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잠실 L-DS 전자 사장실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차준호와의 통화를 끝낸 이아준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툭 던져놓았다. 서류 뭉치를 훑어 내리는 그의 입꼬리가 길게 틀어쥐어졌다.
“이제야 몸이 달아올랐다 이거지? 쳇.”
혼잣말을 내뱉으며 피식 웃는 순간,
Umm Umm-.
책상 위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이아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도국이가 영상 통화를?’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 가득 화려한 조명과 함께 짙은 메이크업을 한 도국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아준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도국이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 계속 통화 중이던데.
이아준은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특유의 살가운
차준호의 손가락이 내 턱 끝을 스치더니 목덜미를 따라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가 내뱉은 말은 경고처럼 차가웠지만, 닿은 손끝은 불꽃처럼 뜨거웠다.나는 잠시 그 말의 진위를 짚어보며 슬그머니 몸을 움찔거렸다.한남동을 그것도 명절에 차진철 회장을 만나자고 하다니.그는 정교한 덫을 쳐놓고 내가 걸려들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저 깊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좋아요, 같이 가요.”차준호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잠시 묻었다가 떼더니, 왼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대범하네. 무슨 선전포고냐고 안 물어보는 건가?”역시 이 남자. 내가 왜 한남동에 가서 회장님을 만나야 하느냐며 발끈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그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구애한다 한들, 내 마음은 빙산의 일각처럼 아주 조그만 조각만 그의 영역에 띄워두었을 뿐이었다.수면 아래 감춰진 내 본심은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이었으니까.하지만 여기서 물러서서 움츠러든다면, 그는 특유의 기적 같은 논리로 정서적 우위를 점해 나를 조종하려 들게 뻔했다.“어차피 사업 이야기하러 가시는 거잖아요. 세종동 재개발 정도 아니겠어요?”내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로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하하, 신하늘 똑똑하네.”진심인지 아닌지, 그의 얼굴은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어찌 보면 차준호라는 인간은 순수악(惡)처럼 오직 제 위주로 행동하는 것만을 선(善)이라 여기는 듯했다.아, 이 남자. 이렇게 다뤄야 하는 사람이었다니.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차피 회장님께서는 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
세나는 지금 머리에 돌을 맞은 듯 현기증이 내몰렸다.나쁜 년이라니. 혹시 도국에게 접근했던 자신을 가리키는 걸까 싶어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강소희의 시선을 가만히 살폈다.하지만 강소희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녀의 걸음은 세나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하나였다.“······강소희 선배님······!”순식간에 하나 앞으로 다가간 강소희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그리고 상상했던 그 끔찍한 행위가 세나의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졌다.쫙-!“악!”거세게 하나의 뺨에서 파찰음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강소희의 입에서도 날 선 음성이 울려 퍼졌다.“이 나쁜 년이! 지름길로 연예계에서 성공하려는 그 더러운 버릇 좀 고쳐! 김희주한테 날 팔아넘겨서 줄 서려고 했어? 너 이 바닥에서 아주 매장당하고 싶지?”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옆에 있다가 놀란 두나와 나나가 얼른 몸을 휘청거리는 하나를 양옆에서 받아 내었다.“······무, 무슨 일이세요?”멤버들이 놀라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던 세나는, 일단 소문이 새어 나갈까 싶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대기실 문부터 꼭 닫아걸었다.우선 자신을 향한 화살이 아니라 다행이기도 했고, 평소 못되게 구는 하나에게 참교육이 시전되었으니 속이 후련해야 맞는데.강소희의 기세가 너무 서슬 퍼래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릴 지경이었다.“선배님! 나락 가
명절 연휴의 첫날이자 토요일 정오.잠실 L-DS 전자 사장실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차준호와의 통화를 끝낸 이아준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툭 던져놓았다. 서류 뭉치를 훑어 내리는 그의 입꼬리가 길게 틀어쥐어졌다.“이제야 몸이 달아올랐다 이거지? 쳇.”혼잣말을 내뱉으며 피식 웃는 순간,Umm Umm-.책상 위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이아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아, 도국이가 영상 통화를?’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 가득 화려한 조명과 함께 짙은 메이크업을 한 도국의 얼굴이 떠올랐다.이아준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도국이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통화 중이던데.이아준은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특유의 살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와, 풀 메이크업하니까 근사한데? 왜, 내 얼굴 보고 싶어서 영상 전화를 건 거야?”― 이 와중에 농담은. 아직 세종동일까 봐 궁금해서.화면 너머 도국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쳤다. 이아준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스르륵 내려놓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빠르게 마무리돼서 사무실 온 거야. 뒷수습은 차준호가 했고.”― ······이아준, 애썼네.“애는······ 우리 하늘이가 썼지.”팽팽하게 서 있던 도국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정하게 풀려나갔다. 화면 너머는 촬영 현장인지 스태프들이 바쁘게 오가는 소리로 어수선했다.
