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학 졸업 후 공모전에서 당당히 입상하며 들어오게 된 첫 직장이었다.
라임에게는 일상이었고 삶의 일부분이었다.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들이 아론 리빙 매장에 진열될 때마다 뭉클했고, 행복했다.
피아노 다음으로 가진 꿈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이 직장이 만족스러웠고,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오래 이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후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다.
다른 것보다 서후와 마주치는 것 자체가 라임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사실 출근 전까지만 해도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그 여자가 서후의 약혼녀라는 것을 들은 순간, 라임은 결정했다.
이제는 자신이 떠나기로, 오랫동안 가슴에 고이 담아두었던 그와의 추억과 삶의 일부분이 이제는 조용히 묻어야 하는 지나간 기억임을 자각했고, 그러기 위해선 흔들리면 안 되었다.
서후 아니 진호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떠나는 것이 맞았다.
우선, 아빠에게로 돌아가 잠시 쉼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지...
같은 일이 아니더라도 뭐라도 해보다 보면 살아질 테니 두려워 하지는 말자.
머릿속으로 써 내려간 시나리오를 열심히 되새기며 사직서를 들고 디자인부 부장실로 향했다.
***
부사장실로 들어온 서후는 자신에게서 차갑게 눈을 돌리던 라임의 모습에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듯했다.
박샤론이 제 팔에 매달려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더이상 긴 머리를 하나로 댕강 묶고서 뛰어다니던 말괄량이가 아니었다. 웨이브 진 머리에 세련된 복장을 갖춘 그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불의 앞에 참지 않는 그녀의 대담한 마음만큼은 여전했다.
'부사장님 약. 혼. 자 분이.........'
라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순간 당황한 서후는 그제야 제 팔에 매달려 있는 샤론을 인식했다.
확!! 팔을 빼 버리고, 인상을 쓰며 샤론을 내려보자 샤론은 입을 삐쭉거리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서후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징계 주시려면, 저 분은 뭐.. 부사장님 약.혼.자.라고 하니 저만 받으면 되겠네요. 디자인 1팀 이라임 과장입니다. 부르실 일 있으시면 1팀으로 연락주십시오. 그럼 저는 지금 많이 늦어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어쩜, 예전이나 지금이나 몸을 사리지 않는 건 변함이 없다.
라임은 결국 서후를 쳐다도 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게이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진 치고 있던 다른 직원들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우르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라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후의 미간이 구겨졌다.
정확히는 뻘겋게 상처가 나 있는 두 발에 시선이 꽂혔다.
자주 신지 않은 구두에 쓸려 상처 위에 피까지 고여있는 모습에 서후의 마음이 아렸다.
샤론에게 따끔하게 선을 긋고 부사장실로 올라온 서후는 자신의 앞에 서서 안색을 살피는 남비서를 향해 물었다.
"혹시.. 상처 났을 때 붙일만한 밴드 같은 게 있을까요?"
"네 의무실에 가서 받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남비서가 부사장실을 나서고 서후는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
"이과장 왜 이래?"
서부장이 상당히 당황스러워하며 눈을 땡그랗게 뜨고 말했다
라임이 제출한 사직서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치다
"이게 뭐야?"
"사직서잖아요"
"그니까.. 왜 갑자기 생뚱맞게 사직서를 내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과장이.."
"저는 뭐 사직서 내면 안 되나요?"
라임은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늘 긍정적으로 동료들의 사기까지 북돋아 주는 디자인팀에 꼭 필요한 사람이 이라임 과장이었다
가끔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상사고 뭐고 들이받고 보는 또라이 기질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직원들은 대부분 라임을 좋아했고 신뢰했다.
아무리 사고를 쳐도 사직서를 제출한 적은 없었기에, 서부장은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아까 로비에서 일 때문에 그런 거야?"
"로비에서요? 아~~ 그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여자가 미화부 여사님한테 갑질한 그거요? 제가 왜 그런 일로 사직서를 내나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부장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벌떡 고개를 들었다
"어디 아파? 막.. 일을 못할 정도로 심각한거야? 어? 얘기해봐.."
"그건 아니고요"
‘사실 아픕니다. 마음이요.. 그 사람 보는 게 아프네요. 도저히 볼 자신이 없네요’
차마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한 말은 조용히 숨겨두었다.
"그럼 우선, 일주일 정도 휴가 줄 테니까 좀 쉬다 와..."
마음이 흔들렸다.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데.. 그 녀석 때문에 그만두는 건 너무 바보같긴 해.. 그냥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피해 다니면 되지 않을까? 아니야.. 디자인 팀 직접 관리한다 했잖아.. 아 몰라’
"그럼 우선, 며칠 더 생각해 볼게요“
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보란 듯이 사직서를 쭉~ 찢어버렸다.
