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놀라긴 놀랐다.지금 이건 명백히 위험한 기류였다. 차준호는 그저 친절하고 매혹적인 상사일 뿐인데, 그 손끝이 닿았던 팔뚝의 감촉과 피부로 느껴지던 열기가 잔상처럼 남아 뇌리를 어지럽혔다.“신하늘이 지금 왜 당황하고 있을까.”“어쩌다 그렇게 되었네요. 어쨌든 저 여학생이 오늘 축제의 주인공 같아요. 대표님, 제가 만나보고 올까요?”나는 태연한 척 새침하게 말을 내뱉으며 얼른 차준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하지만 차준호는 무심하게도 무대 위 여학생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괸 채 고개를 슬쩍 돌려, 오직 내 얼굴만을 짙은 시선으로 빤히 담아낼 뿐이었다.“좋네.”좋기는 뭐가 좋다는 건지.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속을 알 수 없게 굴까.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세차게 뛰어 도저히 그와 눈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차준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뚫어져라 무대 위 여학생에게만 눈길을 고정했다. 마침 전광판에 그녀의 이름이 '세나'라고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메모해 두었다.무대에서 내려오면 바로 스카우트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차준호에게 말을 건네려 했지만, 여전히 그 깊고 고요한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향해 있었다.“대표님, 사람 헷갈리게 자꾸 그러지 마세요.”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불쑥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그러자 차준호의 매끄러운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선이 고운 얼굴 위로 환하고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아, 이제 알았다.”대체 뭘 알았다는 건지.나는 화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볼을 숨기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한계였다. 더 이 남자의 유려한 시선 안
5월 초, 녹음이 싱그러운 계절.목요일 오후 5시. 지성과 청춘의 열기가 가득한 우리나라 굴지의 명문대, S대학교 축제 현장.캠퍼스는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와 경쾌한 음악 소리로 가득 차 있었고, 나 역시 처음으로 차준호가 직접 운전하는 세단 조수석에 올라 이곳에 도착했다.오늘 축제를 위해 그가 준비해 준 옷은 깔끔한 카라가 달린 흰색 반팔 티셔츠와 핏이 딱 잘 맞는 청바지, 그리고 넓은 캠퍼스를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단정한 슬립온이었다.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오늘도 회사와 차준호의 이미지에 맞게 입어야 하는 날인 걸까. 가볍게 생각하면 근사한 캐주얼 한 벌이 생겨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가 안겨준 이 모든 것들은 또 가격표가 가공할 만한 액수일 텐데 은근한 부담으로 다가왔다.옆을 보니 차준호 역시 나와 커플룩처럼 카라가 있는 흰색 폴로 긴팔 셔츠에 청바지를 맞춰 입고 있었다. 탄탄하게 다져진 어깨 라인과 훤칠한 이목구비가 받쳐주니 청량하고 감각적인 대학생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하긴, 그도 20대 후반의 청춘이었다. 짙고 차가웠던 눈빛에 부드러운 봄 햇살이 머물자 주변 풍경마저 숨이 죽을 만큼 눈부셨다.푸른 관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캠퍼스 한복판, 청춘들의 환호와 즐거운 웃음소리에 둘러싸이자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 연신 입꼬리가 올라갔다.“신하늘, 예쁘네. 그런데 기분이 그렇게 좋아?”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이제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직진형 칭찬에 제법 면역이 생겼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축제잖아요. 신날 수밖에 없죠.”“그동안 많이 즐겨봤을 거 아니야.”“매년 축제 기간만 되면 과외하고 알바 뛰느라 단 한 번도 참여하거나 친구들과 놀아본 적이 없
내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게 300만 원짜리 명품이라니.그때, 내 등 뒤에 메인 백팩을 가만히 살피던 도국마저 기가 차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하늘아, 백팩도 회사에서 제공해 준 거냐? 그거 컬렉션 한정판이라 최소 1~2천은 줘야 구하는 건데.”“뭐······?”순간 숨이 턱 막히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주 3~4번은 집이나 회사로 배달되던 수많은 상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물론 원단이나 봉제 마감이 워낙 훌륭해 상당한 고가 제품일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차준호가 소유한 C백화점 쇼핑백에 가격표 없이 담겨 온데다, 명품 로고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은 디자인이었기에 그저 '품위 유지용 협찬품' 정도로만 치부했던 나였다.학비와 생활비를 계산기 두드리며 독하게 버텨오느라, 브랜드를 따지는 가치보다는 실용성과 생존이 훨씬 중요한 수식이었던기에 명품 브랜드도 잘 모르는 나였다.그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 입고 멨던 옷과 가방의 진짜 정체를 깨달은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이 몰려왔다. 단순한 비서 복지라고 하기엔 선을 한참 넘어도 넘어선 액수였다.차준호는 대체 나한테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부자들은 그저 경제 감각이 남달라 그런가 현기증이 밀려왔다.통유리창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야경을 내려다보았다.저 화려한 불빛 사이 어딘가, 이 시간에도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차준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스치는 듯했다.***늦은 밤.이아준의 펜트하우스 손님방에 들어와 대형 모니터 앞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온통 차준호가 내게 안겨준 물건들의 가공할 가격들로 가득
