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의 눈빛은 살을 베일 듯 싸늘했다. 가늘고 긴 눈매가 위협적으로 가늘어졌고 손에 쥔 권총을 감싸 쥔 손가락 마디는 핏기가 가실 정도로 하얗게 굳어 있었다.그걸 본 유진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급히 전화를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말이 왜 이렇게 많아! 당장 사람 데리고 돌아와! 당장!”거친 욕설과 함께 전화를 끊은 그는 황급히 강현우를 올려다보며 변명했다.“강 대표님, 들으셨죠? 이미 보냈습니다, 금방 데려올 겁니다. 그러니까, 더는...”하지만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호의 옷깃을 거칠게 붙잡고 그를 소파에서 낚아채듯 끌어올렸다.“진짜, 다 처리한다고 했잖아요. 진정 좀 해요!”유진호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엔 뚜렷한 공포가 비쳤다.분명 나이도 자신이 더 많고 남강에서 우쭐대는 유진호지만 강현우 앞에서는 이상하게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다.이 사람은 뭔가가 다르다.강현우는 말없이 유진호를 끌고 1층으로 내려갔고 이를 제지하려던 유진호의 부하들이 슬그머니 움직이려 하자 민진혁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탕!한 발, 정확하게 허공을 갈랐고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강현우는 유진호를 차에 태우며 냉정하게 말했다.“주소.”그의 말투엔 분노의 기색이 없었지만 말끝 하나하나가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여깁니다...”유진호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기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 주소를 찾았고 민진혁에게 던지듯 건넸다....그 시각, 윤하경은 이미 또 다른 차량으로 옮겨져 있었다. 도로는 점점 험해졌고 덜컹거리는 낡은 승합차는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을 내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손발이 꽁꽁 묶인 채 뒷좌석에 실려 있던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차 안 여기저기로 나뒹굴고 있었다.앞좌석에서 운전사와 동행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언어를 몰라도,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점점 식어가는 심장이 더 이상 속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갑자기 운전사가 전화를 받았다. 통
남자의 어설픈 한국어는 듣기에도 거북했다.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피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었다. 이미 등은 차가운 벽에 딱 붙어 있었고 눈앞의 남자들은 거칠고도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그만 좀 도망쳐. 도망쳐봤자 어차피 다 똑같아. 말을 잘 들으면 덜 고생할 수도 있잖아.”한 남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가오더니 그녀의 셔츠 단추에 손을 댔다. 그는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윤하경이 시시했는지, 잠시 망설이더니 발에 묶여 있던 끈을 풀었다. 그러고는 입을 막고 있던 천 조각도 걷어냈다.오랫동안 막혀 있었던 입, 턱이 아파서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윤하경은 아픔을 억지로 참고 입을 열었다.“그만해.”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두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예상 밖의 침착함을 보자 두 남자는 금방 헛웃음을 터뜨리며 낄낄댔다.“오, 성깔 좀 있네? 하지만 우린 그런 거 안 통하거든. 아껴둬 이따가 소리 지르라고.”한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목선까지 올라오면서 끔찍한 기운이 전해졌다.“잠깐만.”윤하경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10억 줄게.”남자의 손이 멈췄다.“뭐라고?”“10억. 나 보내주면 줄게. 넌 알잖아. 이런 짓 해서 버는 돈이 얼마 안 되는 거. 하지만 10억이면 얘기가 다르지 않아?”그녀는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차분하게 유지했다. 지금 이 순간, 이들에겐 돈이 목적일 거란 사실에 희망을 걸었고 어쩌면 윤하연과는 단순히 일회성 거래였을지도 모른다.남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짧은 침묵을 나눴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하하하! 돈? 얘가 우리를 뭐로 보고 그러는 거야? 우리가 그런 거 몰라서 여기까지 왔겠냐? 지금 당장 우리가 더 원하는 게 뭔지 몰라?”남자 중 하나가 징그럽게 웃으며 손을 다시 그녀의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윤하경은 온몸이 떨렸다.예전에 이사장의 손에 이끌려 바다에 빠졌을 때도 이렇게까지 절망스럽진 않았다.
