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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수리춘
배정현은 유민영이 가지런히 여민 옷깃으로 두 눈을 한 번 쓱 훑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엽이는 오늘 별탈이 없었는가.”

그에게 추궁할 뜻이 없어 보이자 유민영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소공자님께서는 오늘 기력이 괜찮으셨습니다. 젖을 물리기 전에 소인이 살펴보았으나 열은 없었고, 잠도 잘 주무셨습니다. 다만 갓난아이는 자주 깨어나오니, 소인이 부지런히 살피겠습니다."

그녀가 조리 있고 명확하게 대답하자, 배정현은 그 말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시선을 던졌다.

다만 전에는 몸을 향했던 시선이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새로 들어온 유모는 언뜻 보아도 무척 젊어 보였다. 이목구비가 청초하고 고왔으며 코가 오뚝했고, 입술은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그녀의 뺨은 풍만하면서도 백색을 띠어, 건강한 홍조가 감돌아 마치 연지를 바른 양지 백옥 같았다.

배정현의 눈빛이 점차 깊어졌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엽이를 정성껏 보필하라."

말을 마친 그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으며, 당당한 풍채는 이내 휘장 뒤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유민영은 비로소 온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 나으리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분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사람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마치 죄인을 신문하듯 날카로워, 좀처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유민영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마음에 일었던 기이한 감정을 떨쳐내고는, 다시 품 안의 어린 주인을 정성껏 토닥이며 달래는 데 전념했다.

*

배정현은 곁채에서 나와 곧장 안채로 향했다.

방 안에서 은정서는 이미 자리에 누웠으나, 시녀가 나으리가 돌아왔다고 전하자 이내 옷을 걸쳐 입고 침상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려 했다.

배정현이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몇 걸음 만에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어깨를 지긋이 눌렀다.

“누워 있으시오. 몸도 성치 않은데 어찌 일어나려 하시오.”

은정서는 그의 손길에 밀려 다시 침상에 눕혀진 채 남편을 올려다보며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이가 태어난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으시니, 저는 부군이 이 저택에 어린 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형부의 공무가…… 그리도 바쁘십니까?"

배정현은 침상 곁의 수놓은 의자에 앉아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음, 갑작스레 터진 사건이 있어서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소."

그는 눈을 떠 부인의 창백하고 초췌한 안색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부족한 것이 있거나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그저 방 안의 아랫사람들에게 이르면 될 것이오.”

바라는 건 그저 부군이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인데……

은정서는 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잘 알겠습니다. 저택 안은 별일 없으니 부군께서는 마음 쓰지 마세요."

은정서는 가볍게 하품을 했다. 창밖의 밤은 이미 짙어질 대로 짙어져 있었다. 그녀가 넌지시 청했다.

“제가 부군을 모시겠습니다. 어서 휴식을 취하시지요.”

배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부인은 몸조리에만 신경 쓰시오. 나는 서재에 가서 살펴볼 공문서가 좀 있소.”

지극히 정당한 이유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공무를 처리하듯 딱딱하고 쌀쌀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말을 마친 그는 부인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만큼은 무척이나 자상하고 세심했다.

“먼저 쉬시오. 내일 다시 엽이를 보러 오겠소.”

배정현이 방을 떠나자 은정서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자주가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마님, 나으리께서도 마님의 옥체를 염려하시어 밤중에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될까 저어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다들 그가 자신을 배려하고 아끼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어찌하여 가슴속은 마치 물에 푹 젖은 솜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고 답답하여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일까?

두 사람이 혼인한 지 어느덧 이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늘 손님을 대하듯 서로를 공경할 뿐이었다. 그는 예의 바르고 흠잡을 데 없이 주도면밀했으나, 오직 부부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온정과 애틋함은 빠져 있었다.

마치 그녀는 그가 책임을 다해 돌보아야 할 정실부인일 뿐, 마음 깊이 애틋하게 그리는 정인은 아닌 것만 같았다.

은정서는 몸을 돌려 침상 안쪽을 바라보며 눈가에 차오르는 시린 눈물을 간신히 삼켜 냈다.

*

동이 틀 무렵, 유민영은 유우헌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채비를 했다.

막 월동문을 들어서자, 문 밖에 있던 청화 유모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청화는 그녀를 보자마자 콧방귀를 뀌며 스쳐 지나갔다. 눈빛에 담긴 노골적인 혐오와 불만이 거의 살갗에 닿을 듯 선명했다.

유민영은 이 느닷없는 적의에 멈칫했다. 청화는 본래 말수가 적고 평소 다른 이들과 사사로이 대화를 나누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자신이 대체 어디서 그녀의 눈밖에 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의문을 품고 방으로 들어서자, 침상 위에 뉘어 두었던 딸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유민영은 밤새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몹시 주렸음을 직감하고는, 서둘러 옷깃을 풀어 젖을 물렸다.

