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지금 그녀 옆에는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있거든. 사진을 본 적 있는데, 행복해 보였어. 그거면 돼. 나는 그저 이 실수를 잊지 않고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되는 거야.”‘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 음성 안내가 살짝 멈춘 듯했다. 마치 민여진을 들으라는 듯이.민여진은 귀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나에게 존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고, 뭐가 제일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줬어. 아마 이건 하늘이 준 시험이 아니었을까.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가장 좋은 모습.’지금의 임재윤은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 민여진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재윤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물 있어?”“있어.”민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물을 반 정도 채워 임재윤에게 건넸다.“여기.”하지만 임재윤은 컵을 받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진아, 내가 너를 그녀의 대체품으로 생각해서 이러는 건 아닌지, 충분히 내 마음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처음 극장에서 널 만났을 땐 네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이 신경 쓰이긴 했어. 하지만 진짜 내 마음을 끌어당긴 건 너의 온화한 모습과 성격이었어. 그녀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될 만큼 먼 과거라고. 나는 널 그녀의 그림자로 보지 않아. 진심으로 너를 좋아해.”그의 말은 이미 준비된 듯 타자의 간격 없이 쭉 이어졌다.민여진은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육감만으로도 그의 눈동자 속 뜨거운 열망과 희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임재윤의 손은 점점 달아올랐고, 화끈한 열기에 민여진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솔직히 민여진은 임재윤의 마음이 싫지 않았다. 다만...“재윤아, 너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나도 너한테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게 있어.”그녀는 깊게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예요.”의사의 축하에도 민여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검사가 잘 못 된 건 아닌가요..? 임신일 리가 없는데... 한 번만 다시 검사해주세요.”“혹시 한 달 전에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있긴 한데...”“피임조치를 했다거나 약을 드신 적은 있으세요?”비가 오던 날, 박진성과 보냈던 뜨거운 밤을 떠올리던 민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러자 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검사 다시 할 필요도 없잖아요. 관계도 하고 약도 안 먹었으면 원래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가 잘못됐을 리는 없어요.”의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단서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임신 아니라고 적어주세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민여진 씨, 여긴 합법적인 병원입니다. 환자들의 진단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건 불법이에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세요.”“다음 환자분!”미간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는 의사에 민여진은 진단서를 손에 꼭 쥔 채 비틀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소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민여진은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저를 받아들인 것도 박진성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건데 아이까지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지우라고 할 게 뻔했기에 민여진은 이 진단서를 들고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민여진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박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박진성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내려꽂혔다.“검사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와.”박진성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민여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서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 3층 금지구역에서 내려오는 박진성을 보게 되었다.실크 잠옷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탓에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민
