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Author: 유월냥이

제1화

Author: 유월냥이
묘시(卯時)

윤홍주는 늘 그랬듯 몸소 수제비를 빚어 시부모님의 아침상을 마련했다.

진시(辰時)에는 시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 온 식구의 수라를 곁에서 시중들었다.

진시 신각(申刻)에는 강현우를 문밖까지 배웅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것저것 당부의 말을 건넸겠지만, 오늘의 윤홍주는 눈빛만 차갑게 가라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홍주야. 어머니께서는 병세가 위중하시고, 아우인 현수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장남이자 맏형으로서, 마땅히 제수 씨를 돌봐야 한다네.”

“그대는 황후마마께서 친히 현덕부인이라 칭호를 내린 사람이 아니더냐. 누구보다 어질고 너그러우니, 남들이 너를 헐뜯는 일은 나 또한 바라지 않소. 허니 내 처지도 헤아려 다오.”

말을 마친 강현우는 곧장 말에 올랐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윤홍주는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어질고 너그러우면 지아비를 다른 여인에게 내어 주고, 아이까지 낳게 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허면 차라리 악처가 되는 편이 났지.’

얼마 전, 시동생 강현수는 갓 혼례를 올리자마자 급히 출정을 명받았다. 그러나 공을 탐한 끝에 적의 계략에 빠져, 끝내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후사를 잇지 못한 시동생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집안에서는 강현우가 두 집안의 대를 함께 잇기를 바랐다. 그 뜻을 앞장서 밀어붙인 것은 시어머니였다.

대운 왕조에서 한 사람이 두 집안의 대를 함께 잇는 일은 그리 낯선 풍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현우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 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 시어머니와 밤늦도록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뒤, 오늘은 도리어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마침내 마음을 바꾼 것일까?’

윤홍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손끝마저 서늘하게 식어 갔다.

그녀가 영안후부(寧安侯府)로 돌아오자마자, 노마님은 곧바로 그녀를 처소로 불러들였다.

“홍주야.”

“홍주야, 너는 늘 어질고 속이 깊은 아이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현덕부인이라 칭송하지 않느냐. 나 또한 늘 너를 자랑으로 여겨 왔지.”

“해서 영란이와 현우의 일도 네가 반대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오늘 현우가 관아에서 돌아오거든, 현수의 처소에 머물게 하여라.”

“허나 네가 사리도 분별하지 못한 채 질투에만 사로잡힌다면, 현덕부인이라는 칭호도 헛된 것이 되겠지. 그리되면 영안후부 또한 더는 너를 며느리로 둘 생각은 없느니라.”

시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윤홍주는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팠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녀는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무슨 일이든 몸소 나섰고, 조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의 몸이 편찮으시면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병수발을 들었고, 단 하루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지아비를 다른 여인에게 내주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내쫓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저를 이 집안에서 내치겠다... 서방님도 같은 뜻이옵니까?”

윤홍주는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

“물론이지.”

노마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사실 너에게 숨겨 온 일이 하나 있다.”

“영란이와 현우는 어려서부터 서로 마음을 두고 자랐다. 나 또한 오래전부터 영란이를 며느리로 삼고 싶었지. 이제 현수가 세상을 떠났으니, 두 사람을 맺어 주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두 사람은 이미 합방까지 마쳤다. 네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면, 진즉 한집에서 함께 살았을 것이다.”

윤홍주의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그 뒤로 시어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방을 뛰쳐나왔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 있었으나, 윤홍주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 추웠다.

심장 깊은 곳까지 시릴 만큼.

‘강현우는 여태 나를 속이고 있었어!’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서로 마음을 나누고 있었고, 이미 합방까지 마친 사이였어...’

한낮이 되자 강현우가 관아에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진흙으로 빚은 인형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사내아이 하나, 계집아이 하나였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시전에서 이런 말이 돈다더구나. 진흙 인형을 정표로 삼으면 평생 헤어지지 않는다고. 허니 우리도 하나씩 나누어 방에 두자꾸나. 그리하면 우리 또한 평생 헤어지지 않고 함께할 수 있을 게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계집아이 인형을 윤홍주의 손에 쥐여 주었다.

“허니 이제 그만 토라진 마음을 풀거라. 오늘 아침에 했던 말은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던 것뿐이오. 나는 그런 일을 받아들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받아들일 생각 없소.”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께서 또 너를 붙잡고 몰아세우셨을 것이오. 나는 네가 어머니 일로 더는 마음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내가 예전에 약조하지 않았느냐. 이 생에서 내가 연모하는 이는 오직 너 하나뿐이라고. 내 후사 또한 반드시 네가 낳은 아이일 것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윤홍주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문득 지난날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혼인을 앞두고 강현우는 그녀를 위해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혼례복을 지었다.

