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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우연한 만남

Auteur: 지호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8-07 09:08:06

진섭은 마치 우연인 척 지호를 불러 세우더니,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지호는 그가 자신의 노트북을 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터라 잠깐 멍해졌다.

진섭이 여기 왜 왔느냐고 묻자, 지호는 우유니 사막으로 간다고 답했다.

진섭은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오래 품어 온 버킷리스트라며, 마치 철저히 준비라도 한 사람처럼 둘러댔지만,

지호를 따라왔다는 사실만큼은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진섭은 지호를 한 번 훑어보더니, 준비되지 않은 옷차림이라며 옷을 사러 가자고 재촉했다.

지호도 자신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트북을 덮고 진섭을 따라나섰다.

진섭은 재빨리 택시를 잡았다. 공항은 작고 소박해서 옷을 파는 곳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20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마녀시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지호는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예상한 건 쇼핑몰이었지, 전통의상을 파는 시장은 아니었다.

입구부터 묘하게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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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42. 잊지 않았다는 증거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새하얀 지평선이 떠올랐다.우유니. 하늘과 땅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곳. 발밑이 온통 투명한 거울이 되어 오롯이 자신만을 비추던 그 압도적인 순간.그리고 그 위로 겹쳐지던 진섭의 목소리.볼리비아의 거친 바람 속에서도 늘 지호 옆을 지켜 주던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새 작품 〈가면의 집〉 시놉시스를 다시 열어 보고, 송경숙이라는 잔인한 이름에 마음이 붙들리기 시작하면서 진섭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멀어졌다.진섭은 끝까지 지호를 붙잡지 않았다. 지호는 미안함과 씁쓸함을 삼키며 제 몫의 현실로 돌아왔다.여행에서 돌아온 지 고작 며칠. 치열했던 우유니의 잔상들 속에서 지호는 오히려 더 지독한 외로움에 몸서리쳤다.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오피스텔. 빛이 차단된 암막 커튼 아래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는 고요함은 거의 고통에 가까웠다.그래서 결국, 텔레비전을 들여놓기로 결심했다. 이 적막을 메우려면, 타인의 목소리가 담긴 기계라도 필요했다.텔레비전 한 대를 집 안에 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이사 첫날 이후로 누구도 발을 들인 적 없던 이 폐쇄적인 공간에, 낯선 타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먼저 인터넷 설치 기사가 벽면을 타고 선을 연결했다. 이어 커다란 박스를 든 배송 기사들이 들어왔고, 뒤이어 새까만 대형 화면을 올려 둘 티비장을 조립하는 가구 업체 사람들까지 잇따라 들이닥쳤다.“선은 이쪽으로 빼 드릴까요?”“네, 편한 데 놔주세요.”가구 조립되는 날카로운 마찰음, 기사들이 오가는 무거운 발소리, 투닥거리는 대화 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집 안이 오랜만에 살아 있는 공간처럼 분주해졌다.하지만 그 온기는 금방 가라앉았다.설치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지호는 다시 조용해진 거실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어스름 저녁 빛이 스민 거실. 새로 설치된 거대한 텔레비전 화면은 여전히 검게 고여 있었다. 지호는 리모컨을 쥐지 않았다. 전원이 꺼진 새까만 화면 속에 비친,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41. 오랜만이네?

    노트북 화면 속 〈가면의 집〉 시놉시스를 바라보던 지호는 문득 손을 멈췄다.[작가 : 지호]화면 한쪽에 적힌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본격적으로 드라마 작가 일을 시작한 뒤부터 지호는 더 이상 성을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버린 이름이었다.윤지호.호적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았다.아버지 윤용석은 이혼 후 단 한 번도 지호를 찾지 않았다.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짧은 문자조차 한 번 없었다.처음에는 기다렸다. 언젠가는 연락이 오겠지. 그래도 딸인데, 생일 정도는 기억해 주지 않을까.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대는 조금씩 마모되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버려졌다는 잔인한 감정뿐이었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를 선택한 사람. 지호에게 '윤'이라는 성은 이제 가족의 의미가 아니었다.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지호입니다.”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 윤지호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과거보다, 지호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지금이 더 자신 같았다.지호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가면의 집〉.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의 시작은 송경숙이었다. 어머니를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 여자. 한때는 텔레비전만 켜면 나왔고, 모두가 사랑했던 대배우.어제 유경훈 CP는 전화를 걸어 대뜸 제작사 사장이 송경숙을 주연으로 캐스팅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식을 전했었다.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인쇄해 둔 시놉시스를 다시 읽을수록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극 중 주인공과 실제 송경숙의 나이가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송경숙은 더 이상 드라마 전체를 홀로 이끌어 갈 만한 위치의 톱배우가 아니었다.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던 지호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졌다.“……잠깐.”연필을 쥐고 있던 손끝이 멈췄다. 문득 머릿속에 전혀 다른 그림이 떠올랐다.송경숙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히려 주인공의 엄마 역할이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40. 가면의 집

