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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속절없이 흩날리던 4월이었다.
학생식당 구석 자리, 배유진이 국그릇을 밀어놓고 몸을 바짝 들이밀었다. 눈빛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지호야, 나 남자친구 생겼어.”
윤지호는 국에 말아 넣은 밥을 천천히 떠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같은 과 신입생이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말을 놓고 지낼 만큼, 사람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낯가림이 심한 지호와는 정반대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죽이 잘 맞았다.
“축하해.”
지호가 짧게 답했다. 하지만 유진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데 있잖아, 그 오빠 친구가 아직 여자친구가 없대.”
유진의 눈이 반짝였다.
“동학 오빠 말로는 진짜 잘생겼다던데? 학교에서 인기 엄청 많다고.”
평범한 외모에, 평범하게 살아온 스무 해였다. 지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국물을 삼켰다. 그런데도 ‘잘생겼다’는 세 글자가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유진이 이야기한 남자의 이름은 강휘웅. 그때의 지호에게는 그저 처음 듣는 타인의 이름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놀이공원 가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가.”
너무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지호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스무 살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본 자신이 그런 자리에 낄 자격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됐어.”
“왜?”
“괜히 나만 어색하잖아.”
유진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윤지호. 너 대학 와서 계속 이러고 살 거야? 예쁜 옷도 좀 입고, 연애도 좀 하고 그래야지.”
지호는 대답 대신 물컵을 들었다. 연애라는 단어는 늘 자신과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예쁜 친구들 곁에는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다가왔고, 지호는 늘 그 옆에서 축하만 해주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잘생겼다는 말 때문이었다.
강휘웅. 유진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 부른 그 이름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토요일 오후를 앞두고, 지호는 옷장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입었다 벗기를 세 번쯤 반복한 끝에 결국 무난한 흰 셔츠와 청바지를 골랐다. 거울 속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 눈에 띄는 몸매도 아니었다.
'괜히 기대하지 말자. 잘생긴 남자는 원래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지호는 지하철을 갈아타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의 놀이공원 정문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교복 입은 학생들, 가족 단위 방문객들, 사진을 찍으며 웃는 커플들 사이로 유진과 동학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어, 휘웅이 왔다!”
동학이 정문 쪽을 가리켰다. 지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트라이프 셔츠에 블랙 팬츠 차림의 남자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포카칩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지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키가 컸다. 멀리서 봐도 단번에 눈에 들어올 만큼 훤칠한 체격이었다. 어깨는 넓었고,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은 단단해 보였다. 짙은 눈썹 아래 길게 내려앉은 눈매는 차분했고, 콧대는 반듯했다. 웃고 있지 않은데도 어딘가 느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화려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이라기보다는, 오래 바라볼수록 더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얼굴이었다.
'유진이가 왜 며칠 내내 이 얘기만 했는지 알겠다.'
“휘웅아, 얘가 윤지호.”
동학의 소개에 휘웅이 지호를 한 번 바라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낮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선 뒤, 유진과 동학은 신난 아이들처럼 앞장서 걸었다. 자연스럽게 뒤에는 지호와 휘웅만 남았다. 어색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둘 사이엔 포카칩 씹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오도독. 오도독.
지호는 괜히 발끝만 내려다봤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냈다.
“포카칩 좋아하세요?”
휘웅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지호를 바라보던 그가 말없이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응, 많이.”
지호는 얼떨결에 과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휘웅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며 짧게 덧붙였다.
“다행이다.”
“네?”
“같이 먹을 사람 생겨서.”
툭 던진 한마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걸까. 아니면 그냥 별뜻 없는 말일까.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유진이 멀리서 소리쳤다.
“저거 타자!”
고개를 들자 거대한 바이킹이 눈앞에 들어왔다. 지호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 저런 거 진짜 못 타.”
유진이 귓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과학적으로 말이야, 사람이 심장이 뛰면 설렘으로 착각한대. 그러니까 같이 타.”
“나는 안 탄다고.”
하지만 유진과 동학은 이미 양쪽에서 지호를 끌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휘웅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전바가 내려왔다. 바이킹이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졌다.
