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기자회견장에는 예정 인원의 2배가 몰렸다.방송사 중계차가 본사 앞 도로를 채웠고, 생중계 대기자는 시작 전부터 10만 명을 넘었다.윤해원은 대기실 거울 앞에서 옆구리 보호대를 다시 조였다. 셔츠 아래로 감췄지만 움직일 때마다 재킷 한쪽이 미세하게 들렸다.법무팀은 영상 공개 범위를 두고 끝까지 갈렸다. 손을 떼는 장면은 수사 증거이고, 충격적이라 해원에게 2차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반대로 앞부분만 공개하면 도혁이 ‘구조 과정의 불가피한 사고’라고 다시 왜곡할 가능성이 컸다.해원은 같은 보트의 생존자들에게 먼저 연락했다. 일반 승객의 얼굴과 동의받지 못한 음성은 가리기로 했다. 자신을 잡으려 했던 승무원은 짧게 답했다.[상무님이 괜찮으시다면 공개해 주세요. 그날 제가 끝까지 잡지 못한 걸 매일 후회합니다.]해원은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답을 쓰지 못했다. 보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도혁과 같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공포 속에서도 손을 뻗은 사람과, 그 손을 막은 사람은 분명히 구분돼야 했다.“장면 순서는 손대지 않습니다.”그녀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동의받지 못한 얼굴과 음성만 가리세요. 원본은 감정서와 함께 수사기관에 제출됐다고 명시하고요.”강재욱이 낮은 의자를 가져왔다.“앉아서 하셔도 됩니다.”“제가 쓰러지면 받아 주세요.”“그럴 생각으로 여기 있는 건 아닙니다.”무뚝뚝한 대답에 해원이 아주 작게 웃었다.오전 10시 정각, 그녀가 단상에 섰다.카메라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사적 감정으로 대출을 회수한 것 아닙니까?”“태성해운 인수를 추진합니까?”“사고 당시 안전 책임자였다는 주장은 사실입니까?”
태성 프런티어가 묶인 다음 날, 포털 첫 화면에 윤해원의 이름이 걸렸다.[파혼한 재벌 상속녀의 500억 복수][사랑이 끝나자 채권 회수…기업 사냥 논란][세이프오션, 태성해운 인수 노리나]기사에는 익명의 ‘금융권 관계자’가 등장했다. 윤해원이 약혼 기간에는 부실을 묵인하다 파혼 직후 돌변했고, 사적인 감정으로 독립 리스크위원회를 움직였다는 내용이었다.태성해운이 흘린 자료였다.홍보대행사는 같은 문장을 조금씩 바꾼 게시물을 여러 커뮤니티에 뿌렸다. ‘약혼녀의 질투’, ‘첫사랑 때문에 벌어진 삼각관계’, ‘500억으로 남자를 응징한 상속녀’ 같은 자극적인 표현이 계약 조항과 안전보고서를 밀어냈다. 해원의 구조 경력까지 특혜로 포장됐고, 병원에서 찍힌 뒷모습 사진에는 ‘멀쩡히 걸어 다닌다’는 설명이 붙었다.사고 생존자 한 명이 해원을 두둔하는 글을 올리자 신원이 공개됐다. 태성해운과 돈을 받고 증언한다는 악성 댓글이 달렸고, 결국 그는 게시물을 삭제했다.해원은 그가 보낸 사과 문자를 읽었다.[상무님이 제 아내를 먼저 태워 주셨는데 끝까지 말하지 못해 죄송합니다.]해원은 바로 답했다.[가족부터 지키세요. 증언은 수사기관에서만 하셔도 충분합니다.]해원은 생존자의 신원을 더 노출하지 않기로 했다. 영상도 증언보다 봉인 기록과 감정 결과를 먼저 내놓을 생각이었다.과거 해원과 도혁이 주고받은 문자 일부도 공개됐다. 결혼식 일정과 가족 문제로 다툰 대화만 교묘하게 잘려 있었다.[내가 더는 당신 방식에 맞추지 않을 거야.]해원이 8개월 전 보낸 문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회사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증거처럼 사용됐다.세이프오션 고객센터에는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주가는 장중 6% 넘게 떨어졌고, 구조사업 입찰의 공정성까지 의심하는 기사도 나왔다.
