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은 지호는 손에 쥔 포카칩 봉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직 뜯지도 않았는데, 봉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문득 뒷면에 붙어 있는 작게 접힌 냅킨 한 장을 발견했다.
포장마차에서 봤던 그 얇은 종이 냅킨이었다.
조심스럽게 떼어 낸 순간, 지호는 숨을 멈췄다.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윤지호 ♥ 강휘웅
지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말로는 절대 안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유치한 낙서를 몰래 그려 붙여 놓다니.
'이걸 진짜 썼다고?'
웃음이 먼저 났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지호는 메모를 서랍 안 깊숙한 곳에 조심스레 넣어 두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였다.
내 비밀이 종이 위에서 발가벗겨졌다.
꼭꼭 숨겨두었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열병 같은 감정들이 활자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리는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그 글을 그가 읽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단편극본 공모전 당선!]
대형 방송사에서 주최한 공모전의 당선 문자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지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고 문자를 다시 읽어 보았지만, 화면에 뜬 문구는 달라지지 않았다.
밤새 노트북을 두드리며 완성한 대본의 제목은 심플했다.
「첫사랑」
그저 평범한 청춘 로맨스물이라고 포장했지만, 사실 그 글은 지호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휘웅을 짝사랑하며, 그와 있었던 일들을 몰래 기록해 둔 이야기였다.
놀이공원에서 처음 만난 날. 터미널에서 다섯 살 어린이로 만들어 버렸던 순간.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히어로 흉내를 내던 밤. 그리고 통금 시간에 쫓기며 뛰어가던 골목길까지.
지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 기억을 하나씩 문장으로 옮길 때마다, 마치 그날의 공기와 냄새와 목소리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몰입해서 썼고, 그래서 더 위험한 글이 되고 말았다.
당선 소식을 들은 유진은 자기 일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대박! 지호, 작가님 되셨네?]
[오늘 무조건 내가 쏜다.]
유진의 성화에 못 이겨 학교 앞 카페로 나온 지호는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유진은 아직 오는 중이라고 했다. 혼자 앉아 들뜬 마음으로 인쇄한 대본을 몇 번이나 다시 펼쳐 봤다.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인쇄된 표지를 보고 있으면 아직도 얼떨떨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엄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지호는 대본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테라스로 나갔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호의 등이 조그맣게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렸다.
휘웅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동학을 만났을 때, 유진과 지호가 이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길이라, 딱히 이유랄 것도 없이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그 카페로 향했다.
휘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가 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가방. 반쯤 마시다 만 아이스티.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인쇄된 대본.
휘웅은 별생각 없이 지호의 자리로 걸어갔다. 대본 맨 위에는 큼지막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첫사랑」
그 아래, 작가 : 윤지호.
휘웅은 피식 웃었다.
“대단하네.”
공모전에 당선됐다는 이야기는 언뜻 들었지만, 진짜 작품을 써서 상까지 받았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본의 첫 장을 펼쳤다.
그런데.
몇 줄 읽지 않았는데도, 어딘가 이상했다.
화려한 전구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회전목마 앞. 쓸쓸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남주 : “어릴 때 좋아했었어. 안 무섭잖아.”
오후의 빛이 남주의 스트라이프 셔츠 위로 번져, 줄무늬처럼 일렁인다. 여주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는다.
휘웅의 손이 순간 멈췄다.
“…뭐야.”
낮게 중얼거리며 다시 첫 줄을 읽었다. 회전목마. 스트라이프 셔츠. 해 질 무렵의 놀이공원. 지호와 함께 갔던 그날과 너무도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터미널 내에서 길을 잃은 어린이를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강태웅. 나이는 다섯 살입니다.]
“…푸흡.”
휘웅의 입술 사이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상에. 자기 이름과 비슷하게 써 놓고 우연이라고 우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휘웅은 의자에 기대앉은 채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읽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웃을 수가 없었다.
지문 하나. 대사 하나.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전부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놀이공원에서 건넸던 포카칩. 터미널에서 들었던 안내 방송. 카페에서 접었던 종이비행기. 골목길에서 무심코 던졌던 한마디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지호의 글 속에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이 사람의 세계에서는 하나하나 소중하게 붙잡혀 있었다. 사소한 농담 한마디까지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둘 만큼.
그때였다.
달칵.
테라스로 이어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휘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너머로 휴대폰을 든 채 걸어오는 지호가 보였다. 그리고 몇 걸음 뒤, 지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오빠?”
휘웅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지호는 거의 날아가듯 달려와 휘웅의 손에 들린 대본을 낚아챘다.
“오, 오빠…! 오빠가 여기 왜… 아니, 그걸 왜 보고 있어요!”