“꺄악!”
지호는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겨우 놀이기구에서 내려왔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휘웅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선명해서 지호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진 말대로라면 지금 뛰는 심장은 놀이기구 때문이어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눈앞의 남자 때문인 것 같았다.
해가 기울 무렵, 네 사람은 회전목마 앞에 멈춰 섰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휘웅이 회전목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릴 때 좋아했었어.”
“회전목마를요?”
“응. 안 무섭잖아.”
지호는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생각보다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질녘,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노을빛이 휘웅의 옆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지호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잘생겼다는 생각보다 이상하게 편안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윤지호.”
휘웅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이름 예쁘네.”
순간, 지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남자 이름 같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봤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지호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꼭 쥐었다.
“고마워요.”
휘웅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그날 밤, 지호는 침대에 엎드려 일기장을 펼쳤다. 적고 싶은 건 많았다. 포카칩. 바이킹. 회전목마. 그리고 노을 아래에서 들었던 그 한마디까지.
하지만 결국 펜 끝에서 나온 건 '강휘웅' 세 글자뿐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유진이었다.
[어땠어?]
지호는 한참을 망설이다 답장을 보냈다.
[큰일 났어.]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ㅋㅋㅋㅋ 내가 뭐랬어]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심장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스무 살, 윤지호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
문득 가방 속에 넣어둔 즉석사진이 떠올랐다. 놀이공원에서 네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별생각 없이 사진을 꺼내 든 순간, 지호의 숨이 멎었다.
사진 속 휘웅은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린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지호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다시 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침대 위에 던져 둔 휴대폰이 다시 한 번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잘 들어갔지?]
오후 일정 사이, 잠시 짬이 났다.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유리 문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 전, 지호가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건넸던 물건이었다.“이거 그냥 예뻐서 산 거야. 딱히 의미 없어.”그때 지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문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도, 지호다운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골라 건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휴대폰을 들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문득,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렇게 답장 하나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마저도,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이 났을 법한 순간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 기다림조차 여유롭게 느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음... 아무거나? 근데 오늘 나 원고 잘 풀려서 기분 좋아!]이어서 이모티콘 몇 개가 따라왔다. 그는 그 짧은 메시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면 속 몇 글자만으로도, 오늘 그녀가 얼마나 신나 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잘됐네.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좋아!]짧은 대답 하나에 붙은 느낌표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년째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런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결혼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신혼 초의 어색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는 먼저 눈을 떴다.창밖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불에 남은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말해 주었다.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주방 불빛 아래 어렴풋이 비쳤다.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토스트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매일 아침 이렇게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손길이, 언제부터인가 지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접시 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유독 예쁘게 익어 있었다.“일어났어?”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몇 년째 듣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아침마다 이렇게 듣는 게 여전히 좋았다.“오늘도 일찍 나가야 해?”“응,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겉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지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사소한 아침 풍경이 여전히 낯설고도 감사하게 느껴졌다.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지호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적처럼 느껴지곤 했다.“다녀올게.”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가 말했다.“응, 조심히 다녀와.”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나갔다.문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여, 지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손끝이 지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그 짧은 손길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힘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매일 반복되는 이 인사가, 지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었다.현관문이
