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놀이공원에서의 첫 만남이 지나고 며칠 뒤였다.
윤지호와 배유진은 조별 과제 때문에 경주로 내려가게 됐다. 원래는 여자 둘이서 조용히 다녀올 예정이었지만, 장거리 이동이 심심했던 유진이 슬쩍 남자친구 최동학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지호에게 미안했는지, 동학의 친구인 강휘웅까지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다.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지호는 괜히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딱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이상했다. 바이킹에서 자신을 보며 웃던 얼굴, 회전목마 앞에서 건넸던 말, 그리고 사진 속에서 혼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저 친구의 친구일 뿐인데. 아직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어색한 사이인데. 그런데도 경주에 간다는 말 한마디에 며칠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토요일 아침, 지호는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눈을 떴다. 옷장을 열었다 닫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연한 색 니트와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너무 꾸민 것 같나?'
아니다 싶어 귀걸이를 뺐다가, 다시 끼기를 반복했다. 결국 집을 나서면서도 마음은 조금 불안했다. 괜히 기대하는 것 같아서. 괜히 혼자 들떠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순간, 그런 생각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대합실 의자 끝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강휘웅이었다.
핏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연청바지에 선명한 보라색 니트. 누구나 한 번쯤 쳐다보게 될 만큼 눈에 띄는 색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휘웅은 그 옷을 너무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길게 뻗은 다리.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지호는 들고 있던 가방 끈을 괜히 더 세게 움켜쥐었다.
'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잘생겼다. 놀이공원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더.
그 순간, 휘웅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왔네.”
낮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고작 두 글자인데, 지호는 괜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옆에서 유진이 큭큭 웃었다.
“둘이 왜 이렇게 어색해?”
“안 어색하거든?”
지호가 황급히 대답했지만, 정작 본인 목소리부터 평소보다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잠시 후, 동학과 유진은 버스표를 끊겠다며 매표소 쪽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둘만 남겨졌다. 넓은 대합실 한가운데, 바로 옆자리. 슬쩍 고개만 돌려도 휘웅의 어깨가 보였다.
지호는 괜히 휴대폰 화면만 만지작거렸다.
'저 어깨에 기대서 경주까지 가면 좋겠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미쳤나 봐.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사람인데.
“버스에서 먹을 간식 좀 사 올게.”
휘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네.”
지호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는 늘 그렇듯 느긋한 걸음으로 편의점 쪽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런데 십 분이 지나고, 십오 분이 지나도 휘웅은 돌아오지 않았다. 매표소에서 돌아온 유진과 동학도 고개를 갸웃했다.
“휘웅이 오빠 어디 갔어?”
“편의점 갔는데 아직 안 와.”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편의점 안 어디에도 보라색 니트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잠깐 걱정이 들었지만, 이내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다.
'설마…… 길 잃은 거 아니야?'
키가 거의 백구십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 터미널 안을 헤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유진의 물음에 그녀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휘웅이 오빠 찾으러.”
안내방송실 앞에 도착한 순간, 지호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멈춰 섰다. 멀쩡한 성인 남자를 찾겠다고 방송을 부탁하면 분명 이상하게 볼 게 뻔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했다.
'그래. 다섯 살로 만들자.'
잠시 후, 차분한 안내 방송이 터미널 안에 울려 퍼졌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현재 터미널 내에서 길을 잃은 어린이를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강휘웅. 나이는 다섯 살입니다.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 연청바지와 보라색 니트를 입고 있습니다. 손에는 과자 봉지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목격하신 분께서는 안내방송실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쯤 되면 거의 공개 처형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문을 나선 지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어떡해…….”
강휘웅이 이 방송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났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지호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방송실 문을 바라보며 벽에 기대 선 한 남자. 연청바지, 보라색 니트. 양손에는 음료와 과자 봉지를 들고 있는 강휘웅이었다.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휘웅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무심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지호는 순간, 처음 보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았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휘웅은 손에 들고 있던 차가운 캔 음료를 그녀의 뺨에 가볍게 갖다 댔다.
“다섯 살 강휘웅 어린이, 여기 있는데.”
순간 지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놀리려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완전히 들켜 버렸다.
“아, 아니…….”
창피함에 도망치려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휘웅이 그녀의 가방끈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바로 눈앞으로 보라색 니트가 들어왔다. 고개만 들면 그의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
지호는 숨을 삼켰다.
“어디 가, 보호자님~.”
장난기 섞인 목소리. 그는 허리를 살짝 숙여 지호와 눈높이를 맞췄다. 짙은 눈동자 속에 당황한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낯설었다.
휘웅은 그녀의 귓가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다섯 살 어린이는 혼자 버스 못 타는데.”
“…….”
“경주 내려갈 때까지, 내 손 꼭 잡고 책임져 줘야지?”