그리고 빗속에 하루 밤낮을 무릎 꿇은 채, 목숨 걸고 전장에서 세운 공까지 내놓으며 친정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그녀를 위해 인헌황후께 혼인의 증인이 되어 달라 간곡히 청했다.

혼례 당일, 강현우는 누구보다 성대한 예를 갖춰 그녀를 맞이했고, 화려한 혼례 행렬은 온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는 수많은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강현우는 이 생 오직 윤홍주 한 사람만을 연모하며, 한평생 그녀와 함께 백년해로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윤홍주는 경성의 모든 규수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여인이 되었다.

누구나 강현우처럼 한 여인만을 끝까지 연모하는 사내를 만나 평생을 함께하기를 꿈꾸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 맹세를 다시 들으니, 윤홍주의 가슴 한복판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

그녀는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허나 어머님께서는 서방님과 김영란이 어려서부터 서로 마음을 두고 자란 사이라고 하셨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저는 이제껏 그 사실을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입니까?”

강현우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영란이와는 어릴 적 몇 번 본 것이 전부다. 어머니께서 늘 내가 두 집안의 대를 함께 잇기를 바라셨으니, 일부러 그런 말씀으로 그대 마음을 흔드신 게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말게. 내 마음은 오직 부인 하나뿐이네.”

‘정말 그럴까?’

윤홍주는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면 도련님 쪽 후사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저희에게도 산이 하나뿐인데, 그 아이를 동서의 양자로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윤홍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나는 다시는 부인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차마 그 고통을 또 겪게 할 수는 없소.”

윤홍주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그녀는 분명 그의 말에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허나 서방님께서 저를 속이고 동서와 합방하신다면, 저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작은 마님께서 호수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 살려!”

계집종의 다급한 외침이 온 마당을 뒤흔들었다.

‘작은 마님’ 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도 다급히 일어서는 바람에 탁자 위에 놓인 것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홍주야. 잠시 다녀오겠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윤홍주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 된다면... 저는 서방님 곁을 떠나겠습니다!”

이윽고 윤홍주도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지나 호숫가에 이르자, 강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김영란을 끌어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윤홍주는 문득 떠올랐다.

강현우는 원래 물을 몹시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두려움조차 잊은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고, 눈에는 김영란밖에 보이지 않는 듯 그녀의 이름만 거듭 불렀다.

“영란아! 정신 차려라! 제발 정신 차려라!”

강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김영란을 품에 안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윤홍주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슬픔도, 원망도 드러나지 않는 그 적막한 눈빛이 오히려 강현우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김영란을 내려놓고 윤홍주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김영란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그의 발을 붙들었다.

"아주버님께서는 절 살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 지아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생을 저는 무엇으로 버티며 살아가겠습니까?”

창백한 얼굴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마저 저리게 할 만큼 애처로웠다.

강현우는 그런 김영란을 바라보다가, 끝내 그녀를 품에서 떼어 놓지 못했다.

“나는 이미 어머니와 현수 앞에서 약조했소.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허니 두려워 말고 나를 의지하거라.”

강현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김영란을 품에 단단히 안았다.

그 말이 떨어지자, 김영란은 그의 품속으로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메웠다.

“누구 없느냐. 작은마님을 처소로 모셔라. 의원도 당장 불러오너라.”

강현우는 윤홍주의 눈치를 살피며 김영란을 곁에 있던 하인들에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김영란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손을 끝내 놓지 않았다.

“아주버님, 제발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그 싸늘한 방으로는 돌아가기 싫습니다. 차라리...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세요.”

그녀는 마치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잡은 사람처럼 강현우의 옷깃을 움켜쥔 채 흐느꼈다.

이를 본 윤홍주는 두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쥐었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방님이 직접 데려다드리세요.”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한마디는 마치 강현우의 속마음을 대신 말해 준 것과 같았다.

강현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영란이 몸이 성치 않으니, 내가 먼저 처소까지 데려다주고 오겠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그는 몇 걸음 옮길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는 듯 더디기만 했고, 품에 안긴 김영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차마 감출 수 없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윤홍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 멀어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방 안은 적막했다.