영아는 젖을 빨자 금세 조용해졌다.

아이에게 젖을 다 먹인 후 탁자를 보니, 주방에서 들여온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여전히 유모의 젖이 잘 돌도록 조리된 귀한 보양식들이었다.

유민영은 말없이 식사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청화의 태도가 변한 까닭을 곰곰이 생각했다.

식사 후, 추월이 소공자를 돌보러 가기 위해 채비를 마치고 일어섰다.

추월은 제법 말씨가 싹싹하고 다정했기에, 유민영은 청화가 마당 밖에 있는 틈을 타 나직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고민을 건넸다.

“추월 언니, 청화 언니가 좀 불편해 보이시는데,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범했나요?"

추월은 밖을 슬쩍 흘겨보며 청화에게 들리지 않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에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실은 어젯밤 네가 소공자님을 돌보러 간 동안, 네 딸아이가 몹시 배가 고팠는지 밤새도록 울고 보챘지 뭐야.”

“청화는 워낙 잠자리가 예민하고 잠귀가 밝은 편이라 밤새 한숨도 제대로 못 잤으니, 아침부터 화가 난 것도 당연하지.”

“그나마 내가 아이에게 내 젖을 몇 모금 물려 달래준 덕에, 겨우 진정하고 잠들었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유민영은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언니들에게 참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괜찮아, 서로 도와야지.”

추월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앞으로는 밤중에 아이가 울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게 좋겠어. 이 저택은 법도가 무척 엄격하니, 만에 하나 주인 어른께 누라도 끼치면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유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월은 그녀를 몇 마디 더 다독인 후, 걸음을 옮겨 일을 하러 나갔다.

밤새 아이 곁을 지키느라 피로가 극에 달했던 터라 유민영은 본래 부족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긴 이상 가만히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틈을 내어 청화를 찾아갔다.

“청화 언니, 어젯밤 제 딸아이가 보채는 바람에 언니의 휴식을 방해하여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둔 돈 백 문을 꺼내어 사과의 뜻을 표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청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내민 돈을 받으려 손을 뻗지도 않았다.

“이해하라고? 나 역시 그러고 싶다만 내 잠귀가 워낙 밝아 그런 소란을 견디지 못해. 참다못해 한마디 하겠는데,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처지에 어찌 아이까지 저택 안으로 꾸역꾸역 데리고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단 말이냐?”

청화는 쌓였던 원망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룻밤 시끄러운 것쯤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네가 앞으로 밤 번일 때마다 이리 시끄럽게 굴면 나는 어찌 잠을 청하라는 말이냐? 잠을 자지 못하고서야 어찌 제 일을 제대로 하겠어?”

유민영은 밤을 꼬박 새웠기에 몹시 지치고 졸려서 관자놀이가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꾹 참고 부드럽고 온순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화 언니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부군을 잃고 시댁에서 쫓겨난 신세라 영아를 돌봐줄 이가 없어 부득이하게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빨리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어제 유민영이 처음 저택에 들어와 제 사정을 이야기할 때 청화는 그 자리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도 남의 일에 참견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오늘에야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사연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의 공손한 태도에 청화도 더 화를 내기 어려운지 고개를 획 돌리고는 외면해 버렸다.

유민영 역시 그저 말뿐인 다짐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추월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녀는 넌지시 의논을 구했다.

“언니, 혹시 저희가 당번 순서를 좀 바꿀 수 있을까요? 그러면 밤에 영아가 울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듯싶어서요.”

추월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유씨 동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실은 내 눈이 나빠서 밤만 되면 앞이 안 보여, 소공자님을 제대로 보살필 수가 없어.”

유민영은 할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연거푸 거절의 벽에 부딪히고 나니, 다른 사람의 이해나 순번을 바꾸는 식의 안일한 방도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직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유우헌의 구조를 자세히 살폈다. 곁채 바로 옆에는 샛방 두 칸이 바짝 붙어 있었다.

샛방은 비좁고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으나, 깨끗이 치워내고 정돈한다면 모녀가 거주할 만한 작은 공간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듯했다.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다면 밤중에 딸아이가 울어대더라도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테니, 사사로운 구설과 마찰을 방지할 수 있을 터였다.

마음을 굳힌 유민영은 전 어멈을 찾아가 부탁을 했다.

전 어멈이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방은 어둡고 비좁기 그지없는데,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

“비바람만 피할 수 있다면 소인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다른 분들의 잠을 방해하느니, 차라리 그편이 백번 낫습니다.”

“네가 제법 남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구나. 정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도록 하거라.”

유민영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멈!”