상환 기한 14일 동안 태성해운은 가능한 모든 곳에 손을 벌렸다.주거래은행에는 만기 전 대출을 요청했고, 사모펀드에는 지분을 담보로 긴급자금을 제안했다. 차도혁은 해외 투자자에게 크루즈 사업 지분을 절반까지 넘기겠다고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사고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어렵습니다.”태성해운이 안전위험을 숨긴 사실이 금융권에 퍼진 뒤였다. 세이프오션캐피탈의 500억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금융기관도 대출 약정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주거래은행은 허위자료 제출이 사실로 확정되면 220억 단기대출을 즉ㅁ시 회수할 수 있다고 통지했다. 선박리스 회사는 2척의 용선료를 선납하라고 요구했고, 신용평가사는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꿨다. 한 계약의 위반이 확인되자 다른 채권자들도 동시에 움직였다.도혁은 세이프오션만 설득하면 연쇄 반응을 멈출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문제는 두 회사 사이를 벗어났다. 금융기관들은 태성해운의 돈보다 보고서를 믿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서린은 매일 전화를 걸어 자신이 기사에 노출되지 않게 해 달라고 재촉했다. 도혁은 받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겠다고 해원을 남겨 둔 남자는 회사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그 여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상환 기한 마지막 날 오후 4시.태성해운이 마련한 현금은 173억뿐이었다.차성호 회장은 본사 18층 집무실에서 재무담당 임원의 보고서를 집어 던졌다.“선박 하나 팔면 되잖아!”“정상 가격으로 매각하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립니다. 지금 급매로 내놓으면 채권단이 담보가치 하락으로 추가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그럼 세이프오션에 무릎을 꿇어!”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협상 요청을 3번 보냈습니다. 해원은 만나지도 않습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데 만나 주길 바라?”
차도혁은 조기상환 통보 다음 날 해원이 옮겨 온 재활병동까지 찾아왔다.이번에는 꽃도, 과일도 없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얼굴에는 밤샌 흔적이 선명했다.“사람들 내보내.”“안 됩니다.”김명준 실장이 먼저 막았지만 해원이 손을 들었다.“그대로 있어도 돼요. 이분들은 제 법률대리인과 회사 동료입니다.”도혁은 이를 악물었다.“우리 둘이 얘기할 문제야.”“500억이 우리 둘 문제였어?”그는 침대 앞까지 다가왔다.“회사와 우리는 별개잖아. 파혼은 네 마음대로 해. 그런데 왜 회사를 죽여?”그는 서류봉투를 침대 위로 던졌다. 안에는 양가 공동명의의 사과문 초안과 수정된 결혼 일정표가 들어 있었다.“공식적으로는 사고 충격 때문에 결혼을 잠시 미룬 걸로 하자. 네가 기자들 앞에서 우리 관계에 문제없다고 말하면 금융사들도 시간을 줄 거야. 500억 통보만 철회해.”해원은 문서를 한 장씩 넘겼다. 사과문에는 도혁이 자신의 손을 놓았다는 내용도, 안전보고서를 삭제했다는 내용도 없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 악화’와 ‘불행한 오해’라는 말만 반복됐다.“이게 당신이 말한 사과야?”“회사를 살리고 나면 제대로 사과할게.”“항상 나중이네.”“지금 결혼하자는 게 싫으면 약혼 상태만 유지해도 돼. 서로 사생활 간섭하지 말고, 대외적으로만.”도혁은 그것을 큰 양보처럼 말했다. 해원은 대외용 약혼만 유지하자는 문장을 다시 읽고 봉투를 닫았다.“당신이 말하는 ‘우리’에는 처음부터 내가 없었어.”그녀는 일정표를 반으로 접어 봉투에 돌려 넣었다.해원은 봉투를 침대 끝으로 밀어냈다.“당신 회사가 운항 금지 보고서를 없앴고.”“그건 실무진 실수야.”