어제, 윤하연에게 끌려갔을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오늘, 흉악한 인간쓰레기들 손에 떨어져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끝내 울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강현우 앞에서 윤하경은 눈물이 끊기지 않았다.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확 벗겨냈다.“이제 와서 무서운 거야?”갑작스레 밝아진 시야에 눈이 따가울 정도였고 윤하경은 더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고 갑자기 강현우 품에 파고들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요.”강현우는 고개를 숙여, 자기 품에 안긴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를 내려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정작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안고 차에 태웠고 곧바로 민진혁에게 말했다.“돌아가자.”차 안에서 윤하경은 겨우 정신을 추스르며 옷을 다시 챙겨 입었고 긴장과 두려움 때문인지 단추를 채우는 손이 자꾸 떨렸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녀 옷의 단추를 채워주었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올려다봤다. 촉촉이 젖은 눈망울이 그를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안쓰러웠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코웃음을 흘리듯 말했다.“그 눈빛, 나한텐 안 통해. 돌아가서 따질 게 산더미야.”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지만 그 안엔 분명 고압적인 권위가 담겨 있었지만 윤하경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녀는 다시 강현우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뭐든 다.”그녀는 얼굴을 들지도 않고 그의 익숙한 향기를 들이마시며 그제야 겨우 안정을 찾은 듯했다.강현우는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하... 진작에 네가 이렇게 멍청할 줄 알았으면 그때 바다에서 그냥 상어 밥으로 던질 걸 그랬다.”이젠 조금 안정된 윤하경은 오히려 덤덤하게 말했고 무서울 게 없어
유진호는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사람이었기에 강현우가 누구를 찾는지 단번에 알아챘고 바로 웃으며 말했다.“사람 있어요, 있습니다.”그렇게 말하곤 곧장 밖으로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이었다. 어젯밤 강현우가 쏜 총에 맞은 다리는 아직도 그대로였고 붕대 하나 감겨 있지 않은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윤하연은 이미 겁에 질려 울었는지 얼굴에 화장은 엉망이었고 꼴은 길바닥에서 주워 온 부랑자 같았다.그녀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강 대표님,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요...”강현우는 그 울음 섞인 목소리가 시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유진호는 그 눈치를 재빨리 읽고 곧바로 부하에게 고개로 지시해 윤하연의 입을 막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향해 알랑거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저도 이 여자한테 속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말을 하면서 그는 윤하연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렸고 입이 틀어막힌 윤하연은 신음밖에 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유진호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강 대표님, 이 일은... 여기서 정리하는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사실 유진호가 이러는 이유는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강현우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만 알아보면 누구든 경계심이 생길 터였다.그는 절대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강현우는 차가운 눈으로 유진호를 쳐다보더니 서슴없이 말했다.“이제 꺼져.”유진호는 확답을 받지 못한 채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민진혁이 뒤에서 유진호의 옷깃을 낚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문이 닫힌 뒤, 유진호는 불안한 표정으로 민진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저기, 혹시 강 대표님은 지금 좀 풀리신 겁니까?”민진혁은 그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계속 여기 서 있고 싶으면 남아. 그게 아니라면 당장 꺼져.”그
윤하경은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바짝 마른 입술을 본능적으로 핥았고 그런 그녀의 작은 동작에 강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저... 그게요...”조심스레 입을 연 윤하경은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그땐 너무 급했어요. 하연이가 도망갈까 봐 무서웠고... 설마...”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설마 걔가 현지 사람들과 짜고 저를 팔아넘기려고 할 줄은 몰랐죠...”“설마?” 강현우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안 왔으면 지금쯤 네 몸 위로 몇 놈이 올라탔을지도 모르겠는데?”그 말에 윤하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잔인한 말이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솔직히 말해, 강현우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녀는 이미 그 지옥을 겪었을지도 모른다.순간, 윤하경의 눈빛이 흐려졌다.“그럴 일 없었을 거예요.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전 차라리 죽었을 겁니다.”“...”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녀의 턱에서 짜릿한 통증이 번졌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켠 윤하경은 눈을 맞추며 낮고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파요...”강현우의 손끝은 거칠었고 그녀의 피부는 유난히 예민했기에 그 손아귀는 유독 아프게 느껴졌다.“죽고 싶어?” 강현우의 눈빛은 싸늘했고 짧은 한마디조차 이를 악물고 내뱉는 듯했다.그 말에 겁을 먹은 윤하경은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옷깃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피가 스며든 붕대가 그대로 드러났다.강현우는 그 붉게 물든 붕대를 본 순간, 미세하게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자유로워진 윤하경은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고 아픈 턱을 조심스레 문지르며 눈망울을 치켜들었다. 눈에 그렁그렁 맺힌 물기, 억울함이 잔뜩 어린 얼굴이었다.누가 봐도 불쌍했지만 그 모습은 도리어 사람을 더 자극했다.강현우는 잠시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문밖으로 나갔다가 의료 키트를 들고 돌아왔다.조용히 상자를 열고는 능숙하게 소독약과 붕대를 꺼내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벗어.”“네?”