바닥에는 조금 전 강현우가 탁자를 밀치며 떨어뜨린 흙인형들이 산산조각 난 채 흩어져 있었다.

윤홍주는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하나하나 조심스레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금이 간 얼굴.

부러진 팔.

흩어진 몸통.

아무리 맞춰 보려 해도 처음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순간, 애써 참아 오던 눈물이 끝내 눈가를 붉혔다.

윤가군은 대대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변방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제 그 가문에는 윤홍주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본래 그녀의 가문과 영안후부는 혼약을 맺은 사이였다.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경성으로 가 혼인을 마치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영안후부 노마님은 그 혼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파혼했다는 손가락질은 받고 싶지 않았기에, 마지못해 윤홍주를 후부에 머물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강현우는 윤홍주를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빼앗겼고, 끝내 그녀와 혼인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괴병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게 되었다.

윤홍주는 장생사(長生寺)까지 이어진 삼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한 계단 한 계단 쉼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마침내 장생사의 주지 스님마저 마음을 움직여 산을 내려오게 했고, 귀한 영약으로 강현우의 목숨을 구해 냈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현덕부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목숨을 건진 강현우는 오히려 마음을 더욱 굳혔다.

이 생에는 윤홍주 외에는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노라 맹세했고, 끝내 노마님을 설득해 혼인을 허락받았다.

혼인한 뒤에도 그는 늘 한결같았다.

관아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늘 그녀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이나 맛있는 먹거리를 사 들고 왔고, 한가한 날이면 교외로 함께 꽃구경을 나갔다.

윤홍주가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고생할 때마다 그는 늘 말했다.

굳이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그러면서 집안일도 함께 거들었고, 직접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그녀와 나란히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그 시절의 영안후부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산이를 낳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윤홍주는 산후출혈로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힘겨운 난산을 겪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사내가 산실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만류도 듣지 않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단검을 움켜쥔 채 모두에게 이렇게 말했다.

홍주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자신 또한 함께 죽겠다고.

그날 그의 절박한 눈빛을, 윤홍주는 지금도 잊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 사랑은 어디까지가 진심이었고, 또 어디부터가 거짓이었는지, 그녀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

윤홍주는 손에 쥐고 있던 흙인형 두 개를 창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산산이 부서진 인형이 마당에 흩어졌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이미 변해 버린 사람을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어. 현덕부인이라는 칭호도, 강현우라는 사내도 이제 모두 내려놓을 거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제25화

    강현우는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윤홍주가 사는 곳과 이웃한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다.강현우는 영안후가 보낸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이현이 뒤에서 베푸는 도움도 끝내 받지 않았다.그는 길거리에서 편지를 대신 써 주며 생계를 이어 갔다. 그 덕분에 종종 윤홍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정서대장군으로 봉해져 온 조정의 칭송을 받는 최고의 여장군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윤홍주가 전장에서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장군부 밖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조용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그러다 깊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간이면 달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윤홍주와 산이를 그리워했다.어느덧 5년이 흘렀다. 그의 몸은 갈수록 쇠약해져 이제는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워졌다.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그는 책상 앞에 앉아 한 획 한 획 윤홍주의 모습을 그려 나갔다.그녀는 흰옷을 입고 옥비녀를 꽂은 채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마지막 붓을 놓는 순간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와 화폭 위에 흩어졌는데, 마치 윤홍주의 흰옷 위에 붉은 꽃이 피어난 듯했다.그는 그림 속 윤홍주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눈을 감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홍주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절대 널 저버리지 않겠다.”그렇게 강현우는 세상을 떠났다.윤홍주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찻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래... 이게 낫다.’‘강현우, 다음 생에는 부디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산이에게도 알릴 것이냐?” 이현은 화로에 장작을 하나 더 넣으며 말했다. “요즘 아주 잘 지내더구나. 나 장군만 졸졸 따라다니며 말이다.”“왕야, 산이는 나 장군님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앞으로는 그 아이 이야기를 제게 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그저 그 아이가 바르게 자라, 그릇된 길로만