그 말과 함께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긴 손가락이 지호의 손끝을 살며시 감쌌다. 뜨거운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지호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그 순간, 대합실 스피커에서 버스 출발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지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만이 또렷하게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유치원 정문 앞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어느덧 다섯 해가 흘러 있었다.색색의 풍선과 현수막이 걸린 마당에는, 새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과 그 손을 붙잡은 부모들로 가득했다.봄기운이 완연한 아침, 하늘은 유난히 맑고 청명했다.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부모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지호도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그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엄마, 저기 봐! 풍선이야!”지민이가 눈을 반짝이며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다섯 살이 된 지민이는, 어느새 제법 또렷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서툴렀던 발음도, 이제는 제법 야무졌다.“그러네. 이따가 선생님이 나눠 주실 거야.”지호가 웃으며 지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줄지어 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바로 지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큰 키. 동그랗고 맑은 눈. 오똑하게 솟은 콧날.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까지도.누가 봐도, 아빠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처음 지민이를 품에 안았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지나가던 다른 학부모들도, 지민이를 보며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많이 컸네.”옆에서 함께 걷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목소리에는 뿌듯함과 약간의 서운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이제 곧 아이 곁을 떠나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쉬운 눈치였다.그런 그의 모습이, 지호는 새삼 낯설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그러게. 벌써 다섯 살이라니.”지호도 감회에 젖은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처음 이 아이를 품에 안았던 순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밤새 뒤척이던 신생아 시절, 열이 올라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들,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던 순간,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 주던 그날까지.그 하나하나가 지호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그 조그맣던 아기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유치원에 입학하고 있었다.“선생님이랑 인사하고
시간은 다시 한 계절을 지나 흘러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까지, 두 사람에게는 나름의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업실 책상 위, 휴대폰이 울린 건 오후 무렵이었다. 한창 원고 마감에 몰두하던 지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낯선 번호였다. 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작가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전화를 건 사람은 20살 지호가 응모했던 단편 공모전 관계자였다. 지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연락이 온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죄송한데, 어떤 일로…….”“그때 당선작이었던 「첫사랑」 있잖아요. 그 대본이, 이번에 영화로 제작하기로 확정됐어요.”지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정말요? 그게, 진짜예요?”“네, 진짜예요. 제작사 쪽에서 원작자이신 작가님께 판권 계약 관련해서 곧 연락드릴 거예요. 축하드려요.”몇 마디 더 인사를 주고받은 뒤, 통화는 끝이 났다. 전화를 끊고도, 지호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사실 오늘 오전에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며칠째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지호는,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왔다.진료실에 들어서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의사가 건넨 소식에, 지호는 한참 동안 실감하지 못한 채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작은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나오는 길, 지호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떠 있었다.이 소식을 어떻게, 언제 전해야 할지, 지호는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저녁에 조용히 이야기할지, 아니면 깜짝 놀래켜 줄지, 마음이 자꾸만 오락가락했다.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첫사랑」 소식이 겹쳐서 찾아온 것이었다.하루에 이렇게 큰 소식이 두 개나 겹치다니, 지호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
오후 일정 사이, 잠시 짬이 났다.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유리 문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 전, 지호가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건넸던 물건이었다.“이거 그냥 예뻐서 산 거야. 딱히 의미 없어.”그때 지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문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도, 지호다운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골라 건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휴대폰을 들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문득,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렇게 답장 하나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마저도,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이 났을 법한 순간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 기다림조차 여유롭게 느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음... 아무거나? 근데 오늘 나 원고 잘 풀려서 기분 좋아!]이어서 이모티콘 몇 개가 따라왔다. 그는 그 짧은 메시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면 속 몇 글자만으로도, 오늘 그녀가 얼마나 신나 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잘됐네.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좋아!]짧은 대답 하나에 붙은 느낌표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년째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런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결혼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신혼 초의 어색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는 먼저 눈을 떴다.창밖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불에 남은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말해 주었다.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주방 불빛 아래 어렴풋이 비쳤다.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토스트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매일 아침 이렇게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손길이, 언제부터인가 지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접시 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유독 예쁘게 익어 있었다.“일어났어?”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몇 년째 듣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아침마다 이렇게 듣는 게 여전히 좋았다.“오늘도 일찍 나가야 해?”“응,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겉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지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사소한 아침 풍경이 여전히 낯설고도 감사하게 느껴졌다.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지호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적처럼 느껴지곤 했다.“다녀올게.”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가 말했다.“응, 조심히 다녀와.”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나갔다.문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여, 지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손끝이 지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그 짧은 손길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힘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매일 반복되는 이 인사가, 지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었다.현관문이
맑게 갠 어느 토요일, 웨딩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지호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새하얀 드레스, 정성스럽게 올린 머리,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그려진 눈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지호야, 너 진짜 예쁘다.”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화사한 색의 하객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얼굴에도, 이미 감격이 가득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동학도 헛기침을 하며 눈시울을 훔쳤다.“야, 너 우는 거야?”“아니거든?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동학이 애써 딴청을 피우자, 유진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함께 걸어온 오랜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떨려?”유진이 지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응, 조금.”지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왔던 오늘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그래도 좋아 보여. 진짜 행복해 보인다, 너.”동학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호는 그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을 지켜 준 이 친구들이,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웨딩홀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하게 밝혀진 홀 안으로 하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 하객석 맨 뒤쪽 구석 자리로 시선이 스쳤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다른 하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윤용석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먼발치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고개를
노을이 붉게 번지는 해변, 휘웅과 지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 자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지호야!”휘웅의 부름에 지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휘웅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스쳐 있었다. 지호는 이 순간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왜요.”담담한 지호의 목소리에, 휘웅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몇 주간, 아니 몇 년간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궁금해서.”한참 만에야, 휘웅이 겨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만 남았다.“우리, 이대로 괜찮은 건지.”지호는 잠시 말없이 휘웅을 바라봤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참아 왔던 말을 이제야 꺼낼 시간이라는 걸, 지호는 알고 있었다.“나, 대표님 덕분에 지난 십 년 동안 많이 성숙해졌어요.”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십 년을 놓아주고 싶어요. 스무 살의 강휘웅이랑 윤지호는요.”휘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대신…….”지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장을 위해, 지호는 며칠 밤을 뒤척였다.“작가 윤지호랑, 대표 강휘웅으로. 이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휘웅은 그 말의 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청하는 말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호의 눈빛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진지해 보였다.“그 말은…….”휘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