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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한채이의 사직서 보관함

Author: 노에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30 04:06:11

오후 1시 42분.

병원 식당에서 나는 국에 밥을 말아 급하게 먹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김민재가 내 얼굴을 살피더니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뭐가?”

“교수님이요.”

“괜찮아. 내가 오늘도 살아 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민재는 목소리를 낮췄다.

“교수님이 선생님한테는 좀 다른 것 같아서요.”

나는 숟가락을 멈췄다.

“뭐가?”

“저희한테는 칭찬을 거의 안 하시거든요. 그런데 선생님한테는 가끔 하시잖아요.”

“그게 다른 거야?”

“네. 그리고 선생님이 대들어도 안 자르시고요.”

“…….”

“다른 선생님들은 그 정도로 대들면 바로 불려 가셨는데.”

나는 국을 한 숟가락 더 떠먹었다.

“그건 내가 이미 다섯 번이나 사직서를 냈기 때문이야.”

“다섯 번이요?”

“응. 매번 반려당했어.”

“왜요?”

“몰라. 인력이 없어서 그런가 보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나도 궁금했다. 강태혁은 나를 갈궜다. 남들보다 더 혹독하게 훈련시켰고,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만두겠다고 하면, 이상하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첫 번째 사직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련을 지속하기 어려워 사직하고자 합니다.]

강태혁은 그걸 읽고 물었다.

“어려우면 쉬운 과로 가면 되겠네. 그런데 너처럼 정신이 썩어빠진 인간이 거기서도 잘할 수 있을까?”

두 번째에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금 도망가면, 네가 가진 재능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팔릴 거야.”

세 번째에는 사직서를 찢지는 않았다. 그저 내 앞에 다시 놓으며 말했다.

“이걸 내기 전에 수술 기록부터 마무리해.”

네 번째에는 아예 읽지도 않았다.

“한채이. 네가 정말 그만두고 싶으면 전문의 시험 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

그리고 다섯 번째는 무려 어제.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인간은 나를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나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거였다.

“선생님.”

민재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응?”

“교수님 오셨어요.”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식당 입구에 강태혁이 서 있었다. 그는 내 쪽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까딱했다.

“한채이. 따라와.”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고 있는데요.”

“알아.”

“다섯 숟가락만 더 먹으면 안 됩니까?”

“안 돼.”

“교수님, 환자도 식사는 하게 해 주시잖아요.”

“너는 환자 아니잖아.”

“그럼 의사 인권은요?”

“그런 것도 있어?”

나는 민재를 바라봤다. 민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고 있었다.

‘좋아. 적어도 오늘은 내가 이겼다. 개기는 사이에 무려 밥을 두 숟가락 더 먹고 일어났으니까.’

물론 강태혁은 그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

오후 2시 03분.

교수실 문이 닫혔다. 강태혁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

“이거 봐.”

“뭔데요?”

“다음 주 수술 일정.”

나는 서류를 훑어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요.”

“왜.”

“이 수술들 전부 제가 들어갑니까?

“그래.”

“응급 수술 두 건에 예정 수술 네 건인데요?”

“그래서?”

“교수님, 저 혼자입니까?”

“아니. 내가 들어가잖아.”

“그게 아니라 보조 인력이요.”

강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서류를 다시 살폈다. 이건 단순히 일이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사람이 부족했다. 그것도 심각하게.

“교수님.”

“말해.”

“이렇게 계속 가면 사람들 더 나갑니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래서?”

“인력을 보충해야 합니다. 남은 사람들한테 일을 더 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지금도 레지던트 두 명뿐입니다. 한 명이라도 빠지면 당직표부터 무너져요.”

“알아.”

“알면서 왜….”

“한채이.”

그가 말을 끊었다.

“너는 네가 맡은 환자부터 책임져.”

“제가 맡은 환자를 책임지려면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네가 못 하겠다는 거야?”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못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려면 필요한 게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강태혁은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옳은 말 한다고 해서 내가 당장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만큼은 반박할 수 없었다. 인력 충원에는 시간이 걸렸다. 수련을 중단하는 사람은 생기는데, 그 자리를 곧바로 채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강태혁은 서류를 다시 정리했다.

“다음 달에 전공의 모집 결과가 나와. 그전까지 버텨.”

“…….”

“그리고 무리하지 마.”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

“네가 쓰러지면 더 귀찮아져.”

아. 이 인간은 정말 끝까지 이 모양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교수님은 걱정도 참 재수 없게 하시네요.”

“칭찬으로 듣지.”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럼 나가.”

나는 서류를 챙겨 문 쪽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았을 때, 강태혁이 다시 불렀다.

“한채이.”

“네.”

“내일 아침 회진 전에 환자들 상태 정리해서 가져와.”

“네.”

“그리고 오늘은 정시에 퇴근해.”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

“…진짜요?”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네.”

“그럼 하지 마.”

“뭘요?”

“기대.”

나는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님!”

“왜!”

“진짜 성격 개같으세요!”

“너 오늘부터 회의실 청소도 해.”

“아니, 그건 또 무슨…!”

“문 닫고 나가. 당장.”

나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복도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저 인간은 꼭 오래 살아서 천벌받았으면 좋겠다.”

“누가 천벌을 받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태혁이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 미친개도 개라서 그런가 청력도 좋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래?”

“네.”

“그럼 내일 여섯 시.”

“교수님!”

문이 닫혔다. 나는 복도 한가운데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이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됐을까.

성형외과 전문의가 되어서 예쁜 코를 만들고, 예쁜 턱선을 만들고, 예쁜 얼굴을 만들며 돈을 쓸어 담으려던 여자가. 지금은 흉부외과에서 대동맥을 붙잡고, 환자 열두 명을 확인하고, 미친개에게 매일같이 욕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아직 이 과를 떠나지 못했다.

환자를 살렸을 때의 감각. 내 판단으로 위기를 넘겼을 때의 짜릿함.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나보다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 사람이 하필 강태혁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 딱 일 년만 더 버티자.”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문자 한 통이 떠 있었다.

[강태혁 교수님: 내일 오전 6시. 늦지 마.]

나는 휴대전화를 노려봤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교수님, 혹시 제 사직서 보관함 만드셨습니까?]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응. 네 이름으로 된 서랍 하나.]

나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미친개가. 정말로. 내 인생을 망쳐 놓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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