[신하늘이 쏘아 올린 구원의 손길, 세종동 주민에게 명절 선물처럼 다가와][그 지역구 국회의원 김희주는 그 시각 모 기업 행사 참여, 끝내 세종동에 발길조차 닿지 않아][세종동 서쪽 판자촌 화재 발생은 인명 피해는 없이 진화되어, 과연 재개발을 부추기는 방화일까?][세종동 화재 사건으로 본 우리 사회의 민낯, 가장 먼저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반인 신하늘][신하늘과 그녀의 연인 CH-컴퍼니 차준호, 밤새 라온초 체육관 대피소 지켜. 지역 관계자는 모두 끝내 미등장]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아침부터 언론은 온통 세종동 화재 사건으로 뜨거웠다.민족 대이동 귀향이 시작된 시각에 금요일이라 각종 행사도 많아 상대적으로 세종동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하지만 신하늘은 온갖 비난을 받는 와중에도 늘 그렇듯 서쪽 동네 주민들에게 제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그와 동시에 신하늘에게 씌워져 있던 '꽃뱀'과 '악녀'라는 악의적인 프레임 역시 거센 반전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라온초에 정상적으로 허가를 받아 밤새도록 이재민을 위한 공간을 구축하고, 사재를 동원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적인 봉사는 귀감이 되었다.***지난밤, 짙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신하늘은 기꺼이 세종동으로 향했고 차준호는 그런 그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지만, 차준호의 스위트룸 안에서 신하늘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침대 곁에 걸터앉아 가만히 내려다본 신하늘의 얼굴은 아무리 좋은 음식을 챙겨 먹여도 이전보다 훨씬 핼쑥해져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다.어제 신하늘은 평소 세종동 사람들과 끈끈한 신뢰를 쌓아온 덕분인지, 주민들은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안도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은 설 연휴가 시작되어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일본은 그저 평범한 토요일 아침이었다.일본 아키하바라의 벨X르 전관을 대관하는 대규모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최기범은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실장님! 이번 주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호텔 조식 뷔페에서 만난 한규련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채, 접시에 초밥부터 소복이 담아 올렸다.최기범은 초밥 대신 생선회 몇 점을 담고는 즉석 오믈렛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참, 대리 승진 축하해.”“하하, 명절 지나고 정식 발령장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이번 일본 출장길에 한 대리가 큰 도움이 됐어.”활기찬 한규련이 옆에 붙어 다녀주니 최기범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한규련 역시 오믈렛을 받으려 셰프 앞 줄에 서며 신나게 대화를 이어갔다.“저야 원래 게임 마니아라 행복한 출장이었습니다. 심지어 3월 1일에는 우리 게임이 아키하바라 한복판에 큰 획을 긋게 되잖아요. 생각만 해도 전율이 돋습니다, 하하!”한규련의 말에 최기범의 마음속에서도 기분 좋은 고양감이 피어올랐다.3월 1일이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아키하바라 특유의 서브컬처 문화가 빚어낼 시너지가 이제는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차준호가 왜 하필 이날을 고집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 늦어지면 8월 15일에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던 차준호였다.최근 신하늘과 얽힌 스캔들 탓에 사내 분위기가 어수선해 일정을 미룰까 고민도 했지만, 그래도 3월 1일을 향해 정면 돌파를 감행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이번 일을 겪으며 최기범은 차준호를 다시 보게 되었다.&ldquo
세종동에 무슨 일이 터지다니.“신 과장님!”고요하던 23층 게임 개발실 사옥 내에 사색이 된 김강무 과장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헐레벌떡 달려오던 김강무는 내 곁을 굳건히 지키고 서 있는 차준호를 발견하고는 굳어버린 얼굴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아, 대표님도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너무 급한 일이라 제가 그만 정신이 없었습니다.”“김 과장, 큰일이라니.”차준호가 묵직하게 묻자, 김강무는 숨을 가쁘게 헐떡이면서도 내게 바짝 다가와 입을 열었다.“세종동에 무슨 일이요······?”두려움을 감춘 채 내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김강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저! 신 과장님이 사시던 그 세종동 서쪽 동네에 큰불이 났어요!”“네······?”순간 뇌리가 하얗게 마비되는 기분에 나는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거기 판자촌 전체에 불이 나서 완전히 난리가 났나 봅니다. 위험하니까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차준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더 힘을 주어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서늘하지만 묵직한 어조로 김강무에게 응대했다.“알려줘서 고맙군, 김 과장.”그제야 김강무는 쭈뼛거리며 차준호의 단호한 시선과 그와 단단히 얽혀 있는 내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결연하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저, 응원합니다. 신 과장님, 힘내십시오.”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