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말을 저렇게 뻔뻔하게도 하네...’윤하경이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고 강현우를 올려다봤다.신이 정성 들여 빚어 놓은 얼굴을 달고서 어떻게 저리 태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윤하경이 입술을 다물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현우 씨는 매일 바쁘시잖아요. 하셔야 할 일도 많을 텐데 제가 더 붙잡고 있으면 폐만 끼치죠.”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슬쩍 문을 다시 한번 잡아당겼다.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결국 포기하고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묻는 눈으로 강현우를 노려보았다.강현우는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담담하게 말했다.“나 요즘 되게 한가해. 회사 일도 내가 직접 안 나서도 되는 게 대부분이야. 시간 많아.”한마디로 정리하면 안 나간다는 뜻이었다.“...”윤하경은 문틀만큼 우뚝 선 강현우를 올려다보며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더 줬다.바로 옆에 윤하민이 서 있다는 걸 생각하며 입가까지 치밀어 오른 말들을 겨우 삼켰다.둘은 한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눈으로만 버텼다. 누가 먼저 물러설지 버티기라도 하듯,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결국 이 기묘한 정적을 깬 건 윤하민이었다.“엄마, 나쁜 아저씨랑 놀아도 돼요?”윤하경이 뒤돌아보자, 윤하민이 살금살금 다가와 윤하경 팔을 살짝 잡고 속삭였다.“나쁜 아저씨 너무 불쌍해 보여요...”강현우는 그 말을 듣고 윤하민에게 살짝 안심시키듯 미소를 보내 주었다.윤하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다시 한번 강현우를 훑어보았다.오늘 여기서 확실히 정리를 안 해 두면 이 사람은 정말 밤새도록이라도 문 앞을 지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들어와요.”말투만 들으면 영 반갑지 않은 티가 역력했지만 강현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오히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며 윤하민에게 말했다.“하민아, 성 모양 놀이터 주문해 놨어. 이따 재밌게 놀아. 좋아?”윤하민은 두 손을 마구 치며 환하게 웃었다.“좋아요! 너무 좋아요!”그 모습을 바라보는 윤하경의 마음은
윤하경 쪽으로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강현우는 불쑥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10대 때나 겪을 법한 충동과 긴장이 이 타이밍에 치고 올라오자 강현우는 잠시 멈칫했다.키스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론도 못 내렸는데, 자고 있던 윤하경이 무슨 기척이라도 느낀 듯 눈을 번쩍 뜨고 강현우를 올려다봤다.눈을 뜨는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뭐 하는 거예요.”윤하경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강현우를 밀쳐 내려고 한 그때, 비행기가 갑자기 한 번 출렁거렸다.난기류를 만난 모양이었다.원래도 거리가 거의 붙을 듯 가까웠던 탓에, 기체가 흔들리는 방향으로 강현우의 몸이 쏠리며 그대로 윤하경 쪽으로 파고들었다.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강현우의 입술이 윤하경의 부드러운 입술에 딱 닿아 버렸다.그 순간, 윤하경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게 강현우의 시야에 또렷하게 박혔다.그런데도 강현우는 오히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썹까지 치켜세웠고 쉽게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결국 윤하경이 손으로 강현우를 힘껏 밀어냈다.“강현우 씨, 진짜 왜 이래요. 미쳤어요?”평소에는 윤하민이 배울까 봐 웬만하면 입버릇 곱게 다스리던 윤하경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윤하경의 작은 얼굴은 화가 나서 오히려 핏기가 쫙 가신 듯 창백해 보였다.윤하경에게 밀려나던 강현우는 잠깐 전의 온기가 사라지자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아까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강현우는 일부러 조금 떨어져 앉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났잖아.”비행기가 흔들렸다는 것쯤은 윤하경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강현우가 그렇게 코앞까지 들이밀지만 않았어도 입을 맞출 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본 순간, 윤하경은 자기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그 순간, 윤하경의 심장도 제멋대로 요동치고 있었다.잠시 멍하니 거울 속 자신과 눈을
차에 올라탄 뒤에야 윤하경이 짧게 비명을 내지르더니,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뭐 하는 거예요!”‘힘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야?’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강현우를 노려봤다. 그런 윤하경의 모습은 금세 털이 곤두선 작은 고양이 같았다.강현우가 몸을 숙여 차 안으로 타고 들어오자, 크고 탄탄한 몸이 뒷좌석 대부분을 순식간에 차지했다.원래 널찍하던 뒷좌석이 갑자기 답답해졌다.“하민이가 나보고 엄마를 꼭 직접 데려오라고 했어. 약속을 어길 순 없잖아.”윤하민을 들먹이자 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저 혼자 힘으로도 집에 잘 돌아갈 수 있거든요.”“하지만 하민이는 나보고 엄마를 데리고 오라고 했거든. 말 바꾸는 아빠가 될 순 없지.”강현우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역시 윤하민은 강현우의 든든한 비장의 카드였다.그 말에 윤하경은 한순간에 반박할 말을 잃었다.그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를 악물면서도 강현우를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한참 있다가야 윤하경은 입을 열었다.“모성까지 온 김에 외할아버지 산소에 들렀다가 가고 싶어요.”“나도 같이 갈게.”윤하경은 말없이 콧등을 살살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반대로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렸다. 딱 계획을 이뤄낸 사람의 흐뭇한 표정이었다.강현우가 웃으니 얼굴은 더 또렷하게 빛났다.특히 지금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으니,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그 비주얼 때문에 운전기사는 눈이 부셔 앞을 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남산 묘원으로 가요.”강현우가 목적지를 말하자, 운전기사가 곧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윤하경은 강현우를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 그가 이끄는 대로 외할아버지 묘비 앞까지 함께 갔다.외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찾아온 지도 벌써 4년이 흘렀다.윤하경은 꽃 한 다발을 안고 묘비 앞에 서서 묻지도 않은 먼지를 정성스레 닦아 냈다.하석호가 이런 건 늘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라 애초에 묘비 위에 먼지가 쌓일 틈도 없었다.윤