도대체 차준호는 왜 내가 만우절에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애초에 그와 나눈 대화도 정말 별것 없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대표님, 정말 한가하신가 봐요. 저는 그날 정신없어서 별로 대화도 안 나눈 것 같은데요.”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그렇게까지 노력해서 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신하늘 고단수네. 어쨌든 걸그룹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어. 신하늘이 비주얼 센터로 선다고 해도 진지하게 생각해 줄게.”이 남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날 놀리는 게 분명했다.그때, 나는 대표실 테이블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보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아, 마침 모교 대학 축제가 다가오네요. 제가 한번 다녀올게요. 거기 보석 같은 여대생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즉흥적인 내 제안에, 차준호의 입가에 느른하고 지독하게 매력적인 미소가 번져 나갔다.그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같이 가. 나랑.”지체 없는 즉답에 순간 의아함이 몰려왔다. 지금 대표라는 사람이 일은 안 하고 나랑 대학 축제 구경이라도 가겠다는 건가?순간적으로 머릿속 회로가 엉켰지만, 이성을 끌어올려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하긴 이 회사 대표인 데다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 걸그룹 사업이니, 직접 캐스팅에 관심을 보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뭐 그러시던지요.”그러자 느긋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짙은 눈동자가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나를 향한 시선이 한층 깊어지더니, 그가 상체를 슬며시 기울이며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자꾸 그렇
만우절은 이미 지난 깊은 밤.강소희는 자신의 소속사 JW엔터테인먼트 대표, 주원형의 프라이빗 숙소 침대 위에서 그와 뜨거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큰 키에 다부진 체형, 게다가 막대한 부와 얼굴까지 갖춘 배우 출신의 주원형. 서른 중반인 그는 당장 현역 메인 남주로 복귀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여전히 대단한 인기와 파급력을 지닌 남자였다.강소희가 데뷔하기 전부터 그의 거대한 그늘 밑에 있던 관계였고, 이후로도 두 사람은 늘 이처럼 남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비밀 연애를 이어오고 있었다.하지만 주원형은 워낙 사생활이 방만하고 자유분방한 남자였고, 강소희 역시 자신의 첫사랑인 차준호를 향한 마음을 내려놓지 않은 채 주원형에게는 엄격하게 선을 그어둔 상태였다. 마음은 주지 않는 육체적인 파트너십, 딱 그 정도의 사이일 뿐이었다.그러나 오늘따라 강소희는 헐떡이는 숨결 속에서도 연신 침대 옆 협탁 위의 휴대전화로만 시선을 돌렸다.[차준호, 연락 좀 해. 늦어도 되니까 할 말 있어.]문자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났건만, 수신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리 차준호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 그의 비서인 허기찬에게까지 연락을 시도해 봐도 답이 없었다. 속에서 조바심과 애가 타들어 갔다.“뭐야, 지금 나랑 하면서 딴생각하는 거야?”귓가를 어지럽히는 낮고 서늘한 음성에 강소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원형이 그녀의 턱 끝을 강하게 잡아쥐며 깊은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강소희는 순식간에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주원형의 탄탄한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당연히 제 머릿속이 복잡하죠. 외워야 할 대본도 많고, 요즘 소속사 분위기도 살펴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 대표님 눈치도 봐야 하고요.”그
거짓말을 잘하는 남자라니.갑자기 맥이 탁 풀릴 만큼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그의 오만한 태도에, 나는 입매를 살짝 삐죽거렸다.마치 남녀 사이에 은근히 간을 보듯 구는 모습에 묘한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그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올려다보며 직구를 던졌다.“대표님 사람 착각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그러자 그가 이 기습적인 말에 예상을 못 했는지, 눈매를 가늘게 뜨더니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따.“왜? 뭐 착각한 게 많은 가 보지?”참으로 차준호다운 도도하고 계산적인 답변이었다.순간 나는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으면서도 묘한 감정이 번졌지만, 애써 표정을 지웠다. 여기서 더 끌려다녔다간 이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려 잠도 개운하게 못 잘 것 같았다.나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미련 없이 갈 채비를 서둘렀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그가 나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든 이제 상관없었다.오늘의 공식적인 비서 업무는 여기서 완벽히 끝났기에 나는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호텔 로비를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휘황찬란한 C호텔의 유리문을 나서자, 서늘한 봄 밤바람이 살갗을 오싹하게 스치며 달아오른 볼을 식혀주었다.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그의 잔상이 단 한 순간도 지워지지 않았다.거짓말을 잘한다는 남자라니. 지금까지 그가 한 말 중에 대체 뭐가 거짓말이었다는 걸까.내가 예쁘다는 것? 아니면 달콤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도 아니면 나를 곁에 둔 모든 행동들이 그저 연막전에 불과했던 걸까.설마, 이 대단한 호텔과 백화점을 소유하고 나름 대기업이 된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