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머니에게는 규방 훈계록 한 권이 있었다. 내가 일곱 살이던 해, 변방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나를 안으려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사이를 가로막고 차갑게 말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으니, 아무리 부녀지간이라 해도 남녀의 분별은 지켜야 합니다." 그날 이후 나는 외부의 사내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금해졌고, 아버지와 오라버니와 독대하는 일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금기를 어기면 반드시 벌받아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범한 모든 규수의 도리에 어긋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영안 십이 년 삼 월 초엿새, 심소영은 회랑에서 큰오라버니와 단둘이 있었다. 분수를 지키지 못했으니 『여계(女誡)』를 스무 번 베껴 쓰도록 한다." "오월 열아흐레, 심소영이 돌계단에서 넘어졌을 때 사촌 오라버니가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규수의 예법을 지키지 못했으니 두 시진 동안 꿇어앉아 반성하도록 한다." "팔월 초이레, 심소영은 발 너머로 세자 저하를 몰래 엿보았다. 마음가짐이 흐트러졌으니 손바닥을 열 대 친다." 나는 줄곧 어머니가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이토록 엄격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외실이 낳은 심다정이 일곱 살이 되어서야, 나는 어머니가 모든 딸에게 그토록 엄격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아버지 품에 안겨 응석을 부렸고, 오라버니의 소매를 붙잡은 채 등불 축제를 구경하러 다녔으며, 사촌 오라버니의 어깨에 올라 계화를 따기도 했다. 누군가 심다정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마땅히 남녀의 분별을 지켜야 한다고 일렀으나 어머니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다정이는 마음이 순수하니, 그런 죽은 규율로 아이를 옭아매면 안 됩니다." 나는 여덟 해나 남녀의 분별을 지켜 왔다. 그리고 내가 계례를 올리던 해, 심다정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다. 혼담을 위해 찾아온 죽마고우가 그녀를 구해냈을 때, 두 사람은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서로 맞닿아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규방 훈계록을 펼쳐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저지른 잘못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세고 난 뒤, 어머니는 내 사주단자를 심다정 앞에 밀어 놓았다. "남녀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허나 그 아이는 이미 다정이를 안았으니, 마땅히 다정이를 부인으로 맞아야 한다."
View More어머니가 압송된 뒤, 나는 해당의 무덤을 찾아갔다.해당에게는 본래 성이 없었다. 나는 장공주께 청해 해당을 양인 호적에 올리고, 비석에는 ‘심해당’이라는 석 자를 새겼다.해당은 생전에 자신이 여섯 살 때부터 내 곁을 지켰으니 진작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늘 말하곤 했다. 이제 해당은 마침내 그 누구의 몸종도 아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나는 규방 훈계록을 화로에 넣었다. 종잇장은 불길이 닿자 빠르게 오그라들며 검게 타들어 갔다. 십수 년 동안 나를 옭아맸던 글자들은 불길 속에서 부서져 재가 되었고, 바람이 불자 그 재가 비석 앞에 흩날렸다.나는 쪼그려 앉아 비석에 쌓인 눈을 닦아 냈다.“해당아.”“나는 잘못하지 않았고, 너도 잘못하지 않았다.”“고맙구나...”묘역을 떠나려는데 세자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오래전 서씨 가문에서 정혼의 징표로 보내온 옥비녀가 들려 있었다.“심소영.”“이제 진상이 모두 밝혀졌으니, 너와 나의 혼약은...”나는 그가 내민 옥비녀를 받지 않았다.“제가 사당에 무릎 꿇고 있을 때, 저하는 제게 다정이에게 정실 자리를 내주고 첩이 되라고 하셨습니다.”“그런데 제가 혼수를 되찾고 독립된 호적까지 세우자 이제야 다시 혼약이 생각나셨습니까?”세자의 얼굴이 굳어졌다.“여인의 몸으로 언제까지고 혼인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저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났습니다. 이제 밥 한술 얻어먹기 위해 서씨 가문에 기대지는 않을 것입니다.”나는 세자를 지나쳐 마차에 올랐다.그러다 봄이 되자 외조모가 경성에 남긴 점포 두 곳을 처분하고 강남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곳에 있던 외조모의 약재상을 다시 열고 현판도 새로운 이름 석 자로 바꾸었다.해당원.김 의원은 앞채에서 환자들을 진료했고, 나는 뒤채를 비워 갈 곳 없는 여인들을 받아들였다.부군에게 매를 맞고 쫓겨난 여인도 있었고, 부모에게 팔려 기루에 들어갔다가 달아난 여인도 있었다. 그중에 소담이라는 아이는 고작 여덟 살에 불과했다.이곳에
조사는 스무사흘 동안 이어졌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경조윤(京兆尹)이 어째서 나를 깨진 옥 조각 위에 눌러 앉혔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책임지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내 혼수를 가로챈 연유를 물었을 때는, 심씨 가문 딸의 모든 것은 후작부에 속한다고 했다.또한 해당에게 인두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라고 명한 까닭을 물었을 때도 대답은 한결같았다.“한낱 몸종이 주인을 꾀어 혼인을 피해 도망가게 했으니, 마땅히 벌받아야 하지 않습니까?”그러나 이 어멈이 관아에 끌려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죽는 것이 두려웠던 이 어멈은 그동안 어머니의 명을 받아 저지른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어머니는 이 어멈에게 사당의 화로를 치우게 했으며, 내 음식에 소금을 잔뜩 넣고도 물은 마시지 못하게 했다. 또한 저택의 의원을 매수해 내 몸에 난 상처를 모두 감기로 꾸며 기록하게 했다.