거만하게 와인 잔을 흔들며 떠벌리던 강민우.
임원들은 서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이 다 된 그에게 아부하기 바빴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연회장의 육중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순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떠들던 연회장 안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누군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쏠렸다.
문턱을 넘어선 남자는 단 한 명이었다. (뒤에 비서진이 따르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 키, 맞춤으로 딱 떨어지는 짙은 차콜 그레이 수트.
조각처럼 날카로운 턱선과 베일 듯 오뚝한 콧날.
무엇보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단 1도 느껴지지 않는, 칠흑처럼 깊고 서늘한 눈동자.
태성그룹의 숨겨진 사생아이자, 뒷세계의 자본을 쥐고 흔드는 사모펀드 '에이펙스(APEX)'의 진짜 주인.
차태경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좌우로 길을 텄다.
아무도 감히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이고도 위험한 아우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
강민우 역시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어붙어 있었다.
문제는 그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이었다. 긴장한 나머지 손이 미끄러지면서, 와인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쨍그랑-!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소리에, 차태경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강민우 쪽으로 돌아갔다.
그 서늘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강민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평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고, 잡아먹히기 직전의 쥐새끼처럼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 아앗……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강민우가 허둥지둥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한 비굴한 태도였다.
차태경은 구두 발치에 튄 붉은 와인 방울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굽신거리는 강민우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낮고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그룹 데릴사위."
"네, 넵! 강민우라고 합니다, 이사님!"
"주제 파악 못 하고 짖고 다니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는데."
차태경의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어렸다.
"천박하게 굴지 마. 물 흐려지니까."
강민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감히 반박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저 "명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차태경은 그런 강민우를 철저히 무시한 채, 지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얼어붙은 지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번뜩였다.
"개 목줄 관리 똑바로 하십시오, 서지안 본부장. 한번 꽉 물리면, 주인도 못 알아보는 잡종 같은데."
그는 그 말만 남긴 채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연회장 상석으로 걸어갔다.
지안은 그때 차태경이 남긴 서늘한 경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다. 그저 무례하고 거만한 남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그는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강민우라는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위험한 잡종인지, 그리고 그 잡종이 결국 주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라는 사실을.
끼익-.
택시가 한남동 본가 입구에 멈춰 섰다.
지안은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리면서,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차태경.’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강민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냥견. 아니, 사냥견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그는 사자에 가까운 맹수였다.
그를 나의 조력자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강민우가 서그룹 내에서 쳐놓은 얄팍한 거미줄 따위는 단숨에 찢어발길 수 있다. 태성그룹이라는 배경과 그가 가진 막대한 자본력이라면, 서그룹의 썩은 임원진들을 갈아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미친개를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드느냐였다.
본가 안으로 들어온 지안은 곧장 2층에 있는 자신의 개인 서재로 향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에 앉아 암호가 걸린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저장된 번호 중 하나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본부장님. 오 비서입니다.]
서그룹의 정보통이자, 할아버지 서 회장의 최측근. 그리고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지안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 오 비서실장이었다.
"오 실장님.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은밀하게 알아봐 주실 게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어떤 건가요?]
"태성그룹 차태경."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오 실장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본부장님. 지금 차태경 이사라고 하셨습니까? 그 사람을 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게요. 지금 차태경의 정확한 동향이 필요해요. 언론에 노출된 껍데기 말고, 그 사람의 진짜 약점과 목표. 그리고 현재 위치까지 전부 다요."
오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본부장님, 차태경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재계에서는 그를 '에이펙스의 미친개'라고 부릅니다. 태성그룹 차 회장님의 혼외자로 태어나 미국으로 쫓겨나다시피 버려졌었죠. 10대 때 뒷골목에서 구르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간입니다.]
오 실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사모펀드를 굴리며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았고, 3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태성그룹 본가를 위협할 만큼의 자본력을 갖춘 상태였습니다. 차 회장님의 본처 자식들, 즉 배다른 형제 셋을 1년 만에 반신불수로 만들어 회사에서 쫓아낸 것도 모자라, 그들의 개인 자산까지 전부 흡수해 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입니다.]
지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형제조차 가차 없이 짓밟아버리는 무자비함.
딱 지안이 원하던 조건이었다.
"그래서요. 그 미친개가 지금 원하는 게 뭔데요?"
[……명분입니다.]