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선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전화를 할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때는 아무 말 않다가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할 때가 돼서야 잔인하게 아이를 지우라는 말을 하는 그가 민여진은 너무나 야속했다.하지만 저의 우는 모습을 싫어하는 박진성을 알기에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진성 씨, 나 앞으로 말도 잘 들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아이만은 지키게 해주면 안 돼요? 절대 진성 씨 귀찮게 안 하고 문채연 씨 깨어나면 바로 애 데리고 나갈게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키울게요.”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박진성의 동정은커녕 오히려 비웃음만 샀다.“민여진, 착각하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네 그 얼굴이 아니었으면 넌 박씨 집안 사모님 자격으로 지금처럼 누리고 살지도 못해. 가끔 선 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내 아이는 안돼. 나를 위해 아이를 낳을 여자는 채연이뿐이야. 너한테는 그럴 자격 없어.”자격이 없다는 그 말은 채찍이 되어 곧바로 민여진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내었다.그녀가 박진성의 무정함을 원망하고 있을 때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양경호가 안으로 들어섰다.“얘 좀 은밀한 병원으로 데려가서 수술시켜,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신경 쓰고.”배 속의 아이한테는 아버지인 사람이 저토록 매정하니 민여진은 오장육부가 베이는 것처럼 아파왔다.“진성 씨...제발요... 안돼요!”하지만 박진성이 그 애원도 무시한 채 양경호를 향해 눈짓하자 민여진은 바닥에 꿇어앉아 버렸다.“진성 씨... 제발요, 나한테 무슨 짓을 시켜도 좋으니까 제발 아이만은 지키게 해줘요. 낳기만 하면 바로 보낼게요, 제발 살려만 줘요...”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애원한 탓에 민여진의 이마는 온통 피투성이였고 그걸 본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민여진, 넌 진짜 그 얼굴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어. 채연이는 너처럼 비굴하진 않을 거야.”문채연이야 머리를 박지 않아도 박씨 집안 후계자 박진성의 사랑을
...문채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서야 아래로 내려온 박진성은 사라져버린 민여진에 미간을 찌푸리며 양경호를 바라보았다.“민여진은?”그 질문에 양경호도 어리둥절해 할 때, 박진성은 본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진성아, 넌 이렇게 기쁜 소식을 왜 이제야 전해? 채연이 임신했대, 얼른 집으로 와.”본가에 도착한 박진성은 소파에 앉아 음식을 먹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민여진도 자신이 잘못한 건 아는지 박진성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떨구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하, 대단하네 진짜.”가엾은 토끼처럼 굴던 애가 이런 식으로 반항할 줄 몰랐기에 그 분노가 배가 되는 것 같았다.박진성의 분노를 마주한 민여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이정화가 나서서 박진성을 나무랐다.“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넌 무슨 애가 말을 그렇게 하니? 채연이가 임신했다는 데 안 기뻐?”박진성은 이를 악문 채 민여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아주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은데요 뭘.”“그래야지,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이니. 결혼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아기가 생겼으니, 딸이든 아들이든 다 박씨 집안의 경사지. 넌 채연이 잘 좀 챙겨. 혹시라도 애한테 문제 생기면 너한테 따질 거니까.”말을 하던 이정화를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어머, 주방에서 국 끓이고 있는데, 난 가서 좀 봐야겠다.”“어머님, 저도 같이 가요!”“거기 서.”하지만 민여진은 사냥감을 노리듯 번뜩이는 눈으로 한기를 뿜어내며 말하는 박진성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넌 나랑 얘기 좀 해야지.”이정화는 둘이 사랑싸움을 하는 줄로만 알고 민여진의 손을 꼭 잡으며 웃어 보였다.“채연아, 긴장할 필요 없어. 쟤가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으로는 네가 자기 애 가졌다고 엄청 기뻐할 거야. 진성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둘이 얘기 나누고 있어 그럼.”사랑? 그래, 박진성이 문채연을 사랑하는 건 맞지.
“싫어요! 진성 씨, 제발 하지 마요!”“싫다고? 이 와중에도 밀당을 하겠다는 건가? 진짜 너답다.”민여진의 애원은 박진성에게 그저 거슬리는 울음소리일 뿐이었다.“진성 씨, 아이가 위험해져요!”“우리 아이잖아요...”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려대던 민여진이 애원하자 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우리 아이? 걔는 그냥 인정도 못 받는 혼종일뿐이야.”말을 마친 박진성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졌다.이건 그가 감히 제게 반항한 민여진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했고 또 아이를 죽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진성 씨...”하지만 민여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발버둥 쳤고 하늘이 그녀를 돕듯 누군가가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양경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박진성은 스피커 핸드폰으로 돌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문채연 씨가 깨어나셨습니다!”...박진성은 전화를 받자마자 1분 만에 뛰쳐나가 운전대를 잡았다.더 이상 그 역겨운 여자와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드디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그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고민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한편 혼자 남은 민여진은 벗겨진 옷을 주섬주섬 껴입으며 멀어져가는 박진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질수록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고 온몸이 찌릿찌릿하며 아파 났다.6년 전, 기부금을 받을 때 박진성을 처음 본 뒤로 민여진은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었다.