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 여사님, 진아 양.”
나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긴 의자로 다가가 조용히 몸을 붙였다.
그때 눈시울을 붉히던 고미주 여사가 먼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 신 비서······ 고생 많았지? 우리 차 대표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오늘 수술받을 수 있게 데리고 와줘서,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어.”
내가 한 게 대체 뭐가 있다고.
밖으로 쏘다니며 야망을 위해 선거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저지른 일들의 뒷수습을 아픈 몸으로 해준 건 언제나 차준호였는데.
당당하게 두 사람을 위로하러 갔다가 나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가 제 생명이 깎여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앞길에 레드카펫을 깔아주며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여준
대한민국 선거일은 국민들에게 단순한 투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국가의 명운이 좌우되는 거대한 이벤트이자, 격동하는 대한민국 정치의 맥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날일 터.특히 이번 선거는 세종동을 중심으로 한 ‘신하늘 신드롬’으로 인해 전 세계 외신의 이목까지 집중된 상태였다.평소 적막과 알코올 냄새만 가득하던 대형 병원 로비는 이제 거대한 광장으로 변모해 있었다.“오늘 신하늘 후보랑 차준호 대표가 들어왔다던데, 진짜야?”“차 대표가 선거운동 내내 아내 외조한다고 무리하더니 결국 탈진해서 실려 왔대요. 그 서슬 퍼런 기운은 어디 가고 아내 옆에선 영락없는 사랑꾼이던데.”사람들의 대화는 개표 방송의 요동치는 숫자만큼이나 뜨거웠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차준호의 헌신을 ‘세기의 외조’라 칭송했고, 누군가는 신하늘을 향해 경탄과 축복의 덕담을 보냈다.“처음엔 그냥 운 좋은 신데렐라인 줄 알았지. 근데 저 여자, 다 죽어가던 세종동 민심 뒤집어놓는 거 보니까 보통 내기가 아니더라고.”“그러니까 사람들이 투표했겠죠. 새로운 세상에 거는 기대가 오죽 크겠어요?”각 지역구별로 형형색색의 그래프가 오르내리며 전국이 들썩이던 순간, 장내를 일순간 정지시키는 날카로운 긴급 속보음이 로비를 찢어발겼다.[특보: 김희주 후보 검찰 자진 출두, 모든 과오 인정한다고 밝혀.][김희주 의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및 신하늘 후보를 향한 갑질·폭행 모두 시인]화면 속 김희주는 이전의 서슬 퍼런 여장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포토라인에 섰다.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 그녀가 힘겹게 마이크를 잡았다.
“고 여사님, 진아 양.”나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긴 의자로 다가가 조용히 몸을 붙였다.그때 눈시울을 붉히던 고미주 여사가 먼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참, 신 비서······ 고생 많았지? 우리 차 대표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오늘 수술받을 수 있게 데리고 와줘서,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어.”내가 한 게 대체 뭐가 있다고.밖으로 쏘다니며 야망을 위해 선거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저지른 일들의 뒷수습을 아픈 몸으로 해준 건 언제나 차준호였는데.당당하게 두 사람을 위로하러 갔다가 나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다.그가 제 생명이 깎여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앞길에 레드카펫을 깔아주며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여준 것을 떠올리니, 가슴 깊이 참아왔던 감정이 끝내 폭주하고야 말았다.눈물을 더는 억누를 수 없어 후두둑 메마른 얼굴을 적실 뿐이었다.그래도 세상일 참 알 수 없다고.지난 1월 1일, 강소희를 향해 그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이고, 나에 대해서도 마뜩잖게 보았던 이 사람들이 지금은 제일 의지가 되는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사람 인연은 참 얄궂고, 앞으로 맞이할 운명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나약한 인간의 숙명으로 여겨졌다.***그 시각, 이아준은 도국과 함께 정신없이 잠실을 벗어나 막 대한종합병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신하늘 후보님이 차준호 대표님께 이식을 감행하시려다, 현재는 차진철 회장님이 대신 수술대에 누워 계신다고 합니다.]김정규가 선우현과 정보를 주고받자마자 전해 온 메시지였다.이아준은 한강 주
차준호, 내 남자의 생사가 걸린 수술실의 붉은 등은 비정할 만큼 선명한 빛을 토해내며 벌써 한 시간째 복도를 물들이고 있었다.폐쇄적인 병원의 적막 속에서 그 붉은 빛은 마치 누군가의 쏟아진 혈흔처럼 내 망막에 눌어붙었다.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차올랐고, 이유 없는 메스꺼움이 명치끝을 비틀어댔다. 기분 나쁜 축축함과 울렁거림이 가시지 않았다.아직 갈아입지 못한 선거용 점퍼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조차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내 신경을 긁어댔다.인간이 절대자에게 무릎을 꿇고 의지하는 순간은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항상 그 신이라는 존재에게 외면만 당해온 처지였다.축복보다는 저주에 익숙했고, 온기보다는 서늘함에 길들여진 삶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차준호에게 빌고 또 빌었다.‘대표님, 제발······.’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따가운 햇살이 가득할 때는 그의 넓은 그늘에 머물며 안식하고 싶었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가 막아주는 튼튼한 우산 속에서 비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보호받고 싶었다.눈물이 나고 슬픔이 넘쳐흐를 때는, 오만하리만큼 단단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직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특별한 위로에 젖고 싶은데.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그 어떤 풍파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무소불위의 남자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그러니 절대자를 믿지 않던 오만한 생(生)이 고작 붉은 등 하나에 명줄을 잡힌 채 바닥까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사로잡혀 있었다.