전 어멈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기다리거라, 내 말이 아직 안 끝났다. 그 방은 네 손으로 직접 치워야 할 것이야, 저택 안에는 네 일손을 도울 한가한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묵는 것은 허락하되, 만에 하나라도 안의 물건을 파손한다면 네 살가죽이 온전치 못할 줄 알거라!”

말투는 엄했지만, 결국 청을 허락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민영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올리고서야 밖으로 물러나왔다.

방문을 나서는 유민영의 마음속에는 전 어멈에 대한 인식이 제법 긍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 어멈은 겉보기엔 매정하고 법도에 엄격했지만, 저택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만 넘지 않는다면 결코 이치에 어긋나거나 야박하게 구는 이는 아니었다.

이토록 규율이 엄격하고 삼엄한 저택 안에서, 비록 말투는 칼날 같을지언정 속정은 깊은 관사 어멈을 만난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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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영과 배정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 했다.유민영은 머릿속이 얼마간 새하얘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첫째 나으리께서 분명 자신을 대부인 마님로 착각하신 것이 틀림 없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낱 유모에게 이토록 선을 넘는 친밀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유민영은 몇 걸음 물러나 그의 팔에서 벗어나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첫째 나으리,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나으리께서 오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방금 전 손끝에 남은 따스한 감촉과 코끝에 맴도는 은은한 젖내에, 배정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는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을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시선을 피하듯 돌려, 글상 위에 놓인 장부를 바라보았다."이걸 네가 정리한 것이냐?"유민영은 감히 제 공을 내세우지 않고, 대부분의 공을 은정서에게 돌렸다. "소인이 장부 정리를 조금 배운 적이 있어, 대부인 마님께서 집안일을 돌보느라 바쁘시고 장부를 보실 때마다 머리 아파하시는 것을 보고 자청하여 조금 거들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마님께서 부족한 소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배정현은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글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장부들은 그가 예전에 보았던 것들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예전 은씨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유민영은 고개를 한껏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곁눈질로 문 쪽을 살피는 순간, 연분홍빛 치맛자락 한 자락이 스치듯 사라졌다.아까 뒷간에 다녀온다던 그 시녀였다.그 순간, 유민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번뜩 스쳤다.그 시녀가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방금의 그 아찔한 장면을 혹시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만약 그 일이 퍼져 나가, 한낱 유모인 자신이 첫째 나으리를 유혹했다는 말이 돌기라도 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할 수 없었다.가볍게는 쫓겨날 것이고, 심하면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웠다.위태로운 순간, 유민영의 머릿속에 문득

  • 쫓겨난 유모, 유국공부를 접수하다   제25화

    “대부인 마님께 아뢰옵니다. 소인의 이웃 중에 상점에서 장부를 보는 서생이 있었습니다.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이 많다 보니, 겉핥기로나마 조금씩 기억해 둔 것뿐입니다.”은정서는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하며 말했다. “너를 그저 유모로만 두기엔 좀 아깝구나.”유민영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 왔음을 짐작했다.“대부인 마님, 과찬이십니다. 소인은 감히 그런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님께서 거두어 주신 덕분에 이 저택 안에 몸 둘 곳을 얻고, 소공자님께 젖을 먹여 키울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하늘 같은 복입니다. 그저 훗날에도 계속 저택에 남아 밥벌이를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은정서가 어찌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겠는가.방금 유민영이 보여 준 셈 솜씨와, 평소 엽이를 정성껏 돌보던 모습을 떠올린 은정서는 옅게 웃었다.“넌 참 괜찮은 사람이다. 마음가짐도 바르고 매사에 정성을 다할 줄 알지. 걱정 마라. 훗날 엽이가 젖을 떼게 되더라도, 저택에서 네 앞날을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그 말은 분명한 약속이나 다름없었다!가슴 한편을 짓누르던 불안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유민영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굽혔다.“감사합니다, 마님! 반드시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그날 대부인 앞에서 장부를 계산하는 솜씨를 보인 뒤, 유민영의 소임에 은근한 변화가 생겼다.소공자 배엽헌을 돌보는 일 외에도, 은정서의 뜻에 따라 밀린 재산 장부를 정리하고 계산하는 일을 돕게 된 것이다.쉴 틈은 줄었지만, 유민영은 오히려 달게 여겼다.그녀는 장부 양식을 새로 손보았다. 수입과 지출 항목을 종류별로 나누어 정리하니, 훨씬 또렷하고 보기 쉬워졌다.또 은정서에게 보조 장부를 따로 두어 외상 거래와 재고 변동을 별도로 기록하자고 권했다.은정서도 처음엔 그저 시험 삼아 맡겨 보자는 마음이었기에, 유민영이 정리한 것도 직접 다시 점검하곤 했다.그러나 결과를 본 뒤에는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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