그리고 그들이 두 번째로 만날 때, 박진성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민여진이 생명의 위협도 무릅쓰고 그를 구해 나올 때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너를 아내로 맞이해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던 게 박진성이었는데 그는 민여진을 문채연 대용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대타 노릇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았다.진짜가 돌아왔으니 가짜는 더 이상 필요 없겠지....눈물을 머금은 채로 잠들었던 민여진은 이튿날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여진은 화상을 입은 손보다도 마음이 더 아파왔다.울먹이는 문채연은 다정하게 달래주면서 다친 민여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박진성이었다.민여진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박진성은 우는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그는 그저 우는 민여진을 유독 싫어할 뿐이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억울함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민여진이 부어오른 손을 박진성에 들어 보였지만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며 그녀의 상처를 매정하게 쳐냈다.“그 손 안 치워?!”민여진은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냈지만 박진성은 그걸 연기라고만 생각하며 치를 떨어댔다.“어디서 변명이야, 너한테 물이 튄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만약 다친 게 채연이였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당장 나가!”박진성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민여진은 그만 문채연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봐버렸다.“진성 씨, 그만 해요. 여진 씨도 진성 씨 사랑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2년 동안 부부로 지내서 쌓인 정도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싸우지 마요.”“정?”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나랑 쟤 사이에 정 따위는 없어. 네가 깨어났으니까 쟨 이제 가야지. 본가에서 너랑 결혼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쟤랑 결혼할 일은 없었어. 쟤가 박씨 집안 사모님 행세를 할 일은 더더욱 없었겠지.”닫혀버린 문 때문에 뒤에 이어지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말로도 민여진은 가슴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새까매질 정도로 어지러워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그렇게 겨우겨우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소파에 앉아있은 지 한참 지나자 마침내 박진성이 아래로 내려왔다.“사인해.”그런데 그와 함께 제 앞에 놓은 이혼 합의서에 민여진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오늘은... 이혼 안 한다고 했잖아요.”“안 하면 네가 계속 채연이 해치는 거 보고만 있을까? 빨리 사인하고 나가. 그래야 내가 채연이랑 다시 시작하지.”짜증 가득한 투로 말하는 박진성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힘겹게 현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박진성이 안으로 들어왔다.“진성 씨?”그를 본 민여진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성 씨, 내 말 좀...”“입 다물고 따라 나와.”평소와는 다른 농도의 한기를 뿜어내는 그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채연이가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람을 죽인 것 같아. 그리고 사라졌어.”“그럼 당장 자수를 하라고 해야지 나는 왜...”목이 말라온 민여진이 말도 채 맺지 못하고 박진성을 바라봤는데 그는 차가운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네가 대신 감옥에 가줘야겠어.”“싫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울부짖었다.“내가 왜요? 사람은 죽인 건 문채연인데 왜 걔 대신 나를 감옥에 보내냐고요!”“네가 채연이 자리에서 2년 동안이나 누릴 거 다 누렸잖아.”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채연이 도망가는 것도 CCTV에 이미 다 찍혔어. 둘이 얼굴이 똑같으니까 다들 널 의심할 텐데 네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럼 진실을 말하면 되잖아요, 나랑 문채연 씨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고!”민여진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채연 씨 대신 누릴 걸 누렸다니요? 그건 원래 6년 전부터 내가 누렸어야 할 생활이었어요. 진성 씨를 그때 불구덩이에서 구한 건 바로 나였다고요!”이 말을 들으면 박진성이 놀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미간조차도 찌푸리지 않았다.“역시 채연이 말이 맞네.”오히려 그의 얼굴에 드리운 혐오의 감정이 더 짙어질 뿐이었다.“채연이가 6년 전날 화재에서 구해준 걸 너도 알았다며. 그래서 바로 자기가 그 자리를 뺏으러들 거라고 하더니, 넌 진짜 어쩜 그렇게 염치가 없어?”“... 뭐라고요?”“정말 6년 전에 날 구한 게 너라면 네 성격으로 2년을 참을 수나 있었겠어? 당장이라도 모두한테 알렸겠지.”그 말을 들은 민