“걔가 여기 있어요?”윤하경은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녀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강현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강현우의 눈빛이 순간 깊어지자 윤하경이 놀라 뒷걸음질 쳤고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는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하지만 이번 키스엔 평소처럼 거침없는 이기심도, 가끔 비치는 따뜻함도 없었다.그저 숨통을 조일 듯한 압도적인 지배만이 가득했고 거친 호흡 사이로 그녀의 모든 공기를 빼앗기려는 듯 지독하게 탐욕스러웠다.윤하경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정신이 하얘질 정도로 몰아붙이던 키스는, 그가 그녀의 입술을 세게 깨문 뒤에야 멈췄다.아픔에 고개를 움찔한 윤하경은 눈을 치켜올려 강현우를 바라봤고 두 눈 가득 억울함이 고여 있었다.강현우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날 쳐다보는 거 보니까... 아직 부족했나 봐?”“...”윤하경은 말이 막혔다.무언가 말을 돌리려 입을 열기도 전에, 강현우는 다시 턱을 잡아 올렸고 이번엔 아까보다 부드러웠다.“이건 그냥 이자야. 돌아가서 제대로 결산하자.”그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듣는 사람의 등골이 오싹할 만큼 차가웠다.윤하경은 조용히 입을 열려다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강현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진혁이 피범벅이 된 얼굴의 윤하연을 끌고 들어왔다.비록 요즘 윤하경이 강현우 곁에서 웬만한 잔혹한 장면은 다 봐왔지만 윤하연의 붕대도 없이 피로 얼룩진 허벅지를 보는 순간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다리는... 무슨 일이 있었어요?”강현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내가 쐈어.”그가 길게 뻗은 다리를 교차시키며 앉는 모습은 여느 때처럼 품위 넘쳤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나도 무심하고 냉정했다.총을 쏴 다리를 꿰뚫는 일이 그에겐 그저 일상적인 일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윤하경은 무섭지 않았다. 그가 윤하연에게 총을 쏜 이유,
잠시 침묵이 흘렀고 윤하경은 시큰둥한 얼굴로 침대에 드러눕더니 민진혁을 향해 말했다.“민진혁 씨, 현우 씨가 평소 이런 사람들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죠? 그대로 하세요. 전 좀 피곤해서요. 잠깐 쉬고 싶어요.”민진혁은 멍하니 서 있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지금 윤하경 말투, 딱 강현우 같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강현우를 바라봤고 강현우는 가볍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민진혁은 눈치껏 윤하연을 다시 끌고 나갔고 윤하연은 순간 얼이 빠졌다.다시 민진혁에게 팔을 잡혀 끌려 나가는 그 순간, 다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문밖.민진혁은 그녀를 바닥에 내던졌고 윤하연은 고통에 찬 얼굴로 흙빛이 되었다.그가 허리춤에서 작고 날카로운 칼을 꺼내는 걸 본 순간, 윤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오, 오지 마세요...”그녀는 온몸으로 뒷걸음질 치며 떨기 시작했고 민진혁은 무표정하게 몸을 숙였다.“괜찮아요. 저 솜씨 좋아요. 정신 멀쩡할 때 이 하나씩 뽑는 건 자신 있어요. 안 아파요. 진짜예요.”그의 미소는 말끔하고 온화했지만 윤하연의 눈엔 완전한 악마로만 보였다.“안 돼요... 제발요. 뭐든지 할게요. 살려만 주세요...”윤하연은 울먹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보세요, 저도 괜찮잖아요. 마음에 들게 해드릴게요... 제발요...”민진혁은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옷 입으세요.”하지만 윤하연은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그에게 달라붙어 껴안으려 하며 입을 맞추려 들었다. 민진혁은 지금껏 강현우 곁에서 온갖 진귀한 장면을 다 겪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덤벼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도망치듯 문을 닫고는 다시 강현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강현우는 소파에 앉아 윤하경을 바라보다, 급하게 들어오는 민진혁을 보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뭐야, 왜 그렇게 부산스러워?”민진혁은 우물쭈물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대표님... 혹시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안 될까요?”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윤하경은 살짝 웃었고 표정에 장난기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그걸 어찌 ‘수작’이라 하시겠어요?”그녀는 몸을 일으켜 강현우 옆에 조심스레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현우 씨,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지금 그녀에겐 믿고 쓸 사람이 없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도, 강현우뿐이었다.이번 일로 크게 당한 뒤라, 더는 무턱대고 나섰다가 또다시 팔려 가는 일이 생기면 정말 되돌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차라리 처음부터 강현우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았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입꼬리에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이제 와서 부탁? 그럼 한번 들어보자. 어떻게 부탁할 건데?”그 말에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의 눈빛을 보니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섞여 있었다.무례하거나 곤란한 요구일 가능성도 컸고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윤하경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로 돌아가려 했지만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순간 중심을 잃은 윤하경의 몸은 그대로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이건 분명, 고의였다.몸을 빼내려는 순간, 그녀는 강현우의 깊고 눈동자와 마주쳤다.“이게 지금 부탁하러 온 사람의 태도야?”강현우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성의가 없네.”그는 윤하경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에 감으며 천천히 굴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그의 조금 거친 손끝에 감기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묘하게 관능적이었다.“자, 말해봐. 이번처럼 말 안 듣는 사람은 어떻게 벌을 줘야 할까?”강현우는 나른하게 중얼거렸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윤하경은 알아챘다. 슬슬 이쯤이면 화도 풀렸겠거니 했는데 괜히 먼저 다가가서 불쏘시개가 된 셈이었다.속으론 후회했지만 겉으로는 억울한 표정으로 변명했다.“그땐 정말 급해서요...”윤하경은 강현우가 왜 화난 건지 알았다.그는 통제력과 주도권을 놓는 걸 싫어하는데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다.그러다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