  •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제24화

    한때 강현우가 중병에 걸렸을 때, 윤홍주는 영약을 구하기 위해 걸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고, 밤낮도 잊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그때의 그녀도 지금처럼 고요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마치 깃털이 가슴 위에 내려앉는 듯했다.바로 그때 강현우는 평생 윤홍주를 상처 입히지 않고, 오직 그녀만 아껴주겠다고 맹세했다.윤홍주는 물었다. “저를 속이실 겁니까?”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일 없다. 언젠가 내가 너를 속이는 날이 온다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죽는 걸로 끝날 일이 아니지요.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 인연도 그날로 끝입니다.”그때 윤홍주가 하던 말이 떠오르자 강현우의 몸은 크게 휘청거렸다.도대체 언제부터 그는 자신의 맹세를 잊어버린 걸까...윤씨 가문 사내들은 배신과 기만으로 전장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윤홍주의 가슴에 또 한 번 칼을 꽂을 수 있었단 말인가.‘강현우, 너는 정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윤홍주는 강현우를 발견했지만 담담히 시선을 거둔 뒤, 다시 이현에게 약을 먹였다.“강현우는 어떠냐?” 이현이 물었다.“기력이 너무 쇠하였습니다. 오랜 시간 몸을 추스르셔야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번 일로 몸에 지병이 남을 지도 모릅니다.”윤홍주가 조용히 답했다.“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현의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그는 윤홍주의 표정을 세심히 살피며 작은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강현우가 목숨까지 내던져 그녀를 구하려 달려들던 순간, 그녀는 그의 눈에 오직 자신만 담겨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정말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했다.윤홍주는 그에게 고마웠다.그뿐이었다.윤홍주는 담담히 고개를 들어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 마침 강현우와 눈이 마주쳤다.“달라질 것은 없습니다.”그 한마디에 강현우는 가슴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윤홍주의 마음속에는 이제 정말 자신의 자리가 남아 있

  •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제23화

    윤홍주가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자들에게 붙잡힌 이현과 한쪽에 쓰러져 생사를 알 수 없는 강현우였다.“홍주야, 오지 말아라!” 이현이 다급히 윤홍주를 막아섰다.“윤홍주, 함정에 빠지지 마라!” 이현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모든 장수와 병사들은 윤홍주의 지휘를 따른다. 모두 윤홍주를 도와 나를 구출하라!”이현을 붙잡은 자는 그의 목을 세게 조르며 고함쳤다. “닥쳐라! 저놈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고 하라. 안 그러면 네 목숨부터 끊어 버리겠다.”윤홍주는 서늘한 기세를 내뿜으며 차갑게 말했다. “왕야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반드시 왕야를 구해 내겠습니다.”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가자 칼날 같은 눈빛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겁에 질린 상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다 뒤에 있던 동료와 부딪쳤다.“우선 물러난다! 이현을 데리고 빠져!”독이 퍼진 이현은 입술이 검게 변했고 걸음도 휘청거리더니 중심을 잃은 채 그대로 끌려 뒤로 물러났다.윤홍주는 곧장 뒤쫓으며 병사들에게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을 포위하라고 명했다. “왕야를 놓아라. 데려가 봐야 아무 소용없다. 우리 왕조에는 황자가 열 명도 넘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한량인 사람이 바로 저분이다.”“저분을 인질로 삼아 무언가를 얻으려 했다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이현은 입꼬리를 움찔했다. 윤홍주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너희도 들었다시피 왕야께서는 이미 모든 권한을 나에게 맡기셨다. 왕야를 붙잡을 바엔 차라리 나를 붙잡는 편이 나을 거다.”윤홍주는 일부러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린 뒤 그 틈을 타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현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아 왔다.이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몸 전체를 윤홍주에게 기댔다. 그 때문에 그녀의 움직임도 잠시 둔해졌다.그 순간 검은 옷을 입은 자의 화살이 윤홍주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그녀도 기척을 느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윤홍주는 이현을

  •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제22화

    그날 밤, 강현우는 누군가에게 기습을 당해 정신을 잃은 채 한 객잔으로 끌려갔다.그를 납치한 자들은 적국의 첩자들이었다. 그들은 강현우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이현만 붙잡는 데 협조하면 윤홍주를 다시 그의 곁으로 돌려놓을 방법이 있다고 했다.그들에게는 윤홍주의 기억을 지워 지금까지의 괴로운 일을 모두 잊게 만드는 약이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다시 강현우와 화해하고 그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윤홍주와 산이를 데리고 도성으로 가 일품 대신의 녹봉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약조까지 했다.강현우는 잠시 흔들렸다. 윤홍주가 모든 괴로운 기억을 잊고, 이현만 사라진다면 그들은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끝내 그는 거절했다. 그는 나라를 배신할 수도 없었고, 다시는 윤홍주를 상처 입히고 싶지도 않았다.그들은 강현우를 다시 기절시킨 뒤 장작간에 내던졌다.변경의 겨울은 유난히 일찍 찾아와, 밤공기는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웠다.윤홍주는 두툼한 솜옷을 걸친 채 산이의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 화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밤의 적막 속에 유난히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잠든 산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 아이의 마음은 이미 그릇된 길로 기울어져 있으니, 계속 강현우의 곁에 있다가는 아이의 인생까지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천천히 눈을 뜬 산이는 윤홍주를 보자, 서러움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며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어머니... 산이는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어요. 왜 산이를 두고 가셨어요...”윤홍주는 아이를 조용히 떼어 놓고 침상에 앉힌 뒤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산아, 그 이유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니.”산이는 멍하니 굳어 버린 채 흐느끼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허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인정하고 바로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너는 엿사탕을 먹고 싶어서, 놀고 싶어서, 어머니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제21화