그제야 민여진이 대신 감옥에 가는 일을 얘길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박진성은 바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욕을 하고 억압해도 제 아이만은 포기하지 않던 여자가 이제 와서 모든 걸 버리고 떠나겠다니 박진성은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제 입으로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에 말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걱정 마, 네가 채연이 죄 대신 뒤집어쓰겠다고만 약속하면 나도 너 죽게 안 내버려 둬. 많아도 5개월이야. 그동안 버티면 너도 바로 빼줄게. 그리고 네 엄마도 원래대로 바로 데려올 거야.”그의 말이 끝나도 대꾸를 안 하는 상대방에 인내심이 다 한 박진성은 빠르게 본인 할 말을 마무리했다.“빨리 경찰서 가서 자수해. 나 회의 있어서 다른 용건 없으면 이만 끊을게.”“박진성 씨.”그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슬픔을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민여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우리 다신 보지 말아요.”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가 이미 끊겨버린 뒤였다.결의에 찬 듯한 말투가 민여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낯설기도 했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대신 감옥에 보냈다고 저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처럼 구는 게 2년 동안이나 저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답지 않아서 박진성은 이번에도 민여진이 그저 불쌍한 척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리고 만약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다시 보지 않으면 좋아할 쪽은 오히려 박진성이었기에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대표님.”옆에 있던 양경호가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신호를 주자 박진성도 민여진을 빠르게 잊고 회의실로 들어갔다....한편 통화를 끝낸 민여진은 그길로 경찰서로 향했다.“제가 문채연입니다. 오늘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였어요. 벌 받을까 봐 도망갔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라도 자수하려고요.”공허한 눈동자로 자수를 하러 온 그녀를 보자마자 유가족들이 달려들었다.그들에게 모진 욕을 들으면서도, 갖은 폭행을 당하면서도 민여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배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지금 그녀 옆에는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있거든. 사진을 본 적 있는데, 행복해 보였어. 그거면 돼. 나는 그저 이 실수를 잊지 않고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되는 거야.”‘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 음성 안내가 살짝 멈춘 듯했다. 마치 민여진을 들으라는 듯이.민여진은 귀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나에게 존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고, 뭐가 제일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줬어. 아마 이건 하늘이 준 시험이 아니었을까.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가장 좋은 모습.’지금의 임재윤은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 민여진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재윤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물 있어?”“있어.”민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물을 반 정도 채워 임재윤에게 건넸다.“여기.”하지만 임재윤은 컵을 받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진아, 내가 너를 그녀의 대체품으로 생각해서 이러는 건 아닌지, 충분히 내 마음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처음 극장에서 널 만났을 땐 네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이 신경 쓰이긴 했어. 하지만 진짜 내 마음을 끌어당긴 건 너의 온화한 모습과 성격이었어. 그녀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될 만큼 먼 과거라고. 나는 널 그녀의 그림자로 보지 않아. 진심으로 너를 좋아해.”그의 말은 이미 준비된 듯 타자의 간격 없이 쭉 이어졌다.민여진은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육감만으로도 그의 눈동자 속 뜨거운 열망과 희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임재윤의 손은 점점 달아올랐고, 화끈한 열기에 민여진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솔직히 민여진은 임재윤의 마음이 싫지 않았다. 다만...“재윤아, 너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나도 너한테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게 있어.”그녀는 깊게
머릿속이 하얗게 멍해지는 순간, 그제야 민여진은 그동안 임재윤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한테 신경이 쓰였던 이유도, 그녀의 작은 불편함까지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심지어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뻔할 때 미리 손을 내밀었던 이유가 전부 전 여자 친구가 민여진과 같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그랬구나...”민여진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마치 무언가가 할퀴는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나한테 고백한 것도 그러면 전 여자 친구가 생각나서인가? 나한테서 전 여자 친구의 흔적이라고 찾고 싶었던 걸까?’이런 생각이 들자, 민여진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과거 박진성한테 민여진은 문채연의 대리 품이었는데 임재윤한테서도 누군가의 대리 품이라니.“그런데도 사귄 거면 많이 사랑했나 봐? 그런데 왜 헤어진 거야?”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내 잘못이 컸어.”“잘못?”“응.”그의 숨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나를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믿고 기고만장했었지. 바쁘다는 이유로 항상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별로 없었어. 시각장애인인 그녀는 나를 위해 자유를 포기했고 친구도 없어서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조차 없었는데, 나는 그 외로움을 외면했고 심지어 제일 힘들어할 때 연락조차 되지 않았어.”