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포장마차를 나선 뒤, 휘웅은 끝내 삼킨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지호가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그가 성큼 옆으로 따라붙었다.
"같이 가."
너무 당연하다는 투였다. 지호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버스 정류장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시간은 이미 밤 아홉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호는 초조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봤다. 조금 전 헤어지려던 순간의 여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통금. 밤 열 시. 단 한 번도 어겨 본 적 없는 약속이었다. 늦는 순간, 아버지는 정말 문을 열어 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직도 열 시야?"
옆에서 휘웅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지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저 진짜 큰일 나요."
"아버님 무섭네."
"엄청요."
휘웅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평한 얼굴이 괜히 얄미웠다. 지호는 괜히 휘웅을 흘겨봤다.
"오빠는 무서운 사람 없어요?"
휘웅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있지."
"누군데요?"
"우리 할머니."
지호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예요?"
"응. 우리 집 실세거든."
장난스러운 표정 하나 없이 말하는 모습에 지호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였다. 버스 한 대가 정류장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의 얼굴이 굳었다.
"와…."
버스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잡이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고, 버스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걸 타요?"
휘웅은 태연하게 버스를 올려다봤다.
"타야지."
"숨도 못 쉴 것 같은데."
"다음 버스 기다리면 열 시 넘겠는데?"
그 말에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더 큰일이었다.
결국 사람들 틈에 몸을 욱여넣듯 올라탄 순간, 지호는 곧바로 후회했다.
뒤에서 누군가가 밀었고, 앞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떠밀려 왔다.
"죄송합니다."
어깨와 팔이 쉴 새 없이 부딪쳤다. 겨우 손잡이를 잡았지만,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휘청.
몸이 뒤쪽으로 쏠리는 순간이었다.
탁.
등 뒤로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놀란 지호가 숨을 삼켰다. 커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휘웅이었다.
그는 지호가 사람들 사이에 치이지 않도록 뒤를 막아 선 채,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휘웅의 체온으로 가득 찼다. 코끝으로 은은한 비누 향이 스며들었다. 등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체격에 지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그때였다. 버스가 커브를 돌며 크게 흔들렸다. 중심을 잃은 지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붙잡았다.
툭.
손끝에 잡힌 것은 손잡이가 아니었다. 휘웅의 팔이었다.
"…아."
지호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버스는 얄궂게도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결국 지호는 휘웅의 팔을 더 세게 붙잡고 말았다.
순간, 머리 위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손 놓지 마."
그 한마디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호는 숨을 삼킨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휘웅이 아무렇지 않은 듯 덧붙였다.
"사람 많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목소리였다.
버스가 멈춘 건 밤 9시 50분이었다.
"이번 정류장은 성북초교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홍익대 부속중고등학교 입구입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지호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휘웅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
황급히 손을 떼자, 휘웅이 고개를 살짝 숙여 지호를 내려다봤다.
"다 왔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호는 괜히 창밖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지호도 떠밀리듯 계단을 내려왔지만, 심장은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조금 전, 숨소리마저 닿을 만큼 가까웠던 그 거리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몇 분 남았어?"
옆에서 걷던 휘웅이 물었다.
지호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십 분이요."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편의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밤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원래라면, 지금쯤 집에 들어갈 생각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조금 달랐다. 조금만 더 걸었으면 좋겠고, 조금만 더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조금만 더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근데."
휘웅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네?"
"너 원래 과팅 같은 데 잘 나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래?"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휘웅은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지호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
"…뭐가요?"
휘웅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또 그 말이었다.
'그냥.' '신경 쓰여서.' '같이 먹을 사람 생겨서.' '손 놓지 마.'
강휘웅은 늘 그런 식이었다.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않으면서, 사람 마음만 뒤흔들었다.
어느새 집 앞 골목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호는 무심코 걸음을 늦췄다. 집까지는 이제 채 1분도 남지 않았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저 들어갈게요."
지호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휘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각보다 담백한 반응이었다. 괜히 서운해진 자신이 우스웠다.
지호가 뒤돌아 대문 쪽으로 걸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윤지호."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호가 돌아보자, 휘웅이 가방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무언가를 툭 건넸다.
