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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는 너의 히어로

Autor: 지호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7-21 16:01:18

터미널에서의 아찔했던 소동이 지나고, 마침내 네 사람은 경주행 버스에 올랐다.

유진과 동학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지호와 휘웅은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창가 쪽에 앉은 지호는 애써 태연한 척 창밖만 바라봤지만, 시선은 자꾸만 옆자리로 향했다. 연청바지에 보라색 니트. 놀이공원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는 모습마저 이상하게 그림 같았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어깨가 스쳤다. 그럴 때마다 지호는 자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창밖으로 눈을 돌려도, 차창에 희미하게 비친 옆모습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조별 과제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대강 마쳤을 무렵,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늦봄의 바람이 불어오자 가로수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흔들렸고, 네 사람은 터미널 근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유진과 동학은 어느새 앞서 걸으며 시시한 장난을 주고받고 있었다.

“오빠,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방금 밥 먹었잖아.”

“그래도 먹고 싶단 말이야.”

투덜거리던 동학은 결국 길 건너 편의점으로 뛰어갔고, 유진은 그런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지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실 조금 신기했다.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고, 또 그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그걸 들어주는 관계. 지호에게는 아직 낯선 풍경이었다.

“부러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휘웅이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 아니거든요.”

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휘웅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표정이 딱 그런데.”

“무슨 표정인데요?”

잠시 생각하던 휘웅이 느릿하게 말했다.

“나도 저런 거 해 보고 싶다, 하는 표정?”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호는 괜히 발끝만 내려다봤다.

다행히 휘웅은 더 놀리지 않았다. 대신 아무 말 없이 자판기 앞으로 걸어가더니 캔커피 하나와 복숭아 음료 하나를 뽑아 들고 돌아왔다.

“이거.”

지호는 얼떨결에 음료를 받아 들었다.

“제가 복숭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휘웅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몰랐는데.”

“……네?”

“왠지 좋아할 것 같았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지호는 손에 쥔 차가운 캔과 달리 얼굴이 훨씬 더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던진 말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잠시 후, 유진과 동학이 기념품 가게에 들르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지호와 휘웅은 터미널 근처의 작은 카페에 마주 앉았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공간. 테이블 위에는 커피 두 잔과 먹다 남은 과자 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호는 컵 가장자리만 만지작거리며 맞은편에 앉은 휘웅을 힐끔거렸다. 잘생겼다.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볼수록 느낌이 달랐다. 무심한 표정, 느긋한 말투. 그런데 가끔씩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가죽 시계를 만지작거리던 휘웅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성냥갑을 집어 들었다. 성냥 몇 개를 가지런히 세워 놓더니,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꺼낸 껌 종이를 손끝으로 접기 시작했다.

큰 손에 어울리지 않게 손놀림이 꽤 섬세했다. 지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후, 휘웅의 손끝에서 작은 종이비행기 하나가 완성됐다. 그는 성냥개비 사이를 통과하듯 종이비행기를 날렸고, 비행기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지호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휘웅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말 못 하는 괴물에게 납치된 지호를 구하러, 내가 왔다.”

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휘웅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진지한 척 덧붙였다.

“이 몸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말은 그럴듯했지만, 정작 표정은 하나도 진지하지 않았다.

지호는 참다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그게.”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잖아.”

휘웅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지호는 웃음을 참으며 눈앞의 종이비행기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버스에서 느꼈던 두근거림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따뜻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었어?'

잘생긴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덩치는 산만 한데, 하는 행동은 어딘가 소년 같았다.

지호는 아직 이 감정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이처럼 웃고 있는 휘웅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지호가 종이비행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휘웅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보라색 니트 너머로 비누 향이 스쳤다.

지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휘웅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끝이 지호의 입가를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뺨에 닿은 온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과자가 묻었네.”

휘웅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끝의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지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휘웅은 그런 지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보호자님.”

“…네?”

“생각보다 허술하네.”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에 지호의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휘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반면 지호는 도무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휘웅의 손이 닿았던 뺨이 아직도 뜨거웠다.

손끝으로 슬쩍 그 자리를 쓸어 보았다.

“아직도 얼굴 빨간데?”

“안 빨갛거든요.”

“그럼 왜 자꾸 만져 봐?”

그 말에 지호는 그만 손을 멈췄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윤지호.”

낮게 불리는 이름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 방금 되게 재미있는 표정이었어.”

“……무슨 표정요.”

“딱 들켰다는 표정.”

지호는 그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휘웅은 더 놀리지 않겠다는 듯 잠시 조용해졌다. 그 침묵마저 이상하게 편안했다.

카페 안에는 여전히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저녁빛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멀리서 유진과 동학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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