민여진은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같은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눈앞이 캄캄한 세계에서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며 도망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불안함과 무력함이 어떤 건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힘들었겠네.”“그랬겠지.”임재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서 도망쳤나 봐.”“도망치다니?”민여진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동자에는 어리둥절함과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왜 도망쳤다고 말하는 거야?”임재윤은 긴 침묵 끝에 대답했다.“내가 나쁜 놈이었어. 그 여자가 나를 떠나겠다고 했을 때 잃는 게 두려워서
“여진아, 가지 마.”휴대전화를 손에 든 임재윤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던 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가다니? 나 계속 여기 있잖아. 어딜 간다는 거야?”임재윤은 민여진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꿈꿨어. 네가 나를 떠나는 꿈. 안진 마을로 돌아간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서 계속 너를 찾아 헤매며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갔어.”간신히 손을 뻗어 민여진의 손가락을 잡은 임재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가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그녀가 떠날까 봐.민여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재윤아, 그건 그냥 꿈이야. 게다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너를 피하겠어.”가쁜 숨을 몰아쉬던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나서야 진정된 듯 답했다.“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웃음을 지었다. 임재윤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고 그래. 난 항상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해.”민여진의 말에 순간 임재윤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서렸다.“친구일 뿐이야?”실망이 묻어난 그의 말에 민여진은 말문이 막혔다.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급히 타자를 했다.“여진아, 혹시 내가 원망스러워? 너를 좋아한다면 지난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너한테 숨긴 거 때문에 많이 상처받았어?”민여진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전에도 말했지만,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대답하기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것 때문에 미안해할 거 없어.”“하지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전 여자 친구 얘기잖아.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네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놔야 했어. 그래야 너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을 거 아니야.”민여진이 부정하려는 순간 임재윤은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타자를 이었다.“아니면 너는
민여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시우는 그제야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말들이 홧김에 터져 나온 것 같았다.“여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임재윤과 그 여자 사이는 이미 끝난 일이에요.”진시우가 말을 이었다.“임재윤이 여진 씨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그 여자에 대한 마음은 정리했다는 거겠죠.”민여진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만약 임재윤이 정말로 그 여자를 정리했다면 자신이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그렇게 반응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뭔가를 숨기는 듯 말을 흐리는 진시우도 의심스러웠다.하지만 민여진은 어차피 자신과 임재윤은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누군가를 품고도 왜 그녀한테 고백한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오고 있었다.진시우는 재빨리 달려가 수술 경과와 치료 방향에 관해 물었다. 의사는 수술은 잘 되었지만, 앞으로 수술을 한 차례 더 진행해야 하고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병실로 옮겨진 임재윤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진시우는 뒤처리를 해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혼자 임재윤의 곁을 지키고 있던 민여진은 수술 부위가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 올려 주려다 임재윤의 손과 맞닿았다.그 순간, 임재윤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임재윤?”민여진이 손을 빼내려 했지만, 임재윤이 힘을 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병실로 돌아와 이 광경을 목격한 진시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의식이 없는 상태에도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있어야 시름이 놓이나 봐요.”민여진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신이 없는 상태로 손을 잡더니 놓지 않네요.”“여진 씨, 피곤하세요?”“아니요. 잠을 많이 자서 괜찮아요.”“다행이네요.”진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가 급하게 좀 할 일이 생겨서 아마 내일 아침이 돼야 돌아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