"와... 생각해 본다고 했지 안 한다고 하지는 않았는데요?"
"안돼 하지마."
라임은 더는 아무말도 못하고, 한숨만 푹~ 쉰 채 부장실을 나와야 했다.
***
대강당에는 VIP석과, 부서별로 자리가 지정되어 있었다.
맨 뒷자리 구석을 선호했던 라임의 바람과는 다르게 VIP석 바로 뒤, 무대가 코앞에서 보이는 자리에 디자인부 죄석이 배정되어 있었다.
라임과 함께 무조건 맨 뒷자리를 외치던 하영은 지금 좌석에 상당히 흡족한 표정이다
"이대리야~ 너무 행복해 보인다“
"당연하죠 과장님~ 가까이서 부사장님의 모습을 볼 수 있잖아요"
웃어야 하는데 편히 웃을 수가 없는 라임이었다
하영을 들뜨게 하는 그 부사장님의 존재가 진호.. 아니 진호였던 안서후였으니까.
라임이 차가운 표정으로 심희준을 향해 걸어왔다.라임은 심희준에게 매달려 있는 여성을 한 번 쳐다보고 심희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뭐야?""라임아 그게..""오빠 이 여자 누구야?"애교 섞인 목소리로 심희준에게 묻는 여성은 더욱 심희준의 팔을 꼭 붙들었다."그런 그쪽은 누구세요?"라임이 차가운 표정으로 여성에게 물었다.순간 움찔했지만, 오기가 생겼는지 여성이 눈을 치켜뜨며 라임을 향해 쏘아붙였다"나 희준 오빠 애인인데?""애인?""아님 약혼자라고 해야하나? 오빠 우리 내년 봄에 결혼하니까 약혼자라고 해도 되는 거지?“"결혼?"얼굴이 하얗게 질린 희준이 여성의 팔을 급하게 빼냈다"라임아 그게...""오빠 입으로 직접 얘기해 봐 이 여자 말이 사실이야?""그게... 결혼은...사실인데..""뭐?""부모님이 결혼에 대해 워낙 완강하셔서....""하..."그 사이 테이크아웃 컵 두개를 들고 눈치를 보고 있던 장사장이 조심히 컵을 희준 앞에 내려 놓았다."가져가""어?"라임의 말에 희준이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오빠 약혼자랑 같이 먹으려고 테이크아웃 한 거 아니야? 가지고 나가라고""오빠 가자 나 배고파 룸서비스 시켜준다 했잖아"여자는 라임이 들으라는 듯 룸서비스를 힘주어 말했다.라임은 비소를 흘렸다.희준은 입만 달싹거리며 여자에게 끌려나가다시피 카페를 빠져나갔다.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테이블 손님들과, 장카페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라임은 장사장에게 공손이 머리를 숙였다"사장님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그런데...괜찮으세요?""네.. 걱정마세요 사장님 주신 서비스는 다 먹고 갈거예요"라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허무함과 배신감에 울컥 눈물이 올라오려 했지만 애써 참아냈다.오랜 방황 끝에 다시 마음을 열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믿었던 사람에게서의 또 한 번의 배신은 어렵게 열어 놓은 마음의 문을 다시 굳건하게 닫아버리게 만들었다.*다음 날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었다. 그때 만나서 심희준의 관한 얘기들을 솔직하게 다 얘기해 주기로 했는데, 갑자기 급하게 전화가 와서 다른 큰 일이 생겼나 싶었다. 반차까지 쓰고 달려왔는데, 고작 한다는 얘기가 심희준이라니.."저녁에 만나서 얘기해 준다고 했잖아.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못 기다리겠든?""오늘 심희준이 일부러 라임이한테 접근했어""뭐?"서후는 오늘 점심 때 있었던 일을 들은 그대로 성빈에게 들려주었다.성빈의 얼굴이 싸하게 변하더니 급기야 욕설을 퍼붓는다."이제 얘기해 봐 들어야겠어 심희준이 라임이한테 어떻게 했는지"성빈은 한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머금었다."라임이 누나가 너 떠나고 오랫동안 남자는 거들떠도 안 봤는데, 3년 전 쯤인가? 심희준이 라임이 누나를 엄청 쫓아다녔어. 뭐.. 심희준 말고도 라임이 누나 좋다고 다가오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누나가 엄청 독하게 거절해서 다 나가 떨어졌거든, 근데 그 새끼는 끝까지 버틴거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 처럼 지극 정성이었어"= = =퇴근 후에 장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던 라임은, 장카페에서 만난 심희준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그를 받아들였고, 둘은 연인이 되었다."라임아 집이 코 앞인데 왜 맨날 여기서만 데이트를 할까 우린?""여기가 분위기가 좋아. 음악도 좋고, 커피도 맛있고""근데 너를 안고 있을 수가 없잖아""꼭 안고 있어야 해? 이렇게 같이 시간 보내는 것도 좋은데 난""아휴...언제 쯤 우리 라임이가 오빠한테 온전히 마음을 열어줄까?"심희준은 라임 앞에서 항상 약자였다.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밖에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처음에는 라임의 연인이 되는 것 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행복했고, 자신만큼 좋아해 주지 않는 것 같아도 괜찮았다 내가 더 좋아하면 되니까...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욕심이 생겼다.자신을 더 봐줬으면 좋겠고, 자신을 더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고.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주면