구겨진 종이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지호는 대본을 품에 끌어안은 채, 도망칠 곳을 찾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순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휘웅은 한동안 말없이 지호를 바라봤다. 그러곤 살짝 구겨진 대본 모서리를 손끝으로 툭 건드리며 낮게 말했다.
“그거, 내 이야기잖아.”
“…!”
지호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목이 첫사랑이던데.”
가까워진 거리만큼 지호의 숨이 턱 막혔다. 휘웅이 피식 웃었다.
“난 내가 착각하는 줄 알았어.”
“…뭘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휘웅은 잠시 지호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너 좋아하는 줄.”
[이혼 합의서]눈앞의 글자가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지호는 손에 들린 종이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는데,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거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넘어져 있는 액자와 어지럽게 널린 사진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엄마 박은주가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엄마…….”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은주는 대답하지 못했다.지호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아래에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윤용석.지호의 아버지였다.“이게 뭐야? 엄마, 이게 왜 여기 있어?”은주는 입술만 몇 번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때였다.거실 한쪽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부르르. 부르르.은주가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향해 팔을 뻗었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지호가 먼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남편]지호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잠깐의 정적이 흘렀다.곧이어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차갑고,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은주 씨,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렸잖아요.”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빨리 서명해서 내일 변호사 편으로 보내요.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순간, 숨이 막혔다.지호는 말문이 막힌 채 휴대폰만 붙잡고 있었다.그 목소리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았다. 수십 년을 함께 산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마치 회사 서류 하나를 처리하는 것처럼 건조했다.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아빠?”짧은 침묵이 흘렀다.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카페를 나선 뒤에도, 두 사람은 좀처럼 헤어지지 못한 채 나란히 걸었다.휘웅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잠깐 망설이던 지호는 조심스럽게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휘웅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가 정신없이 다시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손끝부터 번져 오는 열기에 괜히 손에 힘을 줬다가, 어색해질까 봐 다시 슬그머니 힘을 뺐다.휘웅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앞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조금 굳은 어깨가 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방금 전 나눈 대화가 너무 선명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러다 휘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 좀 억울한데.”지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뭐가요?”휘웅은 피식 웃었다.“너는 혼자 엄청 애태운 것처럼 써 놨더라.”“회전목마 앞에서 네가 내 옆에 앉아 있었던 것도 기억나고.”지호의 귀가 다시 붉어졌다.“터미널에서 나 다섯 살 만들어 버린 것도 기억나고.”“그건 잊어주면 안 돼요?”“그건 평생 못 잊을 것 같은데.”지호가 민망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자, 휘웅이 작게 웃었다.“근데 진짜 웃겼어.”“뭐가요?”“대본 제목이 「첫사랑」이던데.”지호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혼자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을 모아 만든 이야기였다. 밤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몇 번이고 고쳐 쓰고, 지웠다가 다시 적었던 문장들.그런데 그걸 하필 휘웅이 읽어 버렸다. 그것도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걸 알아버린 채.휘웅이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근데 있잖아.”“……네.”“네 대본은 짝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어.”지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휘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쌍방향 로맨스였지.”순간, 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놀이공원에서 포카칩을 건네던 순간. 경주행 버스 안에서 어깨가 닿을까 괜히 신경 쓰이던 순간.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하늘의 히어로를 외치던 밤. 그리
“나만 너 좋아하는 줄.”휘웅의 마지막 말이 떨어진 뒤, 지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작 여덟 글자였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그동안 혼자 품어 온 감정을 모조리 뒤흔들었다.지호는 대본을 품에 안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으로도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런데 휘웅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자신만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말하다니.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떤 말을 돌려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은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휘웅은 그런 지호를 재촉하지 않았다.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대본을 넘기던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서 있었다.하지만 얼굴에 남은 미소는 어딘가 어색했다.지호는 그제야 알았다. 태연해 보이는 휘웅도 긴장하고 있다는 걸.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가자.”휘웅이 먼저 카페 출입문 쪽을 향했다. 지호는 품에 안은 대본을 가방에 넣어 끌어안고 그의 뒤를 따랐다.카페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저녁 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스쳤다.주말 저녁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웃으며 지나가는 연인들, 친구들과 장난을 치는 학생들, 길가에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그런데 지호에게는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져 보였다.옆에 강휘웅이 걷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호는 괜히 발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었다가 휘웅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조금 전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았다.'