해당은 혀를 깨문 뒤에도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어머니가 의원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끝내 피를 다 흘리고 죽었다.형이 내려진 날, 경성에는 다시 눈이 내렸다.아버지는 부인이 딸을 학대하고 시신을 유기한 일을 묵인하고 은폐한 데다, 평남군왕과의 혼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사실을 속인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곤장 마흔 대를 맞았다. 또한 후작부의 재산은 모두 관아에 몰수되었다. 큰오라버니는 사사로운 형벌에 가담한 죄로 음서(蔭敘) 자격을 박탈당하고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 사촌 오라버니는 본적지로 쫓겨나 평생 경성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으며, 이 어멈은 삼천 리 밖으로 유배되었다.심다정은 황실에서 하사한 옥여의를 훼손하고 여러 차례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 죄로 곤장 스무 대를 맞은 뒤, 관영 사찰에서 삼 년 동안 노역하게 되었다.어머니는 딸의 혼수를 가로채고,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도록 지시해 사람을 죽게 했으며, 허위 고발과 시신 유기를 저지른 죄로 곤장 여든 대를 맞고 영남으로 유배되었다.서씨 가문에서는 그날 밤 모든 사주단자를 돌려
어머니는 들어올 때도 여전히 규방 훈계록을 들고 있었다. 아마 장공주 앞에서 불효한 딸 때문에 애간장을 태우는 어머니 행세를 계속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그러나 나를 발견한 순간 어머니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고, 아버지와 큰오라버니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역시 어머니였다.“무릎 꿇어라!”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감히 죽은 척 혼인을 피해 달아나더니 공주부에 숨어들었구나!”어머니는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손이 내 뺨에 닿기도 전에 장공주의 곁을 지키던 어멈이 어머니의 손목을 낚아챘다.“심 부인, 공주마마가 계신 자리에서 함부로 형벌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어머니는 힘껏 팔을 빼려 했지만 어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소영아, 정말 죽지 않았던 것이냐?”아버지의 눈에는 잠시 반가움이 어렸으나, 이내 나무라는 기색으로 바뀌었다.“살아 있었으면 어찌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평남군왕부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소란을 벌였는지 아느냐? 너 때문에 후작부는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돌아가서 무엇을 하란 말씀입니까?”“제 다리를 부러뜨린 뒤 혼례 가마에 묶어 태우실 때까지 기다리란 말씀입니까?”아버지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 어멈의 손을 뿌리친 어머니는 곧바로 규방 훈계록을 펼쳤다.“섣달 초여드레, 심소영은 죽음을 가장해 혼인을 피해 도망가고 외인과 결탁했으며 부모를 거역...”어머니가 미처 다 적기도 전에 장공주가 손을 내밀었다.“이리 내거라.”어멈은 어머니에게서 규방 훈계록을 빼앗아 장공주에게 올렸다. 장공주는 마지막 장을 펼쳐 어머니가 내가 죽은 뒤 적은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시월 십오일 밤. 심소영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독을 먹어 혼인을 피해 자결했다. 몸종 해당은 죄가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평: 두 사람 모두 자업자득이다.”장공주가 눈을 들어
납팔절 날, 경성에는 눈이 내렸다. 공주부 문 앞에는 커다란 구리 솥 여섯 개가 걸려 있었고, 죽을 받으려는 백성들의 행렬은 길게 이어졌다.후작부의 마차가 계단 앞에 멈춰 섰을 때, 나는 청설각안에 앉아 있었다. 창밖 매화나무 가지에는 눈이 수북이 쌓였고 화로의 숯은 벌겋게 타올랐지만, 손은 여전히 저릴 만큼 차가웠다.신시가 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새하얀 여우털 갖옷을 걸친 심다정이 홀로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에는 외조모가 내게 남긴 붉은 보석이 박힌 비녀가 꽂혀 있었고, 손목에는 내가 열두 살 탄일에 받은 백옥 팔찌가 걸려 있었다.내 얼굴을 알아본 심다정이 흠칫 멈춰 섰다.“언니…… 죽지 않으셨습니까?”나는 심다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실망시켜 미안하구나.”심다정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문밖에 있던 어멈이 이미 자물쇠를 채운 뒤였다. 심다정은 탁자 곁으로 물러나며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어머니께서 하신 일입니다.”“어머니께서는 언니가 이미 숨이 끊어졌으니, 저택에 두면 모두에게 화가 미친다고 하셨지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다정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그건 내 팔찌구나.”심다정은 황급히 손을 소매 속으로 감췄다.“어머니께서 언니의 혼수를 이미 제게 주셨습니다.”“언니는 죽었으니 그 물건들은 당연히 후작부 사람에게 남겨야 합니다.”“아쉽게도 내가 다시 살아났구나.”심다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나는 품에서 은자 수령증 두 장을 꺼냈다.“네가 물에 빠진 날, 어머니께서 연못가 정자를 지키던 사람들을 일부러 물리셨지.”“내가 이것들을 서씨 가문에 넘기면 세자 저하가 그래도 너와 혼인하려 할까?”심다정이 달려들어 수령증을 빼앗으려 하자, 나는 얼른 소매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말해라.”심다정이 입술을 깨물자, 금세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언니는 어찌하여 늘 저와 다투려 하십니까?”“저는 그저 은호 오라버니를 연모했을 뿐입니다.”“어머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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