"콜라보 팀이 회의 후 다같이 직원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심희준 팀장이 일부러 이라임 과장이 식사 중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는체를 한 것 같습니다"".....""심희준 팀장이 이라임 과장을 계속 자극 했는지 이과장이 식사를 멈추고 화를 내고 나갔고 1팀 모두 이과장을 따라 나간 것으로 파악됩니다""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말입니까?""그런 것 같습니다. 식당을 나간 것까지 전해들었습니다“서후는 휴대전화를 들고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몇시에 끝나?"-퇴근은 6시지만, 지금 당장도 나갈 수 있지-"그럼 지금 나와 어디서 볼까?"-뭐냐.. 무슨 일 있어?-"회사로 와 19층"-나야 좋지~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성빈과의 통화가 끝나자 남비서가 1층 데스크에 연락을 취했다.***서후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느낀 성빈은 당장 만나러 갈 수 있다고 말했다.차후에 자신이 이끌어갈 회사이긴 하나, 지금은 열심히 배운다는 생각으로 다른 직원들과 차별 되지 않게 성실히 임해 온 성빈이었다."급한 일이 생겨서 반차 쓰고 퇴근 하겠습니다"성빈은 급하게 사무실을 나섰다.통화로는 한껏 여유있는 모습이었지만, 서후의 조급한 목소리에 걱정이 밀려오는 성빈이었다.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가장 가까이서 봐 왔던 친구였다.10년 만에 만났지만,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는지 서후의 표정만 봐도, 그동안 얼마나 고되고 힘든 시간들을 버텨왔는지 알 수 있었다.아론 리빙 방문자 전용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로비로 들어섰다.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안서후 부사장을 만나러 왔노라 방문 목적을 밝히자"혹시 문성빈님 맞으신가요?"하고 먼저 이름을 물어왔다"네 맞습니다""네 전달 받았습니다"직원은 방문자 카드를 내밀며 게이트를 통과해 19층으로 올라가시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라임을 만나러 건물 앞까지는 몇 번 와 본 적 있었지만, 직접 안에 들어와서 보니 대기업의 위엄이 단번에 느껴져 서후의 위치가 실감이 되었다.자신도 이렇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업무 능력도 좋고, 심팀장이 이끄는 홍보팀 분위기도 좋은 편이고요..""......."서후는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심희준 팀장에게 무슨 문제라도....""이라임 과장과 사귀었던 사이었다고 하더군요"".....아. 그래서 심희준 팀장이 디자인 1팀과 작업하길 원했던 거군요"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심희준 팀장 아론에 올 때마다 제가 잘 지켜 보겠습니다""조금이라도 허튼짓 하면....""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점심시간]"자자~ 점심 식사하러 갑시다""오늘 메뉴가 뭘까나?""함박이라는데?""오~~~~"1팀 팀원들은 다 함께 지하1층 직원 식당으로 이동했다.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대신 5층에서 지하 1층 까지 비상 계단을 이용하며 시끌 벅적한 분위기로 공간을 울렸다."아빠가 맛있는 거 많이 해 주셨어?"고운 팀장이 라임에게 물었다."아주 배 터지는 줄 알았어요""부럽다~~ 나 가끔 생각나잖아 저번에 소명호과장이랑 같이 이과장 아버지 식당 갔을 때, 진짜 너무 맛있어서 가끔 생각나~~ 김치찌개 대박이었는데"고운이 그때를 회상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난 제육이 잊혀지지 않아 진짜 내가 먹어 본 제육 중에 탑이야"소명호 과장이 끼어들며 말했다."와~~이거 안 되겠네? 담에 우리 가게에서 회식 한 번 해야겠는데요?""진짜? 완전 콜!!"라임은 훈종의 음식을 칭찬해 주는 팀원들이 고마웠다.지하에 도착하여 자율 배식으로 먹을만큼 음식을 퍼담아 다 함께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그래도 우리 회사 식당 음식 진짜 잘 나오는거야""응 맞어 맛있어"다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본격적으로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하자 먹는 것에 집중하여 잠시 대화가 끊겼다간간히 짫은 대화만 오가던 그 때."고운 팀장님 안녕하세요?"식판을 내려놓고 고운 앞에 착석하며 인사하는 심희준 모습에, 일순 얼음이 된 고운과, 어처구니 없는 듯 비