나만 너 좋아하는 줄.'그 문장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놀이공원에서 휘웅을 처음 봤던 날부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포카칩을 건네도. 버스에서 손을 놓지 말라고 해도. 다 먹으면 다시 만나야겠다고 말해도.그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휘웅이 원래 다정한 사람이어서, 자신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은 지호는 손에 쥔 포카칩 봉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직 뜯지도 않았는데, 봉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문득 뒷면에 붙어 있는 작게 접힌 냅킨 한 장을 발견했다.포장마차에서 봤던 그 얇은 종이 냅킨이었다.조심스럽게 떼어 낸 순간, 지호는 숨을 멈췄다.삐뚤빼뚤한 글씨였다.윤지호 ♥ 강휘웅지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말로는 절대 안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유치한 낙서를 몰래 그려 붙여 놓다니.'이걸 진짜 썼다고?'웃음이 먼저 났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지호는 메모를 서랍 안 깊숙한 곳에 조심스레 넣어 두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였다.내 비밀이 종이 위에서 발가벗겨졌다.꼭꼭 숨겨두었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열병 같은 감정들이 활자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리는 기분이었다.하필이면, 그 글을 그가 읽고 있었다.[축하합니다! 단편극본 공모전 당선!]대형 방송사에서 주최한 공모전의 당선 문자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지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고 문자를 다시 읽어 보았지만, 화면에 뜬 문구는 달라지지 않았다.밤새 노트북을 두드리며 완성한 대본의 제목은 심플했다.「첫사랑」그저 평범한 청춘 로맨스물이라고 포장했지만, 사실 그 글은 지호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휘웅을 짝사랑하며, 그와 있었던 일들을 몰래 기록해 둔 이야기였다.놀이공원에서 처음 만난 날. 터미널에서 다섯 살 어린이로 만들어 버렸던 순간.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히어로 흉내를 내던 밤. 그리고 통금 시간에 쫓기며 뛰어가던 골목길까지.지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 기억을 하나씩 문장으로 옮길 때마다, 마치 그날의 공기와 냄새와 목소리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몰입해서 썼고, 그래서 더 위험한 글이 되고 말았다.당선 소식을 들은 유진은 자기 일처럼 호들갑을 떨었다.[대박! 지호, 작가님 되셨네?][오늘 무조건 내가 쏜다.]유진의 성
포장마차를 나선 뒤, 휘웅은 끝내 삼킨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지호가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그가 성큼 옆으로 따라붙었다."같이 가."너무 당연하다는 투였다. 지호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버스 정류장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시간은 이미 밤 아홉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지호는 초조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봤다. 조금 전 헤어지려던 순간의 여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통금. 밤 열 시. 단 한 번도 어겨 본 적 없는 약속이었다. 늦는 순간, 아버지는 정말 문을 열어 주지 않을 사람이었다."아직도 열 시야?"옆에서 휘웅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지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네. 저 진짜 큰일 나요.""아버님 무섭네.""엄청요."휘웅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평한 얼굴이 괜히 얄미웠다. 지호는 괜히 휘웅을 흘겨봤다."오빠는 무서운 사람 없어요?"휘웅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있지.""누군데요?""우리 할머니."지호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진짜예요?""응. 우리 집 실세거든."장난스러운 표정 하나 없이 말하는 모습에 지호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때였다. 버스 한 대가 정류장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의 얼굴이 굳었다."와…."버스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잡이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고, 버스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지호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저걸 타요?"휘웅은 태연하게 버스를 올려다봤다."타야지.""숨도 못 쉴 것 같은데.""다음 버스 기다리면 열 시 넘겠는데?"그 말에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더 큰일이었다.결국 사람들 틈에 몸을 욱여넣듯 올라탄 순간, 지호는 곧바로 후회했다.뒤에서 누군가가 밀었고, 앞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떠밀려 왔다."죄송합니다."어깨와 팔이 쉴 새 없이 부딪쳤다. 겨우 손잡이
“지호야, 이쪽으로 와!”유진이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지호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시작은 그저 조별 과제 뒤풀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유진이 다른 과 동기들과 미리 짜 둔 과팅 자리였다. 좁은 룸 안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가득했고, 다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소개를 주고받고 있었다.“유진아, 나 이런 얘기 못 들었는데.”지호가 작게 속삭이자, 유진이 눈을 찡긋했다.“그냥 밥만 먹고 가면 돼. 재밌을 거야.”재밌을 리가.지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남학생이 뭔가 열심히 말을 걸어왔지만,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숨이 막혔다. 웃어야 할 타이밍에 웃고, 대답해야 할 타이밍에 대답했지만, 정작 머릿속은 텅 빈 것 같았다.'그냥, 집에 가고 싶다.'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지호는 결국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화장실 좀.”유진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뒤, 지호는 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화장실 대신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선 지호는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문이 절반쯤 닫히려던 순간이었다.“어.”누군가 손을 뻗어 문을 다시 열었다.지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강휘웅이었다.“오빠가 여긴 왜…….”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휘웅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동학을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이 닫히고, 좁은 공간에 둘만 남았다.휘웅은 대답 대신 지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짧게 물었다.“왜 혼자 나와.”“그냥… 답답해서요.”솔직한 대답이었다. 휘웅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음부터 과팅 같은 거 나가지 마.”“…네?”지호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휘웅은 이미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뒤였다.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장난인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