세이프오션캐피탈 독립 리스크위원회는 오전 9시에 시작됐다.윤해원은 이해관계자로 분류돼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대신 첫 20분 동안 사고와 자료 위조 경위를 보고한 뒤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개인적인 파혼은 판단 요소에서 제외해 주십시오.”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태성해운이 계약을 지켰는지만 봐 주세요.”닫힌 문 너머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원본 보고서의 진위, 전자결재 기록, 보험사 제출본, 추가대출과의 인과관계. 외부 변호사와 해양안전 전문가가 각각 독립 의견을 냈다.해원은 복도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회의가 시작된 지 30분쯤 지났을 때 윤정호 회장에게 차성호 회장의 전화가 왔다. 차 회장은 두 집안이 예정대로 결혼을 추진하면 100억을 먼저 상환하고 나머지는 1년 안에 정리하겠다고 제안했다. 사고에 대한 공개 사과도 약속했다.“결국 결혼을 상환 유예 조건으로 내놓는군.”윤 회장이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해원은 휴대전화를 넘겨받지 않았다.“위원회에 전달하지 마세요.”“네가 싫다고만 하면 끝날 일이다.”“싫어서 거절하는 게 아니라, 이미 의결이 시작됐기 때문이에요. 지금 협상하면 저쪽이 나중에 개인 감정으로 조건을 바꿨다고 주장할 겁니다.”그녀는 아버지에게 통화기록만 보존해 달라고 했다. 차 회장의 제안은 태성해운이 혼담을 금융수단으로 여겼다는 사실만 확인해 줬다. 이미 시작된 심사와 맞바꿀 거래는 아니었다.회의실 안에서는 위원 한 명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왜 파혼 직후에야 위험 심사가 시작됐느냐는 것이었다. 외부 변호사는 사고 저장장치 복구와 원본 보고서 접수 시각을 제시했다. 심사의 출발점은 파혼 날짜가 아니라 새로운 증거가 확인된 날짜였다.강재욱이 따뜻한 물을 건넸다.“긴장되십니까?”
보험사에 제출된 ‘마리나’의 안전보고서는 3페이지였다.이동규가 보관한 원본은 11페이지였다.윤해원은 두 문서를 나란히 띄웠다. 원본의 붉은 경고문, 조타 유압 그래프, 선체 균열 사진이 제출본에서는 전부 사라져 있었다.[외해 운항 금지]는 [추후 정비 권고]로 바뀌었다.[긴급 수리 필요]는 [운항 후 점검 가능]이 됐다.문서는 받는 사람에 따라 3가지 버전으로 나뉘어 있었다. 선장에게 간 요약본에는 조타 이상만 축소됐고, 보험사 제출본에서는 선체 균열까지 빠졌다. 세이프오션캐피탈에 넘어온 투자자료에는 정비 이력 자체가 ‘정상’으로 표시됐다.준법감시팀 차장이 위험 문구 삭제에 반대했다는 내부 메일도 발견됐다. 그는 “사고 발생 시 대표이사 책임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답장은 단 한 줄이었다.[인사팀과 협의할 것. 프로젝트에서 제외.]차장은 다음 날 지방 사무소로 발령 났고, 보고서는 전략기획실에서 다시 작성됐다. 삭제에 반대한 사람을 치운 뒤 문서까지 바꾼 조직적인 은폐였다.해원은 선장의 회항 요구를 무시하던 도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반대 의견부터 없애는 방식은 바다에서도 똑같았다.“단순 요약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세이프오션캐피탈 준법감시인이 말했다.“위험도를 의도적으로 낮췄습니다. 더구나 같은 제출본이 저희에게도 전달됐습니다.”태성해운은 70억 추가대출을 신청하면서 신규 크루즈 사업의 안전 리스크가 통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수정된 보고서였다.“대출 실행일이 사고 9일 전입니다.”최민호 본부장이 낮게 말했다.“원본을 받았다면 집행하지 않았을 겁니다.”김명준 실장은 파일 수정 이력을 확대했다.수정자는 태성해운 전략기획실 공용 계정. 최종 저장 시각은 사고 10일 전 오후 10시 18분. 승인자는 차도혁 대표였다. 바로 다음 날 70억이 집행됐다.그러나 전자결재 이력만으로는 그가 내용을 직접 바꾸라고 지시했는지 다툼이 생길 수 있었다.그때 이동규가 추가로 제출한 휴대전화 백업에서 삭제 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