박샤론이 갈비 하나를 서후의 밥 그릇 위에 올려주자 서후의 동작이 멈췄다."허허허 우리 샤론이가 서후를 잘 챙기네.. 회장님~ 두 아이가 참 잘 어울리지 않나요?"박태권의 망언에 서후의 얼굴이 구겨졌다.서후는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샤론이가 서후를 챙겨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 행동은 삼가해 줬으면 좋겠구나. 서후는 밥에 뭘 묻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회장의 말에 샤론의 얼굴이 붉어졌다."아.. 죄송해요 몰랐어요""영남댁 서후 밥 새로 퍼줘요"서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남댁이 새 그릇에 밥을 퍼와 서후의 앞에 놓아 주고 갈비가 올려져 있는 그릇을 치웠다."....허허.. 아 맞다 회장님. 세훈이가 생전에 위스키를 그렇게 좋아했던 게 생각나서 좀 사와 봤는데..""소주 좋아하셨습니다""뭐?"박태권의 말을 끊어 먹은 서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저희 아버지는 생전에 소주를 제일 좋아하셨습니다""....소주...는 세훈이랑 같이 먹었던 기억이 없는..""아버지와 20년 동안 같이 산 사람이 접니다. 제가 20살 되던 해 직접 술을 가르쳐 주실 때도 소주를 드셨고요.."'아무리 비싸고 좋은 술을 갖다 줘도, 난 소주가 제일 좋다'서후가 20살 되던 해, 세훈과 훈종, 라임이 함께 앉아 서후에게 첫 잔을 따라주며 아빠 세훈이 했던 말이다.서회장과 세희는 놀란 눈으로 서후를 바라보았다.서후가 저렇게 길게 얘기하는 걸 본 적이 많지 않았던 두 사람은, 세훈의 이야기에 이렇게 동요하여 반응하는 서후의 모습에 뭉클함을 느꼈다.불편한 식사자리가 얼추 마무리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서후를 샤론이 급하게 붙잡는다.반대 손으로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샤론의 손을 떼어내는 서후.샤론은 할 말이 있다며 주섬 주섬 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회장님, 고모님, 오빠. 저 다음주에 피아노 독주회 해요. 여기 VIP초대장이에요"샤론이 봉투에 든 초대장을 내밀자 서회장과 세희가 받아 들고, 서후도 마지못해 받아 줄 수 밖에 없었
콧소리를 내며 서후의 팔짱을 끼려는 박샤론에게서 순발력 있게 몸을 피해버린 서후의 미간이 좁아졌다."흠흠... 샤론아!"박태권 회장이 샤론을 나무라자 입을 삐쭉 거리며 박태권 옆으로 와 섰다."안 부사장. 오늘이 세훈이 기일이라 찾아왔다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매년 기일 때마다 항상 방문을 했었어. 내가.... 세훈이와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고모님께 들었습니다"박태권 태양악기 회장.세훈과는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었고, 세훈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나중에서야 전해 듣고 본가를 찾아와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다.하지만, 서후에게는 낯선 이름일 뿐이었다.아버지 세훈이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었기에, 가장 친한 벗이었다는 말이 서후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쁘다 못해 짜증이 났다.아버지의 가장 친한 벗은 훈종이어야 했다. 아니 훈종이 맞았다.한 날 한 시에 아내를 잃고, 두 아이를 함께 키우며 친구처럼 가족처럼 살았다.어떻게 훈종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세훈의 가장 친한 벗이 될 수 있단 말인가?서후는 박태권 회장도, 그의 딸 박샤론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그래도 네 아버지와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네 아버지를 위해 지금도 저렇게 마음을 쓰고 있는데, 서후 네가 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주면 안 되겠니?‘언젠가 고모 세희가 서후에게 부탁한 말이었다.내키지 않았지만,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런던에 있는 동안 박샤론이 그렇게 끈질기게 들이대고 쫓아다녀도 무섭게 떼어내진 못했다.오늘처럼 먼저 몸을 피하거나, 표정으로 싫음을 내색할 뿐, 독한 말과 행동으로 샤론을 쳐내지 않았다.그런 박샤론이 얼마 전 회사로 찾아와 그 난리를 피우고, 라임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약혼자라 헛소리를 지껄였다.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에, 최대한 참고 또 참고있는 중이다."서후야. 어서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