    강현우는 방 안에 갇힌 채 윤홍주를 만나게 해 달라며 계속 소란을 피웠고, 이현은 문밖에 서서 그만 포기하라고 타일렀다.“강현우, 그렇게 매달릴수록 홍주만 더 괴로워질 뿐이다. 지난번 내가 했던 말은 한마디도 귀에 담지 않았구나.”“왕야의 속셈쯤은 다 압니다. 왕야는 제게서 홍주를 빼앗고 싶으신 거겠지요. 하지만 잘 들으십시오. 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홍주를 왕야에게 넘겨줄 일도 없습니다.” 강현우는 문을 향해 주먹을 거세게 내리쳤다. 그는 이성을 잃은 채 문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문 여십시오! 홍주를 만나야 합니다. 산이가 아픕니다. 나와 홍주가 함께 돌봐야 합니다!”문밖에서 이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강현우는 의자를 집어 문을 향해 내던졌고, 문은 산산조각이 났다. 의자는 이현의 발 앞에 떨어졌다.강현우는 눈이 충혈되고 광대뼈는 앙상하게 튀어나와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몰골이었다.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현에게 달려들었다.“홍주를 돌려주십시오!”하지만 이현은 가볍게 몸을 피했고, 강현우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달려들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이현을 공격했다.몇 차례나 덤벼들었지만 끝내 기력만 모두 소진했다.그러다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며 윤홍주를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만 돌려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거듭 빌었다.화가 치민 이현은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홍주는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다!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생각이 있어. 그녀의 선택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도, 나도 마찬가지다.” 이현은 윤홍주를 떠올리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진정한 연모는 소유가 아니다.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강현우, 너는 애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홍주를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도 없느니라.”“나는 너보다 먼저 그 아이를 만났지만, 단 한 번도 내 뜻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너는 이미 그녀를 얻고도 끝내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나는 절

  • 천 번 후회해도 늦은 사랑   제20화

    “절 보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희 부자는 여기서 함께 죽겠습니다.” 강현우의 칼끝이 산이의 목을 스치며 피부를 베자, 아픔을 느낀 산이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영안후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현우는 이번에는 자신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아버지,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번에도 홍주를 데려오지 못하면 깨끗이 포기하겠습니다.”“업보로구나!” 영안후는 흐려진 눈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산이는 네 아들이다!”하지만 강현우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영안후가 끝내 막지 않자 그는 산이를 안고 마차에 올라탔다.“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반드시 홍주와 함께하겠습니다.”강현우는 마차를 몰고 떠났다. 산이는 겁에 질려 계속 울었고, 몇 번이나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 이제는 강현우의 얼굴만 봐도 아이는 두려움에 몸을 떨 지경이었다....대군이 관문 안으로 철수한 뒤 윤홍주와 이현은 나장군부에 머물게 되었다.나장군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윤홍주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이 있었다.하지만 그곳은 이미 모든 것이 변해 버린 뒤였다.홍주는 대문 앞에 오래도록 서 있을 뿐, 차마 문을 밀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의 기억 속 마당에는 늘 병장기와 말뚝이 가득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틈만 나면 무예를 겨뤘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바느질을 가르치려 애썼지만, 그녀는 끝내 칼과 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배신을 당해 목숨을 잃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말했다.어머니는 그녀를 경성으로 보낸 뒤 반드시 혼인해 아이를 낳고 살아가겠다고 맹세하게 했다.그리고 그녀가 떠난 뒤, 어머니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그날 이후 윤홍주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집이 없었다.“홍주야?” 이현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그녀는 뒤돌아 미소를 지은 뒤 천천히 대문을 밀었다.윤홍주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집은 조금도 황폐해지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