    책상 위에 놓인 시놉시스 파일을 천천히 넘기던 남자가 낮게 웃었다.“오…….”짧은 탄성이었다.“로맨스만 쓰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창밖으로 겨울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넓고 텅 빈 집무실 한가운데, 검은 소파에 몸을 기댄 남자는 시놉시스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손끝에 걸린 종이 위로 적힌 이름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작가, 지호.눈에 익은 이름이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휘웅은 무심코 종이 위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리고 다시 첫 문장을 읽었다.〈가면의 집〉그녀가 훔친 것은 아빠만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의 영혼, 그리고 나의 평범했던 모든 세계였다.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여동생'.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청순하고 깨끗한 얼굴로 사랑받는 톱배우. 하지만 그 화려한 가면 뒤에는 남의 가정을 짓밟고 올라선 추악한 과거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 돌아온 딸.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가 천천히 지워졌다.휘웅은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당신이 연기하는 그 가짜 인생, 내가 진짜 지옥으로 만들어줄게.”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지호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솔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녀는 전부 활자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휘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오래전, 차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시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휘웅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병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번져 보였다.침대 위에 앉아 있던 미선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얼굴은 반쪽처럼 야위었고, 손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늘어져 있었다. 임신 중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쇠약했다.휘웅은 그런 미선을 보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나도 힘들어요.”처음이었다. 스물다섯 살 인생에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39. 잊고 있던 이름

    한국에 돌아온 지 사흘째였다.열여섯 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던 날, 지호는 캐리어를 현관 앞에 세워 둔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우유니 사막의 하늘이 떠올랐다. 소금 평원 위를 천천히 걷던 발걸음, 끝없이 쏟아지던 별빛, 그리고 그 풍경 앞에서 환하게 웃던 진섭의 얼굴까지.꿈이라면 너무 선명했고, 현실이라기엔 너무 멀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진짜였다는 걸 증명하듯, 침대 맞은편 옷걸이에는 볼리비아에서 산 판초와 셔츠, 두꺼운 조끼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지호는 한참 동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충전기를 찾았다. 완전히 방전된 휴대전화를 콘센트에 꽂아 둔 뒤,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예전 같았으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부터 들었을 텐데, 이번에는 아니었다.집이 너무 조용했다.엄마 은주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결국 윤용석과 살던 넓은 집을 정리하고, 지호는 혼자 살기에 적당한 오피스텔로 옮겨 왔다.문제는, 그 집이 지나치게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원래 옵션으로 들어와 있던 냉장고와 세탁기, 작은 전자레인지가 전부였다. 지호가 직접 들여놓은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와 작업용 책상 하나뿐이었다.거실 창문에는 짙은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벽에는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소파도 없었고, 적막함을 달래 줄 텔레비전조차 없었다.그동안은 괜찮았다. 오히려 그런 고요함이 편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우유니에서 돌아온 뒤 처음 맞이한 밤은 유난히 적막했다.눈을 뜨면 늘 들리던 진섭의 목소리도 없었고, 아침마다 호텔 복도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발소리도 없었다.그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와, 멀리서 지나가는 차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지호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티브이라도 하나 놓을까.'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익숙함이 외로움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그 사실이 낯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38.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

    한국을 떠난 지도 어느새 2주가 훌쩍 넘어 있었다.애초에 지호는 이렇게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에 없던 우유니 사막에 푹 빠져 버린 탓에, 볼리비아에서만 벌써 5일째를 보내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걸 알면서도, 지호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 머무는 동안, 지호는 자꾸만 현실감이 희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꿈속을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고, 영화라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았으면 했다. 끝없이 펼쳐진 소금 평원과 그 위를 가득 채우던 하늘. 밤이면 쏟아질 듯 내려앉던 별빛. 그리고 그 풍경 앞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웃던 진섭의 얼굴까지.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싫어했던 건 은둔 생활 자체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렇게 오래 혼자였다는 사실이 싫었던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돌아가기 싫은 이 감정이 우유니의 풍경 때문인지, 아니면 진섭 때문인지 지호는 끝내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휘웅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답은 여전히 아니었다. 휘웅을 잃은 상처를 그대로 안은 채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에게 기대는 건 결국 또 다른 실수가 될지도 몰랐다.지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과 함께, 조용히 피어나던 마음도 다시 접어 두었다.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지난번처럼 아무 말 없이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진섭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지 지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라파스에서 다시 만난 날부터 우유니까지 함께 가 준 것. 추울까 봐 겉옷을 챙겨 주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주고, 수없이 사진을 찍어 주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묵묵히 곁을 지켜 준 것까지.그 모든 마음을 모른 척한 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37. 아직 닿지 않은 마음

    다음 날 아침이 밝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우유니 사막에 발이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눈을 떠도 현실감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졌던 풍경, 끝없이 이어지던 수면 위를 함께 걸었던 순간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긴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들처럼, 지호와 진섭은 어딘가 몽롱한 얼굴로 하루를 시작했다.진섭이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 근처 식당을 찾았고, 지호는 별다른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여행지에서 먹는 늦은 아침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전날의 감동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인지, 평범한 음식조차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둘은 식사를 하며 어제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봤다.무엇보다 지호의 사진은 낯설 정도로 달라 보였다. 10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던 윤지호는 그 사진 안에 없었다. 말갛게 개인 얼굴을 하고는 크게 웃고 있었다. 어딘가 어색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믿기 힘들 만큼 편안해 보였다. 진섭이 찍어준 사진 속의 윤지호는 분명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인데도 낯설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얼굴을 만들어준 사람이 진섭이라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지호는 괜히 아무 말 없이 화면만 바라봤다.진섭은 그런 지호를 옆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이 고스란히 비친 물 위,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두 사람의 뒷모습, 해 질 무렵 붉게 물든 풍경까지. 사진 속 우유니는 현실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그중에서도 진섭의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건 지호의 얼굴이었다. 사진 속 지호는 그가 처음 만났던 지호와는 전혀 달랐다. 어제보다 한결 차분해 보였지만, 시선만은 자꾸만 지호에게 머물렀다. 지호는 그 눈길을 눈치채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진섭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지호는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조금만 들여다보면 살속이 비칠 것만 같았다. 말투는 차분했고, 때로는 어른스러웠지만, 웃는 얼굴만큼은 아직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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