오 실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돈도, 힘도 쥐었지만 그에게는 꼬리표가 있습니다. '사생아'라는 낙인이죠. 태성그룹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주주들과 보수적인 재계 원로들의 지지가 필요한데, 그들은 피가 섞이지 않은 사생아를 회장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건, 자신의 핏줄을 덮어줄 수 있을 만큼 완벽하고 흠결 없는 '명문가의 뒷배'입니다.]
지안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빙고.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완벽하고 흠결 없는 명문가의 뒷배라…… 이를테면, 서그룹의 유일한 정통 후계자 같은 거요?"
수화기 너머의 오 실장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본부장님. 설마…… 아니, 안 됩니다. 그 자와 엮이는 건 스스로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강민우 이사와의 결혼이 곧인데, 대체 왜 무리수를…….]
"강민우와의 결혼은 엎을 겁니다."
지안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오 실장님. 할아버지의 눈과 귀가 되어 주시던 분이니, 강민우의 꿍꿍이를 아주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그놈이 지금 이사회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제 뒤에서 어떤 쓰레기 같은 짓을 꾸미고 있는지."
오 실장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강민우의 야심을 의심하고는 있었지만, 서 회장이 손녀사위를 워낙 아끼기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호랑이 굴이든 악마의 소굴이든 상관없어요. 제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개새끼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맹수와도 손을 잡을 겁니다."
지안의 목소리는 한 치의 떨림도 없이 견고했다. 그 확고한 살기에 오 실장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정보, 내일 아침까지 취합해서 암호화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메일 말고. 지금 바로 알려주세요. 차태경, 지금 어디 있습니까?"
[……현재 차태경 이사는 공식적인 대외 활동을 전면 중단한 상태입니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죠.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한 군데 있긴 합니다만…….]
오 실장이 머뭇거리자, 지안이 재촉했다.
"어딘가요."
[청담동 지하에 위치한 '블랙 오키드(Black Orchid)'라는 프라이빗 클럽입니다. 말이 클럽이지, 사실상 VVIP들의 은밀한 회동 장소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며, 상위 0.1%의 재력과 인맥이 없으면 입구 컷 당하는 곳입니다.]
"블랙 오키드."
[네. 그곳의 가장 안쪽,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펜트룸'이 차태경 이사의 전용 공간이라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그곳에 머문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지안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이 바로 금요일 밤. 밤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오 실장님."
지안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오 실장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본부장님! 설마 지금 그곳에 가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곳은 서그룹 후계자라도 회원권이 없으면 문전박대당합니다. 게다가 차태경 이사는 낯선 이의 접근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무턱대고 찾아갔다가는 오히려…….]
"걱정 마세요. 쫓겨나더라도, 문틈으로 제 얼굴은 각인시키고 올 테니까요."
툭.
전화가 끊겼다.
지안은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차태경.
그가 원하는 것은 정통성을 부여해 줄 완벽한 '명분'.
내가 원하는 것은 강민우를 갈가리 찢어발길 압도적인 '힘'.
조건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결혼을 비즈니스로 취급하는 세계에서, 이보다 더 완벽한 기브 앤 테이크가 어디 있을까.
서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걸고 그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물론 오 실장의 말대로 미친개에게 함부로 다가갔다간 내 목이 먼저 물어 뜯길 수도 있다. 그는 얌전히 목줄을 내어줄 만한 남자가 아니다.
‘내가 가진 패를 보여줘야 해. 그 남자가 구미가 당길 만한 완벽한 패를.’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오후에 입었던 시크한 블랙 슈트는 벗어던졌다. 대신, 몸의 굴곡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는 타이트한 실크 슬립 원피스를 꺼냈다. 깊게 파인 브이넥 아래로 하얀 가슴골이 돋보이는, 도발적이고 매혹적인 다크 와인 컬러의 드레스였다.
화장대 앞에 앉아 레드 립스틱을 지우고, 대신 차갑고 도도한 느낌을 주는 누드 톤의 립을 발랐다. 눈꼬리를 날카롭게 빼고, 흐트러진 듯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평소의 단정하고 우아한 서그룹 후계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위험한 밤의 세계에 기꺼이 발을 들이밀 준비가 된, 매혹적인 사냥꾼의 얼굴이었다.
"기다려, 강민우."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맞추며, 지안이 서늘하게 속삭였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지옥을, 내 손으로 직접 데려와 줄 테니까."
지안은 핸드백을 집어 들고 서재를 나섰다.
목표는 청담동 지하의 요새, 블랙 오키드.
미친개의 심장부로 뛰어들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