당황한 지호가 얼떨결에 받아 든 것은 작은 과자 봉지였다.
포카칩.
놀이공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휘웅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바로 그 과자였다.
지호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이걸 왜…."
휘웅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보호자님 야식."
"오빠는 왜 맨날 포카칩만 먹어요?"
"맛있잖아."
"그건 맞는데…."
휘웅은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렸다.
"얼른 들어가."
"네?"
"이제 곧 열 시야."
지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9시 57분.
"헉!"
지호가 황급히 대문 쪽으로 뛰어가자, 뒤에서 휘웅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온 순간. 조금만 늦었어도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휴우…."
지호는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손에는 아직도 포카칩 봉지가 들려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지호는 가방도 벗지 못한 채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휘웅을 만난 순간들이 머릿속을 정신없이 스쳐 지나갔다.
놀이공원. 경주. 종이비행기. 과팅. 엘리베이터. 그리고 버스 안에서 들었던 그 한마디.
'손 놓지 마.'
지호는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부르르.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지호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포카칩 다 먹으면 연락해.]
문자를 읽은 지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몇 초 뒤,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 먹으면 또 만나야겠네.]
지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혼자 웃었다.
문득 손에 들린 포카칩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뜯지도 않은 채였다. 무심코 봉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지호는, 뒷면에 무언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작게 접힌 냅킨 한 장이었다. 아까 포장마차에서 봤던,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그 얇은 종이 냅킨.
지호의 손끝이 멈칫했다.
'이게 뭐지…….'
조심스럽게 냅킨을 떼어 낸 순간, 심장이 다시 세게 뛰기 시작했다. 급하게 눌러 쓴 듯한 손글씨가 얇은 종이 위로 살짝 비쳐 보였다.
왠지 오늘 밤은, 정말로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치원 정문 앞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어느덧 다섯 해가 흘러 있었다.색색의 풍선과 현수막이 걸린 마당에는, 새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과 그 손을 붙잡은 부모들로 가득했다.봄기운이 완연한 아침, 하늘은 유난히 맑고 청명했다.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부모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지호도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그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엄마, 저기 봐! 풍선이야!”지민이가 눈을 반짝이며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다섯 살이 된 지민이는, 어느새 제법 또렷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서툴렀던 발음도, 이제는 제법 야무졌다.“그러네. 이따가 선생님이 나눠 주실 거야.”지호가 웃으며 지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줄지어 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바로 지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큰 키. 동그랗고 맑은 눈. 오똑하게 솟은 콧날.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까지도.누가 봐도, 아빠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처음 지민이를 품에 안았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지나가던 다른 학부모들도, 지민이를 보며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많이 컸네.”옆에서 함께 걷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목소리에는 뿌듯함과 약간의 서운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이제 곧 아이 곁을 떠나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쉬운 눈치였다.그런 그의 모습이, 지호는 새삼 낯설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그러게. 벌써 다섯 살이라니.”지호도 감회에 젖은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처음 이 아이를 품에 안았던 순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밤새 뒤척이던 신생아 시절, 열이 올라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들,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던 순간,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 주던 그날까지.그 하나하나가 지호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그 조그맣던 아기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유치원에 입학하고 있었다.“선생님이랑 인사하고
시간은 다시 한 계절을 지나 흘러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까지, 두 사람에게는 나름의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업실 책상 위, 휴대폰이 울린 건 오후 무렵이었다. 한창 원고 마감에 몰두하던 지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낯선 번호였다. 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작가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전화를 건 사람은 20살 지호가 응모했던 단편 공모전 관계자였다. 지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연락이 온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죄송한데, 어떤 일로…….”“그때 당선작이었던 「첫사랑」 있잖아요. 그 대본이, 이번에 영화로 제작하기로 확정됐어요.”지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정말요? 그게, 진짜예요?”“네, 진짜예요. 제작사 쪽에서 원작자이신 작가님께 판권 계약 관련해서 곧 연락드릴 거예요. 축하드려요.”몇 마디 더 인사를 주고받은 뒤, 통화는 끝이 났다. 전화를 끊고도, 지호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사실 오늘 오전에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며칠째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지호는,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왔다.진료실에 들어서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의사가 건넨 소식에, 지호는 한참 동안 실감하지 못한 채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작은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나오는 길, 지호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떠 있었다.이 소식을 어떻게, 언제 전해야 할지, 지호는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저녁에 조용히 이야기할지, 아니면 깜짝 놀래켜 줄지, 마음이 자꾸만 오락가락했다.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첫사랑」 소식이 겹쳐서 찾아온 것이었다.하루에 이렇게 큰 소식이 두 개나 겹치다니, 지호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