맑게 갠 어느 토요일, 웨딩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지호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새하얀 드레스, 정성스럽게 올린 머리,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그려진 눈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지호야, 너 진짜 예쁘다.”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화사한 색의 하객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얼굴에도, 이미 감격이 가득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동학도 헛기침을 하며 눈시울을 훔쳤다.“야, 너 우는 거야?”“아니거든?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동학이 애써 딴청을 피우자, 유진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함께 걸어온 오랜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떨려?”유진이 지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응, 조금.”지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왔던 오늘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그래도 좋아 보여. 진짜 행복해 보인다, 너.”동학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호는 그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을 지켜 준 이 친구들이,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웨딩홀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하게 밝혀진 홀 안으로 하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 하객석 맨 뒤쪽 구석 자리로 시선이 스쳤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다른 하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윤용석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먼발치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고개를
노을이 붉게 번지는 해변, 휘웅과 지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 자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지호야!”휘웅의 부름에 지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휘웅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스쳐 있었다. 지호는 이 순간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왜요.”담담한 지호의 목소리에, 휘웅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몇 주간, 아니 몇 년간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궁금해서.”한참 만에야, 휘웅이 겨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만 남았다.“우리, 이대로 괜찮은 건지.”지호는 잠시 말없이 휘웅을 바라봤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참아 왔던 말을 이제야 꺼낼 시간이라는 걸, 지호는 알고 있었다.“나, 대표님 덕분에 지난 십 년 동안 많이 성숙해졌어요.”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십 년을 놓아주고 싶어요. 스무 살의 강휘웅이랑 윤지호는요.”휘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대신…….”지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장을 위해, 지호는 며칠 밤을 뒤척였다.“작가 윤지호랑, 대표 강휘웅으로. 이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휘웅은 그 말의 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청하는 말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호의 눈빛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진지해 보였다.“그 말은…….”휘웅이
휴가 둘째 날, 다 함께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물놀이를 하거나 파라솔 아래 누워 여유를 즐겼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낯설던 리조트 풍경이, 하루 만에 벌써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오후 늦게, 지호는 잠시 바람을 쐬러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뜨거웠던 해가 조금씩 기울며, 바닷바람도 한결 선선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지호는 오랜만에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 지호를 발견한 진섭이 자연스럽게 옆에 따라붙었다.“같이 걸어도 돼요?”“네, 좋아요.”지호가 웃으며 자리를 내주듯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진섭이 그 옆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췄다.두 사람은 나란히 모래사장을 걸었다. 파도가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붉은 노을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여기 오니까, 예전에 우리 같이 갔던 우유니가 생각나요.”진섭의 눈빛이 잠시 아련해졌다. 그날의 기억은 그에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하늘 아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때가,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인연이었다.“저도 가끔 생각나요. 그때 그 새하얀 소금사막.”“그때는 정말, 평생 못 잊을 것 같았거든요. 지금도 그래요. 꼭 다시 한번 가 볼 거예요.”지호가 아득한 눈빛으로 수평선을 바라봤다.“지금이라도 가시게요?”진섭이 웃으며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목소리에는 옅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사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고 싶어요.”지호가 웃으며 답했다.“그때는 마음이 복잡해서 그 풍경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완전히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진섭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지호가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오래도록 곱
〈가면의 집〉의 여파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종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관련 화제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가장 극적인 변화를 맞은 건 송경숙이었다.한동안 이렇다 할 작품이 없어 침체기를 겪던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보여 준 노련한 연기로 완전히 재평가받았다.각종 시상식에서 러브콜이 이어졌고, 인터뷰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하는 날이 이어졌다.후배들 사이에서는 "역시 연기는 관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놀랍게도 종영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송경숙은 벌써 차기작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진섭에게도 변화는 마찬가지였다.각종 브랜드의 CF 제안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영화 시나리오까지 몇 편이나 검토 중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무명에 가까웠던 배우가, 이제는 어디를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다.매니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제안서를 들고 진섭을 찾아왔다.정작 본인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직 얼떨떨한 눈치였다.지호에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여러 제작사에서 차기작 논의를 위한 미팅 요청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 오는 전화, 쌓여 가는 제안서들. 개중에는 꽤나 매력적인 조건을 내건 곳도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놓칠세라 서둘러 일정을 잡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마음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조금만, 정말 조금만 쉬고 싶다.'몇 달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원고와 씨름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던 수정 작업, 촬영장을 오가며 쌓인 피로, 방영 내내 마음을 졸이던 나날들.몸도 마음도 소진될 대로 소진된 상태였다.지호는 당장 다음 작품에 뛰어들기보다,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휴식을 허락하기로 했다.그런 지호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건 그즈음이었다.제작사에서 주요 배우와 작가진을 위한 포상휴가를 준비했다는 연락이었다.행선지는 동남아의 한 휴양지.촬영 내내 고생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