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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유월냥이
“화리라고?”

인헌황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강현우가 너를 박대하였느냐? 본궁이 직접 나서 주마. 여봐라, 당장 강현우를 들라 하라.”

“마마.”

윤홍주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한 번 청했다.

“신첩이 바라는 것은 오직 화리뿐이옵니다. 허니 부디 소인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인헌황후는 윤홍주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더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몸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인헌황후는 강현우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윤홍주의 혼례를 직접 주관해 달라 간청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토록 간절하고 굳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인헌황후 역시 윤홍주를 그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윤홍주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마, 신첩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변방에서 자랐사옵니다. 부친과 오라버니께 변고가 생긴 뒤에야 어머니께서 신첩을 경성으로 돌려보내셨고, 무장의 길을 내려놓고 아녀자의 삶을 살라 하셨사옵니다.”

“신첩이 지금껏 견디며 살아온 것은 모두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사옵니다. 만일 강현우가 그 약조만은 지켰다면, 신첩은 이대로 평생을 살아갔을 것이옵니다.”

“허나 이제야 깨달았사옵니다. 그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다른 이가 있었다는 것을. 허니 신첩은 이곳을 떠나 다시 변방으로 돌아가, 더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신첩 자신의 삶을 살고 싶사옵니다.”

인헌황후는 가만히 윤홍주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여인을 여럿 두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후궁을 다스리는 황후인 그녀도 여인이 때로는 참고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홍주의 말은 이상하리만큼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윤홍주는 그녀의 어머니와 닮아 있었다.

담장 안의 화초로 살아가기보다, 전장을 누비는 매처럼 자유롭게 날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윤홍주의 어머니는 과거 그녀에게 목숨을 빚진 은인이었다.

인헌황후는 이제 그 은혜를 갚고 싶었다.

“좋다. 본궁이 네 청을 들어주마. “

“망극하옵니다, 마마.”

“열흘 뒤 폐하께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이 일을 폐하께 아뢰도록 하겠다. 그 후 화리서를 강현우에게 전하도록 하겠다.”

윤홍주는 다시 한번 인헌황후께 깊이 절했다.

가슴 깊은 곳이 무딘 칼로 도려낸 듯 아파 왔다.

강현우는 그녀가 한때 목숨처럼 연모했던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평생을 살아도 좋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

...

그 시각 영안후부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노마님은 윤홍주가 손수 만든 수제비에 익숙해져 다른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그날도 다른 이가 올린 수제비를 먹고는 크게 화를 냈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영안후부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윤홍주의 손길이 사라지자, 강현우는 당장 입을 관복조차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세자 나리,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하인들은 윤홍주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다가가 예를 올렸다.

“마님, 노마님께서 편찮으십니다. 어서 가 보셔야 합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계속 화를 내고 계십니다.”

“마님, 큰 도련님께서도 방 안에서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관복을 어디 두었는지 찾지 못하셔서, 마님께 찾아 달라 하셨습니다. 이러다 관청에 나가실 시간이 늦어지실 듯합니다.”

“마님...”

윤홍주는 차분히 그들의 말을 끊었다.

“작은 마님을 찾아가거라. 그 사람도 영안후부의 며느리가 아니더냐. 나는 피곤하니 쉬고 싶다. 더는 나를 찾지 말거라.”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영안후부의 온갖 뒤치다꺼리는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윤홍주는 그대로 해당원(海棠院)으로 향했다.

그곳은 강현우가 그녀만을 위해 마련한 곳이었다.

벽돌 하나, 기둥 하나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둥 하나하나마다 강현우가 새긴 원앙이 놓여 있었고, 그 곁에는 그가 직접 새긴 맹세가 남아 있었다.

강현우는 평생 윤홍주 한 사람만을 연모하리라.

죽어서 황천에 이르러서도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라.

영원히 배신하지 않고, 결코 서로를 기만하지 않으리라.

...

기둥마다 새겨진 맹세는 모두 조금씩 달랐다.

윤홍주는 사람을 시켜 비수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한 획, 한 획 그 위에 새겨진 맹세를 도려내듯 지워 나갔다.

특히 자신의 이름은 더 깊게 긁어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강현우는 일찍이 모든 이에게 명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그 말은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현우조차 윤홍주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영안후부 사람들은 감히 그녀를 찾아오지 못했다.

윤홍주를 찾지 못한 노마님은 결국 화를 터뜨렸다.

“윤홍주는 어디 있느냐? 이 시어미가 앓아누웠는데 어찌 아직도 오지 않는단 말이냐? 현덕부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어찌 이리 행동한단 말이냐?”

마침 강현우가 들어오자 노마님은 기다렸다는 듯 불만을 쏟아냈다.

“현우야, 마침 잘 왔다. 네 처가 이제는 안하무인이 따로 없구나. 아침부터 수라상도 올리지 않고, 문안조차 오지 않았다. 내가 이리 앓아누웠는데도 얼굴 한번 비추지 않는구나. “

“영란이는 제 몸이 성치 않은데도 나를 걱정해 이리 찾아왔거늘.”

강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머니, 원망하려거든 어머니 자신을 원망하십시오. 굳이 저와 영란이의 일을 홍주에게 밝히자고 하신 게 누구십니까.”

“앞으로 홍주 앞에서는 영란이 얘기를 꺼내지 마십시오. 더는 그 아이가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자 노마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현우야, 네가 감히 이 어미에게 대드는 것이냐! 너와 영란이는 어릴 적부터 서로 마음을 품었던 사이였다. 그 아이가 끼어들어 네게 시집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변고가 생겼겠느냐! 영란이를 남겨 두려 내가 현수와 억지로 혼인시키지만 않았더라면, 현수가 전장으로 향할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윤홍주로 인해 벌어진 일이 아니더냐!”

“허니 진작에 그 아이를 내쳤어야 했어! 변방에서 자란 천한 계집이 우리 가문의 덕을 입어 현덕부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거늘...”

“어머니.”

강현우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홍주는 제 처입니다. 저는 절대로 홍주를 내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눈에 홍주는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홍주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강현우는 어머니가 윤홍주를 모욕하는 것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떠났다.

노마님은 분노에 치밀어 또다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윤홍주는 잠에서 깨어난 뒤, 해당원 앞에 서 있는 강현우를 마주했다.

“홍주야, 오늘은 어찌 된 일이냐? 혹 몸이라도 편치 않은 것이냐?”

강현우의 눈빛에는 걱정만이 담겨 있었다. 꾸며 낸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안색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아닙니다.”

곧바로 강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면 내가 들어가도 되겠느냐?”

윤홍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다른 것은 모두 잊은 듯하면서도, 이 약조만큼은 강현우가 놀라울 만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그 약조만은 충실히 지켜 왔다.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윤홍주가 담담히 거절하자, 강현우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며 숨길 수 없는 서운함이 스쳤다.

그녀는 늘 자신이 함께 해당원으로 가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오늘은 오히려 그의 발걸음조차 막고 있었다.

윤홍주는 홀로 앞장서 걸었다.

강현우를 기다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윤홍주가 조금씩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듯했다.

강현우는 황급히 걸음을 재촉해 그녀를 따라갔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니, 앞으로는 굳이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 이 일은 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리마.”

강현우는 윤홍주가 또다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허면 오늘부터 가지 않겠습니다.”

윤홍주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담담히 답했다.

강현우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이렇게 선뜻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홍주야... 정녕 아무 일도 없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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