오후 일정 사이, 잠시 짬이 났다.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유리 문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 전, 지호가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건넸던 물건이었다.“이거 그냥 예뻐서 산 거야. 딱히 의미 없어.”그때 지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문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도, 지호다운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골라 건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휴대폰을 들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문득,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렇게 답장 하나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마저도,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이 났을 법한 순간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 기다림조차 여유롭게 느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음... 아무거나? 근데 오늘 나 원고 잘 풀려서 기분 좋아!]이어서 이모티콘 몇 개가 따라왔다. 그는 그 짧은 메시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면 속 몇 글자만으로도, 오늘 그녀가 얼마나 신나 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잘됐네.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좋아!]짧은 대답 하나에 붙은 느낌표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년째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런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결혼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신혼 초의 어색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는 먼저 눈을 떴다.창밖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불에 남은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말해 주었다.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주방 불빛 아래 어렴풋이 비쳤다.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토스트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매일 아침 이렇게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손길이, 언제부터인가 지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접시 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유독 예쁘게 익어 있었다.“일어났어?”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몇 년째 듣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아침마다 이렇게 듣는 게 여전히 좋았다.“오늘도 일찍 나가야 해?”“응,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겉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지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사소한 아침 풍경이 여전히 낯설고도 감사하게 느껴졌다.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지호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적처럼 느껴지곤 했다.“다녀올게.”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가 말했다.“응, 조심히 다녀와.”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나갔다.문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여, 지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손끝이 지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그 짧은 손길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힘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매일 반복되는 이 인사가, 지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었다.현관문이
맑게 갠 어느 토요일, 웨딩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지호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새하얀 드레스, 정성스럽게 올린 머리,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그려진 눈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지호야, 너 진짜 예쁘다.”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화사한 색의 하객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얼굴에도, 이미 감격이 가득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동학도 헛기침을 하며 눈시울을 훔쳤다.“야, 너 우는 거야?”“아니거든?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동학이 애써 딴청을 피우자, 유진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함께 걸어온 오랜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떨려?”유진이 지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응, 조금.”지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왔던 오늘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그래도 좋아 보여. 진짜 행복해 보인다, 너.”동학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호는 그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을 지켜 준 이 친구들이,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웨딩홀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하게 밝혀진 홀 안으로 하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 하객석 맨 뒤쪽 구석 자리로 시선이 스쳤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다른 하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윤용석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먼발치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고개를
노을이 붉게 번지는 해변, 휘웅과 지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 자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지호야!”휘웅의 부름에 지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휘웅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스쳐 있었다. 지호는 이 순간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왜요.”담담한 지호의 목소리에, 휘웅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몇 주간, 아니 몇 년간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궁금해서.”한참 만에야, 휘웅이 겨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만 남았다.“우리, 이대로 괜찮은 건지.”지호는 잠시 말없이 휘웅을 바라봤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참아 왔던 말을 이제야 꺼낼 시간이라는 걸, 지호는 알고 있었다.“나, 대표님 덕분에 지난 십 년 동안 많이 성숙해졌어요.”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십 년을 놓아주고 싶어요. 스무 살의 강휘웅이랑 윤지호는요.”휘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대신…….”지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장을 위해, 지호는 며칠 밤을 뒤척였다.“작가 윤지호랑, 대표 강휘웅으로. 이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휘웅은 그 말의 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청하는 말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호의 눈빛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진지해 보였다.“그 말은…….”휘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