대체 차준호는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저, 15% 조직 적합성(HLA) 일치하는 공여자가 바로 저예요. 대표님, 제발 수술받으세요. 또 좋은 날 오겠죠.”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사이에 15%의 조직 적합성이 나왔다는 건 의학적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이건 분명 우리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유일한 줄기였다.“신 비서, 아이를 가졌는데 그럼 안 되지!”“어머나, 내가 못 살아. 그럼 안 돼!”차진철 회장과 고미주가 가슴을 치며 내게 달려들어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나 역시 알고 있었다. 지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몸이 심하게 쇠약해져 있었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의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차준호는 대체 어떻게 이 모든 진실을 다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대표님, 이 고비를 넘겨야 미래도 있는 거예요!”절규에 가까운 나의 고백이 터져 나온 순간, 차준호를 둘러싸고 있던 병원 전체에 비현실적인 정적이 사정없이 감돌았다.그때 차준호는 만사 귀찮다는 듯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어설프게 내걸며 낮게 대답을 건넸다.“신하늘, 나 비정한 사람 만들 거야? 아이 벌써 포기하면 안 되지. 나 말고 그동안 과로한 신하늘이 좀 입원해야겠네. 어차피 선거는 이길 테니까.”이 남자는 죽어가는 이 순간마저 지독할 만큼 든든하게나를 지키려고 했다.“어떻게 할까요, 회장님.”강진욱 박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차진철 회장을 바라보았다.“회장님, 도와주세요!”나 역시 광기 어린 눈으로 강진욱 박사의 어깨너머 우뚝 서 있는 차진철 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차진철 회장은 형
3년 전,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세상에 이토록 아름답고 견고한 사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난 두 눈을 의심했었다.평범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채, 중세 시대 거대하고 웅장하게 지어 올려진 성(城) 같이 철벽처럼 느껴진 남자였다.물론 손꼽히는 명문 재벌가의 후계자이자 거대 기업의 대표라는 배경이 그를 더욱 대하기 어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이아준이나 도국처럼 완벽한 미남들을 매일 보고 자라 심미안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던 나조차, 차준호라는 사내가 가진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체격도, 혈색도, 타고난 건강미마저 넘쳐나던 그 압도적인 사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쓰러져 있었다.이런 위태로운 모습을 그동안 몇 번이고 지켜봐 왔지만, 오늘도 나는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속에서 그를 병원으로 끌고 와야 했다.“대표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 제발요!”불과 조금 전, 출구조사 발표 직후 나는 이젠 다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그에게 수술받을 것을 종용했었다.라온초등학교 운동장 위, 가슴 벅찬 당선의 환희가 불꽃처럼 터져 나오던 그 순간, 그에게 빈틈이 생겼을까 싶어 슬그머니 파고들었었다.이렇게 가슴 뜨거운 순간을, 오래 살다 보면 자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와 함께 더 많이 웃고, 그 삶의 행복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어서, 참아왔던 애원을 다시 한번 그에게 쏟아부었었다.하지만 그는 꼿꼿하게 서서 늘 그렇듯 나의 절박함을 가볍게 거절했다. 자꾸 쓸데없는 수를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냉정한 말만 내뱉으며.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실랑이가 이어지던 바로 그 순간, 그가 거목이 베어지듯 무너져 내렸다.허기찬과 선우현이 사력을 다해 뒷수습을
JW소속사 프라이빗 주원형의 펜트하우스 거실.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서는 자막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하며 잔인한 숫자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속보] 현재 개표율 10% 돌파, 세종동 신하늘 후보 1위 우세![개표 결과] 신하늘, 압도적인 표 차이로 일찌감치 선두 유지! 서울의 중심 세종동 지각변동![정가 분석] 김희주 사퇴 효과 무색, XX당의 몰락과 신진 세력의 약진!강소희는 홀린 듯 화면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화면 속, 승리의 영광을 입은 신하늘의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차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린 시절 처음 본 순간부터 송두리째 영혼을 빼앗긴 압도적인 존재. 차준호는 강소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하지만 결국 자신은 그의 삶에 단 한 줄의 각주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잔인한 진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녀의 목구멍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수술을 거부한 채 저 몸으로 대체 얼마나 버티려는 걸까. 그녀의 마음속에 늘 뜨겁게 자리했던 차준호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빛을 독점했던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연모를 품는 것조차 과분해 숨을 죽여야 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 비참하게 일렁였다.“지금 생각해 보니, 신 비서와 난 악연이었던 것 같아요.”강소희가 고해성사하듯 낮은 목소리를 뱉어내자, 주원형은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의 다정한 위로조차 닿지 않을 만큼 강소희의 세계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난 세종동 서쪽 마을 판자촌 출신이었거든요. 할머니 손에 맡겨져 그곳을 전전하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하마터면 ‘하늘 보육원’이라는 곳으로 갈 뻔했죠. 그러다 운 좋게 해외로 입양된 거고요.”“··&midd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