문세호는 조용히 말했다.“지금은 하경이가 날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문세호도 마음속으로는 윤하경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별장을 나선 윤하경은 바로 윤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건 방숙희였다.윤하경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자 방숙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숙희는 지금 윤하민이 자고 있다고 말하려던 바로 그때, 마치 생각이라도 통한 듯 윤하민이 벌떡 일어나 방숙희의 손에서 전화를 낚아챘다.“여보세요. 엄마예요? 언제 와요?”윤하민의 작은 목소리는 여전히 말랑말랑했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렸다. 휴대전화 너머인데도 윤하경은 윤하민의 얼굴을 꼭 끌어안고 볼을 꼬집어 주고 싶어졌다.윤하경은 살짝 웃으며 낮게 달랬다.“엄마는 아무 일도 없어. 일이 좀 생겨서 조금 늦어진 것뿐이야. 금방 갈 거야. 알겠지?”“그러니까 아주머니랑 밥도 잘 먹고 푹 자고 있어. 눈 뜨면 엄마가 옆에 있을 거야.”“엄마, 저를 속이면 안 돼요.”윤하민은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또 버려질까 봐 두려운 듯 말했다.윤하경이 몇 번이고 다시 약속하고 나서야 윤하민은 겨우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고 나서야, 윤하경은 주승엽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잠시 망설인 끝에 윤하경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주승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하경 씨, 정말... 하경 씨 맞아요?”윤하경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네. 저예요.”윤하경의 목소리를 듣자 주승엽은 그제야 안도한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정말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주승엽의 말투에는 꾸미지 않은 걱정이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웃었다.“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냥 좀 정리할 일이 있어서... 걱정하지 마세요.”“그렇다면 다행이네요.”주승엽 쪽에서는 안도의 숨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그때 윤하경은 문 쪽에서 나오는
강현우는 윤하경의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몇 시간 전.윤하경이 감쪽같이 사라지자 강현우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윤하경의 이동 경로와 CCTV를 전부 뒤졌다. 겨우 실마리를 하나 잡았는데, 납치해 간 사람이 뜻밖에도 문세호였다.도무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인물이었기에 흔적을 찾자마자 강현우는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윤하경이 실제로 이곳에 있었다. 윤하경이 무사한 걸 확인한 순간, 강현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강현우의 말을 들은 윤하경은 마음이 복잡했다.윤하경은 강현우의 어깨 넘어로 문세호를 바라봤다.“문 회장님, 그만하면 됐어요. 이제 저를 보내 주시겠어요?”문세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난 그저 이 남자가 정말 널 얼마나 신경 쓰는지, 진심이 어떤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야. 지금까지 본 바로는... 나쁘지 않네.”여전히 온화한 미소였지만 조금 전처럼 사람을 압도하던 기세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윤하경은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집에서 윤하민이 자기만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윤하경은 마음이 조급해졌다.윤하경은 몇 걸음 나가다가 문득 휴대전화가 떠올라, 바닥에 내팽개쳐진 이정한 쪽으로 다가갔다.“제 휴대전화 돌려주세요.”강현우에게 목을 조여졌던 탓에, 이정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이정한은 몇 번 기침을 하고서야 겨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건넸다. 윤하경은 그 꼴이 딱하고도 우스웠다.“쌤통이네요. 누가 같이 연기하래요.”윤하경이 투덜거리듯 말하자 이정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크흠... 하하. 아가씨,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윤하경은 이정한의 목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한번 흘겨보더니, 더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윤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루 밤낮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윤하민이 어떻게 버티고 있을지 걱정이었다.한편, 여전히 별장 응접실에 남아 있던 강현우는 방 안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하지만
이 말은 마치 강현우의 급소를 정확히 찌른 것 같았다.그러자 잘생긴 강현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문세호를 노려보며 낮게 물었다.“문 회장님, 정말 이렇게까지 서로 난처하게 만들고 싶습니까?”문세호는 가볍게 웃었고 강현우의 경고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어떤 신분으로 저보고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는 겁니까?”톤만 놓고 보면 싸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세상사 이야기나 나누는 사람 같았다.그러나 온몸에서 풍기는 쌀쌀한 기운은 여전히 상대를 쉽게 넘겨짚지 못하게 만들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그 순간, 문세호의 목소리가 다시 방 안을 가로질렀다.“괜히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자칫하면 강 대표님도 윤하경도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갈 수 있으니까요.”문세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금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세월의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 위로 처음으로 노골적인 경고가 떠올랐다.강현우는 이를 악물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충동적인 선택은 포기했다.“윤하경을 풀어 주세요. 일단 조건을 제시하시죠.”강현우는 남 앞에서 이렇게까지 물러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지금도 자세를 낮추는 쪽은 강현우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해서, 마치 부탁이 아니라 명령처럼 들렸다.문세호는 흥이 난 듯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훑어보더니 눈가에 장난스러운 빛을 띠고 말했다.“강 대표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가진 걸 전부라도 내놓을 기세네요. 다 털어서 윤하경이랑 바꾸겠다는 뜻입니까?”강현우는 버럭 화를 내지는 않고 오히려 피식 웃었다.“문 회장님은 욕심이 참 많으시네요. 그렇다고 제 회사 전체를 감당할 배짱이 있으신가요?”“그건 강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문세호는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묵직했다.“윤하경을 데려가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성의를 보여야지요.”강현우의 눈빛이 한순간 더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